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32

"실존상담자의 전문성"

by 깨닫는마음씨




전문가란 무엇인가? 여기에 실용적이면서 아주 분명한 이해가 있다.


어.떤. 것.을. 위.해. 자.기.의. 손.을. 더.럽.힐. 수. 있.으.면. 그.는. 그.것.의. 전.문.가.이.다.


전문가가 아닌데 전문가인 척하는 이들은 그 반대의 일을 한다.


자.기.의. 손.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것.을. 더.럽.힌.다.


오늘날 실제의 전문가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반지성주의'의 풍조는 이 깨끗하고 순결한 무오성(無誤性)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자기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청소년들이 일부러 거칠고 투박한 양아치인 척하는 위악의 태도로 곧잘 드러난다.


위악은 '키치(Kitsch)'를 좋아한다. 그래서 반지성주의의 위악적 주체는 키치한 이를 오히려 전문가로 숭상하고자 한다. 자기의 무오성을 지켜내기 위해 일부러 전문성에 엿을 먹이려는 것이다. 키치한 광대가 자기 대신에 전문성을 잘 조롱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문가로 위장한 SNS와 유튜브의 광대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이유다.


광대들은 대중을 위해 자기의 손을 더럽힌다. 그래서 이들은 분명 전문가다. 광대 전문가다. 심리학 전문가는 아니며, 심리상담 전문가도 아니다. 오히려 이 광대들은 심리학 분야에서는, 광대인 자기의 손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심리학 및 심리상담을 더럽힌다. 그렇게 자기는 대중을 위해서만 자기를 더럽히는 '순수한 광대'로 입지화한다. 광대와 대중의 야합은 참 지극하다. 효심에 가까운 서정이다.


보통 심리학 광대들이 대중을 향해 자주 발화하는 대사는 다음과 같다.


"저에게 놀라운 경험들이 있습니다. 이 경험들을 잘 통합하여 '출발 비디오여행'처럼 여러분이 어떠한 심리학적 정보를 얻으시면 좋을지를 제가 잘 선별해 드릴게요.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심리학의 최신 동향과 그 성과들을 쉽게 마스터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약장수다. 광대의 생계적 형태는 대개 약장수다. 심리학 약장수는 심리학이 아니라, 심리학이라는 라벨을 붙인 '무안단물'을 팔고 있는 것이다. 물론 효능은 없고, 심지어는 최신의 것도 아니다. 자아나 무의식, 학습, 모델링, 언어패턴 등을 중요하게 다루는 맥락이 나온다면 이는 더 명백하다.


"언제까지 MS-DOS를 쓰실 겁니까? 저를 믿고 윈도우95를 한번 깔아보세요! 여러분의 마음을 최신의 것으로 업데이트해보세요!"


어느 분야에서나 OS를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들고 오는 소재는 이미 너무나 낡은 것이다. 이들이 최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저 자.기.가. 과.거.의. 어.느. 시.절.에. 감.동.받.았.던. 그. 소.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은 가장 정체된 이들이 가장 최신의 것임을 주장한다.


정말 최신의 것이라면, 그것은 주장되기가 힘들다. 왜? 주장하는 순간 이미 또 달라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의. 삶.이. 달.라.졌.다. 그러니 지금 삶의 지평에서 보이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인간의 기술이 발전한 만큼 오늘날 이 변화의 속도는 엄청나게 가속화되었다. 어제 본 것은 이미 까마득하다. 오늘은 소화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새로운 것들이 이미 밀려와있다. 개인의 다양성이라는 지표까지 관여된다면 '최신의 운영체제'라는 말이 얼마나 하찮고 무용한 개념인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러한 사실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 과학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얼마나 빨리 정답을 확보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기.존.의. 정.답.을. 기.각.하.는.가.의. 문.제.가 되어 있다. 이것은 '환상의 해체'의 의미다. 그리고 이 의미야말로 과학이 과학인 이유다.


물리학자가 쓴 인문과학서라고 할 수 있는 『최종 이론은 없다』의 마르셀로 글레이서는 말한다.


"모든 것을 설명해줄 통합이론은 실제가 아니라 우리의 기대에 불과하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통합적 단일성으로 보고자 하는 우리의 투사작용일 뿐이며, 주술적 광신에 가까운 것이다."


글레이서에게 있어 우주란 '혼돈 그 자체'다. 즉, 우.주.는. 무.오.하.지. 않.다. 깨끗하고 순결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글레이서는 또한 말한다.


"이러한 우주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다."


우.주.라.는. 더.러.움.을. 자.신.에.게. 묻.히.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의미로 드러난다.


최신의 운영체제? 최신의 마음원리? 최신의 심리학? 정말 쪼잔하고 조잡한 이야기들이다. 오늘날의 허구들은 사실보다 그 스케일이 너무나 빈약하다. 이 또한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이제 인간은 기술의 도움을 통해 사실을 가장 거대한 것으로서 조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의. 기.술.은. 고.대.의. 신.화.보.다. 강.하.다. 신들의 별자리를 넘어, 제임스 웹 망원경이 벌써 출동했다.


또한 마음의 '무안단물'보다도, 실제의 사실적인 의료기술이 더 신비롭다. "마음을 글로 표현하면 암이 낫는다."와 같은 식의 유사과학들은 왜 이리도 촌스러운가. 그것이 정말로 최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이 아니라 고대의 주술이다. 이러한 일을 하느니 우울증 약을 먹는 편이 낫다. 의학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심리학이라는 라벨을 붙여 마치 유사의학인 척하려는 일은 정말로 사이비 약장수들이나 하는 일이다.


'똑똑한 태도'로 위장한 '반지성주의'가 낳는 주술성을 폭로하기 위해 활동하는 세력들이 있다. 이들은 '회의주의학파(skeptics)'라고 불린다.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스켑틱』 등의 저자인 마이클 셔머는 그 대표자이다. 그는 이 세상을 촌스러운 통합적 원리로 설명하려는 '가짜 합리성'을 해체할 수 있는 '진짜 이성의 힘'의 가치를 제안한다.


이성은 무슨 일을 하는가?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을. 한.다. 이성의 기능을 잘 사용하는 개인은 경계가 분명하다. 라인홀드 니버의 유명한 기도문을 기억하는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경계를 잘 분별할 수 있는 이는 지혜롭다. 그리고 이것이 전문성의 출발점이다. 왜인가? 여기에는 책임의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통합을 말하는 이들은 왜 통합을 말할까?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다. 자기의 경계를 갖고 있는 이에게는 그 경계에 대한 책임이 동반된다. 그러나 경계를 흐려 모든 것이 하나인 척하는 이들은 어느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자기의 경계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입 논술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맞다는 황희정승 놀이를 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양비론은 책임회피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 모자라고 바보라서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 유난히 똑똑해서 양쪽의 정당함을 혼자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책임지기 위해, 그럼으로써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어느 한쪽을 결단하는 것이다.


'선택'과 '집중'은 경영학 개론서에만 나오는 표현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적인 기제다. 자기 자신으로 무르익게 되는 전문성의 향기는 바로 이 결단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우리가 결단하지 않을 때를 살펴보면, 우리는 '가짜 합리성'에 지배받고 있다. 생.각.하.는. 척.하.는. 생.각.을. 하.며. 실은 그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유지할 뿐이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들에게 있어 '선택한다는 것'은 '더렵혀진다는 것'과 같다.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순수한 무오성이 상실될 것처럼 경험한다. 자신은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순백의 요정처럼 칠렐레팔렐레 머리에 꽂을 꽃고는 동산 위를 폴짝폴짝 뛰어 다녀야 하는데, 책임은 이 요정의 날개를 꺾고는 강제로 인간이 되게 만드는 '형벌'인 것처럼 이들에게 간주된다.


틸리히는 이것을 '꿈꾸는 유아적 낙원감'이라고 말한다. '유아적 전능감'의 다른 표현이다. '가짜 합리성'은 이 지점에서, 이들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오만가지 이유를 제공해준다. 책임지는 '더러운 존재'가 되지 않아도 되게끔, 이 우주를 마치 정리정돈이 잘 된 자기집 방구석의 모양새처럼 형상화하는 일을 도와준다.


오늘날의 은둔형 외톨이들은 영화나 만화 등에서 묘사되듯이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인 '동굴'에서 은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우아한 소품과 꽃들로 잘 치장된 '낙원'에서 은둔한다. '가짜 합리성'이 제공하는 환상이 이 낙원을 지지한다. 나아가 그 '낙원' 속에서 홀로 키워나가는 것이 마치 '전문성'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조장한다.


소위 말하는 '방구석 좆문가'의 탄생이다. 위대한 키치며, 영웅적 반지성주의의 도래다.


그런데 심리상담의 전문가들에게는 이 일이 힘들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약을 팔 시간이 없다.


상담자는 '과학자-실천가' 모델 위에 위치한다.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두 배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담자의 경계는 '학위'와 '경력'을 포괄하는 테두리 안에서 결정된다. 상담자는 바로 이 두 영역을 함께 수행하는 경계를 선택한 이들이다. 어느 하나도 소홀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상담자는 왜 이러한 경계에서 살기를 결단했는가?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다.


이것은 상담일을 하지 않으면 돈을 벌지 못하는 두려움을 경험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문성은 이러한 생계의 문제를 초월하는 자리에서 확립되는 것이다.


돈을 벌지 못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렇게 하는 이가 이 세상에 그 혼자뿐이라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는 그 분야의 전문가다. 떠올려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모두 이러하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해봐도 좋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상.담.자.는. 자.신.을. 위.해. 산.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직업들과 변별되는 상담자의 고유한 전문성을 성립시켜준다.


상담자는 결코 정신과의사보다 신경정신학의 차원에서 유능하지 않다. 의사에게 엎드려 절해야 한다. 상담자는 결코 인지과학자보다 마음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유능하지 않다. 인지과학자에게 두 손 들고 항복해야 한다. 심지어 상담자는 임상심리사에게도 그 작업의 엄밀성에 있어 명함을 내밀 수 없다. 임상심리사에게 "건방지게 굴어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상담자는 정신현상을 다루는 그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 앞에서도 자신의 전문성을 분명하게 선언할 수 있다.


"우리는 당신들이 다루지 않는 '삶의 의미'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것은 상담자의 자부심이다. 상담자가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결단한 상담자라는 경계에 전념하는 이유다.


'의미'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살. 때.만. 발.견.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그것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다. 어떤 소설가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소설을 씁니다." 그는 소설의 전문가이다. 어떤 이는 철학을 한다. 니체를 읽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큰 숨을 쉬고 싶어서 니체를 읽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다보니 니체를 더 많이 읽고 싶어 대학원에도 진학해 자연스럽게 논문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한 방향성을 견지하다보니 어느 순간 니체의 사상을 강의하게 되었다고 그는 또한 말한다.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니체의 전문가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주 분명하다.


"자기를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나는 죽을 것 같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이 감각, 이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순수한 자기정체성을 침범해 다 '오염시켜도' 더 사랑하고 싶다. 나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랑에 더 '더렵혀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사랑에 완전히 뒤덮이고 싶다.


혼돈투성이인 더러운 우주 속에서 인간은 그렇게 외쳤다.


우주를 가장 사랑한 인간의 일이다.


이. 사.랑.의. 일.이. 바.로.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더럽히는 이는 전문가다. 반대로 자신을 애정하기 위해 사랑을 더럽히는 이는 좆문가다.


'더럽힌다'는 이 표현을 이제 조금 우아한 표현으로 치환해보자.


자.기.보.다. 더. 큰. 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일.


전문가는 바로 이 일을 하는 이들이다. 좆문가가 자기를 제일 큰 것으로 삼을 때, 전문가는 자기보다 큰 것을 향해 항복한다. 그럼으로써 위대한 역설이 피어난다. 우주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던 인간은, 자신과 하나가 된 우주를 확인함으로써, 우주만큼 거대한 존재로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알고 싶다."


이것은 모든 전문성을 향한 의지의 근원에 있는 소망이다.


"내가 나일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야."


1990년대 시애틀 그런지록 밴드인 앨리스 인 체인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와 같다. 전문가는 '나'가 아니라면 죽을 것 같아서 그 일을 한다. 그래서 모든 전문가는 '나'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를 향한 일은, '나'를 내어주어야 '나'를 얻을 수 있는 역설로만 펼쳐진다.


모든 전문가 내지 전문가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의 가슴속에는 분명하게 이 소망이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인간의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이 일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 또한 역설로 성립된다. 다른 이의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이는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 삶을 통해 그는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


상담자가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담자로 인해 '더럽혀지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요람 속 순수성을 기각하고 내담자에게 내어주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내담자를 위해 그는 이러한 일을 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를 위해 이 일을 한다. 상담자는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이 일을 한다.


때문에 상담자는 내담자를 위해 희생하는 역할이 아니다. 헌신이라는 표현도 맞지 않다. 상담자는 사랑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알아갈 뿐이다. 상담자의 삶과 내담자의 삶이 섞여 이룬 그 '혼돈' 속에서 이제 분명해질 '나됨(I-ness)'의 경계를.


이 경계를 밟고 상담자도 '나'로 내담자로 '나'로 각기 드러나진다. '나됨'의 책임이 다가온다. 우리 모두에게 다 이 책임이 있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다 이 책임이 있다. 이러한 책임의 다른 이름이 바로 '의미'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다. 의.미.가. 있.다.


어느 하나의 삶도 홀로 잊혀갈 우주의 티끌이 아니다. 상담자는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이다. 바로 당신의 의미를 지키고 있는 이다.


이것이 상담자의 전문성이다.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상담자는 인간의 수호자다. 가장 마지막의 자리에서도, 인간됨을, 나됨을 말할 그 이가 바로 상담자며,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일 것이다.


한국형 실존상담의 자격과정을 안내하면서, 1급 과정을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1급의 상담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뜻에서의 1급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1급 재난지역의 오염 속으로 인간을 지키기 위해 성큼 뛰어들 1급의 용기를 갖고 계시다는 뜻에서의 1급입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키.는. 자, 그가 상담자이다. 마음 따위는 몰라도 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이 일이 아직 힘들다고 해도, 인간을 한번 사랑해보고 싶은 당신이라면, 그렇게 도무지 쉽지 않은 자기 자신을 한번 사랑해보고 싶은 당신이라면, 당신의 전문성은 시작될 수 있다. 인간을 향해 죽고 못살 그 사랑에 벌써 참여된 당신의 존재가 이미 실존상담자로서의 전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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