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라기 월드: 도미니언(2022)

티렉스를 이긴 엄마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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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더는 공룡이 주인공인 영화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성주의의 가치를 주장하는 꼰대의 영화다.


쥬라기공원 연대기의 상징과도 같은 티렉스 또한 더는 경외감의 대상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엄마에게로 경외감의 출처를 돌리고자 한다. 엄마가 티렉스를 이겼다. 엄마는 최종적으로 신성한 것이다. 이것이 30년을 이어온 '공룡이야기'의 결말이다.


지금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성주의의 영향권 속에 이 영화 또한 결국 포섭되었다. 서사는 노골적이다. 인간'아이'와 공룡'아이'를 '엄마'가 구하러 간다. 그렇게 공룡과 인간을 동시에 구원하려는 엄마의 헌신에 근거해 공룡과 인간은 사이좋게 통합적 공존의 귀결을 맞는다.


물론 이 통합을 위해 공공의 적은 상정되어야 한다. 제3의 적이 있어야 대립관계에 있던 이들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칠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메뚜기가 그 위대한 적이다. 지구를 위험에 빠트릴 사악한 메뚜기를 퇴치하기 위해 인간아이와 공룡아이가 힘을 합친다. 엄마는 대견해한다. 우리에겐 이제 새로운 희망이 있다. 지구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쥬라기 시리즈로도 어벤져스 놀이를 하게 되는 이유는 단지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정말로 더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쥬라기공원 시리즈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원작소설에서부터 다양힌 미디이믹스물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으로 공유되는 주제의식은 다음과 같은 말로 형상화된다.


"생명은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공룡이라는 형태로, 우리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생명성에 대한 커다란 경외감을 이 연작물에서는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외감은 루돌프 오토가 말하듯 언제나 두 양상으로 드러난다. '신성한 매혹'과 '불가해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전자는 쥬라기공원 1편에서 브라키오사우루스와 조우하는 장면을 통해, 후자는 육식공룡들, 특히 티라노사우루스의 모습을 통해 대표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6번째 영화에서는 공룡에게서 경외감의 속성을 철저하게 박탈하고자 한다. 이 영화에서 처음 출현한 기가노토사우루스는 아주 직접적인 희생양이다. 쥬라기공원 3편에서의 스피노사우루스보다도 못하다. 그동안 쌓아온 역사라도 있는 티렉스와는 다르게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회성 소모용품인 기가노토사우루스가 이 영화에서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저주와 같은 것이다.


희생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주술이 있다. 주술은 비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영화는 "생명은 통제할 수 없다."라고 하는 시리즈 전체의 주제의식을 슬그머니 비틀고자 한다. 그 결과는 이러하다.


"생명은 통제할 수는 없지만, 지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배의 방식은 은밀하다. 지배의 기제로 채택되어 외연화된 그 이름은 바로 '수용'이다. 통제할 수 없는 까닭에 두려운 대상을 '자상하게 수용함으로써' 그 대상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배적 지위'를 점해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기획은 이렇게 실천된다.


이것이 바로 모성주의다. 영화는 이 모성주의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거의 모든 장면을 왜곡시킨다. 공룡 자체를 제멋대로인 아이처럼 상정하여, '인간엄마'가 잘 수용해주지 않으면 그 아이들이 제대로 잘 살지 못할 것처럼 서사를 전개한다. 기승전모(起承轉母)다. 특히 복제된 생명체에게도 실은 엄마가 있고, 또 엄마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감성을 파는 장면들을 강조할 때, 거의 선동에 가까울 정도로 모성주의의 주장은 정점에 달한다.


그래서 영화는 횡설수설한다. 장면들이 산만하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도 설득되지 않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늘어놓고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는 관객을 배신하면서까지 그 이야기에 온통 집중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도 기만하고 상대들도 기만한다면, 대체 이 영화는 누구를 위한 영화인가?


쥬라기공원 시리즈와 30년간 함께해온 관객이라면 결국 티렉스가 이 피날레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에 모든 초점을 두고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쥬라기공원의 시작과 끝은 티렉스다. 절대로 과장된 말이 아니다. 티렉스는 결코 구속될 수 없는 생명 본연의 '자유의 상징'이다. 또는 만약 쥬라기월드의 팬이었다고 한다면 이 최후의 작품에서 더 많은 블루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렉시와 블루 대신에, 모든 생명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살도록 허용하는 '위대한 엄마'의 모습을 최후의 망막에 새기도록 강요받는다.


이것이 이 영화가 관객을 어떠한 방식으로 '지배'하고자 하는지의 그 의도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영화는 특정한 의도를 담아 만든 '계몽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계몽하고자 하는 그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전통적 가족주의를 거부하는 젊은 세대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공룡은 차라리 기성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신진세력'에 대한 비유로 읽는 편이 낫다. 공룡뿐만이 아니다. 인간아이의 모습도 그러하다. 공룡아이와 인간아이의 공통된 특성은, 그들이 '새로운 문화양식'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홀로 태어나, 홀로 자라며, 홀로 진화하는 양식이다. 암수의 결합에서 모든 문화가 싹트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홀로여도 온전한' 문화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 상황을 거치며 어떠한 이들은 분명 체험적 증거들을 수집하며 이 새로운 문화양식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했다. 더는 기존의 집단주의의 구조 속에 매몰되지 않아도 자신이 행복감을 누리는 일에 무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들은 실감해왔다. '홀로'라는 '낯선 현실'이 이들에게는 무력감과 불안의 이유가 아니라, 충실감과 자유의 원천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이들은 시공의 간극을 넘어 한순간 '새로운 현실'로 도약한 공룡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전통적 가족주의를 신봉하던 이들은 매우 당황스럽다. 이 신진세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자체가 가족주의에 대한 위협처럼 생각된다. 어떻게 그러한 방식으로 살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생태가 완전히 다르다. 인간과 공룡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종의 차이를 느낀다. 이것이 세대갈등이다.


바로 이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시도되는 것이 결국 모성주의인 것이다. 전통적 가족주의의 문화양식이든, '나 홀로 가족'을 표방하는 새로운 문화양식이든 간에, '엄마'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시작조차 될 수 없다고 말하며, 모성주의를 통한 대동단결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수월한 방식은 공동체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쪽이 엄마를 자임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전형적이다. 새로운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매우 빈번하게 다른 이들을 돌보는 입장에 서고자 한다. 남을 돌보는 동안에는 자기의 두려움을 잊을 수 있는 까닭이다. 자기는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두려워하는 이들을 '돌보는 자'다. 자기의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이루는 기만적인 정체성이 이렇게 생겨난다.


사실적인 두려움의 상태를 가상적인 돌봄의 상태로 바꿔 그것을 '모성적 정체성'으로까지 취하려 하는 이것이 바로 꼰대현상이다. 꼰대가 누군가에게 '올바른 소리'를 하는 이유는 실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꼰대의 눈에는 그가 지금 두려워하며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이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꼰대의 자기투사일 뿐이다.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오직 꼰대뿐이다.


티렉스는 이미 재미있게 잘 살고 있는데 "아유 우리 티렉스, 저 어린 것이 얼마나 홀로 무서울꼬. ㅜㅜ"라며 오히려 티렉스를 돌보려 하는 일은, 정확하게 티렉스에 대한 지배의 움직임이 된다. 이것이 억압의 폭력이다. 물론 누군가가 꼰대에게 폭력적이라고 말하면 꼰대는 억울해한다. 자기는 돌봄의 선의로만 행위했는데 왜 그것이 폭력이 되는지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꼰대가 채택하고 있는 선량한 '모성적 정체성'이 꼰대의 눈을 가리고 있어서 야기되는 일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애초 꼰대가 모성주의를 도입한 이유는 눈을 가리기 위해서다. 두려운 것으로부터 자기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다. 그렇게 꼰대는 맹목이 된다. 이 맹목은 모성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다른 이들이 꼰대의 깨어있는 수준만큼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꼰대 자신만이 장님이 되어 있는 것이다.


스스로 눈을 가린 이러한 류의 장님에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감각은 경외감이다. 경외감이 없으면 인생이 근본적으로 권태로워진다. 모든 것이 뻔하게 생각되며, 그만큼 자기는 모든 것을 다 아는 현자처럼 착각된다. 그러니 자동으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자기가 무수한 '아랫것들'을 굽어 살피는 입장이 된다.


자기는 받아주는 자고, 알아주는 자며, 곧 수용하는 자다. 이렇게 꼰대는 자기가 실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그 대상인 젊은 세대를 수용하는 척하는 형태로 지배하려고 하게 된다. 두려움에 대해서는 딴청을 피우며 엄마처럼 양육하려고 한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약한 이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공존'의 메시지를 선전한다. 자기가 도와줘야 젊은 세대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식으로 '공존의 주체'로서의 꼰대 자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의미 그대로의 공존이 아니다. 공존은 미지의 것과 이루는 경외감의 관계성이지, 수용하는 엄마가 수용되는 아이에게 행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엄마가 도와줘야 온전한 티렉스가 되어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은, 발화의 주체가 티렉스의 위장 안에 있을 때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꼰대는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문화양식에 '잡아먹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자기는 '수용되면' 안 되고, 수용해야만 한다. 왜인가? 두렵기 때문이다. 자기가 쌓아온 모든 것이 사라질까봐 두렵다. 이것은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꼰대에게 젋은 세대는 이처럼 자기를 잡아먹어 죽음에 이르게 할 것 같은 공룡처럼 경험된다. 그래서 엄마를 소환하는 것이다. 티렉스가 자기를 잡아먹지 못하게끔 엄마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수용하는 척하더라도 자기의 죽음만은 수용하지 않기 위해, 모성주의의 지배력을 빌려 다른 생명들을 대신 억압하려는 이 활동은 활기차다.


모성주의에서 가족주의로 나아가 공동체주의로, 공존을 빙자한 생명억압의 활동은 거듭해서 그 세력을 널리 확장해간다. "저 가엾은 말머리성운을 우리가 지켜주고 수용해야 해요. ㅜㅜ"라는 말이 나오게 될 날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공룡들은 공존을 위해 열심히 우주메뚜기들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최흉의 빌런으로 제시되는 기가노토사우루스의 위업이 메뚜기 1마리 살상이라는 사실은 의미깊다. 아름다운 '공존'의 실현자다.


생명은 지배되었다. 그것이 유전공학의 산물이든, 자연적 번식의 산물이든 간에, 알아주고, 허락하고, 수용하는 신성한 엄마의 품안에서만이 생명은 이제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팬덤의 지지 속에서만 자기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현실과도 같다. 여기에서 엄마는 본질규정자로 거듭난다. 티렉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티렉스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된다. 이것이 윤리고, 율법이며, 정치적 올바름이다. 모성주의의 실천론들이다.


엄마가 티렉스를 가스라이팅해서 이긴 현실은, 바야흐로 본질이 실존에 앞선 현실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지배의 현실이라고 부른다. 30년간의 역사는 "답은 지배다."로 방점을 찍는다. 엄마의 '다정한 지배'를 통해 얻은 힘으로 메뚜기와 싸워 지구를 지켜낸 꼰대영웅들이 모사사우루스의 등에 타고 개선한다. 모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렉시도, 블루도, 더는 외롭지 않다. 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아주 멀리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러나 이것이 결코 답이 아니라 실은 기만이라는 것을 알기에 영화는 횡설수설이다. 이 영화가 지금껏 이어져 온 쥬라기공원 프로젝트의 끝이자 동시에 시작이라는 모호한 말을 남기는 것은 영화의 수익률에 따라 속편을 만들지를 결정하겠다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그저 미봉책이며, 답의 유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답은 언제나 그것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의 실존 속에 있다. 본질이 아니라 실존이 바로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쥬라기공원 연대기의 알파와 오메가는 이안 말콤의 입을 빌려 묘사되는 다음의 문장이다.


"진화의 역사는 생명이 모든 장벽을 뚫고 탈출해 나가는 역사입니다. 생명은 언제나 장벽을 부수고 자유를 찾아 나갑니다. 고통스럽게, 또 심지어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지만 생명은 반드시 길을 찾아냅니다(Life will find a way)."


누가 알아주고, 허락하고, 수용하지 않더라도, 생명은 자신이라는 자유의 길을 스스로 찾는다. 횡설수설 속에서도 생명은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을 수놓는 자상한 엄마의 내레이션이 아니라, 우리는 티렉스의 포효를 대신 듣는다. 모든 지배를 다 찢어버리고자 하는 그 포효가 울려오는 곳은 우리의 깊은 가슴속이다. 30년 전이 아니라 6500만 년 전부터 이것이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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