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20

"생명사업에 대한 인간의 입장"

by 깨닫는마음씨


cells-1872666_1920.jpg?type=w1600



"모든 것은 관계다." 이렇게 말하는 접근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주고, 힘들 때는 짐을 대신 들어주기도 하며, 아름다운 이들끼리 인정어리게 이 세상을 좋은 곳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중인 것만 같은 낭만적인 울림이 이 '관계'라고 하는 단어에는 담겨 있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판타지 중의 판타지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고,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관계에 대한 착각이다. 바로 후술하겠지만 "모든 것은 관계다."라는 말이 진실성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이 말이 "관계가 신이다."라는 말과의 동의어는 아니다. 관계를 신적인 것으로 간주할 때 낭만적 관점이 생겨난다.


낭.만.은. 비.관. 속.의. 낙.관.이다. 모든 것이 다 암울해도 관계만 있으면 인간은 희망적이라고 말하는 이 낭만의 소비풍조를 우리는 거의 모든 일상에서 목격한다. 관.계.는. 이.미. 신.앙.형.식.이.다. 지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가 '관계교'다. 그러나 이 관계교는 불행히도 우상숭배의 종교다. 관계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상대적인 것에게 절대적인 것을 기대하는 행위, 이것이 우상숭배의 정의다. 관계로는 애초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고집하고 있을 때, 이는 관계의 폭력이 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통받는 그 방식이다.


그러나 표현 그대로만 냉정하게 살피자면, 모든 것은 관계일 수 있다. 생태계에서는 이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본질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관계의 속성에서는 그 모든 낭만의 여지가 날아간다. 관.계.는. 냉.정.하.다. 무엇보다 기계적이고 차가운 것이 사실 관계다. 모.든. 관.계.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은 생명사업이다."


세포는 사업을 한다. 다른 세포들과 동업을 한다. 그렇게 유기체는 기능한다. 이것이 '관계의 원형'이다. 필요하면 그 전까지 적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바로 결합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그 전까지 죽고 못살 것처럼 친밀했다 하더라도 바로 분리한다. 관계만큼 정확하게 이득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업이 달리 없다. 관계는 '사업의 원형'이기도 하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유기체가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하는 그 모든 일이 이러한 '생명사업'이다. 다 이득을 위해 최적화된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관계의 활동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에서 상담소를 찾아 배신당했다고 호소하는 일은 빈번하다. 관.계.에.는. 원.래. 배.신.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배신'이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몸에서는 하루에도 3300억 번의 배신이 일어난다. 필요없어진 세포들은 명예퇴직을 당하듯 냉정하게 유기체에서 밀려나간다. 매일 이와 같은 배신의 역사를 누적해간다. 우리 자신이 곧 무수한 배신을 근거해서만이 생존을 영위할 수 있는 '말종의 존재'인 셈이다.


실증적으로도 흥미롭다. 우리가 정직하게 떠올려본다면,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며 의기어린 표정을 짓던 이들이, 누구보다 가장 빨리 우리를 배신했던 기억은 선명해진다. 이러한 이들은 늘 새로운 집단을 찾아 다니며 공동체의 소중함과 관계의 아름다움을 설파하고 다니다가, 그 집단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득을 획득한 뒤에는 신속하게 집단을 탈출한다. 대개는 자기가 먼저 관계의 미덕들을 노래한 만큼 스스로 탈출하기는 민망하니, 일부러 사건사고를 만들어 집단원들의 화를 돋우고 결국 집단이 자기를 추방하는 형태로 탈출을 기획한다.


그렇게 집단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 이 생명사업의 전문가들은, 겉으로는 자신이 얼마나 그 집단을 사랑했는지를 회고하며 많은 오해가 이러한 비극을 낳았다며 눈물짓기도 하지만, 내심은 좋아 죽을 것 같은 상태다. 생존을 위해 실질적인 이득도 확보했을 뿐더러, 가상의 사악한 독재자에 의해 억울하게 추방당한 '고귀한 희생양'으로서의 도덕적 이득도 얻었기 때문이다.


대개 생존의 문제에 과잉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이들이 이러한 일을 반복한다. 그러니 제대로 하는 일이다. 생존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려면 더욱 배신해야 하는 그 일이 맞다. 생존이라고 하는 생명사업은 관계로 확장되는 사업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배신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 사업인 것이다.


이것은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온전한 생명체의 모습이다. 관계라고 하는 생명사업의 논리에 따라, 필요할 때는 잘 써먹고 필요없어지면 잘 버리는 정상적인 유기체의 활동이다.


다만 여기에는 아직 그 입장을 표명할 인간이 없다.


인.간.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이것은 배신하지 않는 성숙한 인격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도덕은 그저 관계를 강화하는 논리일 뿐이다. 관계를 강화하면 배신도 함께 강화된다. 가장 잘 배신하는 이들은 자신이 정말로 도덕적이며 일정 이상의 발달된 인격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은 자신이 배신을 반복하며 산다는 사실을 좀처럼 자각하지 못한다. 자기가 얼마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배신이라니 마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들이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며 추구하고 있는 도덕과 윤리란 그저 '세련된 배신의 원리'를 의미하는 일일 뿐이다.


배신하고 싶지 않은데 불가피하게 버려져서 결과적으로는 마치 배신한 것 같은 모양새처럼 되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다며, 이렇게 억울한 오해 속에서 추방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은 혼자서라도 진리와 인간을 위해 신실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이 통속적인 삼류연기를 통해 인간이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배신하지 않는 존재도 아니고, 배신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놀라운 말로 들리겠지만, 인간은 생존의 현실 '위에' 서있는 존재다. 이 표현은 중의적이다. 생존하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생존을 넘어서 있는 인간이다. 왜? 인간은 단지 생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존.한.다.는. 사.실. 자.체.에. 감.동.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하는 생명사업에 대해, 인간은 자신이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하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감동받을 수 있다. 생명사업에 감동하며 생명이 엄청 멋진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은 이처럼 냉정한 사업을 훈훈한 감동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또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생명을 궁금히 여기는 일, 자신이라고 하는 생명에 관심을 갖는 일, 그럼으로써 생명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 이것이 감동을 낳는 핵심이다. 감.동.은. 생.명.이.라.고. 하.는. 존.재.현.상.을. 향.한. 관.심.으.로.부.터. 온.다.


존재를 관심할 때 인간이 불현듯 출현한다. 존재를 관심하는 이 일을 우리는 실존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그저 생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생.존.을. 실.존.하.는. 존.재.다.


실존상담이 이러한 인간의 출현에 총력의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실존상담의 관점에서 모.든. 내.담.자.는. 그. 자.신.을. 통.해. 인.간.의. 출.현.을. 꿈.꾼.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생존의 문제이기만 했다면 심리상담이라는 활동은 애초에 성립되지도 않았을 활동이다.


그러나 역으로 누군가가 정말로 생존의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면 그는 심리상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하러 갈 필요가 있다. 더 열심히 관계맺고, 더 열심히 배신할 필요가 있다. 심리상담이 세련되게 배신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활동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곧, 심리상담은 관계를 잘 맺는 법에 대한 것이 근본적으로 아니다.


가령 인기있는 MBTI를 예로 들어보자. INFP의 유형은 사적 망상이 만들어낸 자신의 감정에 빠져 배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INTP라면 사적 망상이 만들어낸 자신의 생각에 빠져 배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강점이라고 묘사되는 것이 결국 자신의 주된 배신의 기제다. 에니어그램에서는 더 노골적이다. 에니어그램의 9유형은 가톨릭에서 말하는 7가지 죄악에 2가지를 더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테면 에니어그램의 4번 유형이라면 시기심(envy)으로 인해 배신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이러한 유형론들은 생존에 있어 자신이 강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특성들을 또한 묘사해준다. 그렇기에 생존을 수월하게 하는 그 특성이 배신도 수월하게 하는 특성이 되는 셈이다.


우리가 그동안 신적인 것으로 믿어 왔던 '관계'의 절대성에 대한 의심이 싹트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기능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관계 속에서는 정말로 배신하지 않거나 배신당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즉, 관.계. 속.에.서.는. 정.말.로. 고.통.받.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실존상담은 관계 밖으로 나가는 일을 안내한다.


관계 밖이 바로 실존이다. 그러나 이는 산 속에 홀로 들어가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사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세포들의 관계체인 자신의 몸을 떠나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일과 같다. 어떠한 것과 관계맺지 않는 방법은 그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 밖.으.로. 나.가.야. 그.것.이. 된.다. 이 역설은 재미있다. 이미 인간의 형상으로 있는 것 같은데 그 밖으로 나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을 처음으로 사는 일'


여기에는 관점의 전환이 있다. 모든 것이 늘 뻔하게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로 보며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으로 나가 모든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자신이 인간에 대해 뻔하게 다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앎을 기각하고, 자신이 알던 '그 밖의' 인간의 삶을 처음으로 완전히 새롭게 다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된다.


생존을 실존하면, 실존이 생존이 된다.


관계 속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없던 자기 자신이 출현해, 이제 그 자신이 생존의 역량이 된다. 남의 곳간에 양가죽을 쓰고 들어가 수작할 이유가 사라진다. 동업도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생명사업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바로 '창조'를 위해 동업하게 된다.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하는 그 모든 일에 창조의 요소가 스며들어온다. 삶의 색채가 완전히 달라진다.


매일 일어나던 3300억 번의 배신의 역사도 창조의 역사로 뒤바뀐다. 매일 새로운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창조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 위해, 우리는 10년간 정신분석을 받고, 어젯밤 꿈에는 셀프 원형에 접촉했다며 일기장에 한가득 판타지소설을 쓰며, 앞에 수줍지만 화가 많은 내면아이 토마스를 앉혀놓고 "약하고 여린 너를 알아주지 못했어. ㅠㅠ" 빈의자 놀이나 한다. 이런 쓸데없는 짓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인지과학의 마크 존슨은 그의 책 『몸의 의미』에서, 우리가 몸과 관계맺지 않을 때 우리는 몸이며, 그 몸이 얼마나 스스로 잘 작동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몸과 관계를 형성하려고 할 때, 몸은 창조의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을 '몸의 대상화'라고 말한다. 몸의 문제는 언제나 대상화된 몸의 문제다. 대상에 대해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이 집착이며, 집착은 곧 강박이 된다. 아름다운 몸, 건강한 몸, 똑똑한 몸 등에 대한 강박은 현대인의 대표적인 증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눈치챌 수 있다. 실은 그것이 조금도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이, 그것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관계라는 것은 그것을 영원한 타자로 놓아두겠다는 것이다.


"저는 여러분과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정말 친절하게 잘 해드릴 거예요.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물론 저는 못난 여러분처럼은 절대로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아무래도 변별되죠."


붕어, 개구리, 가재를 정말 진심으로 너무 사랑하지만, 노래 '청계천 8가'의 가사처럼 그 아름답고 진정한 삶의 모습에 감동어린 눈물이 가득하지만, 우리가 굳이 붕어, 개구리, 가재는 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소중한 용이니까. 용의 고결함에 합당한 가장 상냥한 모습으로 붕어, 개구리, 가재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왜 이럴까? 어떻게든 그것이 되지 않고자 그 대신에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왜 주장하는 것일까? 그것이 되는 일을 왜 이토록 싫어하는 것일까?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自身)이 없어서 자신(自信)도 없다. 그러니 그것이 될 수 없다. 자신이 있는 자만이 그것도 될 수 있다.


아주 단순하다. '자기만의 것'에 목숨걸고 있는 이는 실은 그 '자기만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목숨과 바꿔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다. 그 정도로 가난하다. 그러나 상대를 통해 '자기만의 것'을 만들려고 하는 관계맺기의 방식으로는 결코 자신을 얻을 수 없다. 관계를 우상으로 삼아 그에 집착하며 우리가 자신으로 살 방법이란 도무지 없다.


우리가 관계를 예찬하게 만드는 아주 큰 함정이 있다. 그것은 관계가 우리를 감동시켜준다는 착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맺을 대상을 찾아다니며, 언제인가 받았던 감동을 재현하려 하고, 또 확장해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감동이 아니라 자극이다. 쾌락과 고통으로 이루어진 자극이다.


다른 글에서 표현했듯이, 감동은 단순히 자극이 아니라 의.미.현.상.이다. 그리고 의미라는 것은 절대주관성의 일이다. 나에게만 감동적이면 그것은 감동적인 것이며, 나에게만 의미있으면 그것은 의미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도 감동과 의미가 된다면 그것은 더욱 기쁜 일이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감동과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관계의존 내지 관계중독은, 자신은 스스로 감동할 줄 모르니 관계의 대상에게 감동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일과 같다. 이미 감동의 주권자가 대상이다. 유튜브와 SNS가 없으면, 엑스박스와 VR이 없으면, 학생과 내담자가 없으면, 자신의 인생은 감동적이지 않다.


엄청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자신이 감동받던 순간을 한번 떠올려보자. 그 장면 속에 대상이 있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질문은 이것이다.


"그 순간 당신의 몸은 어떠했나?"


자신의 몸이 이루던 자세와, 움직임과, 온도가 있다. 그. 느.낌.이. 바.로. 감.동.의. 원.천.이.다. 그것은 당신의 몸에서 온 감동이지, 대상에게서 온 감동이 아니다. 당신의 몸이니 그것은 애초 당신만의 것이다. 누구에게 뺏길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주 크게 감동을 경험하고, 또 아주 큰 감동의 상실자가 되는 대표적인 경험은 대개 섹스다. 섹스의 경험은 대상에 대한 가장 큰 집착을 낳는다. 그 대상이 아니면 더는 그 감동을 못 얻을 것처럼 우리는 거의 확신한다. 이것도 그렇지 않다. 그 대상과의 관계가 감동적으로 경험된 것은, 그때 자신의 몸이 그 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간주했던 새로운 자세와, 움직임과, 온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몸.이. 이.래.도. 된.다.는. 사.실.에. 감.동.한. 것.이.다.


열렬하게 말하는 것은 이것이 섹스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이것이 정말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언.제.나. 당.신.에.게.만. 감.동.한.다.


감동의 주권자는 바로 당신이다. 다른 누구가 아니다. 관계가 아니며, 관계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새로운 관계 속에서는 새로운 당신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가 미지의 당신을 일깨워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미. 그.렇.게. 되.고. 싶.었.고. 당.신.도. 익.히. 알.고. 있.었.던. 가.능.성.이 그 관계를 활용해 발현된 것뿐이다. 언제나 주권자는 당신이다.


감동이 오직 당신으로만 수렴된다는 사실을 알고, 당신을 향한 무수한 감동들을 따라 살면 자연스럽게 관계맺지 않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가. 아.니.다. 그것과 관계맺지 않는 감.동.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과 관계맺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느.껴.진.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은 인간과 관계맺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바로 인간이다. 자신이 그 인간임에 감동받는 그러한 인간이다.


실존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가장 쉽게 무엇이라고 하는가? '생명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것을 가장 사랑하는 이만이 그것이 된다. 생명에 대한 사랑의 지극한 운동은 '생명됨'이다.


생명을 더 많이 느끼고자 부드럽고 섬세한 몸이 되었고, 생명을 더 잘 보고자 직립보행을 시작했으며, 생명을 가득 안고자 두 팔의 자유를 얻었고, 생명의 아픔을 알고자 뇌를 발달시켰다.


인.간.의. 역.사.는. 모.조.리. 다. 한. 티.끌.조.차.도. 생.명.을. 향.한. 사.랑.의. 역.사.다.


다시 한 번 말하자. 이것이 실존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이 수줍음이 많아 이 단어를 아주 직접적으로 사용한 이는 가브리엘 마르셀 정도밖에는 없지만, 실존의 가장 정확한 의미는 사랑이다. 자신의 사랑이 아주 큰만큼 우리는 수줍어한다. 도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쩔 줄을 몰라한다. 실존주의자들의 기획은 그래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던 거대한 사랑의 보고들이다.


이해하겠는가? 창조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생.명.을. 향.한. 생.명.됨.의. 사.랑.이. 넘.쳐.서. 그.것.이. 창.조.가. 된.다. 인간은 자신이 받은 감동으로, 그 사랑으로, 자신[생명]을 위해 창조하는 자다.


또 한 번 말해보자. 이것이 실존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보거나 쓰레기통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실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당신이 바로 이러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생명사업 현장의 사랑사업가다. 그것이 당신의 입장이다.




작가의 이전글소설가의 영화(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