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43

"삶의 예술가가 태어나는 곳: 마음챙김과 엄마챙김, 그리고 홀로챙김"

by 깨닫는마음씨




# 마음의 관계주의와 마음챙김 장사꾼들


실존이라는 개념이 관계, 체계, 제도, 조직, 구조 등과 같은 일련의 '관계적 문법들'의 반대편에서 성립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에는 독재에 대한 염증이 있다. 이를테면 '최고의 독재'를 형상화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깨달음은 관계[구조]다."


이러한 말에는 교묘한 권력적 의도가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이 말을 발화하는 주체가 신처럼 행세하고자 하는 의도다. 모든 것이 관계임을 '알아보고 있는' 주체 자신이 그 '앎'의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들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관계의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관계 밖으로 빠져 그것이 관계임을 알아본 이 '탈동일시적 메타인지의 주체'만이 이러한 신적 위상을 점한다. 다른 이들은 근본적으로 우민이고, 자기만이 관계 밖으로 빠지기도 했다가 필요할 때면 관계 속으로 들어오기도 하는 등의 준독립적 현실을 갖게 된다. 마치 게임 속으로 들어가 NPC들과 소통하다가 자기는 게임 밖으로 로그아웃한 뒤 NPC들에게 초월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게.임.유.저.의. 감.각.과.도. 같.다.


이 게임의 감각은 소위 말하는 '마음챙김(mindfulness)'을 통해 대표적으로 형성된다. 이것은 "아하! 이런 마음이었구나!"하며, 표현 그대로 마.음. 밖.으.로. 나.와. 그 마.음.을. 앎.으.로.써. 챙.기.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챙김에는 발달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마음에 집중하거나, 마음을 글로 써보는 등의 행위로 마음챙김을 이루다가, 조금 익숙해진 뒤에는 가만히 있어도 "아하!"하며 마음이 앎으로써 챙겨지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대가 이런 단계에 이른 마음챙김의 주체는 거의 모든 경우에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마음을 수용함으로써 그 마음을 수용하고 있던 '마음이 아닌 메타인지'가 체험될 때, 이 메타인지의 힘을 더 크게 키우는 '훈련'을 통해 이들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는 훈련의 성과로 인해, 인위적으로 마음챙김을 하지 않아도 잘 훈련된 운동선수처럼 그 메타인지의 힘이 자동으로 발현되며, 이러한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깨달음'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마음챙김의 전문가'가 된 것뿐이지, 깨달음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 번째로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훈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깨닫는다는 것은 애.초. 챙.겨.야. 할.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정말로 사실로서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禪)에서는 늘 이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도널드 퍼서의 『마음챙김의 배신(McMindfulness)』에서는 마음챙김을 소비하는 이들이 그것을 자본주의적 권력의 소재로 소비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실제는 '윤리로 위장한 장사'다. 윤리적 담론으로 기능해 더 많은 이들이 '건강한 발전적 현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소비해야만 할 것 같은 당위적 동기화에 빠지게 함으로써, 더 많은 상품의 판매를 촉진해낸다. '마음챙김 장사꾼들'의 마케팅 전략이다.


이것은 비단 미국의 경우만이 아니다. 마음챙김 장사꾼들은 오늘날 한국에서도 폭발적으로 번성하고 있다. 특히 오컬트나 사이비심리학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은, 그들이 판매하는 상품이 무엇이든 간에 전부 다 '마음챙김'을 팔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보이는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마음을 '다양한 마음들의 관계'로 묘사한다.

2) 관계들을 정리하고 통합해서 그 방향을 제시할 '마음의 대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마음의 대장'이 되려면 메타인지를 발달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4) 호오포노포노, NLP, 융의 심리구조론, 꿈, 글쓰기 등을 통해 메타인지를 발달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5) 메타인지를 통한 마음챙김이 능숙하게 훈련되면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6) '마음의 대장'이 현실에서도 '세상의 대장'의 권위를 얻어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무.협.지.와. 라.노.벨.을. 많.이. 본. 이.들.이. 이.러.한. 판.타.지.를. 생.산.하.고. 또. 소.비.한.다.


다양한 문파들이 서로 갈등을 빚는 무림에 혜성처럼 나타난 주인공이 기연과 수련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의 힘을 기반으로 무림을 통일하여 '최고의 고수'로 인정받게 되는 통속적 삼류 스토리와 같다.


이처럼 마음챙김의 장사꾼들은 이 무협지를 색다른 용어로만 포장해서 팔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늘 똑같다. 쉽게 요약하면, 마음을 알아줘서 '마음의 대장'이 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어 '마음'은 '관계'이니, 결국 이들은 '관계의 대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자.기.가. 이. 세.상.의.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마음챙김 장사꾼들에게 사람들이 혹하는 이유는, 이.들.이. 파.는. 상.품.을. 구.매.하.면. 자.기.도. 왕.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적인 착각이다. 구매자들이 왕이 되는 현실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교묘한 사기극이다. 사실을 알아보자.


마.음.챙.김. 장.사.꾼.들.은. 왕.이. 되.게. 해.준.다.는. 말.을. 미.끼.로. 삼.아.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사기꾼의 경우와 동일하다. 어떠한 방법이 그렇게 성공적이면, 자기가 그것을 이루면 되는 일이다. 다른 이들에게 팔아야 할 이유가 없다. '로또 당첨되는 법'을 파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주 명료하다. 남들에게 팔기보다는 자기가 그 방법으로 매회 당첨되는 일이 수익률도 더 높다.


결국 무협지처럼 '세상의 대장'이 되는 방법이란 없다. 심지어는 그 방법을 팔고 있는 이들도 '세상의 대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본질은 '세상의 낙오자'에 가깝다. 그러나 이 사기꾼들의 상품을 구매하는 그 행위를 통해, 구매자들이 사기꾼을 마치 '대장처럼' 만들어 주고 있는 것뿐이다.


마음을 관계로 보고자 하는, 또 그 관계를 이끌어줄 '마음의 대장'이 되고자 하는 기획에는 바로 이러한 '속셈'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흥미롭게 관찰되는 현상은, 실은 마음상품의 구매자들이, 판매자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품을 구매해 그를 '대장처럼' 만들어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왜 펼쳐지는 것일까?



# '올바른' 애착관계에 대한 지겨운 판타지


"저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어요. 부모님은 저를 돈으로만 키웠지,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않았어요. 늘 저는 따듯한 정이 그리웠어요. 부모님이 사랑한 것은 제 동생뿐이고 저는 늘 방치되어 있었어요. 동생이 사랑받는 동안, 저는 아이인데도 어른처럼 청소를 하고 심부름을 해야 하는 '어른역할'을 강요받았어요. 아이인데도 아이처럼 느끼지 못하고 늘 성숙하게 행동해야만 했어요. 저는 제 유년기를 도둑맞았어요. 저라는 사람에 대한 무관심 속에 차갑게 방치되기만 했어요."


보통 이러한 말을 발화하는 시점은, 견적서의 숫자를 잘못 기재해 과장에게 혼이 났을 때나, 고객응대창구에서 고객과 갈등을 경험했을 때나, 아이가 시험을 못보았을 때나, 친구들의 남편자랑 앞에 할 말이 없었을 때인 경우가 많다. 즉, 무엇인가 '세상의 낙오자'가 된 것 같은 경험을 할 때, 우리에게는 늘 부모가 소환된다.


다 부모의 탓이다. 자기가 '세상의 낙오자'가 된 것은 부모가 자신을 충분히 지지하고 공감하며 '마음의 대장'이 되도록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은 '세상의 대장'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소환의 주문은 이러한 한탄과 원망을 담고 있다.


자기는 대장이 될 자격이 많은데, 그 '대장의 권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대장으로서 좌절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자주 꾸는 판타지의 내용이다.


조금 많이 지겨운 판타지다. 1980년대에 미국에서 유행한 '애착이론'이 이 판타지를 지지하는 거의 모든 근거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날 애착이론의 허상은 여기저기에서 두들겨 맞아 해체되고 있다. 회의주의학파의 저널인 『스켑틱』에서는 한 연구를 소개한다. 이것은 좋은 양육조건에 놓인 아이들과, '정말로 유기된 아이들'을 선정하여 25년간 진행한 종단연구다.


이 실험의 결과는, 어린시절에 건강한 애착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정말로 유기된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오히려 압도적인 '심리적 건강함'의 지표들을 보이게 된 모습으로 드러났다. 특히 '자존감'과 같은 경우는 그 대조군에 비해 3배 이상의 수치로 평정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은 애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자신의 현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모습을 그대로 암시해준다. 유.기.된. 이.들.은. 애.착.할. 대.상.이. 없.었.기.에.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자기의 인생에 책임감을 갖고 스스로를 근거로 생활했다. 실존철학의 교과서라고도 평할 수 있는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역작 『무뢰전 가이』는 정확하게 이 내용을 그려낸다.


부모가 자신을 '대장'으로 만들어주어야 그것이 '자신이 사랑받았다는 증거'가 되고, 이러한 방식으로 '대장'이 되어야만 자기가 남들 또한 사랑할 능력이 생긴다는 말은 완벽한 환상이며, 판타지 중의 판타지다. 이것은 부모를 '사랑의 원천'으로, 즉 부.모.를. 신.으.로. 보.고. 있.기.에. 생.겨.난. 판.타.지.다.


이 판타지의 실현을 '올바른' 윤리적 실천으로까지 착각하고 있을 때, 우리가 거의 반드시 하게 되는 말이 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남들에게 이렇게 말함으로써, 어린시절 아이가 펼치지 못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모두가 엄마처럼 응원하는 '올바른' 윤리적 판타지는 지배적인 가상현실의 지위를 얻게 된다. 이 발화의 주체는 자기의 어린시절이 비극이었다는 판타지를 소비함으로써, 그 판타지에 의거해 이제는 자기가 '올바른 부모'가 되어 다른 이들을 '사랑해주겠다고' 하는 가상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판.타.지. 속.에.서. 경.험.한. 자.기.의. 모.습.을. 남.들.에.게. 투.사.함.으.로.써. 이.루.는. 일.종.의. 구.원.자. 연.극.이.다.


이 구원자의 역할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 번째는 투사를 철회하고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여기에서 '올바른 부모'에 의해 '구원받고 싶어하는' 이는 오직 자기 자신일 뿐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것이 판타지를 근거로 축조된 '사이비 구원극'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의 이유로 인해, 이 구원자 연극은 정말 촌스럽게 드러난다. 이 '촌스러움'이라는 특성은 면밀히 탐색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삶.은. 촌.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촌스러움이 생겨나 있다면, 여기에는 무엇인가 삶의 굴절이 있는 것이다. 굴.절.에. 의.해. 삶.이. 왜.곡.될. 때. 문.화.도. 왜.곡.된.다.



# 삶의 예술과 진짜 작가들, 그리고 작가 콤플렉스


우리가 이 몸으로 인간의 여러 면모를 체험한 경험들이 있었고, 그 삶의 경험들이 축적된 것이 문화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의. 개.인.의. 삶.은. 하.나.의. 문.화.의. 창.발.가.능.성.을. 내.포.한.다. 우리가 개인으로 실존하기만 하면, 그것이 그대로 문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문.화.화.를. 예.술.이.라.고. 한.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본질적으로 '삶의 예술'이다. 개인의 삶이 예술을 낳는 것이다.


그러니 삶이 왜곡되면 문화화의 과정도 왜곡됨으로써 예술의 탄생이 어려워진다. 이것을 '예술에서 기술로의 전락'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art'라는 표현에는 원래 고전적으로 예술과 기술의 일치된 함의가 담겨 있었지만, 현대에 들어와 이 함의는 분열되었다. '기술적인 것'이 보다 우세하게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문화는 삶에 대해 지배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삶에서 나온 문화가 역으로 삶 위에서 집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굴절이다. 기.술.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 바.로. 굴.절.된. 삶.이.다.


마음의 원리 및 알고리즘 등의 '기술'을 배워서 타인과 세계를 임의대로 '양육하려는' 행위는 이 굴절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것이 오늘날 심리학의 문제다. 이를 굳이 심리학의 문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학(學)을 술(術)로 몰락시키는 사이비심리학의 작용에 대해, 아직까지 심리학이 자체적인 자정작용을 활발히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수치론적 과학주의'에 대한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심리학이 회복하고 견지해야 할 '예술성'에 대한 말이다.


학.문.이. 학.문.인. 것.은. 그.것.의. 예.술.성. 때.문.이.다.


예술성을 잃었을 때 '학'은 '술'로 전락한다. 표현 그대로, '예술에서 기술로의 전락'이다. 이것은 분명 '오리지널리티'의 문제를 시사한다. 예술이 개인의 고유한 삶에서 시작되기에, 그것은 본래적으로 오리지널리티를 내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유한 삶'이란 무엇인가? 바로 사실적인 삶이다. 오.리.지.널.리.티.는. 사.실. 위.에. 발.을. 붙.이.고. 사.는. 개.인.의. 속.성.이.다. 그러니 사실에서 시작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오리지널리티를 잃게 된다.


우리로 하여금 오리지널리티를 상실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은 바로 '작가 콤플렉스'다. 이것은 '작가에 대한 판타지'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 판타지는, 한 작가적 주체가 문화를 만들어내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문화를 소비함으로써 서로가 더 멋지고 '올바른' 인간이 된다고 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것은 마치 작가가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대장'이며, 누구나 작가가 되면 이러한 대장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영웅신화와 같다.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이며, 근대의 꿈이다.


작가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며 동시에 작가로서 우월하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작가 콤플렉스'를 가진 이들이 이러한 '작가영웅신화'를 줄기차게 소비한다. 자기는 하늘에서 받은 마법같은 글쓰기의 재능이 있는 천재적 작가인 것처럼 '가상의 정체성'을 만들어 이를 선전한다.


하지만 이 정체성의 구성원리가 판타지인 까닭에 그의 실제적 수행력은 언제나 정체성에 일치될 만큼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이 '정체성과 사실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작가 콤플렉스의 주체는 자기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것만 같이 특별하게 보이는 남의 말과, 남의 생각, 남의 행동거지를 모방하는 앵무새가 된다. 오리지널리티는 갈수록 요원해진다. 판타지로 시작되어 그 위에 판타지들만 배가되는 셈이다.


'진짜 작가들'은 이러한 작가적 정체성을 세우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자기의 글쓰기 마법을 선전하지 않는다. 아주 당연하다.


숨.쉬.는. 일.을. 자.랑.하.는. 이.도. 있.는.가?


여기에서 '진짜 작가'라는 것이 등단을 하거나 대중적으로 인정받은 유명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보다는 '진짜로 사는 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창조라는 것이 숨쉬는 것과 같은 진짜 생활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이들은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창조한다. 원래 '감각'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정말로 창조적 감각이 있는 이는 모든 면에서 창조적이다. 글을 써도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표현들을 창발해내고, 요리를 해도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레시피를 만들어내며, 옷을 입어도 오리지널리티의 스타일을 완성해낸다.


이.들.이. 하.는. 어.떤. 분.야.의. 것.도. 촌.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진짜 작가들은 선별적인 짜깁기를 통한 통합적 모방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작가 콤플렉스의 주체는 작가처럼 보이기 위해 '튀려' 하기에 모든 분야에서 촌스러워진다. 이쁘장한 소품집처럼 치장하려 해도 딱 거기까지다. 개성이 없다. 개성이 없으니 작위적으로 더 튀려고만 한다. 그러니 조.화.가. 깨.진.다.


촌.스.러.움.은. 조.화.가. 깨.진. 느.낌.이.다. 모방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이 부조화를 만든다. 성공적인 마음의 원리 및 알고리즘을 기술적으로 모방하여 자기 삶을 '세뇌시키고' 있는 이는 스스로를 한없이 촌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은 자기가 마음을 해킹한다거나, 코딩한다거나, 디버깅한다는 식으로 이 모방의 활동을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의 프로그램 코딩을 떠올려보자. 코딩전문가들도 실은 예술가들이다. 이들은 단지 소재들을 짜깁는 모방의 기술자가 결코 아니다. 자기만의 오리지널리티의 문법을 표현하고 있는 엄연한 예술가다.


특히나 작가 콤플렉스의 주체들이 가장 촌스럽게 보이는 경우는, 짜깁은 모방의 결과물을 마치 자기의 고유한 창조물인 것처럼 선전할 때다. 이것은 전술했듯이, '진짜 작가'에 대한 이들의 열등감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질투에서 발로한 일이다.


질투에 불타는 이 21세기 살리에르들은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등에게서 좋아보이는 소절들을 각각 베껴와 조합한 그 결과물을 자기의 오리지널 곡이라고 내놓는다. 전체 악장의 구성이 엉망이고 처참하다는 사실은, 또한 무엇보다도 이 행위가 '표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들에게는 뒷전이다. 아.니. 애.초.에. 표.절.이.라.는. 그. 감.각.이. 둔.하.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자기처럼 '감각이 둔한' 누군가가 듣고서 자기를 뛰어난 예술가로서 칭찬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작가 콤플렉스가 이 일만을 강박적으로 밀어붙인다. 더 무식해보이고, 더 투박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남의 것을 표절해 자기의 영광으로 삼으려는 이 일이 바로 이들을 가장 촌스럽게 만드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폭력이다.


가.장. 촌.스.러.운. 일.은. 인.간.에.게. 가.장. 폭.력.적.인. 일.이.다.


왜인가? 삶이 굴절된 것이 촌스러움이기 때문이다. 삶을 가장 일그러지게 만드는 일은 그 삶을 사는 인간에게 있어 당연히 폭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폭력이 정말로 '올바른' 일인가? 이러한 방식으로 '대장'이 되면 온전하게 모든 마음이 챙겨지는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며 이 폭력의 행위들을 '수용'하려는 이들도 있다. 이제 그 지점을 살펴보자.



# 예술가의 '자생의 공간'과 엄마의 '양육의 공간'


말했듯이, 진짜 작가인 삶의 예술가들은 어떤 소재로도 창조한다. 소재가 없다면, 그 '없음'으로도 이들은 창조한다. 이들이 창조하는 가장 멋진 것, 그것은 바로 '공간'이다. 예술가들이 창조한 공간은 왠지 모르게 힘있고, 감각이 살아나며, 자유의 활력이 넘친다. 창조적 기운으로 늘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척하며 "허허, 네 말도 맞구나. 네 이야기 좀 해보련. 내가 들어줄테니."라고 하는 양육의 공간이 아니다. 엄마가 지켜보는 놀이터가 아니라, 숲속의 캠프파이어존 같은 것이다. 또한 인공적 보호구역인 비닐하우스가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소년들의 비밀기지 같은 것이다.


온실 속 화초의 용도는 두 가지다. '관상'과 '식용'이다. 그리고 이 둘 다 본질적으로 '키워져서 잡아먹히는' 일이다. 수.용.을. 빙.자.한. 이. 착.취. 및. 남.용.의. 폭.력.성.은. 가.짜. 작.가.들.이. 만.드.는. 공.간.의. 특.성.이.다. 반면 온실 밖의 예술가들은 자존과 자유의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에서는 '키워지지' 않는다. 양육의 논리가 아니다. 그러니 '잡아먹히지도' 않는다. 자생의 생리다.


약한 이를 온실 안에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수용이 아니다. 양육을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진.짜. 수.용.은. 자.신.이. 자.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진짜 수용이 이루어질 때의 표현들을 들어보자.


"난 이제 영어를 잘 하기로 결정했어!"

"난 내 자신이 저주받은 존재인 척하는 일을 관두기로 하겠어!"

"난 다시 또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을 선택했어!"


수용은 아주 힘차다. 그것은 질질 짜면서 "그래 이런 나도 온전했던 거야. ㅠㅠ"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잘 알려진 스테디셀러인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제목의 힘에 끌려 많은 이들이 소장하는 책이다. 이 제목은 분명 아주 명징하게 수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그보다 조금 전에 유행했던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의 제목은 또 어떠한가? 이것도 수용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수용은 약한 자신이나 약한 상대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강한 자신임을 수용하는 것이다. 수.용.의. 힘.은.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결.단.의.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엄마와의 건강한 애착관계에서 오는가?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재양육해줄 심리상담사에게서 오는가? 또는 핵심적으로 엄마와 같은 작가적 주체가 만든 '온실' 속에서 오는가?


비.유.하.자.면. 그. 힘.은. 엄.마.가. 아.니.라. 하.늘.에.서. 온.다. 하늘과 같은 '없음'의 공간에서 온다. 엄마도 없는, 그 '없음'의 공간에서 온다. 곧, 삶의 예술가들이 '없음'으로 창조한 그 공간에서 온다.


가짜 작가들은 늘 자기가 창조주 엄마인 척하려 한다. 자기가 하늘을 대신해 하늘의 권위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하.늘.을. 흉.내.내.는. 모.방.의. 활.동.이.다. 이러한 '하늘의 권위'를 얻어야 자기의 열등감이 해소될 것 같아서다. 그러니까 이들은 실제로 자신이 창조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데다가, 남들 또한 양육 안에 가두어 창조하지 못하게 하면서, 이 총체적인 '반창조'의 행위에 입각해 자신을 작가라고 칭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가짜고, 사기고, 사이비다.


자.생.하.는. 이.만.이. 창.조.할. 수. 있.으.며. 양.육.은. 모.방.만.을. 낳.는.다. 상담은 누군가에게 양육의 호혜를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생력을 함께 확인하는 일이다. 즉, 내.담.자.가. 얼.마.나. 삶.의. 예.술.가.인.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엄마의 안전한 양육 속에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이른바 잘 양육된 이만이 자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이것은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만이 폭풍을 견딜 수 있다고 하는 판타지다. 물론 그 묘목이 아주 작을 때에 온실의 도움을 받는 일은 가능하며 또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한참 지나 성년기가 되어서도 "엄마의 양육이 지속되어야 제가 자유로울 수 있죠. *^^*"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보이는가? 아주 공정하게, 이것은 귀여울 수는 있지만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자생하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가 자생하고 있지 않을 때 경험하는 대표적인 상태들은, 권태, 무기력, 짜증, 우울, 분노 등이다. 대체로 우리가 일상에서 아주 빈번하게 경험하는 상태들이다. 이것은 각각의 상태를 유발하는 특정한 대상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양육의 공간' 속에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즉, 총.체.적.인. 부.조.화.다.


다시 공정하게 말하자면, 귀여움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이 총체적인 최악의 상태와 맞바꾸는 일은 여러모로 수지타산이 안맞는 일이다. 심지어 그 귀여움이라는 것도 엄마에게만 귀여움이다. 총체적인 난국이다. 내친 김에 더 처참한 것은, 자생하는 아기고양이가 가끔 애교를 부릴 때 우리는 그것을 더 귀엽게 느끼곤 한다는 사실이다. 왠지 우리 엄마도 항시 카톡으로 아양을 떠는 우리 자신보다, 부모님 없이 자생하고 있는 우리의 친구를 더 이뻐하는 것처럼 보인다. 총체적인 위기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원.래. 건.강.한. 것.에. 끌.린.다. 건강한 것이 가장 매력적인 법이며, 자생은 가장 건강한 것의 생태다.


모든 면에서 자생이 총체적인 조화에 더욱 유리하다. 이것은 분명하다. 어렵지도 않다. 양육의 공간을 찾거나 만드는 일보다 더 수월하다. 기억해보자. 자생의 공간은 '없음'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모.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방하지 않고 백지에서 출발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삶의 예술가로서 즉각적으로 자생의 공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처럼 진짜 작가가 되는 일은, 진짜 작가로서의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짜 작가를 관두는 일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삶.의.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우.리.는. 살.아.야. 한.다. 사는 척만 하며, 살지 않은 그 여백을 메우기 위해 남의 것을 훔쳐다 전시하는 일로는 우리는 결코 삶의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자생의 공간은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 스스로 만드는 공간이다.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자리다. 그것은 엄마가 아니라 하늘이 수용하고 있는 자리다.


상담은 내담자가 이러한 삶의 예술가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을 돕는 활동이다. 그러니 상담자는 필연적으로 예술가여야 한다. 상.담.자.는. 기.술.자.가. 아.니.다. 공감, 경청, 라포형성, 모델링, 빈의자기법 등을 망치와 톱 대신에 그 손에 든 만능해결사가 아니다. 그러나 곤란하게도 이 착각은 분명하게 작동한다. 이것은 상담자의 '탄생설화'가 의도적으로 곡해된 그 결과다.



# 삶의 예술가는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창조하지 않고 모방만 하고 있어서 삶이 심심하다보니, 자기의 어린시절이 불우했다는 판타지를 채택하여 '심리적 고아'를 연기하는 일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이들에게 양육을 제공하는 일에는 어떠한 이득이 있는가?


이것을 이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여기에는 분명한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상담자를 자칭하는 이에게 아주 커다란 이득이 있다.


엄마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판타지를 사실처럼 아주 강하게 믿고 있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경험하는 다양한 관계의 갈등을 정리하고 통합해준 뒤 살아갈 방향성까지 제시해줄 '세상의 대장' 같은 엄마의 전능성을 꿈꾸는 이들이다. 즉, 자기가 영유아 때 엄마가 제공해주던 그 역할을 항구적으로 기대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생물학적으로 실제의 엄마보다 더 커져 엄마가 더는 성공적인 '엄마대장'의 역할을 제공해주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이들에게 '엄마의 부재'가 된다. 가장 피하고 싶은 현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인생에 엄마를 계속 '있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엄.마.가. 되.려. 한.다. 자기가 '엄마대장'의 위격으로서 내담자들을 양육해나가야만 이들은 안심이 된다. 자기가 엄마가 되는 방식으로 엄마라는 것이 있게 되었으니, 자기의 인생이 이제 온실 속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처럼 경험된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얻는 이득이다. 이들의 '온실'은 실은 내담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내.담.자.를. 이.용.하.는. 이. 일.을. 내.담.자. 착.취.라.고. 부.른.다.


이것은 불우한 어린시절의 판타지를 소비하는 내담자에게 그 판타지를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더욱 공고화시킨다. 그러면서 실은 그 정도까지는 엄마가 필요하지도 않은 내담자에게 엄마의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밀어 넣는다. 이처럼 은근한 '세뇌'의 작업을 통해, 엄마가 필요하다고 믿는 자신의 욕구를 내담자가 대신 실현하게끔 하는 것이다. 정작 물을 마시고 싶은 것은 자신이면서, 물이 있어야 할 현실을 만들어야 하는 자는 내담자인 것처럼 의무를 부여하는 일과도 같다.


"당신은 모든 마음을 온전하게 다 알아줄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엄마가 없어서 지금까지 힘든 거였어요. 자,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해보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제가 누구인지 이제 눈치채셨나요. 내가 니 엄마야. ㅜㅜ 엄마로서의 내 권위를 인정해. 그러면 너는 마음의 고통이 다 사라지고 구원을 얻게 될 거야. 네 필요는 엄마, 나는 그 엄마."


이것을 '엄마챙김(momfulness)'이라고 불러보자.


더욱 노골적인 세뇌를 위해 반복되는 이 '엄마챙김'의 주문을 자발적으로 내담자가 내사하게 됨으로써 엄마가 필요한 '가짜 상담자'의 욕구가 채워진다. 내담자가 그를 엄마와 같은 '진짜 상담자'로 봄으로써 결국 내담자의 그 가상한 노력의 결과로 인해 '엄마가 있게 되는' 현실이 출현한 것이다. 이.것.이. 엄.마.챙.김.을. 통.해. 상.담.자.가. 태.어.난.다.는. 왜.곡.된. 탄.생.설.화.의. 전.모.다.


촌스러운 일이다. '엄마챙김'을 해서 '엄마대장'을 탄생시키는 이 '마법의 기술'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예술이 사실 위에서 자생함으로써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자.생.한.다.는. 것.은. 자.신.의. 필.요.에. 자.신.이. 정.직.하.다.는. 것.이.다. 즉, 이 목마름이 누구의 목마름인지 그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목마름을 위해 스스로 물을 찾아 마시는 활동은 예술적이다. 그러나 목이 마르지도 않은 남이 자신의 입에 물을 떠넣게 만드는 '기술'은 아무리 효과적이어도 촌스럽다. 열등감으로 가득찬 가장 촌스러운 왕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나 엄마챙김을 '올바른' 윤리적 당위로 실천하고자 하는 '엄마강박'에 빠진 이들은 한사코 이 일을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엄마로서의 자신을 필요로 할 수 있도록, 더 좋은 엄마처럼 보이기 위한 소재들을 긁어모으는 모방의 활동을 거듭 펼쳐낸다.


"와 이 엄마는 심리학천재에, 철학도 알고, 물리학전문가에, 놀라운 체험도 있고, 마음 다 아는 멘탈리스트네. 이 집, 엄마 잘하네. 오케이 좋았어. 이 엄마를 우리 엄마로 삼아야겠다. *^^*"


이처럼 만능해결사 같은 엄마대장으로서의 자신을 편의점 매대에 전시해 팔고자 하는 일이, 이들이 인생의 총력을 집중해 하고 있는 활동이다. 엄마상품이 매진될 때까지 이들은 매진한다. 그것이 이들에게는 자신이 진정한 엄마대장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이들의 인생에 '엄마'를 항구적으로 존재하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기술'이다. 바야흐로 '엄마챙김'의 승리인 것이다.


21세기의 살리에르가 삶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질투를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그들이 자기보다 더 엄마에게 '챙겨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기는 이처럼 엄마를 챙기려고 갖은 기술적 노력을 다하는데, 엄마는 그러한 자기보다 삶의 예술가를 챙겨주는 것 같아서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자.생.하.는. 것.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기에 삶의 예술가들이 건강해진다는 사실은 이 엄마챙김을 하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엄마와 관련된 소재로만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니 '없음'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모든 공간은 다 엄마로 채워져 있다.


실존심리학자인 롤로 메이는 창조의 핵심을 '나 홀로'라고 말한다. 이것은 '없음'의 다른 표현이다. 나 홀로이지 않고 엄마가 있으면 원래 창조가 일어나지 않는다. 삶은 사실에 근거한 예술의 문화가 되지 않고, 판타지에 근거한 모방의 문화로 전락한다.


진짜 작가는, 곧 삶의 예술가는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게."라고 말하는 엄마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홀로 태어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예술가인 상담자도 나 홀로 태어난다. 상담자가 그러하듯이 내담자 또한 삶의 예술가로서 나 홀로 태어난다.


'나 홀로'라는 것의 실증은 무엇인가? 바로 '나 가득'이다. 우리가 홀로 있을 때를 떠올려보면 이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렇게 묘사해보자.


'홀로챙김(minefulness).'


삶의 예술가의 본명은 바로 '나'다. 홀.로.이.지.만. 가.득.한. 것.이.다. 이 '나'의 속성을 그래서 온전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관계의 산물이 아니기에, 관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니 관계의 갈등을 통합해야 할 '대장'이 될 이유가 없다. '올바른 것'으로 보이기 위해 모방해야 할 이유는 더욱 없다. '나'로서 이미 올바르게 서있다. 이것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나.는. 엄.마.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실.존. 속.에.서. 홀.로. 태.어.난.다.


이 실존이 '나'라는 경험이며, '나'라는 문화다. 삶의 예술이다.


우리는 모두가 이 삶의 예술을 하는 전문가로서, 나의 것으로 가득 체험한, 곧 홀로챙김(minefulness)한 바로 그 '나임(I-ness)'을 함께 나눈다. 그래서 그것이 또한 나임을 안다. '삶의 예술'이란 곧 '나의 예술'인 셈이다. 상담이 이러한 '나의 예술'의 대표적인 활동이다. 이것은 아주 근사한 일이다. 홀로 눈부시게 빛나는 별빛들이, 동시에 서로에게 정겨운 불꽃놀이가 되는 일이다.


바로 이런 것을 하기 위해 우리는 나로 막 태어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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