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상담과 장면화(visioning)"
모든 상담이 어느 정도는 그러한 특성을 갖지만, 실존상담은 특히나 진로상담의 색채를 갖는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인.간.의. 모.습.이 실존주의적 인간관이기에 이것은 당연하다. 연애고민이든, 조직갈등이든, 부모와의 애착이든 간에 모든 문제는 종국에 가서는 개인의 진로와 관련된 문제로 그 핵심이 드러난다.
이는 사실 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확하다. '실존적 문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신경증적 문제'가 파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신경증적 문제들은 실은 실존적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실존주의적 정신분석가인 어빈 얄롬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우리는 자신의 실존적 주제를 숨기기 위해 신경증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진짜 문제인 것처럼 과장한다."
내일 시험을 앞둔 이가 짜증을 내며 대청소를 하는 모습과도 같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형편없는 집안 꼴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조성해주지 않는 부모도 원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부모도 사실은 선량하고 여린 사람들일 것이다. 문제는 부모가 집안 일에 관심을 둘 여유를 갖지 못하게 만든 더러운 사회구조에 있다. 자랑스러운 환국의 백성들의 땅이 오염되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와 유태인 재벌들,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렙틸리언들이 만악의 근원이다. 신이여, 대체 왜 이 악마외계인들을 창조했단 말입니까. 결국 창조주가 문제다. 제길, 내가 아이언맨이 되어 우주를 지켜야 돼, 그는 굳게 다짐한다. 내일 시험점수는 평균 45점이다. 아이언맨의 길은 요원하다.
여기에는 우리가 실존적 문제를 신경증적 문제로 바꾸려 하는 이유가 다 담겨 있다. 실존적 문제는 자기가 다룰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것 같지만, 신경증적 문제는 오래 걸리고 많은 노력이 필요해도 왠지 자기가 효과적으로 다루는 일이 가능한 소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착.시.다. 신경증은 이솝우화의 사과처럼 자신이 개입할수록 점점 더 큰 모습이 된다. 그래서 실제로는 신경증 앞에 우리는 무력해질 뿐이다. 그러나 신경증을 더욱 크게 만드는 이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분명 이득이 있다. 더 커진 신경증의 그늘 속에 실존적 문제를 숨기기 수월해지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의 지적 유능성을 중요한 자원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이러한 신경증을 자주 만들어낸다. 실존적 문제들은 지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신의 지적 유능성이 도전받게 된다. 지성의 권능이 해체될 위험에 빠져들게도 된다. 그러면 자신은 거의 유일하게 갖고 있던 자원을 잃은 채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될 것만 같다. 그러니 이들은 자신의 지적 유능성을 상실할지 모르는 상황 대신에, 모든 것이 자기의 생각대로 잘 운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은 마음의 원리나 심리적 도식 같은 것을 공부하여 자신의 사소한 문제들에 공식처럼 적용하는 활동을 자주 펼쳐낸다. 하나하나 그 공식들에 의해 '인생의 문제'가 풀려가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자신이 지금 제대로 성장해나가고 있다는 환상에 젖어든다.
"와, 오늘은 이러한 마음을 만났네."
"아, 이 무의식의 원형이 계속 작동해서 내가 그런 관계의 문제를 경험했던 거구나."
"왜 나는 화내는 사람 앞에서 계속 쫄게 되지? 아하! 대극의 원리에 의해 실은 화내던 저 사람이 쫄아 있던 거구나! 나는 그 사람이 소외시킨 불쌍한 그 쫄음을 대신 경험해준 거구나!"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진로가 열려가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산재된 '심리적 골칫덩이'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다보면 그 끝에서 우리가 행복할 미래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를. 쓸.어.내.도. 또. 다.른. 하.나.가. 올. 것.이.다. 이것은 끝이 없는 작업이다.
왜 눈을 계속 쓸고 있는가? 눈이 많이 오는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매일 눈을 잘 치우는 일이 언젠가는 맑은 하늘의 현실을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마음공식 같은 것을 비싼 돈을 내며 학습하는 이들이 품는 이 주술적 기대는 반드시 배신감으로 돌아온다. 반복되는 배신감으로 인해 가득해진 화를 묵묵히 눌러담은 채 이들은 오늘도 열심히 눈을 치운다.
눈을 치우지 않으려면 아마도 마을에서 나가는 일이 쉬울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어떻게든 모든 것이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질 마법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하는 이유는 바로 실존적 주제에 걸려 있어서다. 마을을 나가면 죽을 것만 같다. 여기서에는 특히 사회적 죽음이 문제가 된다. 마을 안에서는 부지런한데다가 똑똑하기까지 한 신동이라며 나름 칭찬받고 인정받는데, 마을 밖에서는 그냥 하찮은 소년 A다. 그러니 나갈 수 없다.
그렇게 마법에 통달한 대현자 A는 사실적으로 눈을 쓰는 일이 그의 핵심활동이다. 실존적 관점에서는 그는 대현자가 아니라 그냥 눈 치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대현자가 되기 위해 용기를 내어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하는가? 이것은 잘못된 진로다. 실존상담이 가끔 인본주의 상담을 비판할 때 이러한 논지를 갖는다. '자기실현'이라는 개념이 매우 자주 망상을 지지하는 개념으로 남용된다는 사실을 실존상담은 지적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실존상담에서 진로를 탐색하기 위한 핵심질문은 이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현실에서 살고 싶은가?"
바로 이것이다. '정체성'이 아니다. 방점은 '현실'에 있다.
'비전(vision)'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이는 명확해진다. 이것은 그림을 보듯이 어떠한 장면을 보는 것이다. 무슨 장면인가? 바로 '미래'의 장면이다. 사람들이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미래의 장면이 보인다. 그 장면을 본 이는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만드는 일에 자신을 던져 넣었다. 자신을 위해 현실을 던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위해 자신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인간이 본 그 위대한 비전의 결과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현실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어떠한 현실에서 살고 싶은지를 질문했던 인간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인간이 그 현실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비전은 미래를 보는 힘이다."
이것은 정확하다. 비.전.은.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래서 비전은 개인을 미래와 연결되게 하는 소재다. 비전을 가진 개인은 지금 그의 삶이 미래와 연결되어 있는 중인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인가? 삶.이. 막.히.지. 않.고. 미.래.로.까.지. 흐.르.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우.리.의. 인.생.이. 막.힌. 것.처.럼. 경.험.될. 때. 우.리.에.게.는. 비.전.이. 없.는. 것.이.다.
애인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아서도 아니고, 부장님이 자기만 혼내서도 아니며, 엄마아빠의 잘못된 양육에 의해서도 아니다. 오직 비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심리적 문제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며 상담소를 찾는다. 그래서 실존상담은 자연스럽게 비전을 발견하는 활동이 된다.
우리가 자꾸만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의 모습'만을 생각할 때, 이 비전의 발견은 어려워진다. 그것은 자폐이기 때문이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전은 현재와 미래의 대화를 통해 알려진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현재'와 '하늘을 나는 미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그림 같은 장면이 되어 드러날 때, 이것을 우리는 비전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고정된 그림이 아니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만큼 그림 또한 실시간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비전은 고정된 목표가 아니라 지향성이며 또 방향성이다. 그러한 지향 및 방향을 갖고 계속 운동해가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장면에는 생동감이 있다. 이것을 '장면화(visioning)'라고 말할 수 있다.
서부극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간다. 그가 살고 싶은 현실을 향하여 일관된 방향성 속에서 질주를 지속한다. 풍경들은 변해가며 그가 보는 장면이 역동적으로 구성된다. 멀리서는 아련했던 것들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명료해지고 구체화된다. 장면의 초점이 맞아간다. 색이 짙어진다. 장면이 뚜렷해짐에 따라 그가 말을 타고 있는 그의 '현재'에도 활력이 생긴다. 말을 잘 타는 일을 의식하지 않아도 말과 한 몸으로 더 일치되어 승마의 효율성이 높아진다. 그는 지금 '몰입된 상태'다. '몰입'은 미래로부터 온 것이 현재에 불어넣는 '집중된 생동감'이다. 이 생동감은 그가 지금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생동감이다.
몰입으로 인해 우리는 세계와 하나가 된다. 오직 운동만이 있다. 운동 그 자체다. 몰입되어 있는 그까지 포함한 이 모든 것이 통째로 하나의 장면이다. 완벽한 장면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이 장면 속에 모두 다 담겨 있다. 통째로 완벽해진다. 이것은 과거의 교훈을 통해 성장해 이제는 미래를 준비하며 제대로 살게 되었다는 식의 자기계발 강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한 목적론적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미래는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원인이다. 현재가 그 결과다. 시계의 시간이 아니다. 실.존.주.의.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렇게 현재가 또 원인이 되어, 그 결과인 과거를 다시 구성한다.
인.간.에.게.는. 바.로. 이.러.할. 자.유.가. 있.다.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미래가 있으며, 그 자유가 현재로, 또 과거로 쏟아져내린다. 통째로 자유로워진다. 조나단 갈매기도 말했듯이, 완.벽.하.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장면화'다. 장면화는 자유의 사건이다. 인간의 자유를 그려내는 그림의 실시간적 생성이다. 비전은 언제나 인간이 더 자유로운 현실을 보는 힘이다. 그래서 비.전.은. 초.월.의. 힘.이.다. 성공적인 사업설명회를 떠올려보자. 비전을 말하는 개인의 인간적인 매력이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드러내는 비전의 초월적 힘에 사람들은 가슴이 뛰는 것이다. 더 거대한 자유의 가능성이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정말로 비전일 때, 우리는 가슴이 뛴다. 진짜 비전은 사람을 벅차오르게 한다. 그 감동에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빌려준다. 자신도 그 자유의 현실에 동참하고 싶은 까닭이다. 자유를 향한 웅대한 모험의 여정을 함께하고 싶은 까닭이다.
진로상담이란 이런 것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정체성이 되기 위해, 인기를 더 많이 얻는 정체성이 되기 위해, 모두에게 사랑받는 정체성이 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것이 비전이 아니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애초 비전이 발견되지도 않는다. 비전은 그런 쪼잔한 것들이 아니다. 인간을 더 거대한 존재로 확인시켜주는 것이 비전이다. 진로상담은 내담자 자신이 바로 이러한 인간임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는 거대한 야망과 포부를 가져야 한다는 마초주의의 발상이 전혀 아니다. "소소한 것들 속에 행복이 있다고요. 작은 것도 온전하다고요. ㅠㅠ" 억압적으로 경험한 자기 아버지에 대한 반동으로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한다고 할 때, 그 역시도 지금 자유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은 것이 되어야만 '거대한 욕망'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감히' 자유의 현실을 그릴 수 있는 그는 이미 거대한 존재다. 거대한 비전이 그를 사로잡아 자유의 길로 직접 그를 안내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비전을 가져라."라는 이 말이 "큰 목표를 가져라."라는 말로 자꾸만 오용되기에 착각은 발생한다. '가져라.'라는 이 표현에도 어폐가 있다. 비전은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찾아온 비전을 살 뿐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어떠한 것이 비전이려면, 우.리.는. 직.접. 그. 비.전.을. 살.아.야. 한.다.
비전을 산다는 것은 장면을 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이것이 장면화다. 미술관의 그림을 보고 있듯이 전지적 시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삶.으.로.써.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일도 이와 같다. 어떠한 영감이 박제된 그림처럼 떠오른 상태에서는 아직 글이 아니다. 그 그림을 직접 묘사해가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쓰다보면 처음에 보았던 그 그림과는 다르다. 말하고자 하는 방향성은 지속되지만, 구체적인 형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처음의 그림보다 더 멋지다!
이것이 장면화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는 대화인 이유다. 비.전.을. 차.라.리. 생.명.체.처.럼. 이.해.하.면. 좋.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시점과, 직접 그 그림을 그려가는 시점이 다르기에, 그것은 변화된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당연하다.
비전을 고정된 목표로 생각할 때는 이 일이 어렵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이것이 비전이 굴절되는 대표적인 경우다. 비전이 자아정체성의 성장 및 발전을 위한 봉사재가 될 때, 그것은 몰.락.한. 비.전.이다. 몰락한 비전의 다른 이름이 바로 '망상'이다. 망상은 우리에게 그것을 의무적으로 이루어야 할 것만 같은 강한 압박을 제공하고, 또 그것을 충분히 이룰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비난을 낳는다. 이러한 망상에 지쳐 나가떨어진 이들이 말하게 되는 것이 결국 '소확행'이다. 소확행이 다시 몰락한 비전이 됨으로써 추구되는 목표가 또한 '파이어족'이다. 재테크와 비트코인과 유튜버의 길은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를 이루기 위한 실천론이다. 이 표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활용되는 포장지는 보통 이러하다.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세요!"
백날 '당신의 이야기'를 해봤자 거기에 비전은 없다. 과거의 기억을 자서전 100권 분량으로 써내고, 현재의 고통을 에세이 100권 분량으로 써내며, 미래의 목표를 판타지소설 100권 분량으로 써내도, 비전은 발견되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것은 오직 기억과, 고통과, 목표뿐이다. '당신의 이야기'라는 것이 고작 그런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바로 '고통의 이야기'다. 기억이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목표가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는 언제나 '고통의 이야기'일 뿐이다.
"고통의 이야기를 시작하세요!"
이렇게 바꾸어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은. 비.전.의. 결.여.에.서. 온.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고통은 개인이 그.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경험된다는 말이다. 단순하다. 미래가 없는 것이 고통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은 왜 고통받고 있는가? 미래가 없어서다. 미래가 왜 없는가? 정말로 중요하다.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고. 있.어.서. 미.래.가 없.다.
미래에 대한 과거의 독재, 이것이 현재를 고통스럽게 한다. 과거가 청년들에게 말한다.
"비전을 크게 가져! 열심히 네 꿈을 펼쳐봐! 너란 사람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만들어 나가라고!"
자신들이 미래를 독점하고 있으면서 도무지 무슨 말인가.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미화하는 컨텐츠들이 양산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과거'가 얼마나 좋고 훌륭한 것인지를 선전하려는 의도가 거기에는 담겨 있다. 그러니 그러한 과거는 미래에까지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 일이 정당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과거'가 '현재' 대신에 '미래'에 살려고 한다. 그러니 현재는 미래로부터 소외되어 늘 고통받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과거'는 비전 같은 것은 가져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비전이 아닌 기억과 목표로만 과거는 살아왔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망상을 비전으로 오해하며 살아왔다. 공동체의 이념이나 민족정신 등은 비전이 아니다. 왜? 그것은 기억에 의거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목표에 의해 고통받는 이가, 그 해결책으로서 기억과 목표를 다시 갖고 들어온다. 이것은 고통의 끝없는 재생산이다.
1차적으로 비전이 '고통없는 현실'을 향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다음으로 비전은 '의미있는 현실'을 향한다. '의미'라는 표현 속에는 언제나 '재미'가 동반된다. 의미있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다. 고통만 있고 재미는 없을 때 우리는 무기력에 빠진다. 그 무기력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이 살고 싶은 현실을 찾고자 한 그 결과가 게임이다.
왜 청년들은 게임의 감각으로 살아가는가? 현재는 재미도 없고 고통만 있는데, 게임은 그 반대편의 현실을 체험시켜주기 때문이다. "비전 없이 게임만 하고 있네, 쯧쯧." 그 비전이 없을 수밖에 없게끔 대체 누가 봉쇄했는지를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전'을 '몰락한 비전'으로 굴절시키는 일이 가장 비전을 봉쇄하는 일이다. 오늘날 비전이라고 말하면 대체로 이러한 목소리처럼 들려온다.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더 재미없게 살아! 더 고통받으며 살아! 그게 인간의 사명이야!"
누가 이렇게 살고 싶을 것인가. 불신과 분열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것은 조금 이상하다. '과거'가 그 당시의 현재였을 때, 그 '현재'는 분명 최대치로 놀면서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은데, 고통 없이도 많은 것을 손쉽게 손에 넣었던 것 같은데, 왜 지금의 현재에게는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내로남불은 독재의 의도에서 기원한다. '과거'가 이제 정말로 과거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화로운 현재로 계속 자신을 독점적으로 미래에까지 지속하려고 할 때, 이것이 '과거'가 모든 시간을 독재하는 것이다. 내담자들에게는 이 일이 자주 발생한다. 자신의 과거가 독재하는 그 권세에 지배되어 있어서 내담자는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된다. 독.재.는. 원.래.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모든 독재자는 자신에게 먼저 독재자다. 외부적으로 드러난 독재의 형상은 불가피하게 삐져나온 송곳 같은 것이다.
자신의 영광의 시절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려는, 그래서 미래의 목표로까지 삼으려는 이 독재의 행위가 정말로 야기하는 것은 진로의 봉쇄다. 자신의 앞길이 막힌다. 그러니 자신의 현재도, 또 타인의 현재도 함께 우울해진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이 잘나갔던 영광의 모습을 소환해 그것을 현재에게 솔루션으로 제안한다 할지라도, 과거를 통한 이 독재의 작용은 고통만을 더 강화할 뿐이다. 현재는 계속 고통받는다.
'절대적 과거지상주의'가 정확한 비전의 반대 현상이다. 과거의 신격화된 절대성을 무너뜨리는 일이 실존상담이 한국사회에서 곧잘 하게 되는 일이다. 미래를 가로막거나, 그 자신이 미래가 되려고 하는 과거는 폭력이다. 우리는 이 과거의 폭력에 아주 많이 노출되어 있다. "지금 비전이 없어도 당신의 과거는 온전했습니다." 도사연하며 함부로 말하지 말라. 고통의 이야기를 그만 시동해야 한다. 엔진을 꺼라. 그것은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비전이 없는 곳에 폭력의 고통이 있다.
우리가 만약 고통없는 현실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자. 이것은 어떠한 장면인가? 휴양지에서 쉬는 그림이든, 100평 아파트에서 게임을 하며 뒹굴거리는 그림이든 간에, 그 그림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지금 작동하는 유용한 비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내 이해할 수 있다. 기억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목표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이 경험한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단순하다. 고통이 없으려면 기억과 목표가 없으면 된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기억과 목표의 공통점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분명하게 공통적인 속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확실성'이다. 기억과 목표에 준거해 우리는 자아정체성의 확실성을 얻는다. 그리고 바로 이 '확실한 자아정체성'이란 '확실한 당신의 이야기'이며, 곧 '확실한 고통'이다.
우리는 이 확실성을 기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불확실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미.래.라.고. 하.는. 것.은. 불.확.실.성.을. 통.로.로.만. 현.재.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미래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우연이 창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고정된 확실성 속에서는 가능성이 없다. 그러한 세계는 미래가 없는 세계다. 과거에 의거해 모든 것을 확실한 진리처럼 위장해놓은 독재의 세상에 미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비.전.은. 불.확.실.성.을. 통.해. 온.다. 실제로 비전은 반짝이는 모호성이다. 그 모호한 불확실성을 살아냄으로써 명료한 그림이 되는 것이다. 불확실성은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로 '공간'이 있다. 자.유.는. 공.간.이. 잉.태.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케치북의 여백을 보고 가슴이 뛰는 이유는 거기에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가장 근원적인 형상은 '아무 것도 아닐 자유'다. 이 자유로부터 '모든 것이 될 자유'가 나온다.
"아무 것도 아니어서 고통이 없고, 모든 것이 되어서 재미가 있다."
비전이 우리를 이끄는 그 과정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된다는 이 표현을 또 다양한 자아정체성의 실현으로 이해하면 어려워진다. 슈퍼마켓에서 상품을 고르듯이 "아하! 이번에는 나는 이런 정체성을 선택해볼까!"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은.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몰입의 의미다.
우리는 무엇에 몰입해야 하는가? 우리를 가슴뛰게 하는 그 현실에, 바로 우리가 살고 싶은 현실에 몰입해야 한다. 이것은 실존주의의 개념에서 '참여(engagement)'를 뜻한다. 앞선 예로 돌아가보자. 눈이 많이 오는 마을에 살고 있는 이는 어떠한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가? 자신이 눈을 치우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는 현실에, 또 자신이 대현자이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는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 모.든. 참.여.는. 결.국. 사.랑.에.의. 참.여.다.
서부극의 인물은 사랑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목표가 아니다. 저 끝에서 얻어질 그 무엇이 아니다. 그는 이미 '가는 도중에' 세계와 하나되어 세계와의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러한 장면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사랑을 향해 떠나고 있는 이는 집을 나서기 전부터 이미 그 사랑에 참여되어 있다."
사랑이 그 시작부터 우리와 함께 그림을 그려간다. 이것이 다시 한 번, 장면화다. 모든 장면 속에 사랑이 참여되어 있다. 사랑이 그의 일을 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인생이라고 하는 이 그림은 사랑과 우리 자신이 함께 그려낸 역작이다.
그렇다면 비전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명확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온다. 사.랑.은. 미.래.에.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현재로 밀고 들어오는 강력한 해일이다. 현재의 우리를 집어삼켜 사랑 속에 우리가 거하게 한다. 우리 자신이 사랑과 하나된 몰입의 운동이 되게끔 한다. 이 사랑의 물결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휩쓸 때, 우리는 정화되며, 통째로 거듭난다. 통째로 완벽한 그림이다. '되어감(becoming)'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통째로 사랑 자신이 되어간다는 의미다.
분명하게 이것이 우리가 살고 싶은 현실이다. 비전은 이 현실로 향할 수 있도록 미래의 사랑이 현재의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다.
우.리.의. 진.로.는. 사.랑.으.로. 열.려.간.다. 사랑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우리가 이런저런 신경증들을 만들어낸 뒤 마치 자신이 자신을 돌보는 척하고 사랑하는 척하지만, 전적으로 무용한 일이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워 "괜찮아. 내가 나를 사랑하면 되는 걸. ^^"이라고 먼저 말하는 일은 조금 가련한 일이다. 이것은 자유의 착각에서 비롯한다.
근원적 자유인 '아무 것도 아닐 자유'는 "아무 것도 안 해야지, 아무 것도 안 해야지." 자기를 사랑하는 주문을 외우며 무엇인가 좋은 체험을, 또 그 놀라운 체험을 통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홀로 자유롭게 실현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방문을 열고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시험 빵점 맞아도 나는 엄마를 사랑할 거야."
이처럼 아.무. 것.도. 아.닐. 자.유.란.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현.실.의. 자.유.다. 우선적으로 사랑은 자기를 사랑한다거나 타인을 사랑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대상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의 현실'과만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서 흘러나와 타인을 향하게 되는 것이 사랑의 운동이다. 타인을 목표하지 않았지만 그 결과가 된다.
만약 상기한 장면을 실제로 살아낸 이가 있다면, 그는 그 고백과 동시에 자신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진동이 밀려온다. 해일이 지금 미래에서 들이닥치고 있는 것이다. 옳다쿠나, 하며 사랑이 지금 사정없이 그를 에워싼다. 그는 이제 사랑 안에 있다. 사랑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에게는 미래가 있다. 그가 열어낸 미래다.
사.랑.의. 현.실.에. 참.여.하.기.를. 시.작.한. 이.가. 사.랑.에.게. 사.랑.받.는.다. 그의 사랑이 그의 진로를 활짝 펼쳐낸다. 사랑하니까, 고통이 없고, 재미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살고 싶었다.
눈을 치우지 않아도 사랑의 현실에 참여할 수 있고, 대현자가 되지 않아도 사랑의 현실에 참여할 수 있으며, 시험을 잘 보지 않아도 사랑의 현실에 참여할 수 있고, 대청소를 하지 않아도 사랑의 현실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비전이다. 사랑을 상실한 우리에게, 그래서 미래가 닫힌 우리에게, 사랑이 전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누구에게서 시작되는가? 바로 당신이다. 이 그림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바로 당신 눈앞의 현실이다. 당.신.은. 당.신. 눈.앞.의. 현.실.을. 당.신.이. 살.고. 싶.은.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당신 눈앞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짓는 일이다.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이 천국이 당신이 미래에 가게 될 그 천국이다.
당신이 이러한 방식으로 눈앞의 현실을 살기 시작하면 대화가 시작된다. 당신이 끌어온 미래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모호하게 섞이기 시작한다. '창조의 혼돈'이다. 그러면서 점차 한계와 가능성들이 명확하게 떠오른다. 비전은 구체화되며, 색이 선명해진다. 이에 따라 시야가 넓어져 눈앞의 현실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당연하다. 창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곧 비행기와, 휴대폰과, 냉장고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 것들이 만들어지지 않아도, 창조의 힘이 넘쳐 흘러 당신의 주위를 적실 것이다. 사랑이 장면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도 아직 꿈틀거린다.
"더 사랑하러 가보자."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아 더 자유롭기에 당신이 더 사랑할 수 있는 현실을 향해 당신의 진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당신은 그 완벽한 장면화 속에, 바로 당신의 인생 속에 있다. 그림이 너무 좋다. 미래가 있는 당신의 인생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것이 가장 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로상담은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욱 큰 존재로 경험할 수 있는 현실로 향하는 일과 관련된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존재의 면모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정직한 실존적 주제다. 억지로 우리 자신을 작게 만들기 위해 여러 신경증들을 동원해보지만, 가슴이 뛰는 일들 앞에 솟구치는 이 존재의 크기에 대한 직감을 어쩔 도리가 없다.
존.재.는. 장.면.으.로. 드.러.난.다.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려면 우리는 그 장면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진로란 장면의 진로며, 곧 존재의 진로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을 펼치고자 하는 존재의 앞길을 대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거침없이 미래를 향하는 존재에게 다 던지고 그저 가슴뛰고만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