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38

"과정의 환상과 존재의 스포일러"

by 깨닫는마음씨




『갈매기 조나단』의 속편격이라 할 수 있는 『환상(Illusion)』에서 리차드 바크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묘사한다.


'진짜(reality)'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주인공을 그의 선생이 영화관으로 데려간다. 주인공이 예전에도 보았던 오래된 영화이지만 그는 이내 영화에 몰입한다. 이처럼 주인공이 한창 영화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선생이 그의 몸을 흔들며 이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니 나가자고 말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성을 내며 이렇게 대답한다.


"제발 나를 방해하지 마세요. 이것들은 진짜라구요! 나에겐 이것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세이브도 아직 하지 않은 게임기 전원선을 엄마가 뽑아버리거나, 친구들과 감정을 고무시키며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막 달려나가던 차에 아빠가 컴퓨터 파워버튼을 눌렀을 때, 우리가 경험하던 심정이 이러할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새벽동이 트는대로 진정한 엄마아빠를 찾아 가출을 하거나, 아니면 집에 불을 질러 다 같이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들로 잠을 설치곤 하였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진.짜.가. 훼.손.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우리가 여기에서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잃어짐으로써 우리는 나 또한 잃어진 것처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떠한 대상에 의존해서만이 나일 수 있었다면, 이미 우리는 한참 전부터 '나'라고 하는 것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진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나'다. 내.가. 진.짜.다.


이 '나'는 대상적 소재를 통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내 안에 다양한 내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 또한 상대적인 것이다. 양적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라고 말할 수 없다. 차라리 "나는 불확정성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권장된다. 이 말은, 나.는. 자.아.정.체.성.이. 아.니.라.는. 말이며, 나는 미.지.의. 가.능.성.이라는 말이다.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갇히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가 아이언맨 영화를 보면서, "아 이것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다!"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가능성을 보잘 것 없는 크기로 제한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라고 하는 것은 미국 너드들의 공상이나 디즈니 전체주의의 발상 안에 갇힌 형상으로 축소된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미국 너드들이나 디즈니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늘 그것들보다 더 작은 것이 된다.


대상의 문제는, 대상이 언제나 그것에 의존해 구성되는 '나'보다 더 큰 위상을 점하게 된다는 데 있다. 대상을 추구하면 할수록 '나'는 대상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 감.옥.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심지어는 더 많은 대상을 소비할수록, 더 풍요로운 나를 얻게 된다는 깜찍한 발상도 생겨난다. 아이언맨에게서는 부와 지성을 가진 나를, 토르에게서는 남성성과 신격을 가진 나를, 캡틴아메리카에게서는 리더쉽과 정의감을 가진 나를 얻게 된다는 식의 생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나'의 다양한 면모들을 회복해감으로써, 우리는 더욱더 온전한 자신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주장된다.


이것은 21호 감방에 갇혀 있다가, 178호 감방으로 이감되고, 또 46호 감방으로 이동하게 되면, 그만큼 우리가 '진정한 나'에 한층 가까워진다고 하는 주장과도 같다. 터무니없는 일이며, 전적인 환상이다. 환상들은 감옥이며, 감옥은 그냥 감옥일 뿐이다.


그렇기에 특히 미디어산업이 제공하는 이 환상들은 한 가지의 목적만을 갖는다. 바로 우리의 시간을 환상 앞에 붙잡아두려는 그 일이다. 감옥의 목적이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미명하에 환상은 우리가 환상의 소비에 시간을 투여하는 일을 예찬한다. 똑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게 하고, 하나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미디어믹스물도 찾아 소비하도록 하며, 종횡으로 잡아늘린 서사구조 속에서 설정놀이를 적극적으로 이루도록 한다.


우리의 시간을 '털어먹기' 위해 이 '과정'은 끝없이 지속된다. '과정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환.상.은. 과.정.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유사심리학계의 환상상인들은 그 결과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며, 오히려 과정이 똑바로 이루어지 않았기에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과정을 충실히 챙기지 못한 과실은 소비자에게 귀착된다. 무안단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과정에 고착된 또 다른 대표적 경우는 상담에서의 내담자들의 자기보고다. 환상의 논법에 사로잡힌 내담자들은 상담자가 '이야기의 과정'을 다 이해해야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한다. 자기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 100권짜리 자서전을 다 읽는 '과정'을 상담자가 경험해야, 비로소 자신과 상담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격을 상담자에게 '부여해주고자' 한다.


왜 이렇게 '과정'을 강조하는지는 명백하다. 그.래.야. 환.상.의. 이.야.기.에.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링』을 보고 있다. 그 유명한 우물장면이 나온다. 슬금슬금 사다코가 기어나오기도 전에 우리는 모니터를 꺼버린다. 과정을 거세해버린 것이다. 그러면 사다코라는 환상은 이제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샤워를 할 때나, 밤늦게 거울을 볼 때, 우리에게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어떤 환상도 작동하지 않는다. 만약 과정을 허용했다면? 물론 하나도 안 무섭지만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자야 할 것이다.


이처럼 미디어가 생산한 이야기들이 우리를 어르고 달래거나 또는 협박해서 계속 '과정' 속에 머물게끔 하는 이유는,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지.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환상의 이야기들은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상.은. 우.리.의. 생.명.력.을. 먹.고. 산.다.


환상을 차라리 기생생물처럼 비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좋다. 환상은 우리가 그 '기생의 과정'을 허용하지 않으면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역으로 우리가 환상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들인 것처럼 착각하곤 한다. 환상이 자신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라면서 역정을 부리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이 절박함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환상의 것이다.


우리는 환상에 대해 조금도 절박하지 않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이나 영화관에서 나온 후나 우리는 똑같은 우리 자신이다. 영화관 안에서 무슨 빛의 세례를 받고 마법소녀로 재탄생하게 된다든가, 신비한 고대의 지혜를 얻어 이중영창이 가능한 대현자로 거듭나게 되는 현실은 일어나지 않는다. 재미를 보러 가서, 재미를 보고, 그 재미를 끝낸 것뿐이다.


심지어는 영화를 보던 중에, 근간 썸을 타고 있던 이가 지금 보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내면, 우리는 아무리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어도 미련없이 영화관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이것은 핵심적이다. 우.리.는. 환.상.을. 좋.아.하.는.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 환상은 '진짜'의 열화된 대체재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 또한 실증적이다. 우.리.는. 그.냥. 안.고. 있.는. 것.이. 좋.다.


명상의 원형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가 아닌 존재의 상태를 체험하려는 방편이다. 이것은 무슨 상태인가? 우.리.가. 안.고. 있.으.며. 동.시.에. 안.겨. 있.는. 상.태.다. 존재에 접촉해 존재와 하나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명상을 하고 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환상'이 그들을 행복하게 한 것이 아니라 '환상없음'이 그들을 진정 행복하게 한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 문구가 있다.


"사랑하라, 기대없이."


여기에서의 '기대'가 바로 '환상'이다. 사.랑.은. 환.상.이. 없.는. 상.태.다. 환상 속에서는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 이야기 속에서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사랑을 잃은 이들이 사랑 대신에 눈물을 머금고 채택하고 있는 그.들. 자.신.의. 축.소.된. 가.능.성.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이것이 '진짜'라는 것은 누구라도 직관할 수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랑이다.


"나는 사랑이다."


예수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 바로 말해볼 수 있다. 고개를 들고 한번 나지막히 말해보라. 왜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직관된다. 우리는 사실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슨 일을 하는가?


고전적인 이야기들을 떠올려보자. 그 끝은 대부분 이러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살았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사랑을 잃게 된 비극적 결말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 비극성 때문에 사랑의 농도는 더욱 짙어진다. 모든 이야기의 끝에는 이처럼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중요하다! 이야기는 이 사랑으로 귀결되는 결말을 오히려 '과정'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활용한다. 이야기의 문법에 따라 과정을 잘 이행하면 그 보상으로 사랑을 얻게 된다는 식이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아.주. 비.열.한. 기.만.적. 술.책.이.다. 사실을 흐리는 방식이다.


이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문법을 해체해야 한다. 이야기의 과정을 따라갔더니 그 필연적인 완성의 결론으로서 사랑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이야기의 끝에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즉, 사.랑.은. 이.야.기.가. 멈.춘. 곳.에. 있.다. 환상이 없는 자리에 사랑이 있다. 사.랑.은. 과.정.과. 아.무. 상.관.없.이. 이.미. 놓.여.있.는. 그. 결.과.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과'로 바로 이동할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그 '결과'를 바로 알 수도 있다.


사.랑.은. 존.재.의. 스.포.일.러.다.


이야기의 환상에 빠진 이들은 스포일러를 싫어하겠지만, 사실을 사는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행복할 것이라는 스포일러를 아주 좋아한다.


실존상담에서 이 '결과'를 미리 아는 일은 핵심이다. 실존상담은 단서를 찾기 위해 내담자의 이야기를 한 문장 한 문장 정독하며 뒤지지 않는다. 머릿말 정도를 예의상 읽고는 바로 맨 뒷장의 결말을 펼친다. 신기 있냐는 말은 실존상담자들이 내담자들에게서 자주 듣곤 하는 피드백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기가 아니라 내담자 자신이 이미 창조했던 그 결말에 기인한 것이다. 실존상담자는 결말을 그저 소리내어 읽은 것뿐이다.


실존상담자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존.재.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는 성가신 어린아이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어르고 달래며 무의식을 끄집어올려야 존재가 진심을 털어놓는 그림은 실존상담에는 없다. 우리가 절대로 숨길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존재다. 존.재.는. 무.조.건. 스.스.로.를. 드.러.낸.다. 심지어 은폐의 방식으로도 존재는 자기 자신을 명확히 드러낸다. 존.재.에. 대.한. 이.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실.존.상.담.자.는. 작.업.한.다.


물론 이것이 언제나 유효하지는 않다. 환상에 아주 깊이 중독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반발을 부른다. 영화관에 지금 불이 났는데, 아이언맨이 핑거스냅을 하는 장면을 꼭 봐야 한다며 역정을 내는 이들은, 실존상담과는 궁합이 좋지 않은 이들이다.


실존상담이 가장 잘 기능하는 때는, 자기의 환상이 고통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라도 눈치채고 있는 내담자와 작업할 경우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속하며 그 효과가 아주 크다. 이러한 내담자는 결국 어떠한 이들인가? 자신의 가능성이 환상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답답하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있는 이들이다. 즉, 자신의 가능성을 더 크게 펼쳐내고 싶은 이들이다.


이것은 가장 큰 나를 향한 도전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모.습.이.다.


이것보다 큰 것은 없다. 다른 것이 더 커져도, 사랑이 그것보다 늘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내가 사랑했던 거구나."

"내가 사랑하고 있었구나."

"내가 사랑할 수 있구나."


전부 다 "나는 사랑이다."의 변주들이다. 내담자가 지참해온 그 모든 고통의 환상들이, 사랑의 실증으로 전환되는 순간은 실존상담의 꽃이다. 달리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랑.이. 존.재.의. 의.미.다.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다!"


이것은 어떠한 차원에서는 이렇게 스포일러한 것과 같다.


"당신이 사랑이다!"


사랑은 스포일러된 그것까지 사랑한다. 그래서 사랑이다. 이 말은 존재론적으로 아주 깊은 말이다. 정직하게 떠올려보자. 우리 존재의 운명은 이미 다 스포일러되어 있다. 결과가 정해져 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다 죽는다.


우.리.는. 다. 죽.을. 것.이.지.만. 바.로. 그.래.서. 사.랑.한.다.


사랑은 스포일러되었다고 "에이 어차피 죽는 거면 안 사랑할래."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사랑한다. 가.장. 크.게. 품.에. 안.는.다. 우리는 진짜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말을 이미 다 아는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그저 가.장. 크.게. 품.에. 안.는. 이. 사.랑.의. 일.을 좋아할 뿐이다.


이러한 사랑은 '과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결과'를 사랑하는 것이다.


한 아이가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해 평균 40점의 성적표를 집으로 들고 간다. 그 아이의 엄마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으니까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과정을 통한 합리화'다. 사랑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게 뭐야. 엄마 속상해서 죽을 것 같아. 너도 이런 성적표 보여주느라 죽을 것 같이 힘들지."


그러면서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울다가, 떡볶이나 해먹으며 함께 웃을지 모른다.


왜인가?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가? 아니, 왜인지는 몰라도 된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이 '진짜'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사랑이 '결과'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현재 일어난 결과를 100%로 긍정한다는 뜻이다. '긍정'은 '미화'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혼동한다. 속상한 것을 자꾸 "그것도 괜찮아."라며 거짓말을 한다. '과정'의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사.랑.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이.다. 그리고 존재는 이미 드러난 그 결과다. '속상한 것'에 대한 긍정은 '속상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진짜로 사랑하는 방식이다.


이 사랑을 통해 인간이 또 '죽을 것 같은' 운명에서 구원되었다. 이것이 사랑인 당신이 하는 일이며, 그러한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당신을 스포일러해보자. 당신은 분명히 또 사랑하고, 잔뜩 사랑하며, 가장 끝에서도 계속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을 스포일러할 이 책을 쓸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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