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 낙원을 향한 꿈과 종교적 은유로서의 상담"
# 퇴행의 문제와 마리아의 시간
우리는 왜 퇴행하는가? 내담자들은 왜 퇴행하는가?
'퇴행(regression)'은 시계바늘을 붙잡고 버티며 시간을 멈추고자 하는 일과 같다. 이처럼 퇴행은 퇴.행.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부정한다는 것은 삶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퇴행자들은 삶을 가장 부정하려는 이들이다.
그래서 퇴행이 문제가 된다. 실존상담의 핵심은 '삶'이다. 이것은 '시간'을 다루는 일이다.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그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이며, 이는 개인이 '그 자신의 시간'을 다시 찾는다는 말과 같다. '모모'는 시간도둑들에게 약탈당한 사람들의 시간을 되찾아오는 동시에, 사람들이 가진 삶의 의미를 그들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상징이다.
정신분석의 교과서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실제의 교과서보다 더 효과적으로 정신분석적인 핵심을 보여주고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 제목부터가 훌륭하다. 이것은 기억을 현재의 감각으로 상기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영원성의 현실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정확하게 '해석학적 소설'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실존'이 만나 '미래의 낙원'을 구성해가는 그 과정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아주 섬세히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퇴행이 아니다.
퇴행은 과거에의 고착이다. 과거에 의해 실존이 철저하게 소외될 때 퇴행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왜 과거에 고착되는가? 과.거.에. 의.존.함.으.로.써. 과.거.로.부.터. 힘.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실존상담이 프루스트와 정신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실존상담은 근본적으로 과.거.에. 의.존.해. 서.있.지. 않.은. 인.간.을 그리고 있는 까닭이다. 모든 상담이 해석학적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실존상담이 여기에서 조금 비켜 서있는 이유 또한 이와 같다. 선(禪)을 해석학이라고 말하기 어렵듯이 실존상담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함의를 쉽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존재는 역사적이지 않다."
선불교가 윤리주의자들로부터 곧잘 비판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가 없으면 윤리의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에, 비역사적인 선불교는 비윤리적이라고 이들에게는 평가된다. 대체로 실존상담도 동일한 비판에 직면된다.
"그 어떤 본질적 구조도 없고, 아무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선하게 살아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선불교와 실존상담은 이러한 질문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오, 이것은 중요하다. 불.안.에. 대.한. 자.구.책.으.로. 인.간.이. 더.욱. 의.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기.억.이라는 사실이 이제 우리에게는 명백해진다.
조금 거칠게 정신분석과 실존상담의 핵심적인 차이를 말해보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 정신분석: "우리가 쌓아온 과거와 그 기억의 힘으로 우리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
- 실존상담: "응, 아냐. 그냥 불안하도록 하자."
왜 실존상담이 이렇게 '악마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냐면, 실존상담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상기한 예들을 다시 이렇게 표현해보자.
- 정신분석: "우리가 쌓아온 과거와 그 기억의 힘으로 우리는 자유를 억제할 수 있다."
- 실존상담: "응, 아냐. 자유는 억제할 수 없거든. 그냥 최대치로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누려보자."
실존상담의 입장에서 '불안'과 '자유'는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불안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또한 표현 그대로 자유다. 존재는 이처럼 동사적이다. 이 '존재의 동사성'을 다시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두둥, 효과음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말해야 한다.
'불안'은 '자유'이고, 이는 '시간'의 향기다.
우.리.가. 불.안.할. 때.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을 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자유가 체험된다. 그리고 이 자유는 그대로 우리의 힘이 된다. 실존상담의 입장에서 개인이 힘을 담보할 수 있게 해주는 소재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자유다. 이러한 힘은 무조건적이다. 한 개인이 어떻게 살아온 사람이며, 또 무슨 일을 해온 사람인지, 그 모든 것과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집행되는 힘이다.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현실'에 대한 묘사다. 실존상담이 해석학이지만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종교적 현실은 해석학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적 수동성의 성질과 관계된 것이다.
문학과 종교의 차이는 무엇일까? 둘 다 어떠한 영원성의 감각에 대한 지향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문학은 인간의 언어적 노력을 통해 그 영원성의 감각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반면에, 종교는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도 무관하게 영원성의 감각은 스스로 찾아온다고 가정한다는 점에 있다. 그 어떤 종교성 및 영성의 소재라도 자신의 '언어적 노력'을 통해 그것에 1%라도 접근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이는 단지 100%의 문학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신(神)'이라는 단어를 통해 비유하자면, 문.학.은. 언.어.를. 통.해. 신.을. 초.대.하.는. 일.에. 가.깝.다. 신께서 기뻐하실 가장 아름다운 저녁식탁을 언어라는 특급의 요리사에게 준비하게 한 다음 신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아무 것도 없는 거지가, 아무 것도 없으니 바로 그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을 신에게 내어드리는 일에 가깝다. 그러면 신께서는 전설적인 명쉐프들의 최고급 출장뷔페를 대동하고 거지의 집을 방문하신다.
이것은 성경에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예로 묘사된다. 마르타는 요리를 하는 재능이 있어 그 재능으로 예수를 대접하고자 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저 예수 옆에서 예수가 하는 말씀을 듣고만 있었다. 일을 하지 않는 마리아의 한심하고 무능력한 모습에 마르타가 화를 내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마리아는 지금 나를 가장 귀하게 대접하고 있다."
아무 것도 없던 마리아가 다만 그녀 자신만을 예수에게 고이 내어드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것은 가장 온전한 '마리아의 시간'이다. 퇴행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마.리.아.의. 시.간.을. 살.지. 않.으.려.고. 해.서. 생.겨.난.다.
자신이 무능력하고, 가진 것이 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될 때 체험되는 불안은, 이 마리아의 시간을 암시한다. 불.안.의. 시.간.은. 마.리.아.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 마리아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유일한 시간이다.
정신분석이 '나쁜 기억'을 '온전한 기억'으로 자신의 언어를 통해 회복함으로써 그 '기억의 힘'으로 퇴행을 극복하고 미래를 열어가고자 한다면, 실존상담은 현재의 자신을 포기(surrender)함으로써 그 '존재의 힘'으로 퇴행을 기각하고 미래로 열리고자 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마르타적인 것'과 '마리아적인 것'의 차이다. 이 차이는 삶을 자신의 능력만큼만 제한적으로 사랑하려 하는가, 혹은 무조건적으로 더 크게 사랑하려 하는가의 그 차이와 같다.
이렇게 보자면 퇴.행.은. 결.국. 삶.에. 대.한. 더. 큰. 사.랑.의. 좌.절.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상적 낙원을 꿈꾸는 이들: 고독과 고집의 문제
좌절은 삶이 막힌 것이다. 삶이 막혔다는 것은 미래가 막힌 것이다. 미래가 없는 상태, 이것을 우리는 지옥이라고 부른다. 해봤자 미래가 없으니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다. 이것이 절망이다.
좌절된 이들은 절망 속에 있다. 아마도 절망 속에서 고독을 느낄지 모른다. 세상에 자기 혼자인 것만 같다. 자신을 이해해주며 그 편을 들어줄 이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세상살이가 더 두렵게 느껴지며 현기증이 난다. 너무나 외로워서 아무하고나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며 밤하늘에 소리없는 절규를 토해내기도 한다.
이러한 이들이 꿈꾸는 것은 '낙원'이다. 아주 이상적인 낙원이다. 남들과 다른 자기의 개성으로 인해 생겨난 깊은 슬픔과 커다란 아픔을 이해해주고 또 받아줄 따듯한 품과 같은 곳이다. 이처럼 고독한 이들이 이상적 낙원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이들은 왜 고독해졌는가? "그동안 참 많이 외로웠겠구나."라며 무엇인가를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한 눈빛을 보내기 전에 제발 한번이라도 물어야 한다. 이들은 대체 왜 고독해졌는가?
낙.원.을. 찾.는. 이.들.은 고.집.을. 부.리.고. 있.어. 고.독.해.졌.다. 이들이 고독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착각이다. 그 반대다. 고집스러운 이들이 그 고집으로 인해 고독해진다. 그리고는 자신은 왜 우주에서 혼자냐며 화를 낸다. 스스로 만들어낸 고독에 대해 남들에게 분노한다. 고집에서 고독으로 그리고 분노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전형적이다. 일종의 장르공식이다.
외로워서 자기가 받아질 곳을 찾아 헤맨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고집이 받아질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낙원'이라는 것은 결국 이들이 고집대로 살아도 되는 곳이다. "역시 내가 대장이고 내가 옳았어!"라며 이들의 고집이 실현될 곳이다. 이들은 이러한 '이상적 낙원'에 대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갖고 있다. 그 이미지는 현실에서 이들의 고집이 좌절될수록 더 커진다. 엄마아빠가 아이의 고집을 안들어줄수록, 그 아이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진짜 엄마아빠'의 이미지를 꿈꾸게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방식으로 희구되는 것이 낙원이다. 아주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개념이다. 복고적인 것에 대한 향수는 이 개념의 표현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마치 천사들이 뛰어놀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처럼 개념화하고, 근대사의 어떤 시절이 마치 잘 살지는 못했어도 그만큼 사람들의 따듯한 인정이 넘치던 시절이었던 것처럼 개념화하는 일은, 이 '낙원'이라고 하는 개념이 '과거퇴행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의로운 철가면의 용사와, 인자한 노마법사와, 상냥하고 섹시한 여승려가 낭만적인 모험을 하던 그 중세의 시절은 대체 어떤 시절이었던가? 흑사병으로 인류의 절반이 짐짝처럼 죽어 널브러지던 시절이었다. 과.거.퇴.행.은. 과.거.미.화.다. 과거에 대한 '편집증'이다.
사.실.은. 있.지.도.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 증세는 그래서 '망상'이 된다. 이러한 망상으로 인해 고집이 생겨난다. 아주 쉽게, 자.기.의. 망.상.대.로. 삶.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 고.집.이.다. 왜 이와 같은 망상의 고집을 부리게 되었는가? 삶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망상으로 삶을 해결하고자 고집스러워진 것이다. 고집을 부리니 고독이 생겨나고, 그러니 더 삶이 막히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더 고집스러워진다. 이것은 '고집의 악순환'이다. 고집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고집이다. 고집이 더 큰 고집으로 악화되는 것뿐이다.
붓다가 집착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고집이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어떠한 대상이 있는 것이 실은 아니다. 우.리.는. 집.착.하.는. 일. 자.체.에. 집.착.한.다. 집착에는 모종의 가슴아픈 사연 같은 것은 없다. 어렸을 때 불행했기에 고집을 부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고.집.을. 부.린.다. 똑똑한 자기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린다.
그래서 퇴행의 방향성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제일 똑똑하게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 달성되던 특정한 장면이다. 이를테면 초등학생들 앞에서 심리학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기가 초등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지성적 우월성을 만족스럽게 경험한 이라면, 그는 자기의 삶이 막혔을 때, 이러한 조건을 찾아 퇴행해간다. 또는 엄마아빠 앞에서 유일하게 똑똑하다는 칭찬을 들은 이라면, 그 퇴행의 방향성은 엄마아빠나 그 대리물을 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해진다. 이상적 낙원을 꿈꾸는 이들이 경험하는 '외로움'이란 단지 '자기가 똑똑할 조건의 결핍'의 호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이들은 외로움이라는 것이 사실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른.다. 외로운 것이 아니라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답답하고 자꾸 짜증이 나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똑똑한 자기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바로 그 집착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집.착.하.기.에. 집.착.해.야. 한.다. 왜 그럴까?
아, 이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다. 이들이 자기의 똑똑함을 경험하던 그 순간, 그 똑똑함의 조건은 어떻게 달성되었을까? 바로 이.들.의. 고.집.으.로. 인.해. 달.성.되.었.다. 그러니까 이들이 정말로 똑똑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그래 너 똑똑해."라며 어떤 선량한 이가 '똑똑함'이라고 하는 동전을 적선하고 간 것이다. 붓다의 말은 옳다. 이들이 집착하는 일 자체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이들 자신에게 있어 똑똑함의 조건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고집이 너를 똑똑하게 하리라."
이들에게는 새로운 계명이 주어진다. 이들의 '낙원'으로부터 온 계시다. "과거의 자신은 똑똑했는데 지금은 똑똑하지 않은 것 같애. 그래서 외로워. ㅜㅜ"라고 말하던 이들에게 이 계시는 신성하다. 기억이 편집적으로 상기된다. 과거 자신의 고집 때문에 생겨난 그 모든 고통의 장면은 거세된 채 가장 미화된 기억만이 이들에게 찾아든다. 즉, 이들에게 있지 않았던 가상의 과거가 낙원의 모습으로 이들의 머릿속에 새겨진다.
"초등학생들에게 좋은 심리학 이론을 말해주며, 그 아이들을 행복하고 안전하게 지켜주던 그 시절을 잊을 수 없어.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야."
이것이 이들에게 있어 '막힌 삶'에 대한 돌파구다! 순수한 아이들을 가스라이팅하며 고통을 창조하던 그 사실적 상황은 완벽하게 미화된 채, 자신은 '불쌍한 아이들의 구원자'라는 고집만이 남는다. 이처럼 고집을 통해 또 한 번 삶이 극복된 것만 같다. 이것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 낙원에 집착하며 표류하던 이가 어떻게 '낙원의 창조자'로 그 모습을 바꾸어 가는가에 대한 그 착각의 과정이다.
# 받아들이는 일과 '받아들이는 자'가 되는 일
이상적 낙원에 대한 고집을 실현하기 위해, 또 그러한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모습을 예로 풀어보자.
어떠한 이들이 세상에 자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독감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고향'의 실재를 꿈꾼다. 이들은 고향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돈다. 제주도로, 망리단길로, 또 어딘가의 미개발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나의 일상적 서민촌에 이들이 도착해 시도하는 일은, 자신들의 빛나는 재능을 유감없이 펼쳐내는 것이다. 동시에 그 빛나는 재능을 지지해주고 자연스럽게 그 재능과 어우러질 서민의 따듯한 정을 마을에 기대하는 것이다. 골목의 한쪽에는 옛주택에서 할머니가 나와 집앞을 쓸고 있고 다른 반대쪽에는 모던하고 힙한 가게에서 시크한 젊은 사장이 나와 할머니에게 구수하게 인사를 건네며 너스레를 떤다. 그 사이로 동네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골목길을 달려나간다. 담벼락 위로 늘어져 골목을 감싸안는 목련꽃이 이 모든 광경을 은은한 향기로 증언한다.
이것이 낙원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상적 낙원이란 이런 것이다.
마을의 실제적 입장은 어떠한가? 돌연히 찾아온 침입의 감각뿐이 아니라, 마을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 이미지를 미묘하게 강요당하기까지 한다. 폭력의 냄새다. 반갑지 않다. 그래서 반갑게 대하기가 어렵다. 자꾸 사람들 좀 이 앞에서 담배피지 못하게 하라고, 작은 소재라도 잡아 시비거리를 만든다.
낙원의 개척자들의 입장에서는 섭섭하고 마음이 상한다. 자신들은 아름다운 낙원을 함께 만들기 위해 이 미개척의 영토를 찾아왔는데, 토착민들은 그런 진심을 몰라주고 공격적이기만 하다. 결국 이들은 많이 외로워진다. 세상에 이토록 자신을 받아줄 곳이 없는지를 회의하며 가슴아파한다.
그러다가 이들은 불현듯 '아하(Aha!) 체험'을 한다. 세.상.에. 자.기.를. 받.아.줄. 낙.원.이. 없.다.면. 자.신.이. 누.군.가.를. 받.아.줄. 그. 낙.원.이. 되.자.고. 이들은 모종의 진리와 같은 것을 깨우친 듯한 상태에 이른다. 자구책이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일'과 '받아들이는 자가 되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러한 이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것이며, 그 고집의 궁극적 형태가 결국 '받아들이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것보다 높은 위상을 점하게 된다. 도덕적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도덕적 승리의 양식을 통해, 틀린 것은 세상이지 자기의 고집은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삶을 받아들이는 자로서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일, 그리고 그 소비주체인 스스로를 낙원과 등치하는 일, 이것이 바로 자기우상화다. 이상적 낙원을 찾던 표류자들이 그 퇴행의 여정 끝에 당도하게 되는 최후의 목적지는 대개 이 우상화의 상태다. 자신이 신처럼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이것은 아직 이 여정의 끝은 아닌데, 사실 이들이 진짜 최후로 도착하게 되는 자리는 바로 화다. 다시금 화다. 고집과 고독 그리고 화의 과정은 오히려 이 '받아들이는 자'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공식화된다.
# 고집부리는 상담자
상담자는 '받아들이는 자'인가? 그렇다고 말하는 접근들도 있다. 이러한 주장의 접근을 채택했던 다수의 상담자들이, 우울증으로 자살하거나, 자가면역질환에 걸리거나, 고도의 가스라이터가 되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다 '화병'에 치여 고생하다가 인생을 마감했다.
유사심리학으로 활동하는 유사상담자들이 특히 이 '받아들이는 자'로서의 상담자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사이비와 사기꾼들이 친절하게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어야, 그들의 활동의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사업논리'적으로도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유사심리학계의 거의 모든 이가 존경하는 대가가 있다. 심리학 학위를 취득하고 수련경험을 쌓아 정식으로 심리상담자가 된 많은 이들은 이 인물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리고 사실 알 필요도 없지만, 유사상담자들에게는 상담자 중의 상담자로서 지극하게 숭상되는 한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밀턴 에릭슨이다.
조금 섬세하게 말하자면, 밀턴 에릭슨이라는 인물 자체를 우리가 사이비이자 사기꾼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다만 우리는 유사심리학의 종사자들이 왜 밀턴 에릭슨을 자기들의 교조처럼 보게 되었는가의 바로 그 현실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할 뿐이다. 그 현실은 일종의 환상에 의해 세워진 가상현실이기 때문이다.
유사상담자들이 밀턴 에릭슨을 추앙할 때 그 핵심으로 말하는 내용은 이러하다.
"언어를 통해 삶을 생각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
밀턴 에릭슨이 바로 천재적 언어활용자로서 이 가능성을 실증해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각각의 내담자를 다 긍정하는 친절한 언어를 '비지시적 방법'으로 실천함으로써, 결코 내담자를 강압하거나 지배적 권위를 행사하지 않으면서도, 내담자가 자발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끈 '진정한 부드러움의 권위자'라는 것이 그 추종자들의 평이다. 말만 들으면 황희정승이며, 실제로 밀턴 에릭슨은 서구의 황희정승이라고 평할 만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가.장. 높.은. 권.위.를. 획.득.해. 모.든. 것.을. 은.밀.하.게. 지.배.하.고.자. 하.는. 이 표상을 중심으로 삼아, 최면과 NLP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밀턴 에릭슨은 발달장애를 앓았으며 난독과 색맹의 취약성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7세 때 소아마비를 크게 겪게 되면서 그는 의사에게 죽음을 선고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자기최면의 언어를 통해 밀턴 에릭슨은 자기의 마비된 신체를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동일한 방법으로 몸에 계속 '시련의 과업'을 부여해 훈련시킴으로써 그는 결국 몸을 조금씩 더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밀턴 에릭슨의 이 개인사는 '언어로 몸을 통제한' 성공적인 사례로 그 추종자들에게 지지되곤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의 특징들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밀턴 에릭슨이 무력감에서 비롯한 아주 큰 화를 경험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밀턴 에릭슨을 추종하는 유사심리학의 종사자들이 밀턴 에릭슨만큼이나 자기 몸에 대한 열등감 및 미발달감을 경험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이것이 헤라클레스의 과업처럼 시련을 통해 자기통제를 이루어가는 소영웅주의의 방법론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몸이 무력감의 소재가 되어 있는 이들이, 몸 대신에 자기의 지적 능력에 힘입어, 몸을 극복하고 무력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몸은 계속 시련에 빠져야 하며, '온전한 기억'을 길어내는 마음의 유전처럼 착취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몸의 부위를 긍정하기 위해 대신 또 다른 몸의 부위를 괴롭히는 일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기.만.전.략.의. 반.작.용.은. 누.적.된.다. 그리고 쓰나미처럼 한 번에 찾아온다.
밀턴 에릭슨의 말년에 소아마비는 더욱 강하게 재발되었다. 더 큰 고통과 더 심대한 마비의 형태로 그것은 찾아왔다. 그는 평생 자신이 시도한 방식으로 유능한 언어전략을 활용해 "이것도 온전하구나."를 반복하며 이 두 번째의 소아마비를 해결해보려 했지만, 더는 유용하지 않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휠체어를 탄 채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그렇다면 언어는 몸이라고 하는 삶에 승리했는가? 이것은 정말로 가능한 기획이었는가?
우리는 자기계발분야에 대해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성공담으로 남의 인생을 망친다."
언어와 삶을 대립구도로 놓고, 나아가서는 언어와 삶의 변증법적인 구조를 구성한 뒤, 언어를 통해 삶을 양육하듯 유능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되는 이 방식은 정말로 성공적인 것인가?
밀턴 에릭슨의 실제적인 성공도 실은 이 언어전략에 있지 않았을 수 있다. 그의 사례들을 보면, 고집으로 인한 화가 자기 자신을 공격함으로써 신체화 장애를 겪게 된 이들에게, 그 화를 직간접적으로 대신 표출하게 함으로써 장애를 해소한 경우들이 아주 많다. 밀턴 에릭슨 자신도 동일한 이 과정을 경험했을 가능성은 높다. 그는 유사심리학의 종사자들이 그를 보는 그 방식으로 '언어의 전문가'가 아니라, 실은 '화의 전문가'였을 수 있다.
고집으로 인한 고독이 결국 화로 드러나는 과정을 다시 기억해보자. 고집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상태'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자신은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라는 자아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인 발달장애의 상태가 아무리 그가 책을 읽어도 그 이해가 어렵게 만들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독학을 하며 고집을 부린다.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공부를 억지로 지속함으로써 더 큰 무력감의 분노에 휩싸인다.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 그것은 자기의 현실적 상태, 즉 '자기의 몸'에 대한 거대한 증오가 된다.
'자폐'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자폐는 외계로부터의 커다란 화에 두려움을 느끼며 외계로부터 단절되고자 하는 것이다. 부모들이 크게 화를 내며 싸우는 경험 속에 빈번하게 노출된 어떤 아이는 자기의 방을 유일하게 안전한 곳으로 여기며 그 안에서 은든형 외톨이와 같은 자폐의 상태를 지속하곤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커다란 화가 그에게 들이닥친다면 그는 어디로 숨어야 할까? 바로 자기의 몸 안이다. 이 경우, 몸은 외계와 안전지대를 나누는 경계가 된다. 그러나 또 한 번, 더욱더 커다란 화가 자기의 몸 안에 틀어박힌 이에게 찾아온다면 이제 그는 정말로 어디로 가야 할까?
그.는. 의.식. 속.으.로. 숨.는.다. 의식만이 그의 안전지대가 된다. 여기에서 의식이라는 것은 바로 '언어작용'이다. 이러한 이는 언어만을 유일한 안전지대로 경험하며, 이제 그. 자.신.의. 몸.도. 그.를. 위.협.하.는. 외.계.가. 된.다. '몸의 외계화'는 대표적인 자가면역질환의 양상이다. 통계적으로 아주 유의미하게, 밀턴 에릭슨을 신처럼 추종하는 이들이 이 자가면역질환을 경험하는 빈도수가 높다.
자신의 화로 자신을 매섭게 공격하는 이는, 결국 자신을 스스로 우주의 미아로 만드는 셈이다. 자신의 몸도 그가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사실적 우주 어디에도 그가 안심하고 정착할 수 있는 낙원은 없는 것 같다. 그는 표류자다. 유일하게 그가 쉴 수 있는 아주 작은 안전지대란, 그가 생각하고, 남들 앞에서 똑똑한 척하며, 활발하게 언어작용을 펼칠 때뿐이다. 언어가 만들어낸 '추상적인 낙원' 속에서만 그는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경험한다.
이것이 어찌보면, 자신이 고향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표류해온 이들이 꿈꾸던 '이상적 낙원'의 전모다. 무엇이 그들을 실향민으로 만들었는가? 화다. 자.기. 자.신.의. 고.집.으.로. 인.한. 화.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로 인해 고독해져서 실향민의 상태를 경험한 뒤, 언어로 그 상태를 해결하는 듯이 행위함으로써 이제 고향을 찾게 된 것 같은 상태를 다시금 만들어내는 이 일은 정말로 상담인가? 자기가 자기 뺨을 때린 뒤 약을 발라주면 그것이 치유인가? 자기가 독한 말로 자신을 상처준 다음 상냥한 말로 자신을 위로해주면 그것이 천재적 언어활용법인가?
이것은 야.쿠.자.들.이. 정.부.를. 조.교.할. 때. 쓰.는. 방.법.이.다. 고집스러운 유사상담자들은 이러한 야쿠자 조교법을 자기 자신에게 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 셀프가스라이팅인 셈이다. 나아가 이 셀프가스라이팅의 기술을 '마음을 온전하게 만드는 자기치유법'이라고 보급한다. 스스로의 몸에 병주고 약주는 '시련의 과업'을 반복하면 우리 자신이 연금술로 단련되어 황금이 될 수 있다고, 또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처럼 나중에 신이 되어 낙원에 들어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로 '미친 고집'이다. 미친 이는 상담을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상담을 받아야 한다. '이상적 낙원'에 대한 꿈이, 그 고집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고집부리는 상담자'로 사는 이는 반드시 "자기의 성공담으로 남의 인생을 망친다." 그가 유사상담활동을 멈추는 일이 실은 인류에게 정말로 공헌할 수 있는 방식이다. 자기의 퇴행으로 인류의 퇴행을 유발할 정당성이란 이 사실적 우주 어디에도 없다.
# 자아의 무력감과 자유의 양육
우리가 무력감을 경험하는 이유는 자유롭지 못해서가 아니다. 자유를 제한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력감을 경험한다. 자.유.의. 제.한.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이를 다시 말하면, 자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의 언어의 요람 속에서만 자유를 허락하고자 한다.
앞서 예로 든 밀턴 에릭슨은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그 자신의 언어적 능력으로 손에 넣고자 했다. 그 언어적 능력을 통해서만 그것은 자유다. 그러니 언제나 언어 밖으로 날아가려고 하는 존재의 속성인 자유와, 자유를 포섭하려는 언어는 늘 투쟁관계에 놓이게 된다. 언어는 존재의 사냥꾼으로 화한다.
이런 삶은 그냥 힘든 삶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와 싸우는 나날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느낄 지옥의 시간들이다.
왜 이토록 언어는 존재의 자유를 악착같이 새장 속에 가두려고 투쟁을 펼치는 것일까? 여기에는 자아의 문제가 있다. 자.아.는. 자.유.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자유롭기를 바라면서도, 자유를 증오한다. 자유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언어 밖에 있다는 말은, 자유가 자아 밖에 있다는 말이다. 자아는 '언어덩어리'라서다. 그러니 자아가 자유를 탐낼 때, 그것은 언제나 자기붕괴의 위협에 노출되는 일과 같다. 자아는 자기가 100%로 자유롭게 되면, 자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자아는 언어를 통해 자유를 제한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자아의 언어활동에 의한 '자유의 양육'이다.
자.유.를. 양.육.한.다.는. 이. 미.친. 일.을. 자.아.는. 언.제.나. 기.어.코. 시.도.한.다. 유치한 비유를 들자면, 이것은 티라노사우루스를 갓 태어난 병아리가 양육하고자 하는 일과 동일한 것이다. 이 양육이 성공하게 된 그림이 바로 낙원의 그림이다. "우쭈쭈 우리 애기 이뻐요."라며 병아리가 티라노사우루스를 쓰다듬는 이 일이 일어나야, 낙원의 표류자들은 자신이 비로소 낙원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어려울 때 병아리는 좌절하고 낙담한다. 깊은 무력감에 빠진다. 자신이 성공적으로 티라노사우루스를 양육할 수 없었음에 자책하며, 모든 것이 온전했던 그 시절, 바로 알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것이 퇴행이다.
대체 왜 이러니, 밀턴 삐약아. 티라노사우루스에게 그 어떤 '권위'와 '권능'도 행사할 수 없는 자기 몸에 대한 증오 속에서 병아리는 잠들어간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한순간에 병아리는 깨어난다.
"아아! 내가 지금까지 티라노사우루스를 못살게 굴었구나! 티라노사우루스를 온전하게 받아주지 않고, 그 녀석을 통제하려고만 해서 티라노사우루스가 내 권위에 저항했던 거였어. 저기 멀리 조선땅의 황희정승님처럼 티라노사우루스가 자유로울 수 있도록 그 자유를 인정해줬어야만 했는데! 그렇게 타자의 자유를 허락하는 '진정한 권위'를 행사했어야만 했는데!"
삐약이가 캡틴 삐약이로 용맹하게 일어선다. 불사조처럼 부활한 것이다. 이제 알았다. 이제 진리가 무엇인지를 체험했다. 모.든. 것.이. 자.유.롭.도.록.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 그것이 바로 자신이 되어야 할 그 진리였던 것이다.
이것은 가장 고집스러운 자아가 반드시, 100%로, 언제나 가게 되는 그 길이다.
자아는 '받아들이는 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무력감을 회피한다. 상대를 받아들이는 이 전략을 통해 라포를 형성하면, 이제 자신의 언어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더 효과적인 기회를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소수만 알고 있다는 그 마법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받.아.들.이.는. 자.가. 되.면.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이. 비.밀.이, 실낙원의 자아가 오랜 시간 동안 찾아오던 낙원의 문을 열어줄 궁극의 열쇠였다. 자아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아는 이제 본격적으로 양육의 지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삐약이는 더는 억지로 티라노사우루스를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비지시적 방법'을 쓴다. 그렇게 티라노사우루스가 삐약이와 있을 때만 자유를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삐약이는 티라노사우루스에게 '중요한 존재'로 입지화하고자 한다. 애.착.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애착된 존재는 자기의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다, 이 생각에 삐약이는 야심차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아는 정말로 자유를 양육할 수 있는 것일까?
자아와 있을 때만 자유는 자신을 자유로 온전하게 경험하는가? 자아가 없으면 "엉엉, 난 자유롭지 않아."라며 자유는 비탄에 빠지는가? 자신을 유일하게 자유로 인정해주는 자아를 위해 자유는 목숨을 바치며 자아를 만족시켜줄 그 모든 일을 하는가?
인간관 자체가 대단히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에서 분명히 눈치챌 수 있다.
인간존재의 본성을 자유로 본다면, 이러한 발상은 애초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존재를 근본적으로 노예로 볼 때만 가능할 수 있는 발상이다.
노예가 자신이 애착하는 주인과 있을 때만 자유를 경험한다면, 그 노예는 주인에게 충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수작을 자기 생활권의 모든 인간에게 시도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모든 인간을 결국 자기의 노예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우리는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고 하는 본래적 자유의 존재를 통제하지 못해 무력감에 빠지고 다시 그 무력감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를 신처럼 획책하는 이것이 자아의 실태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낙.원.을. 향.한. 퇴.행.은. 바.로. 이. 자.아.의. 오.만.성.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티라노사우루스는 오만하게 수작하는 이 병아리에게 무슨 일을 할까?
# 기도하는 티라노사우루스: 종교적 은유로서의 상담
운석이 낙하한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자기를 양육하기 위해 열심히 비지시적 방법으로 라포를 형성하고, 집단무의식의 신비를 강의하며, 우리 모두를 온전하게 해주는 마음의 원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병아리의 앞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하늘을 응시한다.
그리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한다.
자.신.보.다. 훨.씬. 큰. 것.을. 향.해.
'기도하는 자'는 상담자의 원형이다. '마리아의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다.
삶.이.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에.게. 삶.을. 허.용.하.고. 있.어.서. 삶.이. 조.금. 우.습.게. 보.였.는.가? 우리 밑에 있는 것인 줄 알았는가? 우리가 천재적인 언어로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인물이 되어도, 삶이 그러한 우리보다 훨씬 위에 있다. 가장 높은 것이 가장 높음을 증거하는 방식은 가장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우리 아래에 깔린 것처럼 우리에게는 체험되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대로 '할 수 없는' 삶에 대해 언제나 이런 입장이어야 한다. 아니, 이런 입장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삶.이.란. 삶.을. 향.한. 기.도.인. 것.이.다.
더욱 종교적인 비유로, 특히 기독교적 비유를 활용해 서술해보자.
정직한 상담자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내적 고백이 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를 모른다. 내개 책임져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부탁드리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것을 향해 부탁하는 방식의 원형이다.
"한 번에는 어려울 수 있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제는 이렇게 아프게 살지 않고, 저를 고통스럽게 한 그 모든 과거의 자신을 벗어나, 저보다 더 큰 하나님을 향해 새롭게 나아가고 싶어요. 힘을 주세요. 길을 알려주세요.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저를 부디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는, 정말로 강한 이다.
인.간.이. 강.할. 때. 하.나.님.도. 강.하.다.
그러니 인간이 가장 강하게 부탁할 때, 하나님은 가장 강하게 도우신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성은 역설이 아니다. 그것은 거울에 비친 모습의 눈동자 속에 비친 그 모습이다. 하나로 비친 하나의 빛인 것이다.
한 목사님이 같은 목사였던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 목회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자 그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래 인간은 그 마음이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거 아니? 하나님도 우리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으신다."
지혜로운 말씀이다.
가장 고전적인 비유로 실존상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
"실존상담은 인간의 안에 깃들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이며, 그 하나님께서 치유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실존상담에 치유를 위한 기법과 기술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보다는 실존상담에는 고집스러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 고집을 해체하기 위한 기법과 기술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아가게' 하려는데, 고집의 자아는 더 많은 상처 속으로 퇴행하려고 한다. 낙원이 자꾸만 가상의 과거에 있다며, 하나님의 동작인 시간을 거부하려고 한다.
그러나 낙원은 정말로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낙.원.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가. 우.리.이.기. 때.문.에. 결.코. 잃.을. 수. 없.는. 우.리.의. 안.에. 계.신.다.
우리는 실은 낙원을 잃은 적이 없다. 이상적 낙원을 찾아 헤매며 외로워하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을 뿐이다. 또 낙원이 없으니 자기가 낙원을 건설해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친절하고 상냥한 왕이 되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을 뿐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잃은 척하는 일'과 '자신이 하나님인 척하는 일'은 사실 같은 일이다. 동일한 자기우상화의 일이다. 상담자는 이 고집스러운 자기우상화를 폐지하고, 내담자에게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에게 부탁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부탁하세요. 어떻게 부탁하는지는 알려드릴 수 있어요. 저도 매일 하나님에게 도움을 부탁드리거든요."
우리는 이 부탁하는 방법만 알면 된다. 나머지 앎은 기본적으로 다 잉여의 것들이다.
한번 정직하게 떠올려보자. 우리 자신이 전교에서 1짱인 것보다, 우리가 부탁하면 언제라도 도와주는 전교 1짱이 우리의 친구인 것이 우리에게는 더 든든하게 느껴진다.
이런 삶이 낙원이다.
낙.원.의. 실.증.은. 우.리.가. 부.탁.할. 수. 있.다.는. 사.실. 속.에. 있.다.
상담은 고집이 만들어낸 고독 속에서 혼자 화내고 우울해진 내담자가 이제 부탁할 수 있는 감각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것은 내담자가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는 일이며, 내담자의 낙원을 영원히 찾아오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상담의 실제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모든 상담의 핵심을 종교적 은유로 말하고 있다.
부탁할 수 있는 이는 퇴행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이다. 부탁은 완전한 항복(surrender)을 뜻하며, 이것은 가장 큰 것을 향해 가장 크게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다. 이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이해하겠는가? 자.신.을. 가.장. 크.게. 내.어.주.는. 일.은. 가.장. 큰. 자.유.의. 행.사.다. 부탁하는 이는 다 맡겼기에 언제나 최대치로 자유롭다.
'마리아의 시간'은 '부탁하는 시간'이며, 곧 '자유로운 시간'이다. 그 자신의 시간을 가장 잘 쓰는 이, 그는 자신의 시간을 '부탁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쓰는 이다. 그러면 그는 곧 알게 된다. 자신이 부탁하던 그 큰 것이 실은 자신이 아주 크게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것이 바로 인간이 더 크게 사랑하는 방식이다. 티라노사우루스가 사랑하던 더 큰 하늘을 인간도 사랑한다.
운석이 비껴가며 지구가 안전하다.
티라노사우루스가 병아리 앞에서 '할 일'을 마친 뒤, 성큼성큼 자유롭게 떠나간다.
그는 낙원을 향하는가? 아니다. 그가 있는 곳이 낙원이다. 낙원은 역사 속에 있지 아니하고, 지금 그와 함께 존재한다. 그러니 낙원을 꿈꿀 필요가 없다. 부탁만 하면 된다. 잘 모르니까 도와달라고. 그러면 낙원이 찾아든다.
"저는 정말로 하나도 몰라요."
내담자의 이 고백을 만나기 위해 상담자는 무수한 시간을 쓴다.
상.담.은. 이. 말.을. 듣.기. 위.해.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부.탁.하.는. 시.간.이.다.
왜인가? 이 말이 인간에게 가장 큰 말이며, 인간이 가장 크게 사랑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하기 전에 모든 이는 커다란 불안을 느낀다. 그만큼 결코 억누를 수 없는 말이며, 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이것은 '존재의 참말'이다. 그러니 억제하지 말고 최대치로 누려보자. 그러면 최대치로 미래가 열려간다. 결코 억누르지 말라.
"도와주세요."
이 순간,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동작을 멈추고 당신의 참말을 들었다.
당신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모두가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가 운석처럼 당신에게로 전력을 다해 찾아든다.
그 섬광 속에서 계속 말하라. 쏟아지는 유성우의 시간처럼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지를 간절하게 말해보라. 그 목소리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깃들어 있다. 당신을 위해 하나된 모든 존재가 자기 일처럼 관심을 가지며 그 '한 목소리'로 당신에게 전하고 있는 '답'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치유다.
상담은 상담자가 아니라, 당신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이 분명한 이 존.재.가. 치.유.하.는. 일.이다.
당신은 이 엄청난 당신의 존재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이 어쩌면 처음으로 당신의 존재를 사랑하게 될 그 자리가, 바로 당신의 낙원이다. 당신에게는 반드시 낙원이 있다. 아직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도와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억누르지 말라. 티라노사우루스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