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36

"나로 산다는 것"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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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모든 것을 왜 하는가? 나로 살고 싶어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고 있음에도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가? 나로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다.


우리는 어쩌면 '나'를 잃었거나 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자신이 어떤 개성의 인물인지,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떤 생각들을 하고 사는지를, MBTI 검사지와, 새벽의 SNS 일기장과, 삼겹살이 구워지는 불판 위에 거듭해서 풀어낸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러한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관계 속의 오해가 속상하기도 하고, 자신의 진심이라고 하는 것이 왜곡되는 세상에 억울해지기도 한다. 그럴수록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잘 알릴 수 있도록 말과 글을 명징하게 사용하려는 노력도 한다.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면 자신도 명확해질 것 같아 그러한 것도 배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리고 싶은 정확한 그 모습으로 알릴 수 있는 것이 소통의 가치로 자리잡는다.


"나는 이해받지 못했어."


이 말은 "너는 왜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보아주지 않아."라는 말이다.


이처럼 '나'라고 하는 것을 찾고 있던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간.주.하.는. 특.정.한. 정.체.성.을 나라고 여기고 있던 셈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소비하면 더 멋진 나를 이루게 된다는 이상한 이야기들도 있다. 마치 게임캐릭터처럼 이야기라는 아이템을 모아 자신을 강화하며 또 치장하자는 식의 '나 운용메뉴얼' 같은 것이다. '나'를 아직 찾지는 못한 것 같지만, 어떻든 이러한 일을 해나가고 있으면 최소 나라고 하는 것이 성장 및 발전의 궤도 위에서 벗어나지는 않고 좋게 이루어질 것만 같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눈앞의 거울 속에서 가장 근사하게 꽃피어나있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 일단은 믿어보고 싶다.


우리가 그 끝에서 '나에게 배신당했다.'라고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방식에 의해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배신하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가 '나'를 배신할 뿐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의 당신은 어린 시절의 당신이 자기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던 그런 사람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나'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글은 읽을 필요가 없다. 계속 그렇게 살며 충만하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나'를 잃은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지금의 당신이 이루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당신이 되고 싶었던 그 모습이 지금의 당신으로 실현되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당.신.이. 되.고. 싶.었.던. 그. 모.습.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당.신.이. 옆.에. 있.어.주.기.를. 바.랐.던.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묻고 있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보자. 부모님을 눈앞에서 잃게 된 아이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불현듯 차가운 잿빛으로 변한 폐허 위에 황망히 홀로 서있던 그 아이에게, 아직 온기가 어린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던 한 사람이 있다.


브루스 웨인은 어린 시절 자신의 곁에 서있어주던 그 고든 경감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고, 그는 자신이 되고 싶었던 배트맨이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브루스 웨인은 '나'를 잃었다. '배트맨'의 인기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비극이기 때문이다. 모.든. 비.극.은. 나.를. 잃.은. 비.극.이.다. 그래서 비극은 '나'를 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어떠한 이야기의 성공여부는 그것의 보편적 비극성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상에는 왜 이야기가 많은가? 나를 잃은 비극이 많아서다. 여기에 착안한 이야기상인들은 더 많은 이야기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사람들이 더욱더 나를 상실해가는 구조를 보급하고자 한다. 히어로물들은 우리 안의 '진정한 나'의 모습을 영웅들의 모습으로 형상화해낸 것 같은 외연을 취하면서, 실은 우리에게서 '나'라고 하는 것이 박탈될 구조를 안착시킨다.


자기계발문화의 모든 성공신화들이 이러하다. 그것은 '나'를 말하는 척하지만, 실은 그저 '특정한 자아의 복제품들'을 양산하고 싶어할 뿐이다. "당당하게 나의 이야기를 펼쳐내세요!"라고 권유하는 목소리들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자.기.의. 모.습.처.럼. 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의 이야기'라고 하는 이 표현은 자아의 전유물이다. '나'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아는 언제나 '나'를 사칭하고 싶어한다. 자기가 '나'인 척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자아는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많이 할수록 자아의 세력은 강화되며, 사람들에게 '나'를 대신해 자아가 집권할 수 있는 구조가 공고화된다.


이것은 '가짜 왕자'와 '진짜 왕자'의 비유 같은 것이다. 가짜 왕자는 진짜 왕자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예전 조선시대 말기에 양반족보를 구매한 이들이, 마치 자기 집안이 원래 유서깊은 양반가문이었던 것처럼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날조해내던 모습과 동일하다.


자아는 언제나 이처럼 자기선전으로 시끄럽다. '나'의 권위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자기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아는 '진짜'의 권위에 늘 목마르다.


나.로. 산.다.는. 것.은. 진.짜.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많은 것을 해도 재미가 없는 것이다. 흥미를 끄는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와도 잠시뿐이다. 근본적으로는 다 뻔하고 지루하게 경험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가짜 같다. 허공에 떠있는 연처럼 자신도 존재감없는 허구의 존재처럼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자아는 이러한 이들에게, 존재감이 부재한 그 자리에 '나의 이야기'를 채우면 존재감이 보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아는 늘 이런 이상한 이야기만 한다. 쉘 실버스타인의 우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은 그 어떠한 이야기들로도 '존재의 자리'가 채워질 수 없음을 경쾌하게 전하고 있는 작품이다.


존.재.의. 자.리.는. 자.아.로. 결.코. 채.워.질. 수. 없.다.


그렇다면 존재의 자리는 '나'로 채워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함정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존재의 자리를 정당하게 채울 그 소재가 아니다.


존.재.의. 자.리. 자.체.가. 바.로. 나.다.


이 글은 이제 우리가 자아 대신에 '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아니다. '자아'와 '나'를 마치 동격의 저울 위에 올려놓고, 그것들 사이에 다소 우열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등한 대상적 소재'인 것처럼 구조화하려는 것이 바로 자아의 음모다.


빛과 아이언맨 피겨는 비교될 수 있는 소재인가? 이것은 '범주의 오류'다. '존재'와 '자아'는 애초 비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범주의 개념들이다. 그러나 이 범주의 오류를 의도적으로 범하고자 하는 것이 자아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초등학교 앞에서 O링 테스트기를 파는 조선의 약장수가 리처드 파인만을 걸고 넘어지는 일과 같다. 그렇게 해야 약장수는 자기도 동격의 과학적 권위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아로 살 때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언제나 '나'를 배신하는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우리가 '나'를 배신할 따름이다. 자아는 존재를 늘 배신한다. 지금 우리가 왜 이러한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의 그 의미를 늘 배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멋진 나로 성장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 아니다. 또는 과거의 영광의 결과물이자 그 지속을 위한 장치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습은 언제나 '나'로 돌아가기 위한 태세의 바로 그 모습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의 운동을 자기복귀운동이라고 말한다.


"나는 언제나 나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돌아가기 위해' 갖춘 그 모습이다. 과거의 우리 자신의 옆에 서있기 위해 우리는 돌아간다. 이것은 과거의 모습이 되기 위한 '퇴행'이 아니다. 과거의 우리 자신이 옆에 있어주기를 소망하던 바로 그 모습이 되어 이루는 '동행'이다.


우리는 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 동행하려 하는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고. 싶.어.서.다.


구원은 타자에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해서만 가능할 수 있는 사건이다. 체 게바라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원합니다."


이러한 사고실험은 가능할 수 있다. 니체의 '영겁회귀'와 비슷한 상상이다.


어떠한 개인의 삶이 지금까지 수천억 번 이상 반복되었다고 해보자. 거기에서는 늘 동일한 과정과 결과만이 일어났다.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언제나 똑같은 비극의 현실만이 반복되어 왔다.


그 사실을 당신이 목격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묻지 말라.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바꾸고 싶었다. 그가 행복하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래서 당신은 그에게로 가서 그 자신이 되었다. 그로 육화되었다. 그에게 있어 '나'라는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나.는. 그.의. 모.든. 순.간.과. 동.행.한.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하.던. 그. 자.리.로. 언.제.나. 나.는 .날.아.간.다.


모든 비극은 '나를 잃은 비극'이다. 이처럼 그에게 '나'가 없다는 것이 바로 비극이었으며, 그 비극을 끝내기 위해 '나'는 그가 '나'를 부르고 있던 그 부재의 자리로 가서, 이제 '나'의 존재로 응답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나'로 산다는 것의 의미다.


'나'는 응답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 '나'는 자아나 정체성 따위가 될 수 없다. '나'는 더 많은 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잃은 그 인간만을 위한 하나의 응답이다.


나.는. 나.를. 위.한. 응.답.이.다.


이것은 과거를 향해서만의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미래를 떠올려보라. 거기에도 '나'를 필요로 하며, 이 몸으로 살고 있는 인간이 있다. 미래의 그 인간이 고양이들과 함께 편안하게 누워 쉴 수 있는 현실을 지금의 '나'는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감으로써 지.키.고. 있.다. 시공을 넘어 '나'는 그와 동행하고 있다.


이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 어떤 과거의 인간도, 그 어떤 미래의 인간도, 현재의 '나'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그들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분명하게 나는 지켜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야.기.의. 종.결.자.다.


모든 이야기를 끝내는 존재다. '나'로 존재하는 곳에 이야기가 없다. 그러니 비극이 없다.


나는 왜 니체를 읽는가?


철학적으로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인가? 더 굳건한 학문적 권위를 갖춘 자신이 되기 위해서인가? 사람들에게 "자 제가 쉽게 니체를 풀어 설명해 드릴게요."라며 잘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부모님도 없고, 친구도 없어서, 정붙일 곳이 어디에도 없어서 책만 읽고 또 읽던 아이가 있다. 딱히 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책에서 눈을 들면 대체 어디를 봐야 할지를 몰라 늘 어색했기에 책에만 눈을 붙이고 있었다. 읽고 또 읽다보니 어느덧 니체를 읽고 있었다. 세주문화사의 만화책들도, 근대한국소설들도, 세계문학전집들도 좋았지만, 책에서 눈을 들었을 때 세상 대신에 책에서 읽은 문장의 잔상을 볼 수 있어 덜 어색하게 만들어준 것은 철학책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니체를 읽는다. 그와 동행하기 위해 날아간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니체 되게 멋있지? 외로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용기를 내며 살아간 사람이야. 너처럼."


그가 책에서 고개를 든다. 얼굴을 이쪽으로 향한다. 아아, 나는 이미 예감한다. 이제는 어색하지 않을 그의 표정이 어떠할지를, 아직 완전히 마주보지 않았지만, 이미 그 얼굴이 선하다.


이. 순.간.을. 위.해. 나.는. 나.인. 것.이.다.


나로 산다는 것, 그것은 기적의 실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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