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허용하는 자아의 율법주의와 자유로운 자아초월의 존재율"
권위를 가진 누군가가 명령한다.
"너는 자유로워라."
이 명령을 받고 사람들은 감동의 눈물을 쏟으며 자유인처럼 보이려는 행위들을 연출한다. "좋아! 이제 진정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어!"라며 소설도 쓰고, 70년대 드라마처럼 서류가방도 허공에 던져보고, 인스타에서 끔찍한 미소도 지으며 셀카질도 시작한다. 자유로우라는 명령에 이들은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정.말.로. 자.유.인.가?
이런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고 있기에 오늘날의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충분한 노력과 성의만 다하면 우리에게 실현가능한 일은 과거와는 비교될 수도 없이 많아진 것 같은데 무엇인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꼈다면 바로 이것이 이유다. 이에 따라, 자신이 자유로움을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간주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 이유다.
자유에 대한 굴절된 환상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스스로를 죄인처럼 옭아매게 된다. 자기의 자유를 실현한 것처럼 보이는 성공스토리를 가진 이들을 부러워하며, 자신도 그들과 대등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쫓겨, 남의 것을 도둑질하고 사기를 쳐서라도 자기를 '자유인'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아실현의 강박'에 빠진다.
그러나 이 자아실현의 모든 움직임은 절대로 자유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운동을 창출하고 가속화하는 거의 유일한 동인은 '혼날 것 같은' 죄책감이다. 이.것.이. 실.은. 율.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율법을 잘 따른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혼나지 않는다. 죄인이 아니다.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니 현재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혼날 것 같이 경험되는 것은 분명 율법을 어기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지금보다 더욱 성실하게 율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기계발 문화를 선동하는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자동적이다. 나아가 내재적이며, 자발적이다. 실존상담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현대인은 자기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묘사한다.
오.늘.날. 율.법.의. 명.령.자.는. 우.리.의. 내.부.에. 있.다.
그 명령자의 이름이 바로 '자아'다. 왜 그런가?
자.아. 자.체.가. 율.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아를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개념을 갖고 있다. 자아는 과거로부터 기억으로 누적된 '빅데이터'와 같다. 이 빅데이터가 우리에게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통합'적으로 '선별'해서 제공해준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빅.데.이.터.가. 어.느.새. 윤.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다.
기술을 관리해야 할 윤리가 기술과 야합해버렸다! 그로 인해 기술 자체가 곧 윤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대중사회가 보이는 가장 큰 폭력적 역기능이다. '더 많은 기억'이 지지하는 기술적 담론은 오직 그 이유만으로 '선한 진리'로 그 입지가 신성화된다. 쉽게 말해, 패거리가 많으면 윤리적 권위를 얻게 된다. 이로 인해 자정작용을 잃게 된 기술적 담론은 끝간 데를 모르고 폭주를 시작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폭.주.는. 자.아.실.현.의. 미.담.으.로. 위.장.된.다. 자유로운 사람들이 저마다 빛나는 재능과 개성을 알리는 '자기의 이야기'를 펼쳐 나가며, 이와 더불어 서로가 힘을 모아 아름다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고 하는 '거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근대적 유토피아론이다. '자아의 왕국'에 대한 환상이다.
바.로. 이. 환.상.을. 이.루.라.고. 우.리.에.게.는. 명.령.된.다.
"너는 자유로워라."라고 하는 명령의 실제가 바로 이 명령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근대적 주체'가 바로 자아인 까닭에 '근대적 환상'인 자아의 왕국을 진리로 실현할 것을 자아가 명령하는 일은 필연적인 일이다. 다만 근대에 자아가 이 명령을 집행하는 주된 방식은 적극적인 '계몽'이었던 반면에, 오늘날의 자아는 적극적으로 명령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자.아.는. 허.용.한.다.
그.리.고. 허.용.이. 자.아.가. 명.령.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율법이란 무엇인가? 명.령.체.계.다. 명령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금지'이고, 다른 하나는 '허용'이다. 명령체계는 언제나 이 'No go!'와 'Go!'의 두 원리로 구성된다. 아이들에 대한 양육이나, 동물들에 대한 조련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는 분명하다.
율법은 금지하면서 허용한다. 그럼으로써 율법 자신의 권위를 확보한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자기의 권위를 강화시켜가는 방식이다. 자아는 일종의 '마음대장'을 먼저 자임함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마음현상들을 금지하거나 허용하는 명령을 집행할 수 있는 '권위'를 발휘한다. 권위야말로 율법이 작동할 수 있는 핵심적 근거다.
그렇다면 율법은 어떤 목적을 위해 작동하고자 하는가? 바.로. 생.존.의. 안.전.이.다. 더 큰 생존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율법은 만들어졌다. 특정한 상황에서 안전을 얻을 수 있었던 경험이 기억을 통해 데이터화가 되었고, 이러한 데이터들이 모여 빅데이터를 이룸으로써, 이제 율법은 각 상황에 따른 효과적인 '생존법'을 명령할 수 있는 안전의 체계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묘사 그대로, 자아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자.아.는. 생.존.의. 안.전.을. 위.한. 명.령.체.계.다.
과거에는 이 자아라고 하는 명령체계가 보다 빈번하게 발화한 명령은 바로 '금지의 명령'이었다. 왜인가? 그래야 사람들에게 안전이 더 도모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아주 단순하다. 과거의 대다수는 자.기.가. 느.낀.대.로. 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허락된 왕이나 일부의 귀족들뿐이었다. 허락받지 않은 하층계급이 개인으로서의 자기의 마음을 드러낸다는 것은 처벌의 소재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마음'이라는 것은 늘 '혼날 것 같은' 죄책감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니 과거의 사람들은 내외적인 강력한 율법에 의존해 자신의 마음을 금지해야만 했다. 억압이 보편화된 것이다. 억.압.은. 언.제.나. 안.전.을. 위.해. 이.루.어.진.다. 처벌당하지 않고 안정적인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 자아는 '금지의 명령자'가 되었다.
그러나 시민혁명 및 산업혁명과 함께 근대가 개화하면서, 이제 사람들은 자기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상류계급의 대상들올 오히려 자신들이 처벌함으로써 그 권위를 스스로에게 이전시켰다. 자아의 권위는 한층 높아졌다. 높아진 이 권위로 자아가 집행한 것은 '허용의 명령'이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발상으로 부르주아의 문화가 꽃핀 것은 이 허용의 명령이 낳은 결과다. 허용하고 또 허용하는 자아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은 신대륙으로, 미개척지로, 자아의 영토를 계속 확장해나갔다. 그 결과로 2번의 세계대전 및 홀로코스트와 같은 제국주의의 잔혹사를 경험했지만 자아의 명령은 멈출 줄을 모른 채 오늘날에 이르렀다.
자아는 왜 멈추려 하지 않았을까? 신.이. 났.기. 때.문.이.다. 자아의 거듭되는 권위의 강화를 통해 신(神)이 태어났다. 자.아. 자.신.이. 바.로. 신.이. 되.었.다. 자아는 급기야 눈치채고야 말았다. 사람들에게 '허용의 명령자'가 되면, 금지의 명령을 내릴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사람들이 그 명령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복종함으로써, 알아서 자아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게 된다는 것을 자아는 마법처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아가 영구히 신이 될 수 있는, 또 신 위의 신을 꿈꿀 수 있는 방법론이다. 따라서 자아는 더욱 용맹하게 '허용의 명령'을 난사한다. 무차별적인 허용을 폭격한다. 이 '무차별적인 허용'은 자아의 세력들에 의해 매우 자주 '무조건적인 수용'이라는 표현으로 활용되곤 한다. 상대적인 '맹목성'과 절대적인 '무조건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완벽한 착각이다. 그러나 자아는 이 착각을 더욱 조장한다. 정말로 '신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혼동시켜야 자아가 신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자아에 봉사하는 사이비심리학의 종사자들, 작가들, 연예인들, 정치인들, 선동가들의 말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표현들로 형상화된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네 마음대로 살아."
"너의 이야기를 시작해."
"네 자신을 말해."
"너를 자유롭게 표현해."
음식점에서 아이의 행위를 자유롭게 허용하는 엄마처럼 자아의 명령은 다정하다. 그 명령에 충실하게, 먹는 일에만 혈안이 된 다른 이의 구질구질한 식탁조차도 신성한 캔버스로 바꾸어 펼쳐내는 창조적 예술활동으로 음식점의 모든 이를 자유롭게 구원하고자 하는 아이의 몸짓도 대견하다. 아이가 남의 식탁 위에서 자기의 고유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귀싸대기를 날리던 무식한 '전근대적' 폭력도 이제는 자유로운 시민주체들이 서로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오늘날에는 찾아볼 수 없으니 이 또한 거룩하다.
과거의 율법이 "하지 말아야 안전해."였다면, 오늘날의 율법은 "안전하니 하도록 해."가 된 것이다. 왜 안전한가? 자아의 인기가 높아져 그 패거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허.용.하.는. 자.아.는. 윤.리.가. 되.어. 모.든. 것.을. 평.정.가.능.해.졌.다. 오늘날에는 인기가 윤리적 권위를 통한 안전을 보장해주며, '허용의 명령'은 가장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기제다.
그러나 율법은 율법이다. 허용의 명령을 집행하는 율법도 그저 율법이다. 엄마와 같은 주인의 허용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정말로 자유인인가? 이것이 바로 노예다. 율.법.은. 노.예.를. 양.산.할. 뿐.이.다. 아무리 허울좋게 말해도 그것은 단지 '말'이다. '사실'이 아니다.
사실적인 차원에서 현대의 자아는 '허용해주는 엄마'와 같은 모습으로 더욱 교묘하게 인간을 옭아매간다. 자아의 허용을 통해서만 우리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자아에게 종속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물론 자아 자신이 모든 마음을 조건없이 다 허락한다고 주장할지라도, 여기에서는 반.드.시. 마.음.이. 자.아.에.게. 수.용.되.는. 그. 과.정.을. 거.쳐.야.만.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아, 이런 마음이었구나. 그래 너도 온전했구나. ㅜㅜ"라는 '자아의 감탄사'를 연출해야만 한다.
이처럼 오늘날의 '허용의 명령'은 실은 과거의 '금지의 명령'보다 더욱 그 구속력이 강화된 것이다. 과거에는 자아가 감히 넘볼 수 없이 '금지한' 영역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자아는 모든 영역을 '허용함으로써' 전적으로 자기가 지배하려고 한다.
푸코는 이 사실을 꿰뚫어보았다. 그에 따르면 지배를 위한 권력은 '금지'가 아니라 오히려 '허용'을 통해 강화되어온 것이다. 사실 어느 쪽이든 동일한 율법의 기제인 까닭이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금.지.와. 허.용.은. 서.로. 반.대.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권.력.의. 봉.사.물.이.다.
'금지하는 왕'보다 '허용하는 왕'은 더욱 독재자다. 사람들 자신이 지금 철저하게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도 은폐시키기에, 이는 더 악질적인 권력의 형태다. 최고의 가스라이터인 셈이다.
어떠한 사이비심리학의 작가들은 이와 같은 '허용하는 왕'으로서의 가스라이터가 되는 일을,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마음의 권위자가 되는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정확하게는 자기를 위한 진정한 노예들을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인간모독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율법주의자인 경우가 태반이다.
율법주의자들은 누구인가? 율법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믿는 이들이다. 즉, 율.법.을. 신.앙.하.는.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율법이 곧 종교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아.가. 종.교.가. 된.다. 율법주의자들이 얼마나 자아를 애정하는지는 놀라울 정도다. 자아를 예찬하기 위해서라면 이들은 존재의 사실도 임의대로 굴절시킨다. 자기의 신앙대상인 자아가 존재보다 강하다고 믿고 싶기에 생겨나는 일이다. 망상은 사이비종교에 빠진 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특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과감하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자.아.실.현.론.은. 사.이.비.종.교.다.
사이비종교에 빠진 상태와 같은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통해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그 구체적인 행위를 떠올려보자. 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바.로. 타.인.을. 정.죄.한.다. 이것은 예수가 가장 크게 반동했던 그 일이기도 하다. 율법주의자들이 자기의 율법을 전도해가는 방식도 바로 이 정죄의 협박에 의해서다. 오늘날 협박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야이~ ㅎㅎㅎ 그래서 자아실현 안할거야?"
마.치. 모.두.가. 다. 하.고. 있.는. 자.아.실.현.의. 역.사.에. 그. 개.인.만. 뒤.쳐.진. 것.처.럼. 개.인.을. 협.박.한.다.
이미 다 허용해주고 있는데, 하기만 하면 되는데, 성공은 따놓은 당상인데, 이 '친절한 율법'의 의도에 동참하지 않는 개인은 '바보'가 된다. 그리고 오.늘.날. 바.보.는. 도.덕.적. 죄.인.보.다. 더. 나.쁜. 것.이.다. 첫 번째로는 율법의 기초가 되는 빅데이터의 '앎'을 거부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율법이 구현한 집단주의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이유로 바보는 가장 정죄되어야 마땅한 죄인이 된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우리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3분짜리 유튜브를 보고 얻은 정보로 자꾸 아는 척을 하려고 할까? 어떻게든 바보로는 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것이다. 위대한 빅데이터의 앎에 동참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자기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최소한도로는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혼내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여기에는 간절하다.
애착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자아를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관계적 활동들, 글쓰기를 함으로써 자아를 확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문예창작의 활동들, 더 많은 이야기를 소비함으로써 자아를 온전하게 강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판타지게임의 활동들에 우리는 왜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려 하는가? 그것들이 재미있어서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쫓.기.고. 있.어.서.다. 바보로 정죄하기 위해 뒤에서 낫과 호미를 들고 달려오는 자아의 광신도들에게 쫓기고 있어서 이러한 일들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할.수.록. 정.말.로. 바.보.가. 된.다.
당연하다. 노예가 되는 일은 가장 바보의 일이다. 여기에서 '바보'라고 하는 것은 비세속적인 현자가 일부러 아둔하게 자기를 낭만적으로 미화하고자 하는 그 표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자아의 기획이다. 이러한 '바보'의 외연을 취함으로써 자아는 자기가 제일 똑똑한 것처럼 역으로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 가증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자아가 먼저 나서 '바보'를 예찬함으로써 얻는 이득은 확실하다. 우선적으로는, 바보를 정죄하려는 자아의 광신도들과 자아가 서로 무관한 것처럼 구조화할 수 있다. 그러니 광신도들에게 쫓긴 이를 자아가 미리엘 주교처럼 웃으며 수용해주는 그림은 더욱 완성되기에 수월해진다. 이에 따라, 자아에 의해 수용된 이가 바보를 좋은 것으로 보며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동기화하는 일 또한 한결 용이해진다. 실은 서로 한패인 두 사기꾼 사이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일과 같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현대적 죄사함'의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도덕적 죄인보다 사악한 바보를 똑같은 '바보'의 외양을 한 자아가 용서해준다. "바보가 되어 혼나는 일이 너무 무서워요."라고 말하는 이에게 자아는 "바보여도 괜찮습니다. 바보도 온전합니다."라고 말해준다. "저도 바보입니다."라며 사람좋은 미소를 짓는 일은 고객서비스다.
이로써 죄인의 역사가 구원되는 것만 같다. 개인은 더는 쫓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안도감을 경험한다. 여기가 자신의 쉴 자리였다는 확신이 생겨난다.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것처럼 따듯하다. 자신도 자신을 구원해준 이 다정한 '바보'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이 내면에 자리잡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아의 세력들에게 바보로 쫓기던 개인이, 바보로 위장한 자아에게 구원을 받아, 자발적으로 바보가 되려 하는 기만극이 완성된다. 이 개인이 "이제 자아실현의 악몽에서 벗어나 쉴 수 있겠구나! ㅜㅜ"를 외치던 그 자리는 가장 '자아를 실현시켜줄' 노예가 될 바로 그 자리다.
자.아.가. 얼.마.나. 교.묘.한.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 이러한 글도 실은 자아에게 봉사하게 되는 결과를 의도치 않게 달성하게 된다. 자.아.는. 일.종.의. 어.그.로.꾼.이.다. 더욱 강한 비판일수록 더욱 큰 먹이가 된다. 옹호도 비판도 하지 않으며 그저 무시하는 것이 답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것도 답이 아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그 행위도, 자아에게는 자기의 자상한 큰 품을 증거하는 자료가 된다. 그런 즉, 우리는 자기를 무시해도 된다는 품 넓은 자아의 '허용의 명령' 위에서 무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자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아는 이처럼 더 많은 노예를 만들어내기 위해 율법의 조항을 적극적으로 늘려간다. '허용의 명령'은 더욱 많아진다. 자아는 마치 아름다운 순교자처럼, 찣기고, 도륙당하고, 무시되어도, 그 모든 것을 다 허용하는 품새를 취한다. 특히 자아는 현대에 들어와 '영성 자본주의'와 결탁함으로써 더욱 고귀한 영적 언어들로 '허용의 명령'을 치장한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엄마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무너지면 모두가 그 앞에서 신성한 명령을 기다리는 어린양이 되듯이, 인류를 위해 끝없이 '허용의 명령'을 집행하며 순교한 '영적 자아'는 노예화를 통한 자본을 더욱 크게 축적해갈 수 있게 된다.
"나를 너무나 미워하는 너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해보렴. 엄마가 숨이 넘어갈 때까지 꼭 들어줄 거야. 마지막 경청까지도 엄마를 미워할 수 있는 너의 자유가 실현되는 일에 아낌없이 쓰도록 할게. 엄마가 없어져도,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인생이라는 멋진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내려가렴. 엄마는 네 마음속에서 너의 풍요로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기뻐할테니."
이것이 심리영성적 엄마로 행세하는 자아의 목소리다. 너무 고결하고 위대해서 말문이 막힌다. 무엇을 하든 우리는 그 앞에서 죄다 비루해질 것만 같다. 그렇게 우리는 어떻게 하더라도 노예의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차라리 이처럼 우리를 궁극적으로 수용해주는 엄마의 신성한 권위를 우리도 빨리 수용함으로써, '슬기로운 노예생활'을 이루어가는 편이 보다 현명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궁극적 율법'의 권세 아래서 자유는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자아로부터의 자유, 자유, 그리고 또 자유를 말하는 실존상담은 이 경우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응, 엄마, 그런데 엄마 지금 가짜로 죽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죽는 거예요. 엄마 이제 다시는 못 돌아와요. 절대로 알 수 없는 그 죽음 속으로 엄마는 지금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서 엄마가 쌓은 그 어떤 권세도 갖고 가지 못할 그곳으로 엄마는 지금 향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당하게 제 이야기하라고 이제 그만 하시고, 지금 엄마의 기분은 어때요?"
자아가 우리에게 엄마 행세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패륜이라는 금기를 범하면 된다.
율.법.의. 권.위.는. 언.제.나. 율.법.에. 기.록.되.지. 않.은. 금.기.를. 행.함.으.로.써. 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치 모든 '허용의 명령'이 다 적혀있는 것 같은 자아의 '궁극적 율법'에 결코 기록될 수 없는 '궁극적 금기'는 무엇일까?
앞서 묘사했듯이 그것은 바로 '죽음'이며, 이는 아무리 견고하게 구성된 '생존의 안전'을 위한 장치라도 뒤흔들 수 있는 궁극의 것이다. 어떠한 명령들로 방비하더라도, 죽음은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스스로 명령한다.
자아의 율법에는 결코 안전에 반대되는 것은 기록될 수 없다. 율법은 안전의 목적을 위해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안.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율.법.의. 패.배.가. 된.다. 이것은 지혜다. 실존주의가 죽음을 강조하는 이유며, 동시에 붓다와 예수가 죽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그 이유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이.는. 율.법.이. 그.를. 건.드.릴. 수.조.차. 없.다.
종교적 선각자들은 세간에서 보기로는 스스로를 안전하지 않게 함으로써, 죽음을 그들의 가장 가까이로 끌어와 자기의 편으로 삼았다. 그러니 그 앞에서 율법들이 다 무너졌다. 무력해졌다. 도저히 그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유의 선각자들은 최종적으로 율법에 대해 승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현실이 찾아왔을까? 더.욱. 안.전.해.졌.다. 죽음 말고는 이제 세상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전부 사라진 까닭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눈치챌 수 있으며, 필히 눈치채는 일이 좋다. 우리는 왜 안전하지 못하다고 경험하게 되었는가? 율법이, 바로 자.아.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프로이트에게서, 초자아와 원초아에서 비롯한 양방향의 위협으로부터 자아가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 실상은 오직 자아만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이것은 더욱 분명해졌다. 문명의 발전에 의해 인간의 생존율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원시시대만큼이나 두려움을 경험한다. 왜인가? 답은 역설적이다. 바로 문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문.명.은. 명.령.에. 의.해. 세.워.진.다.
기억이 문명을 시작한다. 기억의 축적인 명령체계로서의 율법이 문명을 발전시킨다. 빅데이터가 그 발전을 가속화한다.
온전한 일이다. 나무랄 데가 없는 건강한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겨난다. 정말로 무수한 사상가들이 지적한 바, 인간이 그 자신을 돕기 위해 만든 명령체계가 이제 역으로 인간 위에 올라서 인간에게 명령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소외'의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이 명령체계는 개인에게 내사됨으로써 마치 '내면의 신'과 같은 지위를 끝내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짐작하듯이 이것이 바로 자아다.
소외는 파편화된 것이다. 자아는 이 분열을 조장한다. 자아를 강조하던 이들의 논리를 살펴보라. 대극을 주장하는 이들은 인간의 내면을 최소 둘로 분열시켰다. 다양한 분아(parts)를 주장하는 이들은 더 잘게 쪼개 놓았다. 심지어는 인간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조합이란다. 이러한 가슴아픈 분열이 일어났으니 이제 통합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자아가 그 중심에 있다. 이렇게 자기(self), 참나, 메타인지 등의 표현으로 그. 이.름.만. 뒤.바.꾼. 자.아.가 통합자로서의 권위를 얻음으로써 인간소외의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자기가 분열시키고 자기가 통합하려고 한다. 괴물 옷을 입고는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괴롭히다가, 히어로수트로 바꿔 입고는 짜잔 지금 막 나타난 삶의 구원자처럼 연출하는 것이 자아가 펼치는 기만극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아가 우리의 안전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위협자다.
이러한 장면을 한번 떠올려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매일밤 귀신으로 분장해서는 아이의 목을 졸라댄다. 아이가 정신을 잃으면 귀신화장을 지운 뒤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정신차리게 한다. 그리고는 아이를 가득 끌어안고서 영원히 엄마가 지켜주겠다고 아름다운 맹세를 한다. 이것은 공포영화의 소재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왜. 자.아.는. 공.포.의. 소.재.가. 아.니.겠.는.가?
우.리.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일.은. 자.아.가. 신.으.로. 행.세.할. 때. 생.겨.난.다. '허용의 명령'를 남발하고 있는 이는 지금 자기를 신의 입장처럼 두고 있는 이 자아다. 자아의 유일한 문제는, 자기는 신이 아니라 누구보다 겸손한 인류의 봉사자인 척하면서 실은 신이 되려는 의지를 지속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의지는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모두에게 권고된다. 왜 그러는가? 모두를 신이 되게 촉진함으로써, 자아 자신은 그보다 한층 더 높은 '신 위의 신'이 되고 싶은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높은 자아실현을 이루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노예인 것 같은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자.아.는.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자아초월'의 운동을 또한 '실존'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가? 자아는 율법이고 명령이다. 그렇다면 자아를 초월한다는 것은 곧 명령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자.아.초.월.은. 명.령.초.월.이.다. 이 명령초월은 '금지의 명령'과 '허용의 명령'을 동시에 초월한다. 그럼으로써 '명령자'로서의 자아의 권위를 붕괴시켜 자아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린다. 그 자리는 어디인가? '봉사자'의 자리다. 자아는 우리에게 명령하라고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봉사하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자기? 메타인지? 참나? 작가적 시선? 탈동일시적 주체? 이 자아의 변주들은 다 봉사자의 본분 속에서만 존중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명령초월'을 아주 손쉬운 방식으로 이룰 수 있다. 사실적인 상황들 속에서 이렇게만 물으라.
"이게 지금 필요한 것인가?"
빅데이터가 들이닥친다. 메뉴판과 같다. 중국집 메뉴판, 햄버거샵의 메뉴판,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메뉴판 등이 무수하게 우리 앞에 전시된다.
"음, 참 자상하시네. 그럼 나는 지금 어떤 것이 먹고 싶을까?"
이 질문은 틀렸다. 자아는 미소짓는다. 그러면서 각 메뉴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시작한다. 이 설명은 머지않아 어떠한 음식을 먹어야 하고, 또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선동으로 바뀐다. 당신은 그동안 윤리적으로 진정한 음식을 먹으며 똑바로 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그러한 대역죄인인 당신도 자아는 다정하게 끌어안아줄 것이다.
"지금부터, 하면 됩니다. 제가 늘 함께하겠습니다. 저와 함께라면 어떤 음식도 다 괜찮습니다. 모든 음식이 실은 온전하다는 그 사실을 잊지 마세요. 걱정마시고, 자유롭게 당신이 원하는 음식을 드셔보세요. 당신의 취향을 세상에 알려보세요. 당당한 당신의 푸드스토리를 멋지게 전해봅시다."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위에 고수를 얹어 밤양갱과 함께 파인애플 청국장에 비벼먹는 당신도 아마 온전할 것이다. 모든 음식은 온전하니까. 자아가 그렇게 허용해주었으니까.
그러나 이것은 틀렸다. 빅데이터가 밀려드는 그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질문해보라.
"이게 지금 필요한 것인가?"
이. 질.문.으.로. 인.해. 당.신.은. 지.금. 당.신.이. 배.고.프.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물론 지금은 오후 1시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르면 당신은 점심식사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지금 점심식사가 필요하지 않다. 배가 고프다고 경험되지 않는다. 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돌연히 출현해 옆 테이블에 앉은 이성에게 눈길이 가서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지.금.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자.아.의. 율.법.은. 언.제.든. 파.기.되.어.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과거의 기억에 의거하여 당신의 필요를 대신 말해주며, 그 필요를 이루기 위해 '금지의 명령'이나 '허용의 명령'을 내리는 율법보다 당신이 현재 당신의 상태를 우선한다면, 당신은 언제나 율법보다 높은 존재로 드러날 수 있다. 더는 당신이 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의 주체인 자아가 언제라도 명령을 초월할 수 있는 당신 앞에서 떨어야 한다. 당신은 모든 자아의 율법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금기의 존재'다.
당신이 이러한 존재로서 메뉴판들을 옆으로 치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아의 율법식당을 나오게 된다면, 다행이다. 특히나 당신이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위에 고수를 얹어 밤양갱과 함께 파인애플 청국장에 비벼먹지 않을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당신은 이처럼, 자.아.의. 명.령.을. 초.월.해.서. 정.말.로. 안.전.해.졌.다.
우리는 바보로 사는 일을 그만해야 한다. 자신의 필요를 물을 수 있는 이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 필요에 정직한 이는 현명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원.래. 현.명.할. 수.밖.에. 없.다.
모.든. 필.요.는. 언.제.나. 삶.의. 필.요.다. 그 필요를 물을수록 우리는 삶에 대해 현명한 본래의 면모를 회복하게 된다. 과거의 기억의 축적인 빅데이터는 결코 이 삶의 필요를 따라올 수가 없다. 당연하다. 삶은 현재에 펼쳐지는 것인 까닭이다.
유튜브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 듣고 싶은 필요를 느끼는 어떤 노래를 듣는다. 노래가 끝나자 '추천목록'이 뜬다. 들어보면 알 수 있다. 필요를 느끼는 '지금 이 감각'과는 맞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의 어느 순간을 말해줄 뿐이지, 지금 이 순간을 말해주지 않는다. 나아가 스스로 묻고 그 답을 향해 가는 삶의 과정을 즐기고 있는 이라면, 빅데이터보다 훨씬 정확하게 지금 자기의 필요를 스스로 채우게 된다.
이를테면, 글을 쓰고 있는 이가 며칠간 사색하던 고유한 표현을 막 창발해서 지금 워드프로세서에 옮기려 한다. 이럴 때 '자동완성기능'은 아주 큰 방해가 된다. 도리어 불편해진다. 섬세한 이는 워드프로세서가 지금 자신을 바보취급한다고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뭐라도 아는 것처럼 먼저 진부한 표현들을 들이대는 그 모습에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자.신.을. 아.는. 척.하.는. 이. 일.들.은. 누.가. 하.든. 간.에. 우.리.를. 불.쾌.하.게. 한.다. 물론 이러면 카운터에 있던 자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다가올 것이다. "제가 듣겠습니다. 제가 소중한 당신의 이야기 알아드리겠습니다. 제가 그 마음 수용하겠습니다." 저리 가라. 들어달라거나, 알아달라거나, 수용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하.는. 이. 현.재.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일이 없다면 샤케라또나 한 잔 더 갖고 와라. 그러면 자아는 화색을 표하며 쪼르르 카운터로 달려갈 것이다. 우리를 위한 봉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때 자아는 귀여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다. 자아가 존재의 엄마인 척하거나, 창조의 아빠인 척할 때, 자아는 개념이 나간 것이다. 개념으로 이루어진 자아가 개념이 나갔을 때 생겨나게 되는 것이 정신병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언제 발병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신병의 위기 속에서 산다. 제일 위험한 그 자리를 제일 안전한 자리라고 착각한다. 다른 이들에게도 "저처럼 놀라운 자아실현을 하세요!"라며 그 위험한 자리로 끌어들인다. 이들은 어쩌면 자기가 분열시키고 자기가 통합하는 '정신병놀이'를 즐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이 되고 싶어하는 신(神)이란 결국 '정신나간 신'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가?
내친 김에 다 물어볼 수 있다. 당신이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관계' 때문이다. 관계는 자아가 뿌리내린 토양이며, 빅데이터 그 자체다. 그래서 율법은 "관계를 지켜라."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당신과 관계맺고 있는 그 대상이 '정말로' 필요한가?
당.신.이. 당.신. 자.신.이.고.자. 하.는. 일.에. 그. 대.상.이. 정.말.로. 필.요.한.가?
당신이 율법의 명령을 초월한다면, 이 대답은 반드시 '아니요'다. 왜인가?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배고프지 않다. 당신 자신은 결핍되어 있지 않다. 이로 인해, 관계의 상대를 통해 당신 자신을 채워야 할 그 필요는 사라진다. 이로써 당신은 그에게 명령하거나 명령받아야 할 그 어떤 이유가 없다. 그를 금지하거나 허용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그러면 당신은, 더는 당신의 필요가 아니게 된 상대가 완전히 새롭게 보일 것이다. 거의 반드시인데, 이.유.없.이.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이것은 '자아초월'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이다. 당신은 '무조건적인 수용'이라는 표현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를, 그 편린을 맛본 것이다. 당신이 상대를 허용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심지어 자아는 여기에 있지도 않았다.
사.랑.이. 스.스.로. 자.신.이.었.던. 것.뿐.이.다.
빅데이터 속에 사랑은 없다. 기억 속에 사랑은 없다. 율법 속에 사랑은 없다. 곧, 자.아. 속.에. 사.랑.은. 없.다. 사랑은 자아가 초월된 자리에 있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자.아.에.게.는. 금.기.다. 원하지만 이루어지면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자아는 사랑을 이루지 않기 위해, 그러나 이루고 싶은 척은 하기 위해, '허용의 명령'을 남발한다. 모든 것을 허용하고자 하는 그 행위를 사랑의 표현인 것처럼 위장한다. 자아에게 불행인 것은, 우리가 더는 바보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현.하.고. 싶.다. 이것은 궁극이다.
우.리.의. 궁.극.적. 필.요.는. 사.랑.이.다.
우.리.의. 궁.극.적. 필.요.는.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금지의 명령'과 '허용의 명령'을 둘 다 기각하는 그 금기를 이루는 자리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다. '금기'의 정확한 이름은 바로 '자유'이며, 우리는 그렇게 이미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자.유.를 이룬 우리 자신인 까닭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목적이며, 우리가 사랑을 필요로 했던 그 이유다. 이루어진 것이다. 스스로 '궁극적 필요'가 채워지니 대상을 남용하지 않아도 된다. 대상이 이제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 보이며, 그 사람을 향해 사랑은 또 움직여간다. 우리 자신의 자유가 상대의 자유로 확.장.된.다.
우리는 지금껏 이것을 가장 두려워해왔다. '상대의 자유'를 가장 안전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상.대.의. 자.유.는. 잠.정.적.인. 자.신.의. 죽.음.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의 죽음'이 생겨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우리는 상대에게 '허용의 명령'을 내림으로써 '상대의 자유'를 '조련하려' 했던 것이다. 자유의 날개를 꺾어놓고는 우리가 상대를 '자상하게' 허용하는 새장 속에서만 상대가 제한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지배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아라고 하는 '정신나간 신'이 하는 일이다.
종교적 선각자들이 자기 자신을 보다 죽음에 가까운 '덜 안전한' 지평에 위치시킨 것은 그들이 자신의 궁극적 필요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사랑이 인간의 궁극적 필요라는 사실을 이들은 일찌감치 이해했던 것이다.
이 필요에 응답할 가장 정확한 방법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일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들은 안전에 대한 과잉된 율법의 명령을 초월하게 되었고, 사랑은 실현되었다. "사랑이 율법보다 강하다."라는 거룩한 메시지는 사실로서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이들은 더욱 안전해졌다. 사랑이 이제 스스로 그들을 보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가장 심원한 종교적 역설이 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이.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자아초월'의 현실이다. '허용의 명령'을 집행하는 '정신나간 신'으로서의 최상위적 지위를 꿈꾸는 오늘날의 자아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자아의 금기가 사랑이다."라는 말과, "금기가 자유다."라는 말을 다시 기억해보자. 그리고 합쳐보자.
"자아의 자유가 사랑이다."
율법을 넘어선 '자유'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감수성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이해를 여기에 더해보자.
"자아의 죽음이 사랑이다."
자아는 누구에게 '허용의 명령자'로서 행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죽어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자.아.가. 죽.는. 그. 자.리.에.서. 자.아.는. 자.유.로.워.진.다.
자아가 '정신나간 신'의 자리에서 물러나 '편리한 봉사자'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자아의 죽음이다. 이 자리에서 자아는 우리 자신과 상대를 끝없이 율법으로 가스라이팅하며 봉쇄해야 한다는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나머지는 자아의 죽음과 함께 출현한 사랑에게 맡겨진 것이다. '가짜'가 물러난 그 자리에 '진짜'가 귀환한 것이다.
혹여 아직도 철을 모르는 가짜가 말할 수 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네 이야기를 해봐. 내가 들어줄게. 내가 알아줄게. 네 맘대로 자유로워라, 호이!"
진짜가 대답한다.
"응, 너의 죽음이 필요해. 아, 못해주는구나? 무능하네.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한 마디 더 할 수 있다.
"네가 죽지 않기 위해 나의 자유를 허용하는 척하는 방식으로 감히 나의 자유 위에 올라서지 마라."
이것은 모든 율법의 바깥쪽에서 제일 처음 쓰이게 될 신성한 제1의 현대적 불문율이다. 율법 아닌 탈율법으로서의 '존재율'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개미가 우주를 허용할 수 없듯이, 누구도 존재를 허용할 수는 없다. 자아 따위가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그 반대로 자아가 존재에게 허용되어야 하는 것 또한 아니다. 자아의 명령체계는 존재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존재가 존재하는 데는 어떤 명령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존.재.가. 스.스.로. 사.랑.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존재율'에 의해 지금 실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미 '자아초월'을 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일은 분명 우리의 필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