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통과 가상신체"
당신은 왜 화가 나는가?
당신은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며, 다만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 두려움이라는 것이 바로 당신의 화가 당신 자신을 향할 때 경험되는 현상이다.
당.신.이.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당.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화의 핵심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우리가 자신(自身)에게 화가 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의. 신.체.가. 의.도.대.로. 되.지. 않.아.서. 화.가. 난.다.
단적인 예로, 어린아이들은 자기 몸이 '잘 조종되지 않을 때' 울며 화를 낸다. 또 대표적인 경우로, 몸이 아파서 동작이 힘든 이들은 자기의 몸에 계속 화가 나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혐오감과 증오심을 경험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통해 경험된 이 인.간.의. 몸.에. 대.한. 부.정.적. 감.각.이. 렌.즈.처.럼. 작.용.해. 세상의 모든 인간이 다 잠정적인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보이게도 된다. 자.기. 몸.에. 대.해. 난. 화.가. 존.재. 전.반.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화의 본질적인 차원이다.
우리가 화가 아닌 두려움의 형태로 경험하는 이유는, 뜻대로 되지 않는 몸의 현실이 '일종의 패배감'의 소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몸을 통제하는 못하는 이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은 무능력의 표상 같다. 그렇게는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자신에게 난 화는 인정될 수 없다. 화. 자.체.가. 무.능.력.의. 증.명.이.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화의 원인은 자신이 아닌 외부의 대상에게로 투사되어 귀속된다. 자기는 외부에서 자신를 향하고 있는 그 '영문모를 화' 앞에서 두려워지는 것뿐이지, 결코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고로 무능력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화의 원인을 외부로 상정할수록 우리는 실제적인 차원에서 무능력해진다. 그것이 우리의 외부에서 기인한 일이니 우리는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는 까닭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할까?
정처없이 말을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우리는 무능력감을 어떻게든 경험하지 않고자 대신 말이라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가상현실'이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1차현실'이라고 가정하는 현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생존을 위해 돈을 벌고, 직장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며,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실적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실'이란 표현은 늘 우리에게 조금 삭막하고, 냉정하며, 건조한 인상을 제공한다. 사실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처럼도 경험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 꿈도 희망도 없는 사실 대신에, 꿈과 희망이 가득한 언어적 세계를 꿈꾸어내었다. 이것이 바로 가상현실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가상현실이란 결국 사실적 현실이 우리를 무력하게끔 몰아붙이는 폭력 앞에서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이룬 자구책인 셈이다. '1차현실'의 잔혹한 압박 속에서도 우리가 숨쉴 수 있는 '2차현실'의 창조다. 이처럼 언어가 인간구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게 가상현실의 지지자들에게는 믿어진다.
사회적 몰인정에 지친 이가 게임을 하며 위안을 받고, 부모들의 싸움에 지친 이가 소설을 읽으며 자신을 정화하는 등의 일이 이 가상현실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언어적 가상현실이란 사실의 비인간성으로부터 인간을 지켜내는 따듯하고 상냥한 소재라고 볼 수 있다. 사실을 극복하는 판타지의 아름다움이다. 가상현실의 지지자들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여기에서 사실적 세계라고 가정되는 사회, 학교, 가정, 직장, 사업장, 공동체 등의 관.계.적. 소.재.들.이. 바.로. 가.상.현.실.이.다. 즉, 이것들은 이미 '1차현실'이 아니다. 이 또한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2.차.적. 구.성.물.들.일 뿐이다.
사회적 제도권의 폭력에 질려 그 대신에 진정한 자신의 길을 가려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단지 하.나.의. 가.상.현.실.에.서. 나.와. 또. 다.른. 가.상.현.실.로. 이.동.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계속 가상현실인 까닭에, 가.상.현.실.이. 근.본.적.으.로. 내.포.한. 고.통.의. 양.상.은 이동한 곳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그것은 어떠한 고통인가?
바로 언어에 의한 고통이다. '언어통'이라고 표현해보자.
모든 가상현실은 언어로 만들어진다. 언어의 속성은 규정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규칙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란. 언.제.나. 스.스.로.를. 옭.아.매.는. 장.치.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실증적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너 지난번엔 분명 이렇게 말했잖아?"
이러한 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죄책감이다. 이것은 마치 인간말종이 된 것 같은 감각이다. 자신이 말한대로 그 모습을 유지하지 않은 '일탈'이 우리를 인간말종이 되게 만드는 기제다. 즉, 자.신.이. 소.비.한. 언.어.에. 항.시.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죄.책.감.을. 경.험.하.게. 된.다.
실제적인 우리는 매순간 달라지지만,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늘 일관적인 형상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거울을 보며 우리가 화를 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자신이 생각하던 아름다운 모습이 일관적으로 유지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화가 난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화인가? 언.어.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기. 몸.에. 대.한. 화.다.
우.리.의. 몸.은. 언.제.나. 언.어.통.을. 호.소.한.다. 우리를 제일 아프게 만드는 것은 언어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몸을 부정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특히 가상현실을 축조하는 언어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정말로 '1차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진짜(reality)'는 무엇인가? 그 '현실(reality)'은 무엇인가? 바로 몸이다. 몸.이.야.말.로. 우.리.에.게. 사.실.적.인. 것.이.다.
이 '몸의 사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관계'라고 하는 '1차가상현실'을 만들었고, 그것을 임의대로 사실화하였으며, 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2차가상현실'을 만들었다. 이 '2차가상현실'을 통칭하여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임.을. 한.다. 표현 그대로다. 우리가 왜 언어적 판타지에 빠지는지에 대한 그 이유다. 관계라고 하는 가상현실이 야기하는 언어통이 너무 커졌을 때, 우리는 게임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게임에는 심리치료니, 힐링이니, 마음의 평온이니 하는 식의 수식어들이 덕지덕지 붙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었던 언어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상현실의 논리가 더 강화된 만큼 실제적으로 언어통은 더욱 커진다.
재미있는 점은 이처럼 가상현실의 소비가 심화될수록 언어통은 '환상통(phantom pain)'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특정한 신체부위가 이미 결손되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해당부위의 고통을 경험하는 현상이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아주 단순하며 명징하다.
가.상.현.실.은. 원.래. 있.지.도. 않.은. 가.상.신.체.의. 문.제.다.
'가상현실'의 출발점이 '가상신체'다. 자기의 사실적 신체를 부정하는 이는 가상신체를 만들어내고, 그 가상신체로 인해 가상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나,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에서는 이러한 '가상신체'의 현상이 잘 묘사된다.
가상신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실증적인 예가 있다. 읽지도 않는 책을 가득 수집하는 이들이 있다. 왜 그러는가? 이들에게는 책이라고 하는 것이 외재화된 자기 뇌의 표현이다. 즉, 책은 이들의 가상신체다. 그러니 이러한 이들은 책을 수집하는 만큼 자기의 뇌가 발달한다고 생각한다. 읽지는 않고 소장만 하더라도 뇌세포가 증대되어,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쌓이고, 유용한 고급정보들이 자동으로 축적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게임의 구조'다. 책 한 권을 아이템으로 얻으면 지성능력치(INT)가 +1이 된다고 상정되는 구조다. 동시에 이것은 '주술'이다. 언.어.는. 주.술.이.다. 언어를 통해 사실적 '몸'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원래 주술이다.
언.어.통.은. 이. 주.술.을. 집.행.함.으.로.써. 생.겨.나.는.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주술의 시전자는 반드시 그 몸으로 고통스러운 반동을 받는다. 이 반동을 회피하기 위해 마련되는 장치가 바로 '희생양'이다. 떠올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상현실에서 살아가느라 언어통이 심해 화가 많이 난 이가, 자신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필히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상정된 희생양의 존재가 있다. 화는 그 희생양이 내는 것이며, 자기는 순결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술의 집행자는 도덕적 정당화를 이루어 언어통을 희석시키고자 한다. 희생양이 된 그 대상을 제거하면 고통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또는 더 교묘하게, 자기를 두렵게 만드는 그 대상을 자기가 상냥한 마음으로 포용하면, 나아가서는 구원하기까지 하면, 자신은 더 높은 존재가 되어 언어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아정체성'은 바로 이렇게 성장하고, 발전하며, 또 진화한다. 더 높고 위대한 것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상현실을 더욱 심화시켜가는 아주 흔한 그 방식이다.
가.장. 실.증.적.인. 가.상.신.체.는. 바.로. 자.아.정.체.성.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사실적으로 심리학의 전문가가 아님에도, 심리학자들이나 심리학 교수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 투쟁하는 이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그가 그러는 이유는, 자기의 자아정체성을 세계 최고의 심리학 전문가로서 축조해놓았기 때문이다. 물리적 형상으로 비유하자면, 이러한 이는 자기의 가상신체를 헐크처럼 상정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그는 세계적인 이종격투기 선수들에게 늘 화가 난다. 자기의 '신체'가 더 대단한데, 사람들은 격투기선수들의 몸을 예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다. 어떠한 게임 속에서 '심리학자' 내지 '멘탈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열심히 캐릭터메이킹을 한 이가 있다. 게임을 같이 즐기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서 "와, 심리학 딜 잘 넣으신다."라며 칭찬받은 경험들도 다수 있다. 이러한 이가 이제 게임 밖의 현실에서도 게임 속에서처럼 자기가 심리학 전문가로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정체성의 문제다.
자아정체성의 문제란 언제나 '망상장애'다. 망.상.으.로. 인.해. 경.계.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들에게는 그것이 실제의 '현실'인 것처럼 경험될 수 있다. 가상현실은 그 경험자에게는 마치 실제와 같은 경험을 제공하는 까닭이다.
사실과 가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 경계의 문제를 갖고 있는 이들은 보통 '피암시성'이 높다고 평정된다. 쉽게 말해 최면과 세뇌에 잘 걸린다. 그러니 이들은 매우 자주 자신들이 또한 최면전문가 및 세뇌전문가가 되곤 한다. 자신들이 잘 당하는 만큼, 그것을 하기에도 수월한 입장이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이들이 자신을 오히려 사실적인 분별을 잘 하는 인물로 본다는 점이다. 이는 이들이 '설정놀이'를 즐기고 있기에 생겨나는 착각이다.
자.아.정.체.성.의. 운.용.은. 설.정.놀.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정말로 게임아이템을 사서 자기의 캐릭터를 꾸미는 일과 동일하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돈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어만 활용하면 된다. 자신은 똑똑하고, 선하며, 책임감이 많으나, 그러한 까닭에 다소 남들에 대한 배려심이 지나쳐서 힘들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인간에 대한 선의의 희망을 견지하며 더욱 상냥한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라는 식으로 써내려간 '자기소개서'를 여기저기에 흩뿌리기만 하면 된다.
즉, 자기에 대한 이미지를 언어로 만들어 그것을 더욱 널리 보급하는 일이 이 '설정놀이'의 성공적인 방법론이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사실 언어적 창작력도 아니다. 얼굴에 철판을 까는 일이 핵심이다. 온라인 RPG를 떠올려보자. 한 마법검사 캐릭터의 이름이 'pyj20080721'이나 '민영이이뽀'인 것보다는 '윌리엄 폰 막시우스'인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자기소개를 할 때도 "격조들 하셨는지요. 심연의 연금술을 찾아 모험하고 있는 황혼의 성기사 막시우스입니다."라고 하는 편이 무엇인가를 좀 아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들에게는 게임 안에서의 '자신'을 이루는 각 '신체'에 대한 환원적 감각이 분명하다. 오른손에 든 '용자의 검'은 어디에서 획득하는지, 왼손에 든 '현자의 방패'는 어떻게 강화해야 하는지, 또 머리에 쓴 '다스베이더 매지컬 헬름'은 누구로부터 입수해야 하는지 등이 이들의 머릿속에는 체계적으로 잘 분별되어 있다.
이들이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과 '게임' 사이의 그 경계일 뿐이다. 물론 이들은 시뮬라크르 등의 잘 알지도 못하는 용어를 써가며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이미 무너졌다고 열렬히 자신을 변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계는 무너질 수가 없다. 사실적 몸은 죽으며, 가상신체는 죽지 않는다. 경계는 분명하다.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이 사실적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1차가상현실'이다. '1차가상현실'과 '2차가상현실'은 동일한 가상현실의 문법 위에 있기에, 그 경계가 모호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망상 속에서든 실제의 몸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미디어가 발달하기 아주 이전에도 인간은 가상현실을 '필사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붓다도 7년간 가상현실을 체험했다. 불멸하는 지복의 상태를 얻기 위한 수행을 하던 이들이 명상 속에서는 그것을 얻은 듯해 감격하면서도 이내 좌절하던 이유는, 개인이 어떠한 상태를 체험했든 간에 반드시 '이 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수행자들은 몸을 일종의 '저주'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몸만 없으면 가장 위대한 의식으로 늘 자유로울 수 있을텐데, 이 둔하고 미련한 몸이 언제나 문제였다.
개인의 사실적 몸을 적대하는 이 전통은 그대로 '관계'의 감각으로, 또 '게임'의 감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에 따라, 가상신체 또한 확장되었다.
가상신체로 맺는 관계를 '대상관계'라고 부른다. 정신역동적 관점의 '대상관계이론'은 이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관계적 대상들이 자기의 신체가 되어 있는 상태다. 조악한 예로,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는 심장, 빨래를 해주는 엄마는 양손, 성가시지만 유용성도 있어보이는 누나는 맹장, 꼴보기도 싫은 남동생은 새끼발가락의 발톱 거스러미 등으로 형상화되는 식이다.
그래서 '관계'라고 하는 가상현실 속에서는 이러한 대상들의 상실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것은 정말로 자신의 신체를 잃는 것처럼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역으로 말하자면, 대.상.들.이. 온.전.한. 한.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어.진.다. 자신의 영속성이 대상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획을 위해 민족, 국가, 사회공동체 등의 소재들은 곧잘 가상신체의 대상이 되곤 한다. 개인이 이것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비록 '이 몸'은 죽더라도 자신은 이 영속하는 대상을 통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정확한 순교의 기제다.
'게임'이라고 하는 가상현실에서는 이 감각이 더 증대된다. 이것은 실제의 목숨을 저당잡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너를 위해! 모두를 위해!'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그 말만 하면 모두가 기뻐하며, 서로가 이처럼 서로를 생각해주는 마음으로 멋진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는 '공동환상'을 소비할 수 있다. 인터넷은 이 공동환상의 무대다. 블록체인의 구조처럼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며 '공동영속성'을 상호적으로 보장받으리라고 기대된다.
SF물의 소재들은 더욱 양념이 된다. 론머맨이나 공각기동대 등에서 묘사되는 넷(net)에 자신의 의식을 업로드해 영생할 수 있는 구조적 장치 등의 소재가 결국 현실은 언젠가 게임으로 대체될 것이며, 게임이야말로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망상'을 강화한다.
인간이 늘 영속성에 대한 가상현실의 판타지들을 소비해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일은 유익하다. 어떤 때는 환각버섯으로, 마약으로, 명상으로, LSD로, 소설로, 영화로, 게임으로, 단지 시대에 따라 그 소비재가 변화해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소비함에 따라 더 정교해진 언어에 의해 심화된 언어통으로 말미암아 몸의 고통만이 증대되어 왔을 뿐이다. 7년간 가상현실에 빠져 헤맸던 붓다는 보리수에 기대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쓸데없이 내 몸만 괴롭혔구나."
사실적 신체로 돌아오면 이 모든 것은 간명해진다. 몸.을. 편.하.게. 하.면. 된.다. 붓다가 한 그 일이다.
몸을 편하게 한다는 것은 사우나에 가서 땀을 빼고, 냉탕에 들어가 몸을 식힌 뒤, 삼각커피우유를 마시며 휴게실에서 잠드는 등의 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몸.을. 편.하.게. 한.다.는. 것.은. 몸.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몸을 지배하지 않으려면, 자기의 사실적 신체를 이해하면 된다. 어떤 것에 대한 이해는 그것의 경계에 대한 이해다. 사.실.은. 언.제.나. 경.계.의. 문.제.다.
우리가 자기의 사실적인 몸을, 곧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항상 '이상적 몸'에 대한 추구가 생겨난다. 가상신체는 이 이상적 몸의 형상을 얻기 위해 언어로 조형해낸 결과물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팔다리가 짧으면 억지로 늘리고, 길면 억지로 자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특히나 오늘날의 정보화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시달리는 가상신체의 문제는 바로 뇌에 대한 것이다. 아주 쉽게 우리는 구글과, 유튜브와, 나무위키를 자신의 뇌라고 간주한다. 이것들이 가상신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유튜브에서 3분 분량으로 심리학 정보를 유식하게 떠들면, 그것은 곧바로 자기 뇌의 성취가 된다. 게임아이템을 하나 얻어 '뇌력'이 +1이 된 것이다. 한 2개월 정도 유사한 채널들을 섭렵하고 나니, 이제 심리학 눈에 다 보이고, 자신은 심리학 천재가 된 것 같다. 융이 왜 동양철학과 똑같은지도 알겠고, 마음의 비밀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업데이트에 있다는 것도 알겠고, 대극의 원리에 따라 하나의 행동을 했으면 그 반대편의 행동도 같이 상냥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이렇게 심리학 천재가 된 기념으로 전문 심리학 커뮤니티에 가서 '자기의 몸'을 자랑했더니, 이상하게도 자신이 '못난 몸'이 되는 것만 같다. 이럴리가 없는데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은 분명 몸을 키우기 위한 2개월간의 '성실하고도 치열한 노력'을 했는데 이것은 부당하다. 이러한 이에게 형성된 '심리학 전문가로서의 가상신체'는 이 현실을 용납할 수 없다. 화가 난다.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그의 실제적 뇌 상태로 대접받아 그는 화가 난 것이다. 부풀려진 '가상의 뇌'의 위상으로 대접받지 못해 그는 분노하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보.아.주.지. 않.아. 그.의. 화.는. 맹.렬.하.다. 아프다. 있.지.도. 않.은. 것. 때.문.에. 아.프.다. 환상통이 촉진된다. 아픈 만큼 그는 화가 난다.
그는 정확하게 무엇에 분노하는가? 우선적으로 그는 사실에 분노한다. 자신이 심리학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한다. 자신이 언어로 쌓은 가상신체의 자아정체성은 심리학 전문가여야만 하는데, 자신의 사실적 뇌가 심리학 전문가로 작동하지 않아 그는 분노한다. 동시에 자신이 열심히 레벨업시킨 가상신체가 사실 앞에 지극히 무력하다는 것에 그는 분노한다. 사실적 신체도, 가상신체도, 어느 하나 그의 언어적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그 둘 다 분노의 소재가 된다. 두. 배.의. 분.노.가. 되.며. 두. 배.의. 고.통.이. 된.다.
이 배가된 언어통에 대해 그는 이제 무슨 일을 할까?
또. 다.른. 가.상.신.체.를. 만.들.어. 또. 다.른. 가.상.현.실.로. 도.주.한.다.
그 뒤에 남겨지는 것은 희생양이며, 그 앞에 더해지는 것은 언어통이다. 남도 더 많이 희생시키고 자기도 더 크게 고통스러워지는 인생이 그가 그리는 궤적이다.
언어통의 강도는 가상신체가 더욱 추상적으로 심화된 정도에 비례한다. 당연한 말이다. 자기의 사실적 몸으로부터 벗어나 그 몸을 지배하기 위해 가상신체는 만들어진다. 그러니 가상신체의 창조가 반복될수록 사실적 몸의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 하나의 가상신체 역시 결국에는 고통으로 드러나 버려질 것이기 때문에, 이는 사실적 몸에 더해 그 유기된 가상신체의 고통까지 누적되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중요한 이해의 지점이다.
화가 날 때 대체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생.각.을. 한.다. 언어작용을 한다. 이것은 언어로 화를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 주술적 행위다. 그러나 그 화는 실상 몸을 임의대로 통제하려는 언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언.어.로. 뺨.을. 후.려.친. 뒤. 언.어.로. 약.을. 바.르.려.는. 이. 행.위.가. 성.립.될.리.가. 없.다. 우리는 몸을 속일 수는 없다. 다 속여도 우리는 자신(自身)만은 속일 수 없다.
언.어.로. 더. 큰. 자.아.정.체.성. 내.지. 더. 큰. 가.상.신.체.를. 만.들.어. 화.를. 다.루.고.자. 하.는. 기.획.은. 더. 큰. 화.를. 부.를. 뿐.이.다.
자신을 막 다루어 화가 솟구치게 한 뒤, "가엾고 약한 네가 이렇게 화가 났구나. 네가 온전하다는 사실이 소외되어 참 많이 속상했구나. ㅜㅜ"라며 자신을 자상하게 달래는 그림은 혹시 당신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이것이 순도 100%의 정신병으로 보인다면, 우리에게는 당신이 희망이다.
그렇지 않고 이것이 화를 효과적으로 해소하고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천재적 심리언어술로 보인다면, 우리는 잘못된 만남이다.
잘못된 만남은 권태롭다. 정확하게는, 만남이 없을 때 우리는 권태를 경험한다. 만.남.이.라.는. 것.은. 언.제.나. 몸.과.의. 만.남.이.다. 메를로-퐁티와 같은 신체현상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현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가상현실도 물론 현상이다. 이 현상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을 경험하는가?
본.질.적.으.로. 지.루.하.게. 경.험.한.다.
물론 경험의 도중에는 이채로운 자극들이 경험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결과로 우리는 더욱 지루해진다. 관계를 떠올려보라. 쉬이 지루해져서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관계에 질려 게임을 하게 된다. 하나의 게임이 지루해지면 다시 새로운 게임으로 옮겨가는 과정 속에서 게임불감증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다. 이제는 다 지루한데도 다른 할 것이 마땅히 없어 그냥 게임을 습관적으로 붙잡고 있게 된다.
이것은 가상현실이 최대한 언어적 의도대로 이루어지게끔 조성된 '안정적 구조'를 지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결과다. 자.기.의. 몸.을. 위.협.적.으.로. 경.험.하.는. 이.들.이. 가.상.신.체.를. 만.들.어. 가.상.현.실.에.서.의. 안.정.된. 상.태.를. 얻.고.자. 한.다. 그래야 자신이 안전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언어로 내 몸을 통제해서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야 해."
이것은 이러한 기획이다. 안전에 대한 과잉된 강박이다. 이 강박은 모든 것을 지루하게 만든다. 다양한 자극을 생생하게 제공해줄 것처럼 선전하는 가상현실은 실은 대단히 권태로운 속성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실존상담자 중의 하나인 커크 슈나이더가 2000년대 이후 그의 저작들에서 괜히 '경외감(awe)'의 회복을 강조하며 우리에게는 삶의 모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AI와 가상현실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자리는 더 분명하게 미.지.의. 삶.을. 향.해. 여.행.하.는. 모.험.가.의 입장에서 확보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슈나이더와 AI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몸.으.로. 역.설.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설'이라고 하는 것은 융이 말하는 대극의 합일 같은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열심히만 살던 개인이 그 반대편에 있는 휴식을 취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모습도 온전하게 수용하게 될 때, 정신이 균형을 이루어 일도 잘 하고 놀기도 잘 노는 건강한 전인적 인생마스터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다.
이러한 '대극의 설정놀이'는 '가상신체'의 일이다. 하나의 가상신체를 프로그래밍 언어로 구현하면, 그 반작용으로 또 하나의 가상신체가 생겨나니, 그 모든 가상신체를 총괄할 메타적 가상신체를 또 만들어 프로그램의 관리자로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가상신체만 계속 증대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언어통만 가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고의 언어통이 무엇인지를 이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권.태.가. 바.로. 최.고.의. 언.어.통.이.다.
사는 게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심리학을 배우고 싶은가? 수제맥주를 직접 만들어보면 삶이 짜릿해질 것 같은가? 유튜브를 보고 따라해 드립커피를 사람들에게 대접하면 인생의 고귀한 향기가 찾아들 것 같은가? 틱톡의 밈을 유려하게 소비하면 무엇인가 아름다운 인류의 발걸음에 동참하고 있는 듯한 충만감이 느껴질 것 같은가?
직접 만들고, 경험하고, "내가 또 해냈어!"를 체감하려는 이 모든 일이 바로 가상신체의 일이다.
이것은 마치 영유아가 부모의 안전한 비호 속에서 자기 힘으로 이유식을 떠먹었다며 까르륵, 웃는 그 일과도 같다. 이 그림은 중요하다. 이것은 가상신체가 우리에게 정말로 어떠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지를 핵심적으로 알려준다.
가.상.신.체.는. 양.육.된.다. 그리고 양.육.이. 힘.들.어.지.면. 유.기.된.다.
자기의 인생이 권태롭다고 생각하는 이가, 양육할 아이를 입양하듯 하나의 가상신체를 만들어낸다. 그 '아이'를 레벨업시키고 있는 동안에는 지루함을 조금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레벨업의 가성비가 떨어지게 되고, 성취에 비해 노력의 힘겨움이 더 커지게 된다. 그러면 '아이'는 버려지고, 권태는 다시 시작되며, 이에 따라 흥미를 자극할 '새로운 아이'를 찾으려는 탐색의 운동이 생겨난다.
이것이 우리가 가상신체를 향유하는 방식이다. 아이라고 비유하니 조금 잔혹하게 생각된다면, 반려동물로 바꾸어 말해보자. 자신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반려동물을 사육하다가 유기하는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잔혹함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니 잔혹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 표현 그대로, 가상신체를 소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自身)을 잔혹하게 다루고 있는 중이다. 가.상.신.체.는. 엄.연.한. 몸.에. 대.한. 착.취.다. 권태로워 착취하고, 착취함으로써 더 권태로워지는 악순환이다.
우리는 왜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가? 우리의 몸이 원래 권태의 소재이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몸으로 살고 있지 않고, 언.어.로. 살.고. 있.어.서. 우.리.는. 권.태.로.운. 것.이.다. 언어로 살고 있을 때 우리는 몸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자신이 몸인 것을 참을 수 없다. 이대로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재미'를 위한 것이다. 언.어.로. 사.는. 삶.은. 재.미.에. 경.도.된. 삶.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재미의 자극이 금방 역치에 도달해, 쉬이 지루해지고, 그 다음에는 더 큰 자극만을 바라게 되는 중독의 기제 속에 아주 쉽게 편입될 뿐이다.
반면, 몸은 '의미'를 향한 것이다. 의미라는 것은 언제나 '내 존재의 의미'다. 이것은 자신의 '고유한 중대성'에 대한 것이다. 자신을 중요한 존재라고 자각하고 있는 이는, 숨만 쉬고 있어도 왠지 웃음이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의.미.는. 재.미.를. 자.연.스.럽.게. 동.반.한.다.는. 것.이.다.
권.태.라.는. 것.은. 실.은. 재.미.가. 아.니.라. 의.미.를. 상.실.한. 현.상.이.다.
멍하니 미세먼지처럼 부유하듯 살아가는 의미상실자들은 과잉되게 쾌활한 척하며 재미의 소재를 탐닉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매사에 냉담하고 무기력한 우울증의 상태에 사로잡힌다.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은 이 의미상실의 현상을 한 목소리로 지적해낸다.
이와 같은 '의미의 상실'은 '몸의 상실'에서 비롯한다고 말해도 좋다. 우리가 몸을 상실하게 되는 그 전후에는 분명 가상신체의 문제가 놓여 있다. 대개 전단계에서는 '관계'로 인해 자기 몸이 부정되어 가상신체가 출현하며, 후단계에서는 '게임'으로 인해 더욱 자기 몸을 망각하고 가상신체만을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화'라고 하는 것은 출구가 없는 감옥을 뚫어내고자 하는 절규의 표현과도 같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화의 의미는 뒤집어진다. 당신이 몸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가? 아니다. 몸.이. 언.어.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화는 언어통을 겪는 몸의 반응이다.
사실적 몸이 언어로 만들어진 가상신체에 의해 억압당하고, 그 가상신체는 곧이어 생겨날 더 최신의 가상신체에 의해 억압당한다. 몸에 대한 억압의 의지는 겹겹이 세워진 감옥의 벽처럼 그 압력을 더해간다. 언어로 인해, 우.리.의. 신.체.는. 그. 의.도.대.로. 살. 수. 없.어.서. 화.를. 내.는.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분노'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당신은 이것만을 두려워해야 한다. 당.신.의. 몸.을. 당.신.은. 두.려.워.해.야. 한.다. 당신이 만든 자아정체성과 가상신체 따위는, 우주가 만든 이 몸에 감히 비할 것이 못된다. 언어 따위가 생명의 몸 위에서 생명을 주관하려고 할 때, 생명은 반드시 그 판을 뒤엎어버린다. 우리가 지구의 주인이라고 잘난 척을 하고 있을 때, 지구가 지표면을 뒤집어버리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당신의 몸이 이와 같다.
수틀리면 다 찢어버릴 수 있는 것이 당신의 몸이다. 그리고 그. 몸.이. 바.로. 사.실.적.인. 당.신.이.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경외해야 할 것이 있다면, 당신은 사실적인 당신 자신만을 경외해야 한다. 그 정도의 힘과 존재감을 가진 것이 바로 당신이다. 이것이 당신이라고 하는 존재의 의미다. 슈나이더가 말하는 경외감이라는 것은, 당신이 이러한 당신 자신의 면모를 그 몸으로 실감할 때의 감각을 지칭하는 것이다.
혹시 상기한 문단을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이완되어 펴지고 척추가 곧추 서는 경험이 생겨났던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암시하는 말을 들을 때, 당신에게는 이 반응들이 자연스럽다. 이것이 우리의 사실적 신체가 갖고 있는 의도다. 몸.은. 언.제.나. 이. 우.주.에.서. 제.일.가.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갖.는.다.
그런데 최고의 명품이 어떻게든 잘난 듯이 튀고자 하는 촌스러운 유광 재질의 황금색 포장지로 덕지덕지 싸여있는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라. 명품은 화가 나지 않겠는가? 다 찢어버리고 싶지 않겠는가? 당신이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존재의 명품인 당신을 조잡한 언어 따위가 성가시게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어서 애초 있지도 않은 것으로 당신 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당신이 스스로의 몸을 만나 친해지는 만큼 분명하게 언어통은 사그라든다. 권태도 사라진다. 몸으로 사는 일은 언어로 사는 일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것이다.
단순한 예가 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정전이 발생했다. 인터넷도, TV도, 게임도 작동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조금 두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내 가슴이 뛴다. 휴대폰의 플래시를 켜고 동네를 산책해보고 싶어진다. 왠지 그 '모험' 중에 스쳐 지나가게 되는 거리의 사람들이 반갑게 느껴진다. 그들이 당신과 이 시대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진짜 동료로서 실감된다. 이런 느낌이 확 밀려와 왈칵, 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몸으로 산다는 것이다.
'마음'이 대표적인 '가상신체'의 이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유익하다. 상담은 있지도 않은 이 마음을 다루는 일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몸.을. 체.험.하.는. 이. 삶.의. 사.태.를 다루는 일이다. 상담의 핵심은 당연히 '만남'이다. 몸을 만남으로써 개인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활동이다. 의미는 만남을 통해 드러나며, 만남은 몸을 통해 펼쳐진다.
만남이 봉쇄되어 당신은 그동안 얼마나 화가 났었던가. 이제는 만나도 된다. 가상으로가 아니라 우리는 진짜(reality)로 만날 것이다. 현실(reality)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