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키호테의 시간과 시간의 미아"
상.담.은. 시.간.의. 활.동.이.다. 그래서 상담을 '시간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심리상담에서 핵심적으로 무엇을 다루는지를 묻는다면 바로 시간이다. 이것은 내담자와 시간약속을 잡고 또 정해진 시간 동안 한 상담회기를 이루는 기술적인 문제에서부터, 내담자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따라 변별될 수 있는 각각의 상담접근법의 성립근거에까지도 작용하는 문제다.
"내담자는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이 질문은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시.간.을. 쓰.는. 일.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담자는 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것은 내담자가 가진 그 자신의 이야기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인.간.은. 이.야.기.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 산.다. 상담소를 찾는 거의 대부분의 내담자들은 자기는 분명 자기의 이야기를 잘 살고 있는데, 왜 삶이 막히고 고통스럽게 경험되는지를 모르겠다고 호소한다. 호소되는 그 내용 속에 답이 있다. 시간을 살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로. 시.간.을. 무.시.하.며. 살.고. 있.기.에. 그.들.은. 고.통.받.는.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내담자는 실제로 살지 않고 소설을 쓰고 있어서 고통받는다.
미카엘 엔데의 명작 『모모』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잘 묘사된다.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도둑질하는 회색사나이들은, 사람들에게 시간 대신에 이야기를 제공한다. 더 풍요로운 인생의 이야기들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바쳐아만 한다고 말한다.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를 보는 일에만 집중하고 살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말과 같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빠져 그 이야기를 실현하기 위한 행위에만 몰두하는 이 일을 '시간의 저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저축이 아니라 축적이다. 회색사나이들의 곳간을 채워주기 위해 노예들이 하는 축적의 행위다. 소위 인플루언서들의 자전적 자기계발서를 열심히 사서 보는 이들은, 자신이 성공이 아니라 그 인플루언서들의 성공을 더 공고히 강화시켜주는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소비는 언제나 그 이야기를 만든 생산자의 부와 권력, 명예만 증대시켜주는 일일 뿐이다. 그렇게 남의 인생을 위해서만 사는 동안 우리 자신의 인생은 철저하게 버려진다. 이야기 생산자인 시간도둑들에게 우리의 시간이 약탈되는 것이다.
상담자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분명하게 이 이야기 생산업이다. 상담자는 스토리텔러가 아니며, 대중적 인기를 그 중심에 놓는 연예인 성향의 작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안쓰럽게 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반영하여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진정성의 작가가 상담자인 것 또한 아니다. 작가가 상담을 한다는 말은 김제동과 같은 연예인이 상담을 한다는 말만큼이나 농담의 소재다. 이들이 또 이러한 방식으로 유능한 엔터테이너로 잘 기능한다는 것은 물론 반가운 일이다.
심리상담에 대한 대중적 선입견이 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유지되는 데 크게 일조한다. 심리상담이 마치 세심한 공감과 경청을 통해 내담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 다음, 그 이야기 속에 숨은 교훈을 끄집어내고, 나아가 내담자의 이야기를 더 좋은 이야기로 함께 써내려감으로써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활동이라는 착각이 여기에는 작동한다. 내담자의 문제라는 것이 애초 그가 '자전적 소설쓰기'에 막힌 문제상황인 것처럼 전제되는 것이다. 그러니 문예창작의 전문가들인 쇼맨 작가들이 내담자의 소설에 대한 작문코칭을 하는 일을 정당한 심리상담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인식이 출현하는 것이다.
심리학 교수이자, 실존상담 전문가 및 슈퍼바이저이며, 독서치료사 1급 자격 또한 보유하면서 공립 도서관과 학교 등지에서 치유적 글쓰기 강사로도 오래 활동한 입장의 권위를 활용해 말하자면, 이러한 것은 글쓰기치료도 아니다. 독서치료, 글쓰기치료, 미술치료, 음악치료, 연극치료, 표현예술치료 등의 그 모든 테라피(therapy)의 핵심은 '감정'이다. 책, 글, 그림, 음악, 연극, 무용 등은 그저 감정을 촉진하기 위한 매개일 뿐이다. 나아가 심지어는 그 감.정.조.차.도. 실.은. 매.개.다. 내담자가 자신의 '현실(reality)'을 정확히 자각하도록 돕는 데에 가장 빠른 것이 감정이기에 감정을 촉진하는 것이지, 감정의 고저차에 따른 자극을 지속적인 쾌락으로 소비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왜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이야기가 감정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쾌.락.의. 소.재.이.자. 고.통.의. 소.재.다. 우리는 감정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또 감정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관계는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 감정을 가장 극대화된 자극으로 경험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많은 경우 관계중독이 된다. '관계중독'은 '이야기중독'이며 곧 '감정중독'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야기에 탐닉하는 이유가 실은 감정을 소비하기 위해서라는 이 이해에까지 우리가 도착했다면, 이것은 아주 성공적이다. 감.정.은. 시.간.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감정은 시.간. 속.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이해하겠는가? 지금 우리가 아무리 화가 나서 격한 감정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이미 그 감정이 없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옛말은 결코 틀리지 않다.
어.떠.한. 감.정.도. 시.간.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개념은 사실 허상의 것이다. 그러한 것이 우리에게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가 아닌 허구의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는 의미다. 트라우마는 바로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창.조.해.낸. 이.야.기.에. 의.해. 우.리.는. 트.라.우.마.를. 경.험.한.다. 왜 만들어냈는가? 이야기를 통해 그때의 그 감정을 재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떠한 감정이 개인에게 아주 '특별한 자극'이었기에, 그리고 그 특별한 자극을 통해 그 전까지 하찮던 자신이 '특별한 정체성'을 가진 것처럼 경험했기에, 그는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계속 반복하고 싶은 것이다.
"트라우마 때문에 못살겠어요. 너무 두려워요."라고 말하는 이는 사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특별한 자극'을 고통으로만 생각하면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는 실제의 그 경험 속에서 분명하게 쾌락 또한 맛보았다.
그래서 전쟁을 경험한 PTSD의 군인들이 다시 꿈꾸는 것은 많은 경우 전쟁터다. 어린 시절 우리가 숨바꼭질을 하던 때의 흥분을 떠올려보자. 전쟁터에서는 심지어 목숨까지 걸면서 이 은폐를 시도한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오르고, 뇌내에 마약물질이 분비된다. 이것은 정말로 쾌락이다. 그러니 양가적인 분열이 생겨난다. 죽고 싶지 않으니 이 지옥같은 상황에서는 벗어나고 싶지만, 그 흥분된 쾌감의 상태는 다시 한 번 맛보고 싶다. 그러니 알코올과 마약, 섹스 등의 다른 중독재에 쉬이 빠지게 된다.
SM의 활동에서 하는 목조르기(브레스 컨트롤)의 행위가 있다. 고통과 쾌락, 죽음과 삶, 의존감과 전능감 등의 이 모든 '자극의 양가적 상태'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노골적인 행위다. 그리고 이.야.기.의. 소.비.가. 정.확.하.게. 이.와. 같.은. 행.위.다.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안전하면서 가장 쾌락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이 구성된 자극의 소비재, 그것이 이야기다. 맞는 말이다.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고 우리가 죽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어떠한 자극에서 고통의 요소는 최대한 거세하면서 쾌락의 요소만을 증진시킨다고, 그. 자.극.이. 역.치.에. 도.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 번 이상씩 다 경험해본 바가 있다. 보고 싶지 않고 너무 괴로운데, 이제는 재미도 없는데, 계속 유튜브 채널을 바꿔가며 멍하니 영상을 소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경험한 적이 있다. 이것이 '불감증'의 상태다. 자극이 역치에 도달해, 이제는 더 강하고 충격적인 자극이 없으면 더는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심리학 등의 어떠한 학문분야를 공부하면서도 이러한 상태는 자주 발생한다. 이제는 다 뻔한 것 같고, 자기가 다 아는 이야기 같아서, 어디 새롭고 기똥찬 심리학 이론이 없는지를 갈망하는 멍한 눈의 사이비전문가 상태가 된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냐면, 심.리.학.을. 판.타.지.소.설.과. 같.은. 또. 하.나.의. 이.야.기.로. 소.비.하.고. 있.던. 까.닭.이.다. 자기는 이제 이야기의 마스터가 된 것 같으니 재미가 없다. 그러니 남는 길은, 자신이 심리학이야기의 전문가로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뿐이다. 자기 작품을 못 쓰고 있는 불감증에 걸린 소설가가, 스승의 입장에서 남들 작문지도나 하고 있는 모습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불감증은 치명적인 '삶의 질환'이다. 그것은 삶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과 같다. 이야기로 살 때 반드시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 결국 불.감.증.이.란. 개.인.이. 자.신.의. 시.간.을. 상.실.한.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줄도 모르는 상태다.
전쟁터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는 왜 전쟁터에 왔는가? 그가 지원병이었다고 해도 같은 이유다. 그.는. 남.의. 이.야.기.에. 끌.려.서. 왔.다. 전쟁이라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쓰.라.고. 종.용.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커다란 자극을 경험하다보니, 또 그것이 분명 쾌락의 요소로 작용하다보니, 이제 전.쟁.을. 경.험.하.는. 이.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남의 이야기를 위해 사는 일을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여기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노예는 자기 자신을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존재로 착각한다. 남의 이야기에 끌려와 농락당하면서 자기가 잘못해서 고통받는 줄 안다. 나아가 이러한 것을 조금 눈치챘다고 하는 노예들은 이제 '남의 이야기' 대신에 진정한 '자신의 이야기'로 살아야 한다고 외친다. 그는 지금 정말로 무엇이 자신을 노예로 만들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이야기라고 하는 것 자체가 노예화의 핵심기제라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모』에서도 분명하게 묘사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사는 이들이 회색사나이들의 가장 충실한 노예가 된다.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린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주장한다. 그래서 이것은 언제나 과거지향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상실한 과거의 시간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만 같았던 그때의 시간을 되찾기 위한 수단이 곧 이야기인 것이다. 때문에 이.야.기.중.독.은. 언.제.나. 퇴.행.의. 의.지.다.
과거의 영광의 순간을 되찾고자 이 퇴행의 의지를 강렬히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의. 자.신.이. 하.찮.게. 경.험.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국 현재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들이 실제로 하게 되는 일은, 과.거.의. 시.간.을. 앞.세.워. 현.재.의. 시.간.을. 부.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실존상담자들이 정신역동적 관점을 희극적으로 비판하는 주요한 지점이다. 현재의 문제를 들고온 내담자가 최소 100회기 동안 상담실에 앉아 과거의 시간이나 이야기하면서, 그는 최소 100시간의 현재의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는 중이다. 현.재.의. 시.간.을. 버.리.니. 현.재.의. 문.제.가. 풀.릴.리.가. 없.다. 현.재.의. 문.제.는. 오.직. 현.재.의. 시.간.에.만. 그. 답.이. 있.다. 이것은 분명한 실존상담의 대전제다.
실존주의의 시간관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다. '존재의 시간'이다. 현재에 자신이 존재하는 만큼 현재의 시간이다.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는 이에게 현재의 시간은 없다. 그는 '시간의 미아'다.
과거의 시간에 고착되어 그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주었다며 자기계발의 강연에서 자랑스럽게 웅변하는 이들, 그들도 '시간의 미아'다. 그들의 현재의 자신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과거의 자신을 이야기로 만들어 연장하고 있는 것뿐이다. 과거에 자신은 성공적인 영광의 순간을 맛보았으니,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면 미래에도 그 영광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획하는 이들, 이들 또한 당연히 '시간의 미아'다. 빨간 원색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군대 이야기나 반복하며 막걸리나 푸고 있는 빨갛게 상기된 노년의 모습과 같다.
시간의 미아는 근본적으로 다 불감증의 상태다. 그러니 더 격렬한 자극을 원하며, 그럼으로써 더욱더 시간을 잃게 되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이 모든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상실해가는 모습에 대해 붓다라면 "어리석고, 어리석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고객지향적이며 친절한 실존상담이니까 이 '어리석음'이라는 표현을 부드럽게 치환해보자.
'촌스러움'
이것은 촌스러운 일이다. 퇴행은 촌스럽다. 자신의 시간을 살지 않는 시간의 미아들은 언제나 촌스럽다. 자신이 영광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유치원 학예회 때의 광대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며 율동을 하듯 엉덩이를 곱게 흔드는 중년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엄마가 세일러문 같다고 칭찬해준 영광의 순간으로 말미암아 늘 금발 양갈래 머리를 하고 짧은 세일러복을 입은 채 미나리와 청국장봉지 사이에 핑크색 요술봉이 꽂힌 시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이것은 처참하다. 무슨 인류의 잔혹사인 것 같다. 웃긴데 차마 웃을 수 없어 대신 눈물이 나오게 하는 그림이다.
어쩌면 돈 키호테가 풍차로 돌격하는 장면을 보며, 우리는 유사한 느낌을 받았을지 모른다.
이것을 'the quixotic time'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표현 그대로 '돈 키호테의 시간'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촌스러운 시간이라고 그 뜻을 아주 임의적으로 제한해보자.
우리가 자신의 시간을 살지 않고, 자신에게 특별한 정체성을 제공해주는 것 같은 이야기를 소비함으로써 시간의 미아가 될 때, 삶의 불감증이 생겨난다. 이 과정은 총체적으로 촌스러운 시간이며, 나아가 불감증이 생겨난 상태를 이제 다루게 되는 방식은 더 촌스럽다. 왜냐하면 과잉되고 과장되기 때문이다. 잘. 느.끼.지. 못.하.는. 이.일.수.록. 호.들.갑.을. 떠.며. 잘. 느.끼.는. 척.한.다.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부르르 떨며 "읏흥, 읏흥."한다. 보통 그 이후에 "아하!"하는 의성어는 동반된다. 자신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 '특별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임을 셀프증명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생이 작위적인 연극 한마당이 된다.
이러한 연극은 상담자를 자임하는 이에게서도 곧잘 상연된다. 가장 촌스러운 시간에 사로잡힌 상담자의 모습, 그것은 바로 '구원자'다. 이 구원자는 크게 두 형태다. 하나는 흑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마법사이다.
흑기사는 깡통가면을 쓴 진중한 의지의 모습으로 묵묵하게 내담자를 지키고자 한다. 비오는 새벽 3시에 내담자가 부르면 자전거를 힘차게 밟으며 달려나가는 것은 이 유형이다. 물론 가보면 별 일은 없다. 내담자는 술에 잔뜩 취해 자신이 죽으면 누가 슬퍼해줄지를 상상하며 비극적 특별성의 이야기를 음미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제 자신이 너무 미워서 허벅지 깊은 안쪽에 타투를 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습작가들이 할 법한 대사들도 곧잘 발화된다. 이성의 내담자일 경우 섹스의 요청이 가끔씩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흑기사들은 정중히 거절한 후 집에 돌아와 혼자 상상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기사도를 다한다.
마법사는 마음의 원리라는 것을 통해 내담자의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주고자 한다. 의외로 마법사들은 다양한 마법공식을 외우지는 않는다. 만능열쇠 같은 최강의 공식 하나로 내담자의 모든 문제를 풀어내는 일이 그들의 일이다. 대체로 상담이 막히면, 이들은 강의를 시작하거나, 자신에게 지금 어떤 느낌이 드는지에 집중한다. 아마 내면의 진정한 자기가 전해주는 마나 같은 것을 공급받고자 하는 일인 것 같다. 만화 같은 것을 재미있게 사는 재간둥이들이다.
이 두 유형들의 공통점은, 내담자가 돈 키호테와 같을 때 이들만의 특유한 방식으로 이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돈 키호테도 얼마나 여리고 온전한지를 아냐며, 그 눈빛이 얼마나 떨리고 사랑스러운지를 아냐며, 돈 키호테를 내면아이로 만들어 대한다. 또한 자신은 그러한 돈 키호테의 진정성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구원자가 된다.
그러니 이들은 언제나 내담자의 연락만을 기다리며 지낸다. 일주일간 내담자를 만나는 날만 기다리고 살다가, 갑자기 내담자가 상담일정을 바꾸면 이들은 급작스럽게 시무룩해지지만, 결코 티를 내지 않고 사람 좋은 모습으로 내담자의 온전한 자유를 허용하는 대인배의 표정을 짓는다. 이들이 이러한 이유는, 내담자라는 대상이 있어야만 자신이 구원자라는 '특별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자신을 예쁘다고 말해준 손님을 이제나 저제나 춘향이처럼 기다리고 있는 남원 평촌리의 다방레지와 같은 지극함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누가 촌스럽다고 말해줘야 한다. 진짜 상담자가 보통 그 임무를 맡는다. 물론 촌스럽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고, 그가 촌스러움을 촌스러움으로 직접 보도록 조력함으로써 그의 웃음을 안내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아주 약간의 수치심이 경험될 수 있는데, 마치 자신의 과거 싸이월드 일기를 보는 듯한, 이러한 류의 수치심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그.가. 과.거.의. 시.간.의. 주.박.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났.다.는. 좋.은. 소.식.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현.재.의. 시.간.을. 찾.았.을. 때. 반.드.시. 웃.음.이. 나.온.다. 반갑기 때문이다. 더는 미아가 아니라, 가장 찾고 싶은 것을 찾았는데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을? 바로 자신을.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고 필요로 하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의 시간에만 있다. 우리의 삶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자신(自身; 自信)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두려워진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을 잃게 된 것은 우리가 시간을 잃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미.아.는. 자.신.의. 미.아.다.
'미아'의 한자를 '未我'라고 표현해보면 어떨까. 이것은 '아직 내가 아닌 것'이다. 왜 내가 아니게 되었을까? 나 대신에 다른 것을 나인 것처럼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정체성'이다. 특별하게 경험된 정체성일수록 그것이 나 대신에 나의 자리에 올라선다. 그럼으로써 계속 나인 척한다.
정체성은 생각과 감정으로 만들어진다. 즉, 생각과 감정을 촉진하는 이.야.기.는.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주.요.인.이.다. 이러한 정체성을 붙잡고 있는 동안 우리는 더욱 빠르게 미아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나쁜 정체성을 좋은 정체성으로 바꿔서 우리가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또는 여러 정체성들을 관장할 수 있는 '작가적 정체성'을 얻음으로써 가장 본원적이고 진정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 또한 아니다. 하나의 정체성만을 붙잡으며 고착되지 말고 유연하게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하는 '정체성의 게임'을 누려야 한다는 페르조나와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정체성의 개념에 집착하는 것은 정신역동적 관점의 특성일 뿐이다. 이것은 본질주의적 사유의 특성이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진정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작동한다. 표피를 하나하나 벗겨가며 심층에 이르면 가장 중심부에는 위대하고 빛나는 본질적 진리와 같은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실존주의는 그 생각이 전적인 착각임을 알린다. 양파를 계속 벗겨나가면 그 중심에는 원래 아무 것도 없다. 신체감각을 주요하게 다루는 포커싱의 창시자인 유진 젠들린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내면을 두려워하거나 추구하지 마세요. 당신의 내면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아(未我)는 무아(無我)를 이해함으로써 '나'로 거듭난다. 이것은 실존주의와 선(禪)이 말하는 심원한 역설이다.
그런데 라캉과 같은 이는 이러한 무아적 현실에서는 예수나 붓다와 같은 아주 특별한 이들만이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그들 자신이 의지할 언어로 만들어진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실존상담이 정신역동적 관점과 영 친해질 수 없는 이유다. 예수는 '모든 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의 방법론을 전개하고, 붓다 또한 '모든 이'가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의 방법론을 전개했는데, 왜 자신들이 임의적으로 인간의 기준을 정하는가? "아 쟤는 정체성이 아직 필요하고, 오 쟤는 정체성 슬슬 놓아도 되겠구만." 이것은 자신을 신으로 간주하는 이나 하는 말이다.
누가 신이 되려고 하는가? 가장 '특별한 정체성'을 얻고 싶어하는 이가 신을 꿈꾼다.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까봐 신이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그 언행은 이미 자신을 신처럼 드러내고 있다. '작가적 정체성'이 바로 대표적인 신의 정체성이다. 가장 특별한 이 정체성을 얻으려 하는 이는, 가장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는 이다. 즉, 가장 무아(無我)를 두려워하는 이가 신적 정체성을 얻고자 한다.
왜 무아가 두려운가? 무아라고 하는 현실은 마치 자신의 곳간에 비축해둔 마약을 경찰들이 와서 다 압수해가는 현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아는 두려움의 소재가 된다. 그런데 무아라는 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나'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이 중.독.자.들.은. 사.실.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정체성의 게임'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을 망각하기 위해 이들은 시간을 망각한다. 내담자들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를 탐색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이 지점에 있다. 현.재.의. 문.제.를. 경.험.하.는. 내.담.자.에.게.는. 반.드.시. 망.각.된. 현.재.의. 시.간.이. 있.다. 그로 인해 시간의 미아가 된 입장이 있다.
구체적인 상담장면은 이 '시간망각의 과정'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축소판이기도 하다. 내담자가 상담예약을 잡고, 상담소에 방문하며, 실제적인 대화를 진행해나가고, 또 상담소를 나가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이 모든 과정이 실은 상담과정이다. 상.담.은. 단.지. 상.담.실. 안.에.서.의. 대.화.가. 아.니.다. 내담자가 상담을 받는 이 과정 또한 삶이다. 그러니 내담자가 어떠한 지점에서 자신의 삶의 시간을 망각하려 하는지는 이 과정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상담자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그 망각의 지점을 포착하는 일이다.
그러면 그 망각의 이득 또한 탐색가능해진다. 내담자는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그 이야기가 만들어준 '특별한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망각에 접어든 것이다. 이 '특별한 정체성'이 드러났으면, 이제 이것은 즐겁게 희화화시킬 수 있는 소재가 된다. 우.상.을.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상.을. 농.담.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을 위시한 모든 위대한 코미디언들은 이 작업의 명수였다. 이러한 희극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우상파괴의 전문가들에게는 우리가 상담을 받을 만하다.
선사들의 언행을 담은 선담은 왜 재미있을까? 우상이 파괴됨으로써 이제 해방된 인간의 웃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 실존상담의 실제는 생각 이상으로 엄청 웃기다. 이것은 정말로 경험해봐야 안다. 그 웃음은 촌스럽지 않고, 마냥 해맑다. 종소리처럼 댕, 댕, 댕, 울린다.
한참 웃고 난 내담자들이 말한다.
"왠지 모르게 저 행복해요. 우왕, 이런 게 행복이었구나."
종소리가 걷어낸 것은 바로 자극이었다. 웃음은 고통과 쾌락을 함께 거두어낸다. 행복은 쾌락이 넘치는 상태가 아니라, 고통과 쾌락으로부터 동시에 해방된 자유의 상태다. 자극이 없으면 기계같이 냉담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웃는 상태가 된다. 이 웃음 자체가 행복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뚝뚝하고 그저 초조하기만 한 불감증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다. 삶의 회복이다. 시간도둑들이 패배했다.
되찾은 현재의 시간이 다시 흐른다. 그러니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간명해진다. 때문에 실존상담을 정확하게 경험한 이들은 "알기는 다 알겠는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묻지 않는다. 물을 필요가 없다. 어리석은 시간은 끝났다. 그렇다고 자신이 현명해진 것도 아니다. 현재 배가 고프니 밥을 먹는 것뿐이다. 과잉과 과장이 없어지고 자연스러워진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우리가 미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아닐 수 있는가? 현.재.의. 시.간.이.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아는가. 시간은 삶이다. 우리의 삶이 우리를 꼭 붙잡아주고 있다. 이제 다시 찾았다며, 이제는 놓치지 않겠다고, 가득 끌어안고 있다. 우리는 이 시간의 품속에서 산다.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시간은 우리 자신을 만든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깡통가면을 쓰고 아이언맨인 척 촌스럽게 다닐 때, 시간은 우리를 섬세하고 세련되게 빚어낸다. 인.간.은. 시.간.의. 예.술.품.이.다. 자신의 시간을 쓴다는 것은, 시간이 우리를 예술로 만들게끔 우리 자신을 시간에 내맡긴다는 것이다.
정직하고 성실한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것은 시간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구체적인 일이다. 시간이 우리 자신을 무르익게 하며, 그 향기를 동산에 흩날리게 한다. 한결같이 자신의 시간을 살아온 이에게는 분명 향기가 있다. 그것은 시간이 자신의 것이라고 아끼며 묻혀놓은 시.간.의. 향.기.다.
실존상담에서 인간존재를 '되어감(becoming)'의 존재라고 묘사하는 이유가 이와 같다. 삶에 의해 예술로 되어가는 인간존재다. 정직하고 성실한 자신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걸작이 되어간다.
이는 '정직하고 성실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말을 지겹게 자꾸만 부연하는 이유는, 실존이라는 것이 '실존의 정체성'을 가지는 일인 것처럼 매우 자주 오해되기 때문이다. 이 오해는 정당하다. 시간도둑인 이야기 생산자들에게 하도 당해서 실존을 또 하나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가 아니니 이야기가 만드는 생각과 감정의 자극도 아니다. 이야기 생산자들만 독점하는 권력구조를 뒤집고자, 우리 자신 또한 '작가적 정체성'을 갖고 이야기 생산자로 거듭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미아의 포류를 이제 끝내보자. 정체성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현재의 시간이 드러내주는 현재의 자신이기만 하면 언제나 충분하다. 있지도 않은 것을 붙잡고 있는 일은 이상하다. 그렇지 않은가? 정체성의 재료가 되는 생각과 감정은 이미 현재에 있지도 않다. 시간 속에 흩어졌다. 그 어떤 생각과 감정도 시간을 이길 수 없다. 이미 있지도 않은 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재현해봤자, 그러한 '신기루'에 자신의 삶을 맡긴다는 것은 허무하고 고생스러운 일이다.
모.든. 정.체.성.은. 다. 미.아.의. 정.체.성.이.다.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그리고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정체성이 아니다. 자.신.은. 언.제.나. 존.재.다. 현실(reality)이며 실재(reality)다. 어떠한 것이 정말로 현실이고 실재인가?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불교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부르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삶이며, 이것이 바로 시간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다시 찾고 싶은 시간의 미아가 잡아야 할 것은 존재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현재에 있다. 현재 당신의 눈앞에 있다.
당신의 눈앞에는 풍차가 있는가, 아니면 배고픔이 있는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일인가, 산초와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는 일인가?
실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돈 키호테는 둘 다 했다. 그때그때 눈앞에 있는 것을 했다.
이제 뒤집어보자.
『라 만차의 돈 키호테』는 왜 불멸의 역작인가? 돈 키호테가 '되어감'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이가 아니라, 계속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였다. 그에게 기사라고 하는 존재방식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던져지는 현재의 모험이었다. '건강한 최신의 이야기'를 우상으로 가진 사람들에게는 역으로 늘 농담거리가 되었지만, 자신을 오롯이 다 내던지는 그의 모험은 멈추지 않았다.
돈 키호테는 '모험하는 인간'의 원형이다. 그는 '기사의 정체성'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사.로. 존.재.했.다. "세상은 내가 책으로 본 것과 달랐다."라며 그는 자신이 기사의 꿈을 갖게 만든 기사의 이야기를 초월해, 스스로 기사인 그 시간을 살았다. 그와 함께 모험의 시간을 가진 이들은 그 시간의 향기를 잊지 못했다. 그것은 망상의 쾌락이 아니라, 돈 키호테가 직접 자신의 몸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낸 시간의 숙성이었기 때문이며, 그 시간이 빚어낸 존재의 맑은 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담과정과도 같다. 그에게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던 날,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볼 필요없이 그가 하나의 삶을 이루는 일이 자연스러웠듯이, 그에게 다가온 하나의 죽음도 그와 같았다.
"라 만차의 돈 키호테라고 불리던 착한 사람 알론소 키하노가 이 세상을 편안히 자연스럽게 떠났다."
우리는 그렇게 그의 죽음을 맞이한다. 키호테도 키하노도 아닌 그는 그냥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으로 살고 자신으로 죽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모험하는 인간으로 깨어났던 그는 평생 자신을 믿으며 살았다. 진실로 돈 키호테는 '자신의 시간'을 살았다.
이것이 '돈 키호테의 시간'이다. '실존의 시간'이라고 그 의미를 다시 말해보자. 돈 키호테는 분명 실존주의적 인물상이다. 자신의 삶을 정말로 그 자신의 것으로서 '통째로 선택하여' 사는 실존의 구현자다. 저자인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미친 일 중에 가장 미친 일이란 살아야 할 삶이 아닌, 주어진 삶을 주어진 그대로 사는 일이다."
실존은 미쳐 사는 일이다. 주.어.진. 삶.에. 미.쳐. 사.는. 일.이.다. 우리는 주어진 그대로 삶에 던져졌고, 그러한 우리 자신을 삶에 다시 내던진다. 그렇게 우리는 삶의 정수에 미친다. 도달한다. '삶의 예술가'로 사는 일이다. 실존은 이 일이다.
돈 키호테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그 용기가 하늘을 찌른 강인한 이달고 이곳에 잠드노라. 죽음이 죽음으로도 그의 목숨을 이기지 못했음을 깨닫노라. 그는 온 세상을 하찮게 여겼으니, 세상은 그가 무서워 떨었노라. 그런 시절 그의 운명은 그가 미쳐 살다가 정신 들어 죽었음을 보증하노라."
눈물이 너무 깊어 차마 그 깊은 눈물 대신 기쁜 웃음이 나오게 하는 그림이다.
이것은 촌스러운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행복하다. 인간이 승리했다.
당신의 승리이고, 당신의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돈 키호테의 시간'에 당신을 내맡겨봐라. 시간의 미아가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며 더는 멍하니 표류하지 않는다. 시간 위에 늠름하게 올라타 막 박차를 가하는, 풍차를 향한 당신의 돌격이 이리도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