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과 창조: 관찰에서 관심으로"
"누구도 스스로를 정신적인 감옥에 구금시킬 수 없다. 그들은 이미 갇혀 있다."
우리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이 말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중.독.은. 갇.혀. 있.는. 상.태.다. 중독(addiction)의 어원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노예가 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야 한다. 이것이 감옥에 갇힌 노예의 상태며, 이것이 바로 중독의 상태다.
중독은 아주 섬세하게 풀어낼 주제다. 읽다 보면 기분이 조금 상하거나 가슴이 아플 수도 있을 것이다. 화를 내며 반박하고도 싶어질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 것처럼 해맑은 미소를 띠며 딴청을 피울 수도 있다. 또는 자신은 이미 중독을 극복한 스승적 존재인 것처럼 맞장구를 칠 수도 있다. 중.독.의. 해.지.는. 유.사.죽.음.의. 과.정.과.도. 같.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묘사한 죽음의 5단계인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과정을 그대로 체험한다.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약중독에서 회복된 이들이 종종 인간승리의 본으로 존경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유사죽음이라면 대체 무엇이 죽는 것일까? 이 질문은 아주 유효하며 중요하다.
모든 중독에는 '주체'가 있다. 바로 그 주체가 중독의 해지와 함께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독은 현대병이 아니라 엄밀하게는 근대병이다. 근대를 이끌어간 인간의 특징적 면모가 바로 주체인 까닭이다.
주체라고 하는 개념을 아주 쉽게 풀어보자면, 자기는 세계로부터 독립되어, 세계로부터 크게 영향받지는 않으면서 반대로 자신의 영향력은 최대치로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이다. 술래잡기의 '깍두기' 같은 것이다. 근대는 이 주체개념을 통해 건설되었다. 데카르트를 떠올려보자. 세계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의심하는 자기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삼았다. 이처럼 주체는 그 태생부터 세계와 분리되었다. 세계와 분리됨으로써, 세계보다 높을 수 있는 '특급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주체개념은 근대의 완성자라고 평가받는 헤겔에게서도 변주된다. 물론 헤겔은 데카르트처럼 '창문 밖으로 세계를 들여다보는' 탈동일시적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헤겔의 주체개념은 오히려 '세계에 참여하는 주동자'다. 세계와 상호작용하려는 주체의 의지로 말미암아, 세계는 꽃피어나며, 주체는 함께 풍요로워진다. 주체와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변증법적으로 서로를 끌어 올리며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변증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역사변증법은 서구 중세유럽의 연금술적 사유에서 비롯하였으며, 헤겔뿐만 아니라 융과 마르크스가 이어받은 전통이다. 대극의 합일 내지 통합을 말하는 사조라면 거의 이 영향권 아래 있다고 보면 얼추 정확하다.
이것은 '주체의 사조'다. 이 주체의 사조는 사실 중세의 연금술보다 더 오랜 기원을 갖고 있다. 그것은 고대 인도의 잔재다.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르는 자아 개념이 바로 이 주체의 원형이다. 융이 말하는 대문자 셀프(Self)는 이 아트만을 지칭한다.
재미있는 것은, 헤겔적 주체개념을 소비하는 이들이 데카르트적 주체개념을 소비하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변별되고자 한다는 점이다. 자기들은 세계를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세계 위에서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게 그 권위를 내려놓은 뒤 세계에 들어가 함께 상생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기들의 주체개념은 과잉된 자아중심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아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데카르트의 주체개념이든 헤겔의 주체개념이든 동일한 아트만이다. 세계와 상호작용한다고 아트만이 아닌 것이 아니다. 핵.심.은. 주.동.성.이.다. 주동성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시.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변화는 자기가 움직여야만 가능하다. 주동성은 언제나 이 '소영웅주의'의 특성이다.
준독립적인 주동성에 의해 주체는 자.기.가. 영.향.받.고. 싶.을. 때.만. 영.향.받.는.다. 그러니 주체는 늘 화가 난다. 지금 영향받고 싶지 않은데 영향받는 현실은 '잘못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칠 때만 영향받아야 하는데, 뻔히 돌아보며 관찰하고 있는데도 이 망할 세계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주체는 이것을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주체는 이러한 '개념없는 대상들의 운동'까지 모두 통제할 수 있는 통합적 체계를 구성하려고 한다.
이로 인해 주체의 실천적 표현은 언제나 '지배'가 된다. 민주적으로 치세를 이룬다는 식의 고귀한 언어로 미화해도 그 본질이 지배인 것은 불가피하다. 주체는 '권위'에 입각해 대상들을 지배하는데, 이처럼 주체가 권위를 확보하게 해주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대상을 관찰할 수 있는 주체의 탈동일시적 메타인지의 힘이며, 두 번째는 대상에게 태평성대를 이루어주고자 하는 주체의 친절한 태도다.
주체의 일상적 이름은 바로 '주인'이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다. 그러나 통속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여기에서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주.인.은. 아.주. 상.냥.하.다. 진심으로 노예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노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주인은 여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주인개념을 가부장제의 가장이나, SM 관계에서의 마스터, 그리고 고전적인 '왕'으로 이해하면 더욱 쉽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히틀러는 아주 자상한 주인이었다. 그는 근대의 주체개념을 그대로 체화한 듯한 인물이다. 히틀러는 진정을 다해 자신의 사랑스러운 노예들인 독일국민들을 위해 몸을 바쳤다. 독일국민들이 경험하던 비극적 현실에 공감하며 '이 약하고 안쓰러운 아이들을 내가 온전하게 지켜주리라.'라고 충정으로 다짐한 주인 중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근대의 주체개념이 얼마나 큰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지를 폭로하며 이를 해체하고자 한 선두에 실존주의가 서있었다. 모든 현대적 사조는 실존주의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 아이만을 지키고자 남의 아이들은 잔혹하게 학살하던 귀자모신의 정체성을, 즉 악한 부모의 정체성을 해체하려던 기획이었다. '주인-노예'의 관계는 '부모-자식'의 관계다. '약한 아이'와 '악한 부모'가 이루는 구조다.
이렇게 보자면, '주체'라고 하는 개념은 결국 세.계.의. 부.모.노.릇.을. 하.려.는. 자.아.정.체.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아정체성은 자신만은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주체는 자.기.만.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주.인.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주인으로 행세할수록 더욱더 그 자신이 노예가 되고야 만다는 사실은 헤겔에 의해 진술되었다.
당연한 말이다. 주인은 노예를 유능하게 관리해야만 한다. 그래야 주인의 덕목을 다하는 것이다. 노예에게 의존함으로써만이 그는 주인이다. 그러니 그 자신의 삶을 살 수가 없다. 노예를 예속하는 주인은 역으로 그 자신이 노예에게 예속된 또 다른 노예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주인과 노예의 구조를 포기하고, 서로가 준독립적인 상호주체로서 공동체를 이루어 상생하는 변증법적 과정에 들어서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믿는 이들은 아주 많지만, 이 믿음은 주체에 대한 신앙의 유지일 뿐이다.
주체가 채택하고 있는 변증법이라는 구조 자체를 살펴보자. 언제나 대상이 필요하다. 대상을 통해서만 성장과 발전이 가능하다고 전제된다. 이처럼 주체에게는 그것이 노예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대상이 대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주체는 언제나 '주체-대상'의 관계로만 존재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주.체.는. 대.상.의. 노.예.다.
즉, 주체는 '대상중독'이다. 이 '대상중독'은 동시에 '주체중독'이며, 바로 '관계중독'이다.
그래서 결국 주.체.는. 관.계.의. 노.예.다.
앞서 모든 중독에는 '주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모든 중독에는 반드시 '관계'가 있다. '관계중독'은 중독의 원형이다. 상담은 관계를 잘 하는 법을 다루는 일이 아니라, 관계중독에서 벗어나는 법을 다루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관계가 다 '주인-노예'의 관계이고, '부모-자식'의 관계이며, 곧 '주체-대상'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일에는 현기증이 동반될 수 있다. 공황의 증세다. 붓다는 황망하게 주저앉았다. 세상 천지를 다 보아도 전부 노예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그는 맹세했다.
"모든 인간이 노예의 운명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나는 모든 것을 걸리라."
기독교가 한국으로 전파되면서 유교주의와 결합되어 '하늘부모에 대한 윤리'와 비슷한 것으로 변성되었기에 크게 강조되지는 않지만, 예수는 분명하게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떠날 것을 권유했다. 그 핵심은 사람들 자신과 그들의 부모를 동시에 '주체-대상'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주술과 변별될 수 있는 고등종교의 성립은 원래 노예상태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려는 기획에서 출발하였다. 심리상담은 이러한 종교적 맥락 위에서 작동한다.
거의 모든 고등종교가 가장 해체하고자 했던 우상숭배라고 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바로 '중독'이다. '대상중독'이고, 그 결과로 경험되는 '주체중독'이며, 결국 그러한 '관계중독'이다.
'관계가 만드는 노예화로부터 벗어나 개인이 자유롭게 실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종교의 목표이자 동시에 상담의 목표다. 주체, 아트만, 주동성, 변증법, '좋은 주인' 등으로는 이 목표를 절대로 이룰 수 없다. 이것들은 '자극재'이기 때문이다.
중독에는 자극이 있기에 중독이 된다. 중.독.재.는. 자.극.재.다. 그리고 '관계'는 강렬한 자극재를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는 장치다. 어떠한 관계의 대상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자. 그 기억이 아주 유쾌해도 자극이고, 아주 불쾌해도 자극이다. 우리가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불쾌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강렬한 자극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극을 잊을 수 없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쾌한 자극뿐만이 아니라 불쾌한 자극에도 중독된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자극에는 원래 유쾌감과 불쾌감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자.극.의. 속.성.이. 아.니.라. 자.극.의. 강.도.다. 강렬한 자극을 한번 맛본 이는 이제 평소의 상태가 냉담하게 경험된다. 더욱 큰 자극을 얻어야만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것처럼 경험할 수 있다. 이처럼 자극의 강도만이 모든 중독의 이유가 된다.
조금 심심하다 싶으면 부부 및 애인들이, 또는 부모와 자식들이 싸우는 이유 또한 이와 같다. 현재의 갈등상황에 기억까지 끌어와 그들은 '신들의 전쟁'을 펼친다. 국지전에서 점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 우주전쟁으로까지 그 양상은 심화된다. 서로가 오직 더 강렬한 자극을 소비하기 위해 그들은 사실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곧 주체가 하는 일이다. '주체'라고 하는 것에는 정말로 답이 없다. 주.체.못.할. 일.들.만. 파.국.처.럼. 찾.아.든.다. 중독의 끝은 무엇인가? 파.멸.이.다. 주체는 2차 세계대전의 전례처럼 반드시 파멸을 향해서만 달려간다. 왜인가? 이것은 아주 놀라우면서도 당연하다. 모든 강렬한 자극을 다 섭식한 주체에게 있어 결국 최후로 남은 가장 강렬한 자극이란 바로 '죽음'인 까닭이다!
심리상담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거창한가?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 일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우리가 빨리 죽으라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던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우.리.가. 정.말.로. 살.기.를 바랐기에 죽음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미. 죽.어. 있.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과 롤로 메이와 같은 실존상담자들은 중독으로부터 생명을 살려내는 이 일의 핵심적인 기제를 바로 '자유'라고 말한다.
"F는 S와 R 사이에 있다."
이 말은 자극(Stimulus)과 반응(Response) 사이를 끊는 것이 자유(Freedom)라는 뜻이다.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자.유.를. 집.행.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는 주체가 집행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의 '근대적 자유의지'에 대한 착각이 기각될 때 우리는 정말로 자유를 집행할 수 있다.
우리는 주동자인가? 세계는 우리가 화려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상시 준비되어 있는 무대인가? 우리가 시동을 걸어야 무엇인가 제대로 된 일들이 돌아가기 시작하는가? 우리가 이제 '진정한 나의 길'을 걸어갈 모습을 세계는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는가?
주체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엄마의 품속에서 대장처럼 위세를 부리는 어린아이의 몸짓이다. 이처럼 엄.마.가. 있.어.야.만. 성.립.되.는. 자.유.란 정말로 자유인가?
실존주의는 자기가 아이인 척하는 낭만적 망상 속에 사로잡혀 있던 이 주체를 세계로 던져 넣었다. 현미경을 보며 꼬마천재 관찰자처럼 행위하던 주체를 샬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세계와 단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으며, 애초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실감하도록 하였다. 세계와 독립적으로 분리된 입장에서 세계에 친절한 태도를 취함으로써만이 성립될 수 있었던 '주체의 권위'를 원천적으로 박살낸 것이다.
이것을 일본의 선(禪) 연구자인 니시타니 케이지는 '자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것은 '이것 자체'이지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 자체'가 스스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지, 주체가 대상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는 이렇게 묘사될 수 없지만, 굳이 말해야 한다면 우리는 '하는' 입장이 아니라 '받는' 입장이다. '이것 자체'가 우리에게 다가오며, 주어지고, 일어난다. 이것을 '체험'이라고 말한다. '경험'과 '체험'의 차이는 무엇일까? 경험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고, 체험은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이다. 즉, 경험은 '주체'가 하는 것이고, 체험은 '자체'가 하는 것이다.
'주체의 경험'을 반복하며 누적해가는 것이 중독이다. 그래서 모든 중독은 다시 한 번 '경험중독'이다. 유사한 상황과 유사한 기억을 최대한 조건적으로 재현하여, 동일한 질감의, 그러나 강도는 더 높아진 경험을 우리는 되풀이한다. 그러나 체험은 이럴 수가 없다. 체험은 일회적이다. 우리의 인생이 한 번뿐인 것과 같다. 우리에게 체험되는 일분일초가 다 한 번뿐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이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이 일회적 시간을 창조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이다. 표현 그대로, 자유의 집행은 창조를 통해 이루어진다.
창.조.는. 중.독.을. 벗.어.날. 열.쇠.다.
중독에 대한 심리학적 문헌 중 마스터피스로 평가받는 제랄드 메이의 『중독과 은혜』에서는, 그 방향성을 갖지 못해 좌절된 개인의 종교적 지향이 결국 중독현상을 낳는다고 분석한다. 절대적인 것을 향한 소망이 상대적인 대상에게로 귀속된 것이다. 그러니 영영 이루어지지 않아, 중독재로서의 대상을 소비하면 할수록 오히려 갈증만 심해진다. 정확한 우상화의 현실이다.
종교적 지향은 언제나 창조로 정향된다. 창조하는 이는 중독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창조'라고 하는 말은 조금 어렵게 생각된다. 너무 거창해보인다. 늘 그렇다. 왜일까? 여기에 주체가 오랜 시간 동안 파놓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주체의 입장에서 창조란 자기 재능의 표현이다. 즉, 재능있는 자만이 창조할 수 있다. 창조라고 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놀라운 성과들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처럼 창조에 대해 드높은 이미지를 주체는 도처에 선전해놓았다. 창조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재능을 증명해보라고, 우리에게는 암묵적으로 요구된다. 요즘에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필히 검증받아야 한다. 그러니 '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창.조.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통.해.서.만. 허.락.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주체가 이렇게 악질이다.
그러나 창조는 이처럼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체.험. 자.체.가. 창.조.다.
창조와 우리는 분리되어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따로 창조라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창조라는 것은 언제나 창조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이며, 우리는 이미 참여되어 있다. 우리는 피조물인 까닭이다. 다시 한 번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묻고 있다.
그것이 사랑인가?
쾌락이 사랑인가?
쾌락은 기억의 움직임이다.
문장을 암기하지 마라, 다만 귀기울여 듣기만 하라.
흘러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면 즐겁지 않은가?
그 즐거움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 즐겁지 않은가?
그대가 지난밤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산 위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면 즐겁지 않은가?
커다란 기쁨 아닌가?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가?
그러나 생각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난 그걸 간직해야 해, 그걸 기억해야 해, 그걸 숭배해야 해, 그걸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 말썽이 시작된다.
그때 쾌락의 모든 움직임은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쾌락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려고 획책한다.
이것이 창조의 원형이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체.험.이. 창.조.의. 원.형.이.다.
창조는 '스스로를 즐기는 일'이다. 이것은 곧 '이것 자체'를 즐기는 일이다. 우리에게 다가오며, 주어지고, 일어나는 삶의 사태들에 감동받는 일이다. 이 엄청난 창조의 역사에, 이를테면 우리집 고양이가 창조되어 지금 내 옆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이 어머어마한 창조의 사건에, 커다란 행운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는 일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을 보고 "나는 왜 저러한 재능이 없지?"라며 우울해하는 일은 '주체'의 일이다. "감동. ㅜㅜ" 이것은 '자체'의 일이다. 실.은. 바.로. 이. 자.체.로. 있.는. 관.객.으.로. 인.해. 창.조.는. 완.성.된.다.
자, 이제 창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말해보자.
창조는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그것은 바로 '관심'이다. 관심의 고전적인 이름이 '사랑'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듯이 이러한 사랑은 쾌락이라는 이름의 자극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극.은. 사.랑.이. 아.니.다. 자극은 '중독된 뇌'의 섭식작용인 마음(mind)이 추구하며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또 들어보자.
"사랑은 마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마음을 관찰한다. '주체'의 일은 '관찰'이다. 정보를 얻어내 자신의 힘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내면을 관찰해도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은. 마.음.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밖.에.서. 우.리.를. 꼭. 끌.어.안.고. 있.다.
이것을 아는 일이 '관심'이다. '자체'의 일이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이 사랑 속에서 창조되었고, 그 사랑의 역사에 이미 참여되어 있다. 우리가 '이것 자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듯이,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이 바로 '이것 자체'다. 이것은 기독교적 은유만이 아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실제이며, 사랑의 존재론이다.
우리에게 펼쳐지는 그 자체의 일들에 대해, 우리가 관심으로 열려 있을 때, 우리 밖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던 사랑의 향기가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온다. 이. 향.기.를. 우.리.는. 자.유.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떠한 자유의 감각을 미세하게라도 체험할 때, 우리는 사랑이 이루는 창조의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말했듯이, 자극을 끊는 것이 자유다. 우리로 하여금 자극을 끊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창조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더 많은 자극을 소비해야만 우리가 창조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게끔 만든다. 그렇지 않다. 단순하게 창조에 동참하면 된다. 창조된 것들에 관심을 가지면 된다.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찰'은 노예에 대한 주인의 소유양식이며, '관심'은 그 자체의 존재양식이다. 이것을 행위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관찰'은 부단히 행위하는 것이고, '관심'은 행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관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종의 '감상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와 같은 감상행위는 오히려 전형적인 중독의 증세다.
이만한 정도까지 내용을 전개했으면 분명 당신에게서 이러한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 말은 반갑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잖는가. 이것은 주체의 유사죽음의 과정이라고.
어.떻.게. 하.는.지. 몰.라.야. 한.다. 이것은 절대로 말장난이 아니며, 당신을 골탕먹이기 위해 하는 도사연이 결코 아니다.
몰.라.야. 관.심.이. 작.동.한.다.
당.신.이. 사.랑.에. 대.해. 몰.라.야. 사.랑.이. 당.신.에.게.로. 들.어.온.다.
"됐어, 이런 거지 같은 책 그만 읽고 바람이나 쐬야지!"
당신은 이순간 중독의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며, 당신은 자유롭다. 집을 나서면서 당신이 체험하게 될 그 모든 것은, 당신 세계의 기적이다. 당신은 지금 가장 큰 창조의 역사 속으로 막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며, 그 모든 것은 다 당신을 위한 것이다.
당.신.은. 이.러.려.고. 태.어.난. 것.이.다.
당.신.은. 이.것. 자.체.다.
그 창조의 여정에 언제나 행복이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