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마음과 심장의 마음, 그리고 본감각"
마음은 뇌에 있는가, 아니면 심장에 있는가?
이것은 과거 그리스 철학의 시절부터 논쟁거리였다. 플라톤은 마음이 뇌에 있다고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은 심장에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뇌과학 및 인지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뇌가 마음이라는 견해가 대세일 수 있다. 마음의 작용과 '유사한 활동'이 뇌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실제적으로 뇌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프로이트나, 특히 융과 같은 이가 주장하는 방식으로, 뇌 안에 자아, 아니마, 아니무스, 그림자, 트릭스터 등의 이름을 가진 스머프들의 마을이 펼쳐져 있고, 가끔 용과 고블린도 나오며, 저기 멀리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는 깊은 동굴이 존재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마.음.은. 형.이.상.학.적.인. 소.재.가. 아.니.며. 신.화.적.인. 소.재.도. 아.니.다.
프로이트가 뇌과학자들에게서 정신현상에 대한 탐구를 과학이 아닌 문학으로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는다면, 융은 아예 그것을 판타지 라노벨의 영역으로 이행시킨 확증범이다. '월희'나 '페이트'를 나스 키노코가 쓰지 않았다면 분명 융이 썼을 것이며,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나 '에반게리온'을 안노 히데아키가 감독하지 않았다면 분명 융이 감독이었을 것이다.
판타지나 신화를 좋아하는 서브컬쳐 키즈들은 마음을 그러한 방식으로 말한 융을 좋아한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의 열띤 소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일이 필요할지 모른다.
마.음.은. 없.다.
특히 뇌 속에 마음은 없다. 가장 보편적으로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생각'과 '감정'의 작용을 나타낸다. 이것은 뇌의 작용이지, 마음이라는 실체적 구조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뇌가 아닌 심장에 마음이 있다는 것 또한 아니다. 심장에 있는 4개의 방에는 마음을 위한 방은 없다.
생리학적 발전이 덜 이루어져 우리 몸에서 그 용도가 불분명해보이는 장기로 관찰되는 것이 있었다면, 보통은 그것이 '마음의 기관' 자리를 꿰차기도 해왔다. 때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맹장에 있기도 했을 것이고, 송과선에 위치하기도 했을 것이며, 이것저것 고민하기 귀찮은 이들에게는 마음은 전신으로 분산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해부학적 신체 어느 곳에서도 마음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선(禪)의 시조인 달마 대사는 마음이 불안하다고 찾아온 혜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알았어. 해결해줄게. 마음, 그거 한번 내놓아봐."
혜가는 기뻐하며 마음을 찾다가 이내 말한다.
"어, 마음이 없는데요."
달마는 대답한다.
"응, 없게 해결해줬지?"
이 삽화에서 혜가는 원.래. 없.는. 마.음.을. 원.래. 없.는. 것.으.로. 확.인.한. 것.이다. 마치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활동하지만 그 실체는 없다. 그 작용이 경험되고 있는 중에는 그것만이 전부인 양 지배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쉽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작용의 특성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더 좋게 만드느니, 마음을 성장시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공허하고 부질없는 것인지는 분명해진다. 없.는. 것.을. 좋.게. 만.들. 수.도. 있.는.가?
마포대교 옆 한강에 '깔랑낄루꾼테'라는 작은 섬이 있다고 해보자. 그 섬에 들어가면 모두가 불로불사의 몸을 갖게 되며, 각 개인들의 통장으로 100조 원씩 입금이 된다. 하늘을 나는 능력도 주어지고, 어벤져스에 자동가입도 이루어지게 된다고 하자. 그래도 아직 부족할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이 섬을 더 좋게 만들 수 있겠는가?
'깔랑낄루꾼테'를 좋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다.
뻥.을. 많.이. 치.면. 된.다.
있지도 않은 것을 좋게 성장시키는 방법의 핵심은 거짓말이다. 허구에 허구를 더해가는 일이다. 오늘날 마음산업이 사기꾼들의 블루오션이 되어 있는 결과는 필연일 수 있다.
특히 '뇌의 마음'을 믿는 이들이 이 허구의 사업을 맹렬히 펼쳐간다. 이들에게는 단순히 '뇌'가 아니라 '뇌의 마음'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마음이라는 '환상적인 소재'에 대한 이야기가 생겨날 수 있다. 마음에 대한 이야기의 소비도 촉진될 수 있다. 이것을 누가 바라는가?
그.들.의. 뇌.가. 바.란.다.
'뇌의 마음'의 신도들은 사실 '뇌의 노예'다.
이것은 코즈믹 호러처럼 악마적 인격을 가진 '뇌'라고 하는 초자연적 괴물을 묘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뇌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자극에 대한 실제적 중독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야.기. 중.독.이.다. 여기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악성의 중독자는 자신이 중독인지를 모른다. 그냥 재미있어서 하고 있는 취미활동이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소비하지 않을 때 그는 지루하고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다. 하다 못해 포털사이트 뉴스란이나 대형 커뮤니티 게시판에 들어가 멍하니 새로고침만을 반복한다. 무엇인가 새로운 자극이 될 이야깃거리가 출현해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경험하는 일이 바로 자극의 소비다. 그러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자신이 성장한 듯한 착각이 든다. 자신이 아니라, 뇌가 조금 더 비대해진 것이다. 뇌.는. 자.극.을. 먹.고. 산.다. 정확하게 말하면, 뇌는 문제가 되는 자극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확장된다. 그래서 이야기는 가장 좋은 먹이다. 이.야.기. 자.체.가. 갈.등.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갈등은 이야기가 이야기일 수 있는 핵심요소다. 갈등이 없으면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갈.등.은. 언.제.나. 가.장. 큰. 자.극.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뇌는 이야기가 제시하는 갈등의 문제를 직접 풀어내거나, 또는 이야기의 내적 흐름이 보여주는 문제해결의 과정을 즐기는 방식으로 만족을 얻어간다. 하루라도 이.야.기.의. 자.극.을. 소.비.하.지. 않.으.면. 뇌.는. 유.사.기.아.상.태.에. 빠.진.다. 초조해지며 쫓기는 기분이 된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공급되지 않는 이 기아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뇌는 스스로 자극을 만들어낸다. 이럴 때 많이 경험하는 것이 '신비체험'이다. 환상도 보고, 환청도 들으며, 미리엘 주교 같은 신적 인격에게 용서도 받는다. 자신이 다 온전한 것 같은 정동감도 느끼게 된다. 전.부. 다. 뇌.가. 만.든. 환.상.이.다.
이것은 긴장과 이완의 기제로 설명된다. 이야기의 갈등을 잔뜩 소비하며 긴장을 키워가던 이가 여타의 이유로 이야기의 소비가 끊어져 더는 자극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을 때, 체험자의 뇌가 스스로 그 이야기를 더 신비적인 형태로 만들어내 강한 긴장을 이어감으로써 결국 체험자를 '황홀경'의 이완상태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위 신비체험자들이 말하는 '놀라운 경험'이란 이처럼 '환상적 자위의 경험'이다. '물리운동'만으로는 쉽사리 도달하지 못하던 오르가즘을 '이야기가 제공하는 환상'을 통해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보고다.
마약중독자들이 황홀경의 상태를 경험한 덕분에 마약에 더욱 빠지듯, 이야기의 예찬자들은 이러한 상태체험으로 인하여 이야기를 더욱 숭상하게 된다.
"이야기는 텐가보다 강하다!"
이것은 충분히 이들이 쓸 수 있는 성공적인 홍보문구다.
프로이트는 아주 기뻐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이.야.기.가. 성.욕.의. 해.소.를. 위.해. 만.들.어.진.다.고. 말.한. 사.람.이.다. 헤밍웨이는 이를 열렬히 지지한다. 그는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섹스를 하지 않았고, 섹스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말한다.
융은 이러한 사유에 반기를 들며, 어떠한 이야기는 성적이지 않고 오히려 영적이거나 신성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피식 웃으며, 융은 신체발달에 미숙해서 자신의 성에 대한 근본적인 수치심을 갖고 있기에 성욕을 영성이나 신성으로 '안전하게' 바꿔 부르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같은 문학이라지만, 이것은 리얼리즘 소설과 판타지 라노벨의 차이다.
오늘날 많은 판타지 라노벨이 하렘물로 형상화되는 것은 수치심과 무관하지 않다. 수치스러운 소재는 원래 과잉된다. 성적결벽증은 성적노출증으로 곧잘 표현된다. 지적 열등감이 있는 이가 자신의 지성을 과잉되게 뽐내는 모습과 같다. 이 또한 긴장과 이완의 기제다. 다 뇌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일들이다.
이러한 경우들이 조금 특수한 사례처럼 들린다면, 우리는 더 일상적인 상황을 말해볼 수 있다. 자극이 없거나 충분하지 못해 기아상태에 빠진 뇌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상적 상태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쓸데없는 걱정'과 '자기비난'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한번 가만히 있어보라. 이 두 증상은 금새 나타난다. 이것을 각각 '투덜이'와 '징징이'이라고 불러볼 수 있다. 전자는 생각과 관련된 증상이고, 후자는 감정과 관련된 증상이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경험하는 것은 대부분 다 이 투덜이와 징징이일 뿐이다. '생각을 위한 생각'이고, '감정을 위한 감정'이다. 이러한 생각에 우리는 쫓기고, 이러한 감정에 우리는 떠밀린다. 전부 다 갈등의 자극을 생산하기에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내적 도구들이다.
실제로 이러한 상태에 위치할 때 우리는 외적인 갈등에도 보다 쉽게 노출된다. 외적인 갈등을 우리 자신에게로 끌어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투덜거리고 징징거리는 언행만을 사람들에게 지속하고 있는 이가 갈등상황을 경험하지 않기란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무슨 비극의 주인공이라서 자기에게만 갈등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갈등을 최대치의 의지로 호출하고 있는 것이다.
뇌의 노예들에게는 늘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노예가 가장 열중하는 일은 무엇일까? 자.기.와. 같.은. 노.예.를. 늘.리.는. 일.이.다. 마약중독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마약을 권하는 일에 지극정성이다. 지옥에 갈 때는 다같이 가야 안심이 된다. 뇌의 노예는 다음과 같은 표어로 또 다른 노예후보자들을 불러 모은다.
"마음에 좋은 이야기들을 함께 더 많이 경험해봐요. 서로의 멋진 이야기들을 같이 나누어봐요. 우리가 펼쳐가는 풍요로운 이야기들로 마음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봐요."
뇌의 노예들이 '뇌'가 아니라 꼭 '마음'이라고 써야 하는 이유를 이제 우리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마음을 갖고 와, 뇌를 마음으로 대신 바꾸어 말함으로써, 이들은 노예상인으로서의 업무가 더욱 효과적일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마약에 중독된 이가 함께 더 많은 마약을 경험해보자는 말은 어떻게 들리는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정말로 '건강함'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뇌에 자극을 공급하기 위해 끝없이 이야기라는 마약을 생산하고 또 소비하는 이 노예활동이 진심으로 권장할 만한 인간의 삶인가?
마음에 좋은 이야기라는 것은 애초 없다.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뇌에 좋은 이야기는 있다. 충분히 소화가능한 차원에서 더 복잡하고 정교한 이야기일수록 뇌에 좋다. 뇌의 문제해결 기능을 더욱 활성화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뇌에게는 가장 좋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러한 질문은 가능하다.
"뇌가 좋아진다면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방향성이 없는 욕망'의 문제다. 이를테면 강한 육체를 갖기 위해 더 많이 먹으며 운동을 열심히 하는 이가 있다. 그는 그 힘을 쓸 곳을 상정하지 않았음에도 무작정 몸을 키운다. 그러한 그에게 펼쳐지는 현실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연료를 소비해야 하는 현실이며, 동시에 비대해진 몸의 힘을 쓸 곳이 없어 늘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현실이다.
뇌의 문제도 동일하다.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이가 있다. 그의 뇌가 잘 활성화된 결과로 그는 서울대에 입학했다. 이것은 성공적이다. 정확한 방향성에 따라 필요한 힘만큼 잘 가용되어 실현된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의 인생에서 뇌를 만족시킬 끝없는 '도전과제'를 찾아다니던 끝에, 결국 심리학을 그 소재로 채택하여 '새롭고 어려운 것'을 익히는 자극을 소비하는 이가 있다. 그는 심리학을 배울수록 욕구불만에 빠지게 된다. 단지 뇌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만 행위하고 있을 뿐, 자신의 구체적 현실을 위해 살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보통 이러한 이들은 프로이트나 라캉, 융 같은 정신역동 계통의 심리학 이론을 소비하곤 한다. 왜인가? 크게 두 가지의 이득이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통째로 문제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해결할 문제들을 외부에서 찾아다니는 일은 쉬이 지친다. 그러나 자기의 인생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리면 근접거리에서 보다 쉽게 자극을 소비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는, 무의식이라는 것은 끝없는 문제의 보고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의식 속에는 문젯거리들이 넘쳐난다. 아무리 잡아도 씨가 마르지 않는 사냥터다.
그렇게 뇌 폐하에게 늘 자극을 안정적으로 진상할 수 있게 된 이 '이득'은 뇌의 노예들이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욕구불만의 상태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신념적 가치가 된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의 문제를 돌보며 더 좋은 마음으로 성장하기 위한 길을 똑바로 살고 있는 거야.'
모두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똑바로 살고 있는 '깔랑낄루꾼테' 노예섬에서의 일이다.
노예들이 얼마나 '똑바로' 윤리적인지 아는가? 니체가 도덕 및 윤리를 그토록 비판한 이유는, 그것들이 노예의 산물인 까닭이다. 마약중독자들은 자신이 비윤리적이라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 그들이 마약을 개방해야 한다고 열렬하게 외치는 이유는, 자신의 윤리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다.
왜 이렇게 되는가? 윤리성이라는 것이 부단한 노력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뇌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극을 소비하는 노력을 쉬지 않고 하는 이들은 자신이 신실하고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하며, 곧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무협지를 보며 주인공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던 아이가 부모의 꾸지람을 들었을 때 "당신들의 추한 세계와는 다르지만, 나도 내 자신만의 길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라며 무협지 주인공에게 빙의된 대사를 하는 이유다.
'뇌의 마음'은 윤리적이다. 뇌를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삶은 윤리적이다. 윤리적이어서 노예는 자발적인 노예가 된다. 자극을 섭식하라는 뇌의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이지만,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가장 답없는 상태의 노예다. 자신이 노예인 줄도 모르는 노예는 그 상태를 벗어나는 일이 어렵다.
그런데 실제적인 차원에서 이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기에 인간은 희망적이다. 인간에게는 '심장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뇌의 마음'이나 '심장의 마음'이라는 표현은 정말로 마음이 뇌나 심장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은유일 뿐이다. 이러한 은유로서 묘사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다. '뇌의 마음'이 '생각'과 '감정'에 대한 것이라고 할 때, '심장의 마음'이 알리는 것은 바로 '감각'이다. 실존상담이 감각을 통해 상담하는 활동이며, 이 책이 당신의 감각을 깨우려는 이유다.
아주 희소한 예외를 제외하면, 모든 동물에게 있어 심장은 그 핵심이다. 살아있는 '몸'의 중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뇌가 죽어도 심장이 움직이면 신진대사가 유지된다. 사망의 기준은 뇌사가 아니라 심장사이다. 그런 즉, '심장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몸.의. 핵.심.적.인. 감.각.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주 쉽게 '느낌'이라고 말한다. 유진 젠들린은 '감각느낌(felt sense)'이라는 용어로 서술하며, 신체현상학자들은 그저 '신체성'이라고 부른다.
더 일상적으로 활용되는 표현도 있다. 그것은 바로 'gut feeling'이다. 몸의 안쪽 중심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칭하는 표현이며, 흔히 육감, 직감, 직관 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본감각'이라는 표현을 제안하고 싶다. 불교에서 '본래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연결짓는 일을 한층 유용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본감각'이 갖고 있는 주요한 기능은 '그냥 아는 것'이다. 논리적 추론과정을 거치지 않고 마치 그림을 보듯이 느껴서 그냥 알게 된다. 뇌가 없는 생명체도 느.껴.서. 안.다. 이 기능은 표현 그대로 몸을 가진 생명체에게 있어 본래적인 것이다.
벌써 1999년도에 발표되었던 가트만의 유명한 실험이 있다. 이것은 숙련된 심리전문가들에게 시애틀에 사는 124쌍의 부부들이 각각 대화를 나누는 15분간의 영상을 보여준 뒤에, 심리전문가들이 감각한 그 실제가 부부들의 결혼생활에서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정확히 6년 뒤에 확인한 결과, 부정적으로 감각된 부부들은 이혼을 하며, 긍정적으로 감각된 부부들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확률이 아주 유의미하게 평정되었다. 심지어 이것은 15분의 영상을 다 보지 않고도, 초반 3분의 장면에 대한 감각만으로 예측된 결과였다.
이것을 아주 극단적으로 묘사하자면 결국 "몸이 안다."라는 것이다. 특히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에 대해 몸은 더 빨리 안다. 몸은 안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방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한 여성이 왠지 모르게 불쾌한 감각을 느낄 때, 그 방에 성범죄자가 앉아 있던 경우에 대한 연구 등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생명체로서의 몸이 얼마나 우수하고 섬세한지에 대한 묘사다.
실존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몸에 대해 핵심적인 견해들을 피력하면서, 2차대전 중 전쟁에 참전한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멀리 떨어져있던 그의 어머니가 아주 고통스럽고 불쾌한 감각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현상과 같은 것이 몸의 실제적인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것들을 다 '본감각(gut feeling)'이라고 칭해볼 수 있다. 이것은 은유적으로 뇌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활동하는 '심장의 마음'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뇌의 마음'은 허구를 접수한다. 더 많은 허구를 끌어오게 함으로써 인간을 허구의 노예가 되게끔 만든다. 그러나 '심장의 마음'은 사실을 접촉한다. 사실로 허구를 붕괴시킴으로써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는 요한복음의 구절은 현대의 버전으로 "사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표현하면 적절하다.
마음은 없는 것이지만, 그 작용의 차원에서 있다고 굳이 말하려면 차라리 심장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우리에게는 아주 유익하다. 심리학은 '심장학'이 되어도 나쁘지 않다. 물론 이것은 해부학적 담론이 아니다. 은유로서의 심장은 결국 우리의 약동하는 가슴에 대한 것이며, 우리의 사랑(heart)에 대한 것이다.
스즈키 선사는 선(禪)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한다.
"선은 느낌이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적을 수 있다.
"사랑은 느낌이다."
느끼는 일이 곧 사랑의 활동적 표현인 경청이고, 공감이며, 수용이다. 심리상담의 모든 기제는 따로 작업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느끼는 일 속에 자연스럽게 다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활동은 다시 또 감옥에 갇힌다. 사랑을 느끼면 뭐하는가? 뇌는 사랑 또한 자신이 지배할 소재로 삼는다. 이것은 이러하다. 어떠한 이들은 느낌을 통해 얻어낸 '정보'를 자기의 뇌를 만족시킬 요리재료로 쓴다. "아하! 이런 거구나!"라며 무엇인가를 아는 현자로서의 자기 가치를 드높인다. 이들이 애정하는 것은 뇌뿐이다. 일편단심의 지고한 애정이다. 왜 이러한가?
뇌. 폐.하.께.서.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주.고. 계.시.는. 것. 같.기. 때.문.이.다. 뇌의 힘이 강화되어야 세상사는 모든 일이 그 힘으로 안전해질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된다. 때문에 뇌의 노예가 되어 '뇌 절대왕정' 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유지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윤리적이다. 윤리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생존을 지켜줄 뇌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일은 윤리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윤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위가 된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 당위가 바로 감옥이다. 스스로 만들어 그 안에 자신을 가둔 뒤 끝없는 욕구불만 속에서도 이것은 옳은 일이라며 덩치만을 키워가는 행위 속에 자유는 없다. 그러니 노예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할. 수. 없.어. 노.예.가. 된.다.
자신의 무엇을 신뢰하는 일이 필요한가? 몸이다. 생명체로서 우리가 가진 '본감각'이다. 우리가 몸을 생존의 문제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몸의 느낌을 '정보'로 받아 "음, 그래. 이렇게 하도록 하지."라며 우리가 은하함대의 유능한 천재사령관으로 몸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이. 우.리.를. 지.켜.준.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를. 향.한. 몸.의. 사.랑. 속.에. 있.다. 몸이 우리를 경청하고, 공감하며, 수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뇌의 마음'으로 살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이 세력을 오히려 지배하고자 한다. 연인을 가스라이팅하는 일, 이것은 최악이다. '뇌의 노예'는 그 최악으로 산다.
왜 연인을 가스라이팅하는가? 연인이 언제라도 자기를 떠날 것처럼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인을 신뢰하지 못한다. 신뢰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는 지배하려고 하게 된다. 노예는 왜 지배당하는가? 지배하고 싶어 지배당한다. 이 지배의 기제로만 사는 것이 노예다. 심지어 노예가 지배하고자 하는 그 연인은 바로 자신의 몸이다. 다시 한 번, 마르셀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몸이다."
표현 그대로, 노예는 자신이라고 하는 몸을 신뢰할 수 없어 그것을 지배하려고 한다. '자신의 지배자'가 '뇌의 노예'의 정확한 이름이다. 자신을 지배하고자 하는 이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게 된다. 그래야 세상을 안전하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뇌.의. 힘.을. 갖.추.는. 일, 이것이 바로 '자신의 지배자'의 궁극적 소망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지향은 우리의 '본감각' 속에는 없다. 우리의 '본감각'은 언제나 자유를 향해 감각한다.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노예의 변증법'이다. 그리고 자.유.롭.지. 않.을. 때.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이것은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역설이다.
지배란 무엇인가? '권위'다. 지배는 언제나 권위로 행한다. 가장 높은 권위에의 추구는 가장 강한 지배에의 의지다. 우리를 지배하고자 하는 권위 앞에서 우리는 안전감을 경험할 수 없다. 언제라도 그 권위에게 침범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권위를 기각하는 것이 바로 자유다. 대중에게 권위를 얻고 있는 연예인이나 SNS 인플루언서들을 떠올려보라. 미디어 속에서야 자유롭게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 자유롭게 움직이면 자신이 확보한 권위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늘 권.위. 안.에.서. 위.협.받.는.다.
몸이 가진 '본감각'이 자유를 향해 움직인다는 말은, 몸은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가장 안전한 상태를 향한다는 말과 같다. 자유의 반대편에 안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야. 안.전.하.다. 자유와 안전에 대한 착각은 하루 빨리 해지될수록 좋은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심장이 우리를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몸이 우리를 자유롭고 또 안전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감각(gut feeling)'을 정말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감각'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극의 끝없는 소비와 잉여적 힘의 축적을 멈추고, 노예가 경험하는 영원한 욕구불만의 감옥을 벗어나, 필요한 곳에 필요한 힘을 적확히 가용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위한 구체적 현실을 실현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사랑의 일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개념을 우리의 삶에 끌어와서 우리가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심장의 마음'으로 살아보자. 그것이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를 살리는 사랑은 우리의 몸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우리가 몸을 잘 아끼고 관리하며 몸에 대한 사랑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해오던 몸을 이제 우리가 맞이하는 것이다. 이 몸이 나라고, 바로 아는 것이다.
상담은 이 '사랑의 몸'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