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복권: 심리학적 가족주의로부터의 귀가"
# 자아가 만드는 지배의 문화
우리는 한결 더 정직해볼 수 있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왜 배우거나 알려고 하는가? 마음을 유능하게 다룰 수 있다고 간주되는 멘탈리스트 같은 것을 왜 동경하는가? 왜 심리학 학위 하나 없고 수련과정 하나 안 밟은 가짜전문가들이 심리상담사를 사칭하는가?
지.배.하.고. 싶.어.서.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은. 지.배.하.되. 상.대.로.부.터.는. 지.배.되.지. 않.고. 싶.어.서.다.
심리학 내지 심리상담은 마치 자아가 가진 이 내로남불의 의도를 안전하고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줄 수 있는 수단처럼 인식되고 또 취급된다. 이것은 단지 대중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넘어서 있다. 오히려 반지성주의의 주술사회를 대변하는 시대적 상징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세련된 지배'의 방식에 대한 추구는 이미 병적이다.
물론 자아는 속임수의 전문가이기에, 남을 속이는 만큼 자기도 속인다. 이것은 자아의 유일한 전문성이다. 그래서 자아는 자기가 지배하려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당신의 소중한 마음을 함께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강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당신을 온전하게 바라보겠습니다."
"당신의 자유로움을 허용합니다."
"당신을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합니다."
자아는 정말로 자기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심리학 및 심리상담을 학습하고 실천한다고 믿는다. 자아는 원래 자기최면과 합리화에 능하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고급언어들로 자아가 이루고 싶은 현실은 다만 '지배의 현실'이다. 자유도, 사랑도, 수용도, 온전함도, 좋아보이는 그 어느 것이라도, 전.부. 다. 자.기. 손.바.닥.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현.실.이.다.
우리는 왜 자신이 결핍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자.아.로. 살. 때. 결.핍.감.은. 찾.아.온.다. 자아는 애초에 실체가 없는 것이라, 그 자체가 '결핍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간에 근본적으로 결핍을 경험한다. 그래서 자아는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한다. 좋아보이는 것은 약탈해서라도 다 자기의 것으로 하고 싶다. 아니, 이미 자기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어떤 것도 자기의 손 위를 벗어나면 안되는 것이다. 자아의 핵심이 '집착'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면서도 자아는 자기가 '자유인'인줄 안다. 자기계발강사들이 수줍게 웃으며 말하듯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도 하면서 돈도 버는' 아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인스타 선전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높이'의 문제다. 자기가 상대적으로 더 높이 있으니 자기는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통속적으로 "돈을 많이 벌면 자유로울 수 있을 거야."라고 하는 말이 담고 있는 발상과 같다.
본.질.적.으.로. 약.육.강.식.의. 논.리.다. 다단계의 피라미드 구조와 같은 이야기다. 자아는 자기를 높은 상위계급이라고 간주하기에, 자기가 '자유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가 자기를 '높이' 세우기 위해 의존하고 있는 소재는 무엇인가? 이 글에서 묘사하고 있는 경우, 그것이 바로 심리학이다. 마음에 대한 정보며, 그 실천론이다. 자아는 자기가 마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최소한 잘 알 수 있는 방법론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에 근거하여 자기를 상위계급으로 위치짓는다.
그러니 자아는 자기가 지배되는 일을 싫어한다. 자기가 제일 높은 '주인'의 입장인데, 그러한 자기를 지배하려고 하는 일은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자아는 자유를 사랑하기에 지배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유를 고급언어로 은밀하게 지배하는 주인의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되지 않으려 한다.
"지배하되, 지배되지 말자."
분명한 자아의 슬로건이다. 이것은 타자와 세계를 향한 자아의 태도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을 향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는 이제 몸의 문제를 시사한다.
# '몰락한 몸'으로서의 마음과 심리학적 카스트제도
우리는 흔히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신건강의 차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관계는 독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몸과의 관계'다. 우.리.가. 자.기.의. 몸.과. 맺.고. 있.는. 관.계.만.이. 중.요.하.다. 이것은 엄밀하게는 관계라고 규정할 수는 없으나, 관계처럼 묘사해볼 수는 있는 것이다. 관계적 성질을 갖는 듯이 보이니 '관계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몸과의 관계성은 다른 관계들과 분명하게 변별된다.
관.계.는. 마.음.의. 논.리.고. 관.계.성.은. 몸.의. 생.리.다. '관계성'이 붕괴되었을 때 '관계'가 출현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마음과 몸의 실제를 떠올려보면 이 이해는 분명해진다. 몸과 접촉되지 않은 그 간극에서 생겨나는 '가상적 소재'를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이란 것은 원래 없다. 몸.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인. 느.낌.만. 있.을. 뿐.이.다. 이 느낌을 언어화해 기억과 뒤섞어 버무린 가상의 구성물이 바로 마음이다. 그래서 '몸과 하나된 관계성'으로 사는 이에게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것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바로 접촉되기 때문이다. 더욱 명징한 삶이다.
마.음.에. 대.한. 모.든. 말.은. 다. 몸.으.로. 바.꾸.어.서. 이.해.하.면. 더. 편.리.하.고. 정.확.하.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사실적인 지평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라는 표현을 우리가 쓰게 될 때는 우리에게 있어 중대한 모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란 바로 '분리감의 문제'다.
마.음.은. 일.종.의. 분.리.감.이.다. 이것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힘들게 만든다. 분리되어서 불안하고 두려우니 관계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렇게 관계로 인해 더 힘들어진다. 관계는 마치 중독재처럼 힘들어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소재가 됨으로써 이제 마음은 관계의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표류하게 된다. 힘겨움의 정도는 나날이 증대된다. 우리가 '마음의 문제'를 호소하며 상담소를 찾을 때 우리는 실은 이 '분리감의 문제'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분리감이 생겨나는가의 문제다. 무엇이 분리를 만드는가?
언.어.가. 분.리.감.의. 원.인.이.다.
언어는 대상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언어 자체가 대상을 지시하기 위한 수단인 까닭이다. 따라서 몸의 느낌에 언어가 작용할 때, 우리의 몸은 우리의 대상이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우리와 분리된다. 이렇게 보자면, 마.음.은. 몸.이. 대.상.화.된. 그. 결.과.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화된 것은 이제 상대적인 현실에 위치하게 된다. 무엇을 해도 반쪽이다. 무엇을 해도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 것만 같다. 이러한 '마음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이것저것을 시도하는 것이 바로 '자아'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몸.의. 느.낌.을. 언.어.로. 대.상.화.해. 마.음.을. 출.현.시.킨. 그. 주.체.가. 바.로. 자.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인위적으로 고통을 부여한 뒤에, 자신이 그 고통을 치유해줄 영웅처럼 나서는 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것이 바로 자아의 모습이다. 자.아.는. 본.질.적.으.로. 가.스.라.이.터.다.
자아는 시작부터 지배하고자 한다. 자아는 왜 느낌을 언어화하는가? 어떠한 느낌이 버겁게 느껴질 때 그 느낌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즉, 몸을 통제하기 위해 자아는 언어를 집행하며, 그 집행의 결과 '노예화된 몸'의 편린이 곧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그.것.이. 마.음.이. 된. 순.간.부.터. 이.미. 노.예.의. 상.태.다.
이것은 '몸의 몰락'이다. 마.음.은. 곧. 몰.락.한. 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가장 몸의 느낌을 통제해서 '마음노예들'을 최대치로 만들어내는 자아의 세력들이, 오히려 자기의 놀라운 언어능력으로 마음을 자유롭게 해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는 결국 마음을 임의적으로 가두기도 하고 또한 해방하기도 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전능한 자신'의 모습을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몸을 도구로 삼아 이 '병주고 약주는' 상위계급의 권력을 집행하며 '마음의 신'이라도 된 듯한 도취에 빠진다.
그렇다면 분명해진다. 원래는 다 '몸'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을 우리가 '마음'이라고 이해하게 되는 그 주요한 이유에는 자아가 있다. 자.아.가. 의.도.적.으.로. 분.리.감.을. 조.장.한.다. 그래야 자신이 '마음의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신'이 됨으로써 자아가 얻는 이득은 몸에 대한 통제기제의 확보다.
자아는 직접적으로 몸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언어를 사용해 몸의 전모를 가장 축소시켜 '마음'이라는 도구적 대상물로 바꾼 뒤에 그것에 통제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급의 서열'에 따른 명령의 집행방향은 다음과 같다.
자아(마음의 신) -> 마음(노예) -> 몸(불가촉천민)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심리학적 카스트제도'의 성립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자아는 언어로 몸을 몰락시킴으로써 이 '심리학적 카스트제도'를 건설하려고 한다.
새.로.운. 심.리.학.적. 카.스.트.제.도.는. 결.국. 또. 하.나.의. 바.벨.탑.을. 건.축.하.고.자. 하.는. 꿈.이.다.
이 작업에 동조하는 이들은 분리감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아가 바로 그 분리감을 제공한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오히려 자아의 기획에 힘을 더한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자신이 수호하려고 하는 이 일은 내담자들이 가진 영원한 숙제와 같다. 그만큼 자아가 유능한 가스라이터라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 몸을 대하는 '마음의 신'의 태도
자아가 '심리학적 카스트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사실 몸.이. 두.렵.기. 때.문.이.다. 왜인가? 아무리 가장 밑바닥으로 몰락시켜도, 몸이 충분히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의 신'으로서의 자아의 권위는 끊임없이 몸에 의해 도전받는다. 언제라도 자아 자신이 역으로 가장 밑바닥의 계급이 될 것만 같다.
특히 자기의 노예인 마음이 몸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된다. 그것은 반란이다. 마음이 '마음의 신'을 거부하고 몸을 향하는 현실은, 자아에게는 가장 끔찍한 현실이다. 그동안의 자기의 모든 노력이 전부 다 헛된 것으로 화하는 절망의 현실이다.
그래서 자아는 늘 배신을 경계한다. 우리가 자아로 산다는 것은 '배신의 기제'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늘 자기를 배신할 것처럼 간주하며, 그러기 전에 자기가 먼저 배신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아는 배신의 경험만을 누적시켜간다. 자.아.의. 역.사.는. 분.명.하.게. 배.신.의. 역.사.다. 그것도 전부 다 자기만이 배신한 역사다. 물론 자아는 이를 거꾸로 지각한다. 늘 자기는 배신당하며 살았다고 눈물을 훔치곤 한다. 순도 100%의 거짓말이다.
자아는 늘 남의 것을 훔쳐 자기의 것처럼 선전하여 그 영광의 이득을 취하며 산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자아로 사는 이들이 자기의 것처럼 자랑스럽게 선전하는 소재들을 보면 자기의 재능 및 노력으로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 남의 말과 글을 훔쳐 자기의 책처럼 내고, 남의 생각을 훔쳐 자기의 강의처럼 만들며, 남의 모습을 훔쳐 자기의 모습처럼 삼는 것이 자아다. 이 배신의 역사는 시작부터 그러했다.
몸.이. 누.려.야. 할. 그. 영.광.을. 자.아.는. 자.기.가. 마.음.의. 신.처.럼. 대.신. 취.했.다.
애초에 이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출현한 자아다. 그러니 자아는 언제 죽창에 찔릴지 몰라 늘 두렵다. 특히 밑바닥에서 터져나올 몸의 분노가 자아에게는 가장 두렵다.
"지배하되, 지배되지 말자."
'마음의 신'인 자아가 몸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에는 이 두려움이 깊게 배어 있다. 몸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자아는 몸을 더욱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해낸다.
EFT니 NLP니 IFS니, 마치 과.학.적.인. 전.문.용.어.처.럼. 보.이.기. 위.해. 자아가 최선을 다한 방법론들이 있다. 그래야 이러한 상위계급의 지적 유능성에 더 많은 이가 동의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심리학적 카스트제도'가 지지되고, 그 구조 속에서 몸을 지배하려는 자아의 의지가 정당한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 실제를 보면, 분명 효용도 있는 것 같다.
버스정류장을 잘못 내린 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진 채 자기의 관자놀이와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톡 미친듯이 두드리는 사람의 모습을 혹시 본 일이 있는가? 잘못 실행된 프로그램의 오류를 잡아 알고리즘을 다시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하는 마법의 기술이라나 뭐라나 한다. 또는 부장님에게 혼난 뒤 자기 자리에 앉아 1시간 동안 멍하니 자기 몸의 모습을 우주에서 바라봤다가 지척에서 바라봤다가 하는 일만을 반복하는 이의 모습도 본 적 있는가? 스타워즈에 나오는 깡통가면들이 지을 법한 비장한 표정이다. 또는 자기 몸 안에 분노찰리와, 우울사만다와, 권태토마스가 살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본 적이 있는가? 미국 시트콤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을 그 밖에서 지켜보는 이에게는 웃음테라피로서의 충분한 효용이 있을 수 있다고 우리는 평가가능하다. 그러나 그 당사자들에 대해서는 이것이 바로 당신들의 몸이 '마음의 신'에게 지배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배하되 지배되지 않으려는 이 방식은 마치 아.이.를. 효.과.적.으.로. 양.육.하.려.는. 부.모.의. 태.도.와. 흡.사.하.다. 양육은 '부드러운 지배'의 방식이다. 자아는 몸을 이 양육의 방식으로 대한다. 자아 자신이 아이처럼 미숙한 몸의 부모인 것처럼 군다. 또한 상기한 자아의 방법론들은 일종의 '몸 조련법'이기도 하다. 반려동물을 조련시키듯이 몸을 조련시키고자 하는 그 방식이다. 이처럼 자아는 '자상한 부모'이자 '유능한 조련사'로서 자기를 위치짓는다.
자아가 이러한 '양육'과 '조련'의 방법론들을 열성적으로 보급하려는 근본적인 목적은 '사상교육'이다. 이 방법론들이 유용하다는 그 효용의 선전보다도, "우리 몸이 이렇게 모자라요."라는 세뇌를 사람들에게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더 크다. 그.래.야. 불.가.촉.천.민.으.로.서.의. 몸.의. 위.상.이. 공.고.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는 이 밑바닥에 있는 구제불능의 대상에 대해 '자상한 부모'와 '유능한 조련사'의 입장으로 헌신하는 과정을 관철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채널의 흥행을 성공시키고자 한다.
"우리 몸이 이렇게 달라졌어요."
사람들이 이 '놀라운 경험'을 목도하며, 가장 미천한 것에 대해서조차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자아의 '따듯한 헌신'에 박수를 보내는 동안, 자아는 감격에 취한다.
"내가 드디어 해냈어. 언어를 통해 마음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몸을 바꾸는 일에 성공한 거야!"
카스트제의 구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몸.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 자아는 이제 '마음의 신'으로서의 자기의 권위를 스스로 드높인다. 자아도취쇼가 성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을 알아보자.
화가 났을 때 30분간 이마를 두드린 그 결과로 화를 다스려 몸을 평온하게 하는 일에 성공했다고 믿는 이가 있다. 사실은 무엇일까? 벤치에 앉아 10분간 가만히 있으면 화는 사라진다. 몸은 더 빨리 평온해진다.
또한 화가 났을 때 2시간 동안 글을 쓴 그 결과로 화를 만나 몸을 자유롭게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고 믿는 이가 있다. 사실은 무엇일까? 괴성을 크게 지르면 1분만에 화는 만나진다. 몸은 더 빨리 자유로워진다.
심지어는 화가 났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몸의 느낌을 다만 온전히 수용하고 있던 그 결과로 화라는 마음의 이야기를 알게 됨으로써 몸을 치유하는 일에 성공했다고 믿는 이가 있다. 사실은 무엇일까? 몸을 지배하려 하지 않으면 애초 이와 같은 화는 나지 않는다. 몸.은. 이.러.한. 방.식.으.로. 치.유.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예들이 말해주는 것은 자아가 몸에 대해 집행하는 어떠한 방법론에도 그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몸.이. 스.스.로. 한.다. 몸은 미숙아가 아니다. 스스로 지혜로운 것이 몸이다. 몸이 항상성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던 그 시간에, 자아가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척한다고' 그것이 사실적인 치유의 기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아가 그렇게 하려는 이유는, 이. 모.든. 상.황.을. 자.기.가. 지.배.하.고. 있.던.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만약 자아가 하는 이 행태를 우리가 심리상담의 치유적 효과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배력이 치유력이다."라는 이 말에 대해 진리라고 동의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동.의.한. 것.은. 우.리.에.게. 작.동.한.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지배될 것이다. '다정한 치유'라는 외연을 띠고 가스라이팅은 흥을 다해 시도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이미 많은 부분 이 자아라고 하는 '마음의 신'에게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마음의 신'은 활개를 치며, 게임의 구조처럼 더 많은 마음노예들을 만들어내어, 몸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봉쇄하고자 하는 독재를 펼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지점을 면밀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 무종교시대에 도래한 가족주의: '심리학적 올바름'을 표방하는 IFS
지금이 '무종교시대'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가 이루어진다. 이 무종교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종교를 갖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는.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자.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은폐된 것'은 언제나 자정작용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무종교시대에 '종교적인 것'으로 추구되는 것은 바로 '가족'이다.
가.족.주.의.가. 실.은 .이. 시.대.의. 종.교.다.
디즈니에서 양산해내는 미디어물을 보라. 하나같이 가족주의의 찬송가와도 같다. 어벤져스는 정확하게 이 가족주의의 연대기물이다. 대립도 하고 반목도 하던 '가족구성원들'이 끝내는 '가족'을 위해 화합함으로써 종말론적 문제들을 해결해낸다. 가족의 범주는 더욱 확장된다. 현 우주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우주에도 실은 가족이 있다.
정치적 올바름(PC)의 운동은 이 가족주의가 확장되고자 하는 의지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것은 단지 인권존중의 차원이 아니다. 그 메시지는 정확하게 이러하다.
"그들도 온전한 우리 가족이라구. ㅜㅜ"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심리치료의 이론 중 하나는 '내면가족제도'라고 번역될 수 있는 IFS(Internal Family System)다. 『소인격체 클리닉』이라는 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내면아이' 등의 용어는 여기에서 곧잘 활용되곤 하는 개념이다.
상기한 메시지는 그대로 이 IFS의 표어로 작동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전까지 불순물이자 이단아로 취급받던 '마음'이 실은 얼마나 전체의 시스템을 위해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얼마나 온전했는지를 알아줌으로써, 이제 그 마음이 큰 가족 안으로 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최면이론에서의 분아적 접근과 동일한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적. 가.족.주.의.라.고. 통.칭.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이러한 '심리학적 가족주의'의 논리가 대세로 작동하고 있는 시대다. 아이돌이나 어린 연예인들의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라. 다 삼촌과 이모들이고, 대부이자 대모들이다. 팬.덤.은. 이. 가.족.주.의.의. 방.식.으.로. 구.성.된.다. 오늘날의 정치도 그러하다. 비판적인 한 세력이 출현하면, 반대편에서는 옹호적인 '가족'이 출현한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오늘날에는 이 '가족의 힘'이 아주 강대해졌다는 것이다. 그 어떤 공공적 권위에 대해서도 이 가족의 세력은 결코 그 세가 밀리지 않는다. 가.족.의. 어.벤.져.스.화.다. 아니 역으로 어벤져스가 바로 이 가족주의의 영웅적 묘사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가족'이라고 하는 영웅은 가족 밖으로 추방되었던 소재를 다시 가족 안으로 '올바르게 되돌리는' 일을 한다. 그래서 가족주의의 표현인 IFS는 '심리학적 올바름'의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분히 윤리적이며, 바로 그렇기에 잠정적으로 문제는 내재된다. 이미 표면화되어 있기도 하다.
윤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신적인 것' 내지 '종교적인 것'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종교성'이 몰락한 것이 '윤리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종교적인 것은 윤리적인 것일 수 있지만, 윤리적인 것이라고 종교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자가 더 커다란 집합이다.
실존주의는 종교적인 것인가, 윤리적인 것인가? 콜린 윌슨은 여기에 대해 분명하게 답한다. 윤리성을 향한 실존주의는 몰락했고, 종교성을 향한 실존주의는 살아남았다고 그는 진단한다. 여기에서 '종교적인 것'이라는 표현을 '초월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종교성'이란 '초월성'이다.
실존주의는 이 초월성에 대한 묘사다. 밖(External)을 향하는 나(I)의 실존(Existence) 운동이다. 이처럼 실존상담은 EIE다. 모든 면에서 IFS의 반대편에 선다. EIE의 표어는 '심리학적 올바름'이 아니라 '심리학적 자유함'이다. 자.유.는. 초.월.의. 다.른. 이.름.이.다.
아무리 큰 것이라 하더라도 '제도'가 지배하는 한 그것은 초월이 아니다. 실존은 언제나 제도(체계, 구조)에 반동한다. 이 반동이 우상해체의 운동이 되며, 동시에 초월지향의 운동이 된다. 윤리는 자신이 가장 큰 제도를 이루고자 한다. 그러나 종교는 가장 큰 그 제도를 해체함으로써, 언제나 그것보다 더 큰 '절대성'의 현실을 암시하고자 한다. 실존은 이 자유를 향한 종교적 방향성에 충실하다.
가장 실존적인 종교전통을 꼽으라면 역시 붓다의 불교와 예수의 기독교를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가족주의를 배척했다. 그러나 '제도화되면서' 반어적이게도 이 둘은 가장 대표적인 가족주의의 상징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제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제도'는 그 아무리 큰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의 입맛대로 가공해 더 작은 것으로 만들어 자.기.의. 손.바.닥. 위.에. 놓.는.다. 제도를 추구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눈치채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바로 '자아'다.
자.아.는. 무.종.교.시.대.의. 영.웅.이.다. 자아는 종교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으로 뒤바꾼다. 그리고는 그러한 언어적 집행력을 가진 자기만을 '종교적 영웅'으로 위치시킨다. 이것은 아주 교묘하다. 무종교시대에 자아가 새로운 카스트제도의 상위계급이 되려는 그 방식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가족주의의 카스트제도를 보급하는 자아는 겉으로는 '윤리'를 표방하지만 실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종교'를 꿈꾼다. '마음의 신'을 믿는 가족주의의 신흥종교는 이렇게 출현한다.
프로이트와 융도 '신'의 자리를 '마음'과 연결지으려는 그 일을 시도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에 '신적인 아버지'를 이식하려고 했고, 융은 '신적인 어머니'를 이식하려고 했다. 가족주의는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신의 왕국'을 인간의 심리에 제도화시키려는 야망을 품는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개인의 내면에 스머프 마을을 만드는 일과 같다. 마을에 살고 있는 스머프들은 카스트제도가 정한 규율에 따라 저마다의 개성으로 마을이 잘 돌아가게 하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라도 없으면 안될 귀한 보물들이다. 그러나 서로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려다보니 가끔씩 역할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성실이스머프는 늘 게으름스머프와 갈등을 빚는다. 그러다보니 게으름스머프가 마을의 변두리로 추방당해 속상해하는 현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스머프 마을의 현실은 개인의 몸으로도 반영되어, 누군가는 게으름스머프가 추방되어 위치한 왼쪽 새끼발가락이 마비되는 증세를 경험하기도 한다고 보고된다.
이럴 때 스머프들의 신이 나타난다. 그는 파파스머프보다도 높다. 스머프들의 신은 이렇게 말한다.
"얘 스머프들아, 우리 한번 게으름스머프의 온전함을 만나보지 않겠니? 성실이스머프는 늘 성실하게 일해줘서 참 고맙단다. 너는 아주 아름다운 존재란다. 그러나 네가 너무 열심히 일하다가 지치게 되었을 때, 그럼에도 네가 쉬면 안된다고 꾹 참으며 더 힘들어지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를 위해 게으름스머프가 있었던 거란다. 게으름스머프가 우리 마을에 있어줘서 우리가 힘들 때면 우리는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거란다. 얘 성실이스머프야, 게으름스머프와 너는 대극이란다. 너희가 서로를 지켜주고 있는 서로의 온전함을 알고 화해할 때, 우리 마을은 변증법적으로 더 발전하게 될 거야. 그런 너희의 모습이 나는 아주 자랑스럽단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
스머프들이 한 목소리로 말한다.
"게으름스머프야, 미안해. 우리가 너의 온전함을 몰랐어. 우리가 미안해. 어리고 약한 것이 혼자서 얼마나 속상했을까. ㅜㅜ 이제 너를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거야. 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가족이라구! 게으름스머프야, 너는 온전해! 우리가 다 너를 사랑해!"
이러한 '심리학적 올바름'의 유치원 동화구연 대회를 주재하고 있는 이 스머프들의 신은 누구인가?
바로 '참나'라고 불리고 싶어하는 자아다. 자아는 '참나'라고 불림으로써 자기는 자아 아닌 것으로 '초월된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나, 이것은 누구보다 자아인 것이다. 여.기.에.는. 초.월.이. 없.다. 붓다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냈다.
이러한 '참나'의 속성은 '다정한 아빠'다. 이 '다정한'이라는 표현에는 아주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남성성의 긍정적인 최대치와, 여성성의 긍정적인 최대치가 다 담긴 표현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자아주체가 꿈꾸던 '환상의 아빠'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표현이다. '다정한 아빠'란 결국 '심리학적 올바름'의 궁극적인 구현자인 것이다.
제도종교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였던 것이, 프로이트와 융을 거쳐, 오늘날의 심리학적 가족주의에 도달하면서는 이제 '다정한 아빠'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인간의 그 어떤 소재와도 경계가 분명했던 자리에 대해, 이제는 자아가 그 자리를 대신 꿰찰 수 있게 되었다.
자아가 '다정한 아빠'로 행위하든 '사악한 아빠'로 행위하든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신적인 것이 아닌 것'이 '신적인 것'처럼 행위한다는 데 있다. 이것이 자아의 유일한 문제다.
여기에서 참나라고 하는 이 자아는 일종의 작가의 입장처럼 형상화된다. 스머프들의 신은 스머프가 아니다. 스머프들을 자기의 책 속에 창조한 작가가 바로 스머프들의 신이다. 자아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가 몸을 몰락시켜 만든 '마음'과 자기를 변별한다. 자.아. 자.신.만.은. 마.음.이. 아.닌. 척.한.다. 마음 밖에 있는 모종의 메타인지적 주체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마음이란 것이 몸에 대한 언어작용의 부산물이라면, 고순도의 언어로 만들어진 자.아.야.말.로. 가.장. 마.음.적.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배.하.되. 지.배.되.지. 않.으.려.는. 자아의 기획은 산산조각난다. 이것은 마치 자기는 AI가 아닌 것처럼 굴며 AI들에게 자상하게 대하던 한 '인간'이, 상처가 난 자기의 살갗 아래로 기계의 골격을 보게 되는 일과도 같다. 카스트제도의 해체이며, 신의 옥좌로부터의 추락인 것이다.
자기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초월자'인 척하던 입장이야말로 자아가 자기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는데, 이제 자아에게 그 근거가 상실되면 자아는 '몸' 앞에 무력하게 노출된다. 자기가 불가촉천민으로, 혹은 고작해야 '느낌을 알려주는 도구' 정도로 하대하던 몸이 스멀스멀 죽음의 냄새로 다가오는 위협감을 경험한다.
그래서 자아는 다시 한 번 가족주의 속으로 도피하고자 한다.
"SNS가족들아, 나에게 힘을 줘!"
원기옥을 모으는 손오공의 마음으로 간절한 자아는 지금 고립된 듯한 '분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힘이 아니다. 친.밀.감.이.다.
# 친밀감: '하나임'의 몸으로 돌아오는 경험들
분리감은 마음의 것이다. 표현 그대로, 몸으로부터 분리되었기에 마음은 분리감을 항시적으로 내포한다.
우.리.는. 주.변.에. 다.른. 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몸.을. 잃.어.서. 외.롭.다.
자아는 몸을 남용하고, 자아가 만든 '제도'는 몸을 억압하며, 제도의 이념인 '심리학적 올바름'은 몸을 왜곡시킨다. 요즘의 PC 문화를 보면 이는 명백하다. 이것은 '왜곡된 것'을 복권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부러 '왜곡된 것'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일에 가까워졌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스머프 왕국을 만들어 '원맨쇼'를 하는 일은 이 왜곡을 심화시킨다.
정말이다. "이 마음이 어떻고, 저 마음이 어떻고, 아하 다 온전하구나!" 이러한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정처없이 외로워진다. 이것은 방구석에서 '마음놀이'를 하지 말고, 나가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대외활동을 하란 뜻이 전혀 아니다. 그래도 외로워질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외로운 마음이 있으면, 그 외로운 마음 옆에서 함께 있어줘야겠다. 외로움이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지 그 온전함을 알아줘야겠다. 마음아 내가 같이 있을게!"
이것은 중증이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우.리.는. 마.음.에. 대.해. 다. 잊.을. 수. 있.다. 이것이 희망이다. 마음이 아니라 몸만을 남겨보라. 이것은 생각하지 말고 다만 느껴보라는 말이 아니다.
몸은 느낌을 수신하는 도구인가? 가만히 느껴보면 몸이 그 느낌을 받아서 "아하!"하며 마음의 정보를 제공해주게 되는 그 역할인가?
그렇지 않다. 몸은 도구나 역할이 아니다. 몸은 느낌에 '대한' 그 무엇이 아니다.
몸.은. 느.낌. 그. 자.체.다.
느.낌. 그. 자.체.로. 존.재.함.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이 느끼는 일은 자연스럽다. 당신이 느끼지 말아야 하거나, 느껴선 안될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다 당신의 몸이다. 당신의 몸이 금지되어야 할 이유는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 당.신.은. 존.재.해.도. 된.다. 얼마든지 당신으로 존재해도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고, 이런 감정을 가지면 안되고, 이런 느낌을 느끼면 안된다고 하던 그 모든 것들이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의 몸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전격적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한다. 당신이기를 선택한다.
당.신.이. 그.렇.게. 존.재.하.게. 되.었.을. 때. 제.일. 처.음.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 바.로. 친.밀.감.이.다.
언어가 빠지고 당신이 직접적으로 몸과 접촉하게 된 덕분이다. 이것이 '몸과 하나된 관계성'이다. 이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다. 마.음.이.라.는. 잉.여.를. 남.기.지. 않.는.다. 전면적 접촉(full contact)이다. 부분으로 분리되지 않았으니, 거기에 분리감이 이미 없다. 그러니 친밀하다.
당신의 그 개별적 몸은 당신을 외롭게 하는 소재가 아니라, 당.신.이. 혼.자. 있.어.도. 친.밀.감.을. 체.험.하.게. 해.주.는. 당.신.의. 존.재.다.
이러한 몸에 접촉하지 않아 몸을 잃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많이 외로워져서 친밀감을 갈망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 친밀감을 얻을 대체재로서 가족주의를 채택한다. 그러나 그 어떤 가족주의의 문화 속에서도, 심지어는 실제의 가족 속에서도, 당신은 더 외로워진 경험만을 반복해왔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참나 같은 '상위계급'이 되면 혹시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하며, 수행도 하고 심리학도 공부하며 열심히 해봤지만, 그 결과는 외로움에 피곤함까지 가중된 현실이었다.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자아의 야망처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친밀감 속의 '하나임'을 느끼기만을 바랐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야 모두가 '하나임'을 이룰 수 있다고 외치던 것은 다만 자아의 열기다. 자아는 그냥 뜨거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연금술의 항아리 속에서 태어난 까닭에, 자기를 계속 불태워야 그 면모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따듯한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친밀감의 온도다. 바.로. 우.리. 몸.의. 온.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온도를 느끼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결코 모든 인류와 구조적으로 하나이고 싶지 않다. 가족주의의 제도 속에 하나로 용해되고 싶지 않다. 스머프 마을에서 하나의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지 않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과의 '하나임'의 온도를 체감하고 싶다.
탕아가 돌아와야 할 곳은 이 '하나임'의 품속이다.
몸.이.야.말.로.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모.든. 경.험.이. 돌.아.올. 유.일.한. 곳.이.다.
우리가 복귀함으로써 몸은 우리가 돌아올 그 자리로서 복권된다. 이 '마음'을 받아줄 곳을 찾아 오대양 칠대륙을 다 떠돌았다. 그 끝에 우리는 알게 되었다. 언제라도 받아질 수 있도록 몸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있었음을. 아니, 이미 우리는 아주 많은 경우를 '받아진 채' 살아왔다.
복음성가에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힘들 때를 뒤돌아보니 길 위에 난 발자국이 한쌍뿐이었던 이유는, 몸이 우리를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실제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를 떠올려보라. 자아가 의지로 했던 것이 아니다. 몸이 해주고 있었다. 안되는 것을 억지로라도 되게 해주려고, 몸이 구멍난 양말처럼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 행성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든든한 아군이 우리의 몸이다. 자아보다 지혜롭고, 가족보다 따듯하며, 참나보다 자상하다. 우리에게 가장 친밀한 것이다. 브렌다몸과, 피터슨몸과, 챔벌린몸이 있지 않다. 몸은 하나며, 당신을 위한 당신만의 하나다. 유일함으로서의 1이며, 하나임으로서의 1이다.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에게 아주 특별한 것이다.
실.존.은. 당.신.이. 이. 몸.으.로. 사.는. 일.이.다.
당신은 이 몸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작가인가? 그렇지 않다. 그냥 업혀라. 집으로 돌아가자. 업혀서 가만히 있으면 더 잘 느껴진다. 이 따듯한 친밀감 속에 문득 당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아주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당신의 할 일을 다한 것이다. 이것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