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사춘기를 위한 상담의 임무: 마음쓰는 시간"
이것은 아주 큰 주제다. 조금은 가쁜 호흡이 될 수 있기에 최대한 쉼표를 배치하면서 갈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떠한 흐름을 묘사하는 데 집중할 까닭에 세부사항들은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뉘앙스를 섬세하게 잡아주었으면 한다. 필요한 것은 논리적 완결성 및 정합성이 아니라, 섹.시.한. 직.감.이.다. 이것은 이 글의 핵심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충분히 섹시하지 못하고, 이러한 상태를 곧 사춘기라고 한다.
# 심리학은 언어술인가?
상담자는 언어술사이고, 상담은 언어술의 적용이며, 심리학은 언어술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인 것처럼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
정신병이다. 정신병자들이 자기의 정신병에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과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술이라는 것은 언어를 통해 마음을 통제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언.어.로. 존.재.를. 통.제.할. 수. 있.다.는. 주.술.적. 믿.음.이. 곧. 언.어.술.이.다. 더 알기 쉽게 이것은 무슨 뜻인가? 언어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언어술이 정신병이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를 보고는, 세계를 구성하는 마법의 프로그래밍 언어만 알면 자신도 빌딩에서 뛰어내려 날 수 있다고 믿는 상태와 같다.
물론 현실에서의 언어술사들은 언어술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보다 겸손하게, 언어를 더 잘 활용해서 다만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정직한 활동이라고 말하기는 할 것이다. 이들의 본심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언어술사들은 정말로 자신이 마법사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마음을 통제한 놀라운 체험도 있으며 그 체험의 작동방식 또한 명확히 이해되어 있는 까닭에, 자신은 마음 위에, 존재 위에, 삶 위에, 그리고 당연히 언어 위에도 군림하는 모종의 초월적 주체라고 간주한다. 이 우주에서 가장 권위있는 마법사의 면모가 바로 이들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이다.
당연히 직접적으로 이러한 자아상을 노출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는 부끄럽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그렇게 하면 장사가 안되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려면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해주겠다는 영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실상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독차지하며 사람들에게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 그 독점의 사실은 알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이가 다 왕으로 살 수 있는 민주주의의 세상을 자신이 만들겠다고 하는 이가, 실은 자신만이 왕이 되고 싶은 소망을 은밀히 품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들로부터 힘을 갈취할 의도를 품고 있는 모습과 같다.
사.기.는. 똑.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병.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사춘기는 이러한 '사기의 시절'이며, 정신병과 같은 한때다. 사춘기의 자기표어를 한 마디로 말해보자.
"당당하게 나의 이야기를 할 거야!"
SNS는 사춘기의 요람이다. 여기에는 '개인적 우화'와 '상상의 청중'이라는 사춘기의 핵심적 특성들이 작용한다. 아주 쉽게 말해 이것은, 사춘기의 주체가 자신의 삶을 영웅적 서사시로 생각하는 동시에, 영웅인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가 늘 촬영하고 있다고 믿는 현상이다. 그가 걸을 때는 언제나 BGM이 깔리며, 그가 위치하는 모든 장면에는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그래서 언행은 늘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연극적이다.
심리학이 이러한 연극에 봉사할 때, 심리학은 언어술로 굴절된다. 정신병을 오히려 지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심리학은 우리에게 더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심리학의 종말이다.
# 인류의 사춘기
심리학으로 위장한 이러한 언어술의 연극들이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류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이다. 쇼의 시대며, 지구촌 쇼다. 바야흐로 '인류의 사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사춘기를 경험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친구 및 동료? 그렇지 않다. 이것은 2차적이다. 1차적인 것이 바로 언어다. 사.춘.기.의. 무.기.는. 언.어.다. 친구 및 동료는 자신과 유사한 언어를 공유하는 '어족(語族)'이기에 친밀한 것뿐이다.
사춘기의 주체는 무협지나 라노벨, 만화나 미국드라마 등에서 본 '첨단의 언어'를 흉내내어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부모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되었다고 간주한다. 기성은 촌스러운 것들이다. 최신의 언어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여전히 낡은 운영체제를 소비하고 있는 이들이다. 멸종되고 근절되어야 할 고생대의 화석들이다.
그러나 사춘기의 갈등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사춘기의 주체가 무시하고 있는 저 '낡은 언어'의 봉사자들이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만 같다. 자신은 더 최신의 존재임에도 구태의 세력들 앞에서는 늘 무력함을 경험한다. 그래서 반항이 시작된다. 모든 사춘기의 반항은, 자신은 아이폰 13을 갖고 있는 존재이니 자신을 신으로 섬기라고 요구하는 그 반항이다. 이처럼 '언어에 대한 신격화'가 사춘기의 반항을 이루는 핵심 전제가 된다.
왜 이럴까? 사춘기가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언어로 만들어진다. 자.아.는. 자.아.이.미.지.다. 언어로 만들어 자신과 남들에게 동시에 보이기 위한 그림이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거야."라는 류의 말은, 자기 자아를 조립하겠다고 하는 사춘기의 선언이다. 자기가 수수깡으로 만든 영웅적 자기를 전시하겠다고 하는 기획이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아라고 하는 '자신의 작품'을 관람해야 하는 의무를 남들에게 부여하고, 또 우호적인 평가를 내려주어야 한다며 남들에게 강요할 때, 사춘기의 지옥은 시작된다.
사춘기의 주체가 부모에게 하는 일들이 이러한 것이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자기가 만든 놀라운 작품이라며 쪼르르 들고 달려와 부모에게 칭찬과 인정을 기대한다. 열심히 돈을 벌고 집안일을 하느라 지친 부모가 건성으로 대하면, 자기는 애정결핍이고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며, 또는 왜 놀라운 자신을 부모가 되어서는 제대로 알아봐주지 못하냐며, 방구석에서 한을 쌓아가든가 가출을 한다. 나중에 상담사를 찾아가 이러한 경험이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보고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극의 스토리 또한 상담사를 부모로 보며 강요하는 '또 하나의 작품전시활동'일 뿐이다.
이것은 아주 많이 피곤한 일이다. 이 언어술사들이 자기가 만든 자아정체성을 관람하고 칭찬해달라며 시종일관 달라붙는 이 '구걸의 현실'은 대단히 피곤하다. 언어술사들은 왜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들을 못살게 구는 것일까? 왜 자꾸만 자기 자아정체성을 들이밀며 인정과 사랑을 요구하는 것일까? 개떡처럼 만들어 놓은 것 앞에서 웃어달라고 왜 이리도 강압하는 것일까?
자기들도 실은 그것이 개떡인 줄 알기 때문이다. 자.아.는. 원.래. 개.떡.이.다. 개떡은 맛있으니 예가 잘못되었다. 자.아.는. 원.래. 똥.이.다. 언어라는 똥으로 빚은 똥떡이다. 손에 똥칠을 한 채 웃으면서 그 똥떡을 엄마에게 내밀면, 정성스럽게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엄마의 인내심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때 엄마의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제 인생에 트라우마가 되었어요. ㅠㅠ"
엄마도 당신이 내민 똥떡을 잊을 수가 없다. 똥범벅을 한 채 신이라도 된 것처럼 웃고 있던 당신의 표정이 엄마에게는 공포영화였다.
# 똥컴의 유지
언어술사들은 언어를 업데이트하면 삶이 업데이트된다고 정신병 같은 말을 하지만, 실은 그들도 알고 있다. 자.아.정.체.성.은. 운.영.체.제.가. 아.니.다. 기억해보자. 자아는 언제나 자아이미지다. 이것은 핵심이다. 자.아.정.체.성.은. 바.탕.화.면. 이.미.지.일. 뿐.이.다. 언어를 아무리 최신의 것으로 업데이트해봤자,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자아의 변화란 바탕화면 이미지의 교체일 뿐이다. 운영체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무리 바탕화면만 바꾸어봤자 하드웨어는 그대로다. 똥컴은 똥컴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이게도 우리의 하드웨어는 자동으로 교체된다. 인간의 하드웨어란 것이 무엇인가? 바로 '몸'이다. 몸은 매일매일 최신의 것으로 교체된다. 자연은 위대한 업데이터다. 우리는 똥컴이 될 수 없는 신성한 운명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술사들은 반항한다. 이 사춘기의 주체들은 매일매일이 다르게 변해가는 몸이 너무나 당혹스럽다. 자신은 더는 귀엽지 않고 여드름투성이의 괴물이 된 것만 같다. 중요부위에 자란 털 때문에 대중목욕탕에 가는 일이 너무나 버겁다. 늘 같이 놀던 옆집 미선이를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괴로워지며 하반신에 이상한 긴장이 느껴진다. 무.엇.인.가.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겨.난. 것.만. 같.다.
이것은 하나의 낙원의 붕괴다. 특히 자신의 몸이 더는 부모의 품속에 꼭 안겨 애정받을 수 없는 형태로 커졌을 때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혼란이 된다.
그래서 사춘기의 주체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지푸라기처럼 언어를 붙잡으려고 한다. 언.어.로.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언어로 자신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통제하고자 하는 일, 즉 자신에게 드러난 하나의 존재방식을 통제하고자 하는 이 일이 바로 독재다. 모든 사춘기의 주체는 독재자며, 모든 언어술사는 독재자다. 자기의 인생에서 지속적으로 독재의 의도를 드러내는 이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사춘기 안에 있는 것이다. 사춘기를 통과하지 못한 이가 평생 이 독재의 운영자가 된다. 피터팬은 독재자의 정확한 이름이다!
이들은 독재를 통해 무엇을 꿈꾸는가? 언어술사들의 말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이 놀랍다. 이.들.은. 사.실. 자.신.의. 하.드.웨.어.를. 똥.컴.으.로. 유.지.하.기.를. 바.란.다. 가장 변화의 장에 놓여있는 사춘기의 주체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변화를 거부하려는 이들이다. 이들은 '변화' 대신에 '성장'을 바란다. 성.장.이.란.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변.화.다. 성장의 모델 속에서는 주체가 벡터에 관여할 수 있다. 마치 게임캐릭터를 육성하듯이, 싫은 것은 배제하고 자기가 원하는 좋은 것들로만 자기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열망이 사춘기를 지배한다.
메타버스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다 안다. 그냥 게임 이야기라는 것을. 실제 구현되어 있는 메타버스의 프로그램들도 그냥 게임의 논법이다. 차라리 '동물의 숲'을 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이처럼 게임문화가 일상을 지배하고자 하며, 자기 자신을 게임캐릭터처럼 상정하고 싶어하는 일에는 사춘기의 감성이 농후하게 배어 있다.
왜 이렇게 똥컴을 바탕화면만 바꾸어가며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유지하고 싶어하는가? 하드웨어가 바뀌면, 그동안 모아둔 야동과 싸이월드 일기캡쳐본이 다 날아갈 것 같아서다. 자신이 누리던 인정과 칭찬의 소재는 유지하며, 그 위에서 더 좋게 변화하고 싶다는 이 '정신병'은 만연하다. 이를테면 군대에서 병장으로 누리던 권위가 사회에 나와서도 유지되기를 바라며, 그밖의 더 좋은 것들도 추가로 가득 얻고 싶어하는 복학생 오빠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것은 경계의 혼란이다. 모든 정신병은 경계의 혼란으로 인해 생긴 증세다.
# 자기긍정의 좌절
사춘기는 분명하게 경계의 문제다. 하나의 경계가 포기될 때 다른 경계로 우리는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을 변화라고 부른다. 어.른.은. 언.제.나. 선.택.하.는. 자.다. 실존주의의 용어로는 결단이라고 부른다. 잘라 끊는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것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긍정'이다. 자기긍정은 자기를 사랑하며 긍정적인 자기의 모습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아니라, 자기에게 불확정적으로 찾아오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춘기의 주체는 이 자기긍정을 지금 하지 못하고 있는 이다. 그래서 늘 부모와 같은 대상을 찾아다니며 칭찬과 인정을 구걸한다. 자기가 언어로 만든 자아정체성이라는 작품을 칭송해달라고 요구한다. 자기에게 전적으로 긍정되지 않으니, 남들이 대신 긍정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할 때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대표적인 정서들이 있다.
# 불안과 분노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사춘기의 주체가 질풍과 같은 불안과, 거센 파도와 같은 분노에 휩싸여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불안'과 '분노'는 사춘기의 대표적인 정서다. 오늘날 인류의 사춘기를 경험하고 있는 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정서이기도 하다.
왜 불안한가?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이.가. 없.다.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춘기의 주체는 세상에 자기 혼자 있다. 누구도 진정으로는 자기의 편이 아니다. 그는 어떠한 편을 기대하고 있는가? 자.기.의. 생.각.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기.를. 도.와.줄. 편.을. 바.란.다. 자기의 언어가 맞다고 언제나 우쭈쭈, 해줄 무조건적 긍정자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자가 없기에, 사춘기의 주체는 화가 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서, 이 세상 전부에 다 분노가 치민다.
이것이 어떠한 상황인지 이해하겠는가? 사춘기의 주체는 지금, 자신의 언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어서 불안과 분노를 경험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마법적 신이 아니라서 불안해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어마어마한 착각을 하나 해지해도록 하자. 우리가 불안하고, 그 불안으로 인해 화가 나기 때문에 언어를 통제의 기제로 활용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우리가 언어로 삶을 통제하려 했기에, 우리는 불안해지고 결국 분노하게 된 것이다. 독재자는 독재하려 하기 때문에 두려워지고, 그 결과 더욱 독재의 의지를 강화한다.
삶을 통제하는 독재 중의 가장 최고의 독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 여기에 대답해야 한다. 기분이 조금 상해도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답을 답안지에 써내야 한다.
# 양육의 기만전략
최고의 독재, 그것은 바로 '양육'이다.
지.구.촌.은. 지.금. 양.육.에. 미.쳐.있.다.
삶을 어떻게든 언어로 통제하고자 악착같은 이가 있다. 그가 더 악착같아진 이유는 과거보다 삶이 힘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앎.이.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정보가 너무 많다. 앎의 문제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그는 사실 앎을 또 다른 앎으로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나, 그가 정보를 삶이라고 착각하고 있기에, 그 억압의 몸짓은 삶을 향하게 된다.
당연하다. 그는 자기의 언어적 앎으로 만든 자아정체성으로 산다. 그럴 때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처럼 언어적 앎으로 만들어졌다고 간주하게 된다. 똥떡 눈에는 똥떡만 보인다. 나날이 새롭게 생산되는 정보의 앎을 자기의 앎으로 통합하게 되는 만큼 그는 자신이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세상의 정복자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정복자다. 새롭게 업데이트된 좋은 장비를 노력해서 구한 만큼, 자신의 게임캐릭터는 빛난다. 자아에게 늘 광명이 비친다.
이러는 동안, 그는 사실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몸을 괴롭히게 된다. 삶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몸.이. 삶.이.다. 더 많은 앎을 지배해 앎의 전능자가 되기 위해 그는 삶을 억압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날 아무리 개인이 자신의 몸을 탈곡기처럼 탈탈 털어가며 착취한다 해도, 언제나 정보의 쓰나미 앞에서는 무력한 자신을 경험하게끔 된다.
생각처럼 안되니 생각대로 무력해진다. 이 무력감은 누가 도와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기 혼자 다 책임져야 할 것 같은 것이다. 그러니 혼자라 불안하다. 더 통제해보려 할수록 더 무력해진다. 결국에는 화가 난다. 누구에게 낼 수도 없는 화라 스스로를 친다. 스스로가 갑갑한 감옥이 된다. 대기권의 제일 아래에 우울권이 형성된다. 농도가 짙은 우울의 대기가 지구를 밀봉한다.
탈출구는 있는가? 언어술사들은 비상문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양육이다.
"나만 이렇게 무력하고 약한 게 아니었구나.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약했던 거야. ㅜㅜ 약하지만 다들 온전했던 거야. ㅠㅠ 이제는 제가 여러분의 약함을 알아드릴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약함이 실은 여러분의 소중한 온전함이었다는 걸 이제 제가 알아드릴 거예요. 여러분의 이야기를 시작하세요. 제가 여기 듣고 있습니다. 캐감동. 나 존나 다정하고 멋있는거 같음. ㅜㅜ"
통제의 좌절로 인한 무력함을 경험하던 사춘기의 주체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약하게 보려는 일을 시작한다. 실제의 사춘기 속에서 한 개인이 늦은 새벽 홀로 커피 한 잔을 들고 자기 방의 창문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며 '아, 이렇게 덧없이 사라져갈, 그러나 지금 빛나고 있는 저 작고 소중한 불빛들이란 얼마나 애처롭고 아름다운가. ㅜㅜ'라는 감상에 젖어 자기가 구원자라도 된 것 같은 도취에 빠져있을 때, 이것이 양육적 감수성의 시작이다.
자기의 부모와는 달리, 이 세상의 말못할 슬픔들을 알아주고 구원해주는 '가장 훌륭한 부모'가 되겠다고 사춘기의 주체는 지금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기.의. 무.력.감.을. 망.각.할. 수. 있.는. 까.닭.이.다.
사춘기의 주체는 모든 것을 약하게 보며 친절하게 대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실제로 모든 것을 약하게 만든다. 이 또한 중요한 이해다. 그는 상대가 약해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상.대.는. 약.해.진.다. 양육은 자기의 무력감을 상대에게 떠넘기기에 아주 효율적인 방식이다.
독재자는 언제나 친절하다. 권위주의에서 가장 먼 것이 독재자다. 독재자는 자상한 미소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 막 대하는 일
우리가 정말로 친밀감을 느끼는 이는 어떠한 이일까? 경험적으로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를. 막. 대.해.주.는. 이.를. 좋.아.한.다. 그러한 이와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즐겁고 힘이 난다. 왜인가? 그가 우리를 약한 자로 보며 하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에게 막 대해진다. 표현 그대로다. 우리가 그에게 막 대해질 때, 우리는 그에게 막대(莫大)해진다. 더할 나위 없이 아주 크고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는 바로 그러한 존재로 우리를 대하고 있던 것이다.
우리를 막 대하는 이는 우리에게서 힘을 강탈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힘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자기의 무력감을 우리에게 떠넘기려는 의도 따위는 전무하다. 그러니 마음이 열린다. 우리를 양육하려는 이 앞에서 우리는 그가 아무리 친절함에도, 무엇인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언제나 어떤 것을 뺏기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양육하는 사춘기의 주체에게 헌납하고 있는 중이다.
막 대하는 일은 통제의 반대표현이다. 통제하려는 이는 절대로 막 대하지 않는다. 신주단지를 다루듯 조심스럽다. 늘 눈치를 보고, 아양을 떨며, 눈웃음으로 알랑방귀를 뀐다. 마치 성가신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와 같다. 사춘기의 주체 자신이 바로 그러한 아이이며, 그는 사람들에게서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는 아이가 아니라 엄마인 척 그 입장을 슬쩍 이동해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를 벗어나는 빠른 방법은,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자인 척하는 것이다. 결국 사춘기의 주체에게는 자기 자신이 문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성장하고 싶어한다. 더 좋은 자아정체성을 얻고 싶어한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을 막 대할 수 없어서, 이 모든 문제를 만든다.
# 자아 스노비즘과 경험하지 않을 자유
50년 전에 우리는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제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경험하지 않을 자유'를 중요한 것으로 말해야 한다.
왜 그런가?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성.장.의.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경험의 축적은 정보의 축적이다. 남들은 아직 가보지 않은 맛집과, 남들은 아직 사용해보지 않은 신상을 소개하는 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앎의 권위자라는 자아정체성의 만족을 준다.
'자아 스노비즘(ego snobbism)'이라고 말해보자. 사실 이 표현은 동어반복이다. 자아는 원래 자아이미지이기에, 허세로만 가득하다. 자아 자체가 애초 허상이다. NFT 같은 것이다. 진담으로 자아는 NFT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너를 지켜줄 거야."라는 관계적 맥락에서 구성되어 작동한다. 동시에 자아는 N(너한테), F(팔고), T(튈거야)라는 가장 정확한 정의를 만족시키는 상품이다. 자아상품은 그 내용은 없이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허위매물이다.
그래서 커플들은 서로 싸운다. 상대의 자아이미지를 반영구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구매했는데, 이 자아상품이 이내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상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지일 뿐이었다. 흔한 일이다. 피터팬의 요정옷을 벗겨보면 그냥 찐따다. 팅커벨조차 만족시키지 못해 늘 무시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아상품을 홍보하기 위한 영업전략으로서 경험의 소비는 촉진된다. 안이 텅 비어 있으니 그 이미지라도 더욱 크게 부풀리고자 하는 것이다. 미디어의 광고들도 마치 누구나 유튜브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의 소비를 가속화시킨다.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더욱더 "너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시작해!"라며 권유한다. 우리가 다들 친절한 엄마처럼 지지자가 되어주겠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에 절망한 제2의 커트 코베인은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조커(2019)'는 예언자적 영화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경험에의 강박'을 멈추어야 한다. 경험을 통해 레벨업을 한다는 착각이 정말로 착각임을 이해해야 한다.
'경험하지 않을 자유'란 '이 모든 것을 관둘 수 있는 자유'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더 쉽게 풀어보자. 우리가 경험하고 있을 때 실제로 대부분의 우리는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주.체.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성관계의 장면에서, 실제로 성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날 본 야동에서의 포르노 배우와 같은 자아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한 연극이다. 경험에의 강박은 연극에의 강박이다. 자기가 쓴 각본에 따라, 자기가 배우처럼 열연하는 일이다. 이것이 또한 자아 스노비즘이다. "내가 또 해냈어!"의 허세며 그 과시다.
주체감이란 무엇인가? 전능감이다. 주체의 문제는 반드시 전능성의 문제와 결부된다. 자기를 신처럼 느끼는 것이 전능감이다. 통제의 궁극점이다.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든 간에, 다 전능감의 소재로만 삼을 뿐이다. 그렇게 주체는 자기의 통제력에 스스로 도취되어 간다. 이것은 분명 중독이다. '경험중독'이라는 것은 이를 지칭한다. 경험중독은 곧 '주체에의 중독'이며, 이것이 우리가 그만 해야 하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주체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주체로서 경험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자유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삶에게 맡길 자유'라고 부를 수 있다. 서핑을 예로 들어보자. 서퍼는 파도를 타며 왜 무한한 자유감을 맛보는가? 그가 파도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삶.과. 자.신. 사.이.에.서.의. 신.뢰.감.이.다. 전능감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자유로운 것은 양력과 중력이라고 하는 삶의 '사실적인 힘'에 자신을 위탁했기 때문이다. 새는 자신의 힘으로 날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새를 날게 하는 것이다.
'인류의 유년기'에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근육을 써서 활동을 취해보는 일이 권장될 필요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경험에 대해 개방되라는 말이 더욱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사춘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삶에 대한 신뢰다. 이것은 개인의 사춘기에 있어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과업으로 묘사되곤 한다.
삶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는 자기의 지성적 통제력만을 믿는다. 그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의 직간접적인 경험으로부터 왔다.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이러한 풍조를 조소한다.
"그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제가 경험했습니다.' '제 경험입니다.' '제 경험에서 배울 바는......' 맙소사! 경험이 그들 자신을 대신해 생각해준다고?!"
휴머니스트라고 하는 '인류의 친절한 양육자들'이 실은 가장 인간을 보지 않는 이들임을 사르트르는 역설한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만을 볼 뿐이며, 무엇이 와도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자신의 주체성만을 신뢰할 뿐이다. 자폐아들이다. 자폐는 자아 스노비즘에 빠져 가장 몰락한 사춘기의 모습이다.
# 색시(色時)한 인생
자폐아들이 섹시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 섹시하지 않은가? 살.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야 성숙해진다. 성숙한 것이 섹시하다. 당연한 말이다. '성숙'은 '성장'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굳이 변화라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전자는 '질적 변화'며 후자는 '양적 변화'다. 포.도.가. 성.장.해.서. 와.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와인은 성숙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지금은 섹시를 잃은 시대다. 이상적인 소년으로 형상화되는 그리스 조각상 같은 것을 숭배하는 시대다. 양육을 통해 존재를 콘크리트처럼 굳혀 놓고는 그것을 "이쁘다, 이쁘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쁘다. 그러나 섹시하지는 않다.
섹시함이란 단지 하반신의 국소부위가 찔끔찔끔한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섹시함이란 존재론적인 것이다. 그 옆에 있으면 우리 자신이 벅차게 살아날 것 같은 삶의 기운이다. 그것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오늘날 피터팬처럼 웃고 있는 조각상들에게는 그러한 기운이 없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그들을 예쁘다고 말해주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낀다.
섹시하지도 않은 자아에게 매일매일 예쁘다고 말해주어야 하는 일이 강요되는 이 현실, 이것은 지옥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로 어떠한 것을 섹시하다고 느낄까?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막 대하며, 우리도 막 대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섹시하다고 경험한다. 남성중심적인 언어로 비유하게 될 것이지만, 비유의 뉘앙스를 읽어주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어떠한 이를 정말로 색시로 맞고 싶어하는가? 자애롭고 완벽한 여신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여신은 색시감에서 가장 멀리 있다. 우리는 우리와 '말'과 '몸'이 통하는, 곧 우리 자신과 에.너.지. 교.류.가. 활.기.차.게. 일.어.나.는. 이를 색시로 맞고 싶어한다. 막 대한다는 것은, 이 막대(莫大)한 에너지 교류의 현실을 의미한다.
힘찬 진동이 똑같이 힘찬 진동을 만나 공명할 때 퍼지는 그 생명의 울림이 바로 섹시함이다.
그래서 섹시함은 색시함이다. 서로가 색시로 서로를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색시(色時)'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색이 짙은 시간'을 살아야 한다. 섹시함은 시간의 문제다! 존재는 언제나 시간의 문제다!
색이 짙은 시간이란 무엇인가? 자기 안의 시간이 가속화되어 응축된 인생이다. 그러한 인생은 색이 짙어진다. 시간압축이 일어난 것이다. 고밀도의 시간압축으로 인해 우리가 색시한 인생이 펼쳐진다. 사춘기를 살아가는 이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섹시함이며, 곧 색시함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만이 남겨진다.
# 마음쓰는 시간
상담은 언어술의 실천론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시작부터 기각했다. 선(禪)에서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말한다. 마음은 직접 향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마음을 직접 향할 수 있는가? 하이데거는 큰 도움을 준다.
마음을 지시하기 위해 우리는 시간의 문제를 지시해야 한다. 상.담.은. 시.간.을. 주.제.화.하.는. 일.이.다. '시간의 예술'이다. 시간을 주제로 삼아야 존재가 주제화될 수 있다. 존.재.는. 시.간.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른 장에서도 말했듯이, 실존상담의 시간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으로 이제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가. 마.음.을. 쓰.는. 것.이. 시.간.이.다.
내담자는 대체 어떠한 일에 가장 마음을 쓰며 보내고 있는가? 그것이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아정체성과는 무관하다. 사실적으로 그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고 있는 바로 그 방식이 그의 사실적 면모다.
어떠한 이가 자신은 선비라고 생각하는 자아정체성을 소비하고 있지만, 또 그러한 경험들을 주체로서 누적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 그는 사람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속일까를 궁리하는 데 가장 많이 마음을 쓰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사기꾼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될 수 없는 존재의 사실이다. 어떠한 언어를 가용해도, 그것은 그가 스스로 결단하여 쓴 그의 시간으로 엄밀하게 드러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무리 날백수에, 불효자이고, 사회적 무능력자여도, 그래서 단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가 소설을 쓰는 일에 매순간 마음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다. 그.의. 시.간.이. 그.가. 누.구.인.지.를. 증.명.해.준.다.
시간의 색이 짙을수록, 그 존재의 색도 짙어진다. 스스로를 증거한다. 그러니 인정과 칭찬을 구걸하지 않는다.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존감이 결여되지 않는다. 그가 마음을 쓰며 시간을 살았기 때문이다.
상담을 받게 되는 내담자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이 채택하고 있던 자아정체성과, 사실적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를 몸소 체험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적인 까닭에 경계가 된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분명해진다. 사기를 치고 있던 이는 사기를 치는 대신에 광고회사에 취업을 하고, 자기를 못난 존재로 보며 비난하고 있던 이는 소설가로서 소설을 쓴다. 자신의 색이 더 아름답게 짙어질 그 섹시한 길로 진입한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색시(色時)'로 살아간다.
사춘기 때 우리는 아주 근사하고 멋진 누군가의 색시가 되기를 꿈꾸지 않았던가? 실은 그것이 모든 사춘기의 꿈이 아니었던가? 아다치 미츠루의 청춘만화를 읽으며 가슴이 설레었던 것은, 색시로 성숙해가는 우리의 사춘기적 자화상이 거기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존재의 색시라니, 이것보다 완벽한 것이 또 있을까?
이것은 종교적으로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연인이라는 의미이며, 통속적으로 비유하자면 우리가 소비해온 그 모든 미디어 컨텐츠들 속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경험했던 바로 그 캐릭터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늘 이불 속에서 우리가 상상하며 들떠했던 그러한 현실에 대한 의미다.
그런데 이것은 자아정체성을 게임캐릭터처럼 양육하여 육성하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이를테면, 이러한 이는 니체처럼 행위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축적함으로써 니체로서 레벨업을 해나간 끝에 결국 자기 자신을 니체로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주. 쉽.게. 그.는. 니.체.를. 모.델.링.하.지. 않.는.다.
그는 니체에게 마음을 쓸 뿐이다. 그러나 그가 마음쓰고 있는 것은 사실 니체가 아니다. 그 순간에는 니체로 보인 자기 존재의 면모다. 때문에 그는 니체를 모델링하지 않는다. 니체가 할 법한 언행을 찾아서 따라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그가 하게 되는 일은, 니체가 사랑했던 것을 사랑하는 일이다. 니체가 보던 것이 아니라, 니체가 보고 있던 것을 그도 본다. 그리고 입을 뗄 때, 그의 입에서 니체가 하지 않은 니체의 말이 흘러 나온다. 존재가 말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성숙이다. 이 멋진 성숙을 아주 잘 묘사해주는 작품이 그 유명한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얼굴』이다. 주인공인 어니스트 소년은 자신이 마음을 쓰고 있는 큰바위얼굴을 결코 모델링하지 않지만, 성숙하게 드러난 그를 모두가 큰바위얼굴로 바라본다. 그는 큰바위얼굴의 이미지를 자아정체성으로 삼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한 것이 아니라, 큰바위얼굴로 그냥 산 것이다.
"아싸! 내가 또 해냈어! 내가 또 놀라운 경험을 하고, 놀라운 능력을 얻었어!"
이러한 감각이 마음쓰는 시간에는 없다. 성숙은 막 말을 할 시간에, 차라리 막 대한다. 니체에게 마음을 쓰는 이는 니체를 막 대한다. 신주단지가 아니다. 어니스트도 큰바위얼굴을 막 대한다. 비가 오고 천둥이 친다고 눈물을 쏟으며 "아유, 누가 저 약한 큰바위얼굴을 지켜줘야 해요! 우리가 큰바위얼굴이다! ㅜㅜ"라며 양육의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는 그저 큰바위얼굴과 함께 짙은 시간을 새겨나간다. 니체에게 마음을 쓰는 이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니체와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자신이 실시간적인 시간의 진한 공명을 이룬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모델링은 언제나 죽은 것을 모델링하는 것이지만, 마음을 쓰는 일은 늘 살아있는 실시간 속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사춘기는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혐오를 깔고 있다. 모든 것이 변해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죽어간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사춘기는 변화에 대한 염증을 갖는다. 자기의 인생에서 처음 들어온 죽음에 대한 자각이 너무나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아직 사춘기의 주체는 마음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을 쓰게 되면 죽어간 것들이 동시에 진행되는 실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과 똑같이 지금 그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 경험된다. 죽어간 것들이 아니다. 죽어갈 것들도 아니다. 시공을 넘어 지금 함께 살아 있는 것들이다.
마음쓰는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사랑할 시간이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도 생생한 그 호흡들을 들이마신다. 그들은 존재했고, 지금도 부재의 존재방식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이 고귀한 인류의 '함께섬' 속에 있다.
모.든. 인.간.이. 당.신.을. 위.해. 같.이. 서.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 말이 정말로 사실임을 알고 신뢰하게 되는 그 순간을 위해 상담은 기능한다. 인류의 사춘기를 위한 상담의 임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금 더 막 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정말로 인간의 막대한 사랑 속에 있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게끔 안내하는 것이다. 마음은 그렇게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