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45

"삶의 예술가의 발달과정"

by 깨닫는마음씨


hand-2604429_1920.jpg?type=w1600



실존상담은 상담자와 내담자가 함께 '삶의 예술가'로 무르익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또한 '자아초월'의 과정임은 분명하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학문분과로 정립되어 심리학의 4세력이라고도 불리게 된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을 아주 쉽게 묘사하면 '심리학'과 '영성'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적 영성주의' 또는 '영적 심리학'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기원과 활동의 범주는 결국 종교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보다는 '영성'이라는 개념이 주요하게 활용되는 것은 현대의 특징이다. 이것은 개인이 관계 및 구조 또는 공동체에 근거해야 온전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해체하고자 한 실존주의 운동의 분명한 영향이다. 실존주의를 통해 근대적 시민주체로서의 인간관이 현대적 전인성으로서의 인간관으로 전환되었다. '이념적 보편성'에서 '체험적 주관성'으로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종교적 영역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더는 개인이 보편주의적 종교담론에 입각하지 않아도, 스스로 종교적 실재를 지향할 수 있다는 정당성이 확보된 것이다.


예전부터 사용되어온 영성이라는 표현은 보통 체험적 현실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적 영성'의 개념은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실존적 함의'가 내포되어야 한다. 즉, 개.인.이.라.고. 하.는. 개.념.의. 존.재.론.적.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자아초월심리학은 초개인심리학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인격적 개인을 넘어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개인'은 사실 '개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곧 '근대적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넘어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현대적 개인'의 개념 내지 '실존적 개인'의 개념은 그것을 넘어서 이루어야 할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든가, 개인을 넘어서 우주와 하나된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든가, 개인을 넘어서 모든 인격의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개인보다 큰 것이 상정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개인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개.인.이. 가.장. 크.며. 가.장. 온.전.하.다. 그래서 이러한 함의를 담기 위해서는 자아초월심리학이라는 번역어를 활용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현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인은 '앎'의 차원이기 이전에 먼저 '삶'의 차원에서 존재한다. 이것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하는 그 유명한 실존주의의 선언이다. 국내의 종교철학의 대가인 정재현 선생님은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을 '없음'과 '모름'의 주제로 설정한다. 이것을 개인의 '주제파악'이라고도 말한다. 주제파악을 못하는 개인은 자기도 모르는새 자기를 신격화시킨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실존주의자들은 이 논지에 동의한다. 당연하다. '이념적 보편성'과 동일시해 끝없이 자기를 상위존재인 것처럼 끌어올려가던 근대적 주체가 자행한 폭력에 반동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실존주의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주체가 이념을 소비하던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앎'이다. 근대적 주체는 자.기.가. 아.는.대.로. 자.기.의. 삶.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앎이 삶에 앞선다."의 행동강령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고의 앎으로 상정된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메.타.인.지.다.


근대를 추동하며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친 '주체의 인식론'은 메타인지를 발달시킴으로써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기획으로 쉬이 전락하게 되었다. 이것을 전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러한 기획을 실현하려 할수록 개인의 삶은 점점 더 소외되어만 갔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소외의 내용은 언제나 공통적으로, 인간이 자신을 위해 도입한 소재가 역으로 인간을 위협하게 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삶에 도움이 되기 위해 추구한 앎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히려 삶 위에 서서 삶을 지배하려는 기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배는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됨으로써 그것이 지배라는 사실을 은폐시키곤 한다. 심지어 통.합.의. 목.적.은. 그. 무.엇.도. 소.외.시.키.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돌.보.기. 위.해.서.라.고. 제.시.된.다. 소외를 만들어내는 기제가 역으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기제인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교묘한 기만극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소외로부터 구원하려는 통합적 메타인지의 방식으로 영성이라는 것을 추구할 때, 그 '최고의 앎'의 행위로 말미암아 개인은 더욱 소외되는 문제가 생겨난다. 이것은 이미 '현대적 영성'의 개념이 아니다.


자아초월심리학이 성립되던 초기에 가장 많이 대립했던 세력은 바로 실존심리학이다. 실존심리학자들은 정확하게 상기한 지점을 비판했다. 근대적 인식론을 단지 영적 메타인지론의 외연으로 확장해 만든 그 결과물이 정말로 이 시대에 제안되어야 할 타당한 영성의 개념인지에 대해 회의적 물음을 던졌다. 근대적 인식론이 결국 전체주의의 시녀로 전락했듯이, 실존심리학자들에게 있어 자아초월심리학의 초기의 주장은 '영적 전체주의'의 암시와도 같았다.


'영적 전체주의'란 무엇인가? 아주 쉽게, 영성은 모든 것의 부모처럼 모든 것을 돌보는 최고의 기능이자, 단계인 동시에, 구조이며, 고로 이 영성을 통해 모든 것이 새롭게 재편되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제1의 보편적 원리로 영성이 채택됨으로써, 이제 영.성.이. 현.실.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앎이 삶에 앞선다."의 또 다른 변주다.


영적 전체주의로 사는 이들이 현실에 대해 빈번하게 발화하는 일상적 대사가 있다.


"안타깝네."


현실(reality)은 실재(reality)다. 실재의 명백한 의미는 '진짜'다. 진짜에 대해 대체 무엇이 안타깝다는 말인가? 이러한 말을 하는 이는 자기가 진짜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이뿐이다. 진짜보다 더 높다는 것은 어떻든 간에 진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말.을. 하.는. 이.는. 그. 자.체.로. 진.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진.짜.로. 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진.짜.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진짜'라는 말은 진.짜.로. 살.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초기의 자아초월심리학에 대한 실존심리학의 비판은, 브라만교에 대한 붓다의 비판과도 유사한 양상을 띤다. 이것은 결국 '종교적 실재를 향한 지향'이라고 할 수 있는 영성개념의 그 '지향점'을 앎에 놓는가, 아니면 삶에 놓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내면의 무의식, 내면의 아이, 내면의 자아들 등을 '자상하게 알아주고자' 한다면, 이것은 그 지향점이 앎에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는 근대적 인식론이 펼치는 '주객관계' 속에서, 주체와 대상 사이의 소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앎을 추구할 때, 이러한 앎이 언제나 '대상에 대한 앎'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아주 유익하다. 이와 동일한 대상화의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마.저.도. 대.상.으.로. 만.든.다. 메타인지는 우리의 삶을 가장 대상화하는 그 방식이다.


이렇게 모든 삶을 대상화해놓고는 "안타깝네."라고 말하는 이는 지금 단 한 가지의 이득을 누리는 중이다. 그것은 '모든 삶으로부터의 분리'다. 대상화의 분명한 이득은 대상과 자기를 분리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분리되면 안전한 것 같다. 이처럼 실은 삶.이. 두.려.운. 이.가. 삶.을. 대.상.화.한.다. 그는 이것을 '삶의 초월'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적으로 이는 '삶의 분열'일 뿐이다.


실존심리학자들은 초기의 자아초월심리학이 이 '삶의 분열'을 조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예찬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명상만 하면 모든 것이 좋아진다느니, 영적 글쓰기를 하면 약을 먹는 것보다 건강이 좋아진다느니, 메타인지를 통한 마음의 돌봄을 하면 원하는 것을 다 갖게 된다느니 하는 식으로, '영적 이야기'를 통해 '현실적 삶'을 회피하려는 '영적 우회'의 경향성이 자아초월심리학의 운동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이들은 발견했다.


그래서 실존심리학자들의 비판은 결국 자아초월심리학의 역기능적 차원에 대한 심리학의 자정작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아를 초월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적극 동의하지만, 이 '자아초월'의 움직임이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또 다른 '현실회피적 자아'를 분열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실존심리학자들은 섬세하게 보고한 것이다. 정말로 자아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정확하게 개방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이처럼 초기의 자아초월심리학의 열렬한 비판자였지만, 그 핵심을 이해해보면 실존심리학만큼 자아초월적인 접근도 달리 없다. 실.존.상.담.은. 자.아.초.월.심.리.학.의. 아.주. 효.과.적.인. 실.천.론.이.다.


자아를 초월해가는 일은 분명 우리가 '근대적 주체'로서 '앎'에 경도되어 사는 일을 지양해가는 일이다. 이렇게 살 때 우리에게는 '삶'에 대한 감수성이 회복된다. 감수성이 회복됨에 따라 '삶의 예술가'로서 우리 자신이 개화된다. 이 과정은 엄밀한 발달의 과정은 아니지만 개인에게 체험되는 상태에 따라 흡사 발달의 과정처럼 묘사해볼 수는 있다.



# 보기만 하면 되겠구나


이것은 자신이 삶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착각으로 말미암아, 삶을 통제하려는 강한 긴장 속에서 삶과 싸우던 이가 체험하게 되는 상태다. 긴장이 극도화되었을 때 일종의 해리가 생겨나며, 그로 인한 이완감이 체험자에게 찾아온다. 그 전까지 긴장했던 정도만큼 이완감의 크기는 크게 경험된다. 그래서 체험자에게 더욱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이때 체험자는 자신이 모든 '행위'의 과업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책임져야 할 고된 행위들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 경우, 그는 '삶을 보는 입장'에 위치하게 된다. 삶과 분열되어 그 삶을 관조하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는 다만 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치 '책'과 같은 텍스트고, 자기는 '작가'로서 이 이야기들을 봄으로써 이야기가 말하는 바를 잘 알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실현의 가장 극적인 형태다. 메.타.인.지.가. 신.적.인. 위.상.으.로. 드.러.나.는. 경.우.인 것이다.


이에 따라 체험자는 이제 '신처럼' 행세하게 된다. 모든 것을 안타깝게 보고, 그렇지만 안타까운 그것들도 다 온전하다고 말하며, 이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어찌 이리도 풍요롭냐는 식으로, 이 모든 것을 '아는' 자기감격에 빠진다.



# 안 보아도 되겠구나


메타인지의 감격은 금새 권태와 냉담으로 전환된다. 당연하다. 살.지. 않.으.면. 삶.이.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감추기 위해 자주 시도되는 전략은, 다양한 미디어의 놀이를 소비하고, 또 타인들에게 메타인지를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스승놀이'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점점 생활에서 화가 쌓여간다. 왜일까? 놀다 보면 지치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고 있으면 그날 밤 왠지 모르게 계속 짜증이 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계속 재미있는 척, 감동받는 척하며 놀지 않을 수는 없다. 한 순간이라도 '놀고 있지' 않으면 지루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력해질 것만 같다. 기껏 놀라운 메타인지의 '능력'을 얻었는데 무력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능력이 부정되는 일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정직한 몇몇은 이 상태를 넘어간다. 자신이 어떠한 앎의 능력을 얻었든 간에, 여전히 자신은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놀이를 하는 대신에 삶이 무엇일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보니 삶이 스스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게 된다. 즉, 자.기.가. 보.고. 있.지. 않.아.도. 삶.이. 알.아.서. 스.스.로.를. 조.직.해.나.간.다.는. 사.실.을 점차 실감하게 된다.


이 실감으로 인해, 이제 체험자는 내일이 기다려진다. 권태와 냉담이 어느 순간 사라져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을 조금 더 자신의 편으로 실감하게 된 입장에서는, 그 전까지의 불안이었던 것이 자유의 감각으로 전환된다. 자신이 신뢰해야 할 것은 메타인지가 아니라 삶이라는 점이 그에게는 더욱더 분명해진다. 자기가 이제 안 보아도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에게는 기쁨으로 다가온다.


그는 지금 '모름'의 즐거움을 익히게 된 것이다.


#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되겠구나


모르지만 체험하는 즐거움을 누리던 이 체험자는 이내 '체험자'도 아니게 된다. 여기에서는 더욱 신속하게 이 과정들이 촉진된다. 삶에 대한 그의 신뢰감이 커진 까닭이다.


그는 체험하는 '자신'에게 이제 방점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체험에서 해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일.어.나.는. 일. 속.에. 있.을. 뿐.이.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미워하고, 졸려하고, 수줍어하고, 사랑하는 그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삶에 의해 무엇이 되고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 자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운.동.이.다. 흐름 그 자체다. 문득 그가 자신을 의식할 때면, 그는 생각한다. "존재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 생각이 그를 더 자유롭게 한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이해하게 된 것이다. 몰.라.도. 괜.찮.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없.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신기하게도 그것이 정.말.로. 괜.찮.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그는 지금 '없음'의 온전함을 누리게 된 것이다.



# 나는 그냥 나이면 되겠구나


생각이 그에게서 점점 줄어든다. 필요할 때만 생각이 쓰인다. 무엇인가에 괜히 막 감격하려고 하던 감정놀이가 그에게서 잦아든다. 정말로 만나질 때만 감동이 찾아든다. 무엇보다 그는 느낌에 대해 "이것은 무슨 느낌일까?"라며 생각하지 않는다. 더 잘 느끼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를. 나.답.게. 유.지.해.줄. 것. 같.은.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다.


되.는. 만.큼.만. 그.는. 산.다.


대.충. 산.다.


대충 살아도 삶이다. 그는 대충 된 이것에 그냥 '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니 대충 해도 나다워진다. 대충 해도 된다니 자유롭다. 걸음걸이가 경쾌하고 대범해진다. 툭툭 지르고 본다. 그래도 나라서다. 그렇게 해서 뭐가 안되어도, 그래도 나라서다.


그는 정확하게 실감한다.


"나는 그냥 나이면 되겠구나."


자신이 언제나 자유롭다는 사실을 그는 선언한 것이다. 그때그때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자신의 면모에 단 1mm의 부족함도 없으며, 단 1mg의 결핍도 없다는 사실 위에서 그는 산다. 그는 완전하다.


'나로 있음'의 행복을 그는 영원히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초월하는 개인의 의미다. 삶에 무르익어간 '삶의 예술가'의 모습이다. 이 모든 과정을 더 짧은 말로 묘사해본다면, 이것이 곧 실.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빠.르.게. 삶.을. 우.리. 자.신.의. 편.으.로. 삼.을. 수. 있.는.가?


이것은 가장 실용적인 질문이다. 실존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행복은 그 답에 달려 있다.


마음을 알고리즘처럼 알면 삶이 우리의 편이 되는가? 삶을 대상화해서 메타인지를 키우면 삶이 우리의 편이 되는가? 놀라운 영적 체험을 구조화하면 삶이 우리의 편이 되는가? 하나같이 다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방법론들이다. 삶과 우리 자신을 분열시키는 일에 특화된 근대적 방법론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삶을 빠르게 우리의 편으로 끌어오려면 '삶이 앞서게' 하면 된다. 되도 않는 의지로 삶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으면, 삶은 원래의 속도대로 빠르게 나아간다.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알아야 할 것이 많다고 착각해서 우리는 늦장을 부린다. 우리 자신의 삶과는 상관도 없는 것을 알려고 한다. 이것을 이해하면 편하다. 지.금. 우.리.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말해도 그것이 내 자신의 삶과 상관없다면 그것은 나에게 무의미한 것이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술.은. 자.신.에.게. 필.요.한. 일.만.을. 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하찮더라도 자신에게는 필요한 그 일을 조건없이 그냥 하면 예술이 된다. 자신의 삶이라는 것은 원래 상대적인 조건들이 만드는 관계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다른 누구와 비교하거나 경쟁하며 특정한 조건을 달성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삶이 이끄는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필요만을 해나가면 그 삶은 완전하다.


남들로 인해 우리 자신의 삶이 덜 살게 되거나 더 살게 되지 않는다. 진짜로 살고 싶은 이가 자신의 편으로 삼아야 할 것은 '남들'이 아니라 바로 삶 그 자체다.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우리의 삶과만 친하면 된다. 자신의 삶과 친하지 않은 이가 대신 남들과 친해지려고 해서 생겨나는 고통은 상담의 영원한 주제다.


삶.과. 친.해.진.다.는. 것.은. 대.충.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게를 빼는 것이다. 무게는 조건 때문에 생기니, 무게를 뺀다는 것은 조건을 뺀다는 것이다. '대충'과 '조건없음'은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친밀감의 상태다.


삶은 조건없이 우리에게 삶을 주었는데, 우리는 삶을 사는 일에 왜 그리 많은 조건을 부여하는가? 더 많이 알아야 잘 살게 된다며 그렇게 많은 '앎'의 조건을 부여한 결과로 우리는 정말로 행복하게 살게 되었는가?


자.아.는. 앎.으.로. 만.들.어.진. 조.건.덩.어.리.다. 이 조건들을 충족해거나 또는 강화해가는 일이, 우리가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영성의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것은 초월되어야 한다. 초월한다는 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향.하.는. 것.이다. 삶의 실상인 현실에서, 삶의 속성인 '조건없음'을 실현하는 일이다. 대충 살아보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대충 '삶의 예술가'로서 발달해간다.


물론 이것은 엄밀하게는 발달은 아니다. 삶.이. 이.미. 예.술.로. 빚.어.낸. 우.리.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 발달론보다도 앞서는 까닭이다. 방의 거울이나 마음의 거울을 보면 너무 '대충'인 것 같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또한 당신을 웃음짓게 한다. 그 웃음이 깊어지면서 당신은 '삶의 예술가'로 무르익는다.




작가의 이전글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