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에스프레소 머신의 진리와 외로움의 진리성"
우.리.는. 정.말.로. 외.로.운.가?
현대인의 핵심적 정서를 관통하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우리가 외로움이라고 경험하는 상태는 실은 '결핍갑'이다. 혼자 있을 때를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지루한 권태 속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아 화를 낸다. 자신이 능력 및 매력이 없기 때문에 멋지고 아름다운 사건들이 자기에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줄 화려한 세계에 동참하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으려 한다. 그러다가 쉬이 지쳐 결국에는 유튜브를 보고 넷플릭스 결제를 한다. 또는 엑스박스 게임패스를 뒤적이거나, 오늘자로 업로드 된 야동들을 웹하드에서 뒤적이다가, 결국에는 별 볼 일 없는 하루를 뒤척이며 마감한다.
이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결핍감이다. 결핍감은 '채워져야 할 당위'를 절박하게 느끼는 상태다.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할 것은 이 결핍감은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이 채워지지 않아도 우리의 생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그런데도 조바심이 난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비정상'이 되는 것만 같다. 이. 상.태.의. 자.신.을. 견.딜. 수. 없.다.
결.핍.감.을. 경.험.하.는. 이.는. 지.금.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외로움이 아니다. 중독의 상태다. 그러나 이 중독의 상태를 일부러 외로움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외로워서 그랬어요. ㅠㅠ"라고 하면 중독과 관련된 제반상황들이 미학적으로 정당화될 것 같기 때문이다. 지지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겠다는 자상한 표정들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리라고 기대된다.
지금 '엄마'는 소환되고 있다. 중.독.이. 엄.마.의. 양.육.을. 호.출.하.는. 기.제.라는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가 아주 눈여겨봐야 할 현상이다. 결핍감을 호소하는 누군가의 중독은 그를 돌보려는 '엄마'를 반복적으로 불러내어 양육의 행위를 지속적인 형태로 출현시킨다. 다자이 오사무의 악마같은 이야기와도 흡사하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양.육.이. 바.로. 최.고.의. 자.극.을. 제.공.하.는. 활.동.인. 까.닭.이.다.
이것은 하.나.의. 중.독.이. 다.른. 중.독.으.로. 전.염.되.는. 방.식.이다. 마약이 그 소비자를 계속해서 늘려가는 이유는 중독의 장 자체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다. 놀랍게도, 마약중독을 치유하려는 활동조차도 중독의 장에 포섭되어 또 다른 중독재로 기능하는 경우는 빈번하다.
이를테면, 한 마약중독자를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엄마와 같은' 헌신적 기능을 수행하는 치유자는, 바.로.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강.렬.하.게. 자.극.받.는.다. 이것은 흡사 자애롭고 자비로운, 그러나 동시에 정의롭고 엄정한 '신'이 된 것만 같은 상태다. 이 신적 전능감의 '권위'를 얻음으로써 경험되는 자극은 성적 오르가슴에 비견될 정도의, 어쩌면 그 이상의 자극이다. 이에 대한 중독은 애써 거절될 이유가 없다.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짜릿한 자극'까지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일은, '중독'이라는 부정적인 어감의 범주도 피해가면서 실제적인 중독의 이득을 취하기까지 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일이다.
아주 많은 상담자들이 이러한 '상담중독'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혹시 비밀이었다면 이제는 드러나야 할 필요가 있다. 상담활동을 중독재로 소비하는 상담자들은 그. 자.신.이. 자.극.을. 얻.기. 위.해. 상.담.을. 한.다. 조현병 내담자를 정성스러운 헌신의 힘으로 치유했다거나, 놀라운 대극의 마음법칙을 적용해 결코 풀릴 수 없을 것 같던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했다거나,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대신에 마법의 글쓰기를 시켜 내담자를 건강하게 만들었다거나 하는 삽화들은 이 '상담중독'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이것은 마치 종교적 개종의 문제와도 흡사하다. 제랄드 메이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중.독.은. 일.종.의. 종.교.현.상.이.다. '상담중독'에 빠져 '신적 엄마'처럼 활동하는 상담자는, 내담자가 원래 '신'으로 섬기고 있던 중독의 소재로부터 개종해 이제 상담자를 새로운 신으로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곧 현재 상담자 자신의 모습으로 드러난, 양.육.하.는. 엄.마.를. 신.으.로. 섬.기.라.는. 그 의미가 된다. 이것을 수식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마약중독 + 상담중독 = 엄마중독
게임중독 + 상담중독 = 엄마중독
알코올중독 + 상담중독 = 엄마중독
유튜브중독 + 상담중독 = 엄마중독
이야기중독 + 상담중독 = 엄마중독
오.늘.날.의. 모.든. 중.독.현.상.은. 엄.마.중.독.으.로. 수.렴.된.다. '엄마'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다. 모든 문제를 해소해줄 것이라고 기대되는 궁극의 이름이다. 소위 '상담자'라고 하는 이들이 이러한 엄마의 신적 전능성을 계시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들은 중독의 문제를 경험하는 내담자들에게 엄마의 양육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함으로써 내담자들을 '엄마교'로 개종시킨다. 이 전도사들에게나 신도들에게나 함께 약속되는 것은, 더 큰 행복이다. 이렇게 쓰고 '자극의 극대화'라고 읽는다.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우리가 가장 많은 자극을 경험했던 관계는 엄마와의 양육관계였다. 그렇지 않은가? 엄.마.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쾌.락.과. 가.장. 큰. 고.통.의. 소.재.였.다. 즉, 자극의 원천 그 자체였다. 부부관계가 더욱 그렇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부관계의 실제가 각기 원가족에서 경험한 양육관계의 반복 및 재생산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 또한 엄마를 중심소재로 두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엄마가 최고의 중독재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이것이 결핍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줌.으.로.써. 모.든. 결.핍.감.을. 채.워.줄. 수. 있.는. 신성한 마법의 존재인 것처럼 곧잘 표상된다. 이러한 방식의 '언어게임'이 '엄마'라고 하는 것을 담론화시켜 권력을 부여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엄.마.가. 바.로. 언.어.게.임.의. 희.생.양.이.라.는. 의.미.다.
오늘날의 성공조건은 엄마를 지지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인기를 얻고자 한다면 적극적으로 자신이 엄마의 편에 서있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 엄마가 자식을 잘 돌보려는 양육사업을 조력하는 이들이 소위 전문가로서 대중적 권위를 확보한다. 나아가 엄마에게 잘 양육된 듯한 모습의 외견 및 언행을 보이는 이들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무수한 '유사-엄마팬덤'의 지지 속에서 유명인이 되어간다. '엄마'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이 시대의 문화적 중추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희생양이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문화의 변두리에 위치한 소수자가 희생양이 아니라, 실은 가장 중심에 위치한 문화적 중추의 소재가 희생양이다. 왜인가? 그.것.이. 가.장. 기.능.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우, 엄.마.는. 더.는. 인.간.이. 아.니.라. 기.능.이.다. 문화를 존속시키기 위해 신적인 기능을 다해야 한다. 실제로 엄마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엄마들의 보편적 정서는 무엇인가? 죄.책.감.이.다. 전부 다 자신이 잘못해서 이 모든 문제가 생겼다고 엄마들은 늘 자책하곤 한다.
엄마는 피곤해도 반드시 아이에게 공감을 해주고, 아이의 마음을 다 온전하게 살펴주며, 아이가 최대치의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늘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덕목들이 양육의 주체인 엄마에게 요청된다. 세상이, 사회가, 전문가들이, 엄마가 이 과.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돕겠다며 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한다. 마치 골고다에 홀로 오르는 예수의 뒤편에서 "우리가 다 주님의 편이에요.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의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공감하며 올라가시기만 하면 돼요! 예수님 홧팅!"이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이.런. 일.을. 정.말.로. 인.간.이. 할. 수. 있.다.고. 믿.는.가?
이것이 가능하려면 그는 인간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매주 목요일 종량제봉투에 담아, 재활용될 수 없는 일반쓰레기로 분류해 내다놓아야 한다. 그렇게 모든 인간성을 포기한 기능으로서만 엄마는 남아야 한다.
비유하자면 이는 70억의 징징거리는 고객의 행렬을 앞에 두고 있는 바리스타의 입장과 같다. 하나하나의 고유한 개성을 온전하게 만족시켜줄 '도파민 에스프레소'를 그의 영혼을 갈아넣어 짜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이 바리스타에게는 부여되어 있다. 고객들과의 '실랑이'를 통해 갈등하고, 번민하며, 자책하는 몫까지도 정당한 이 착즙의 과정이다. 착.취.는. 정.당.화.된.다.
'엄마중독'은 분명히 '엄마착취'의 다른 이름이다. 모유가 착유되듯이, 엄마라는 소재를 통해 도파민은 착즙된다. 더 큰 자극을 바라는 이들이 타인을 엄마로 만들거나 자기 자신을 엄마로 만드는 방식으로 끝없이 엄마를 소환해낸다. 그렇게 엄마의 양육기제를 통한 도파민의 '안정적인 공급'은 꿈꾸어진다. 이것이 오늘날 '행복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병적인 것'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서 우리는 불행하다. '엄마의 불행' 위에 우리의 행복을 쌓으려 해서 우리는 최악이다. 최악으로 불행한데 자신이 그런 줄을 몰라서 우리는 가장 병적이다.
인스타 갬성을 가장 충족시켜주는 도파민 에스프레소 '공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게임과 같은 '겜성'의 일이 일어난다. 전술했듯이 이것은 '언어게임'의 일이다.
여기에서 '공장'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양한 표현으로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 자아, 시스템, 구조, 관계, 율법, 명령체계 등이 그것들이다. 이는 다시 하나의 표현으로 함축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공산품이 언어가 아니라, 공장 자체가 언어다. 언어가 담론을 생산하고, 그 담론이 인기를 통해 권력을 얻어, 이제 진리로 작동한다.
오늘날 진리라고 하는 것은 도파민의 소재다. 고.통. 및. 쾌.락.의. 자.극.이. 되.어.버.린. 진.리.의. 이.름.이. 바.로. 윤.리.다.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윤리에 집착하는 것은, 윤리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이중의 방식으로 도파민의 분비를 더욱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윤리와 동일시된 자아도취는 아주 강렬한 자극의 경험이다. '정의'의 구현은 성행위보다 짜릿하다. 이처럼 현대에서의 윤리는 올바르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극적이기 때문에 소비된다.
어떤 것이 제공하는 자극의 정도가 곧 그것의 진리성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몰락한 진리다. 이렇게 보자면, 윤리란 곧 진리성을 상실한 진리의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러한 '진리성의 상실'의 문제가 이 '공장' 속에서는, 즉 언어 속에서는 이미 필연적으로 내재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결.핍.감.의. 문.제.는. 진.리.성.의. 상.실.의. 문.제.다.
이 문제를 면밀하게 다루기 위하여, 먼저 류시화 시인이 그의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서 소개한 아서 제임스 밸푸어의 '진리에 대하여'를 살펴보자.
우리가 최상의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절반의 진리에 불과하다.
어떤 진리에도 머물지 말라.
그것을 다만 한여름밤을 지낼 천막으로 여기고
그곳에 집을 짓지 말라.
왜냐하면 그 집이 당신의 무덤이 될 테니까.
그 진리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할 때
그 진리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히 여기라.
그것은 침구를 거두어 떠나라는
신의 속삭임이니까.
이 잠언시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언.어.화.된. 모.든. 진.리.는. 절.반.의. 진.리.밖.에.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연하다. 언어구조는 원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뜨겁다.'라는 언술은 '차갑다.'라는 상대적 개념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뜨거우면서 차갑다.'라고, 상.대.되.는. 둘.을. 동.시.에. 말.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언어구조가 붕괴된다.
특히 우리가 '명사'를 중심으로 두는 언어구조를 갖고 있을 때, '선하면서 악한 것' 또는 '높으면서 낮은 것' 내지 '자상하면서 냉담한 것'은 넌센스 퀴즈로나 성립가능할 추상물에 대한 묘사가 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선하고, 높으며, 자상한 것'을 진리로서 불가피하게 언술할 수밖에 없다. 굳이 언술해야 한다면 상대적인 우열관계 속에서 '좋아보이는 것'을 '좋은 것'으로 채택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언어의 작용은 어떠한 문제를 낳을까?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 그럼으로써 인간이 마치 우열기능과 열등기능의 조합처럼 형상화된다. 분열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자.아.정.체.성.은. 이. 분.열.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 생겨나는가?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절반 정도는 결핍된 '반푼이'로서 경험한다. 언어구조에 의한 분열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결핍감의 본질적인 원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도파민 파티가 시작된다. 이제 '반푼이'인 자아는 자기에게 결핍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온갖 자극을 끌어모은다. 이것은 융과 같은 이에게서 '대극의 합일'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된다. 페르조나 라떼, 아니마 마끼아또, 아니무스 카푸치노 등, 다양한 도파민의 소재들을 경험해감에 따라 자아는 자기의 분열을 통합하여 신적인 완전체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주장된다.
이렇게 자아가 열심히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의 '자기착취'를 홀로 해나가다보면 반드시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된다. 이제 혼자 얻어낼 수 있는 자극에 '내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불감증과도 같은 상태다. 초조하고 답답하다.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것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효용이 없다는 것을 예감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큰 자극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자아는 사로잡힌다.
그 고민의 끝에서 이제 자아는 '협력'을 부르짖는다. 우리는 다 약해서 혼자서는 살기 어려우니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함을 주장한다. 공동체의 논리가 구성된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가 예찬된다. 인간이 곤충처럼 살아야 그 존재의 정당성이 생긴다는 이 논리의 조악함은 사실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다 도파민을 더욱 착즙하기 위한 수작일 뿐이며,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그러나 몇 번 패를 돌려보다보니 생각보다는 '협력'으로 충분한 도파민이 공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아는 눈치채게 된다. 그래서 자아는 태세를 전환해 이제 '갈등'을 전도하려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갈등을 통해 성장한다는 '변증법'의 가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서로 반대되는 원소가 각자의 온전함을 통해 더 큰 온전함을 이루게 된다는 식의 '연금술적 원리' 등이 예찬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연금술의 항아리는 고전적인 도파민 에스프레소 머신이다. 그것은 타자를 자기의 구조 속에 넣고 일부러 갈등을 만들어 착즙하려는 '타자착취'의 발명품이다. 이 상호적인 타자착취를 흔히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연금술로 비유되는 통합적 변증법의 원리는 더도 덜도 아닌 '도파민착즙장치'일 뿐이다. 연.금.술.의. 황.금.은. 곧. 도.파.민.이.다.
이렇게 갈등을 통해 '황금'을 얻어내려는 자아의 기획은 그러나 결국 다시금 내성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빛.났.던. 만.큼. 결.핍.감.은. 더.욱. 크.다. 불감증은 더욱 강력한 형태로 찾아온다. '자기착취'도 '타자착취'도 다 해보았는데, 이제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뿅가는 자극을 더 공급받을 수 있을까. 자아의 고민은 진중하고도 깊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자아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영광의 시절을 경험하셨던 전문가라고 들었는데요. 모자란 저도 황금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아의 눈이 번쩍 뜨인다! 고인물에게 단비와도 같은 그 이름, 뉴비가 찾아왔다!
자아는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하며, 상냥하게 뉴비를 육성하기 시작한다. 뉴비의 성취에 함께 흥분되고, 가끔 뉴비가 반항하는 일조차 사랑스럽다. 도파민이 흘러 넘친다. 사막에 샘이 되어 흐른다. 오, 뉴비여! 더 많은 뉴비들을 얻게 되면 고인물은 더는 고인물이 아니라 사막을 뒤덮을 생명의 바다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도파민의 쓰나미가 밀려와 자신을 영생하게 해주리라고 자아는 희망에 부푼다.
자아는 지금 막 양.육.이. 도.파.민.을. 생.성.할. 최.고.의. 기.제.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자아는 이제 엄마다. 엄마를 소환해 자기 자신에게 빙의시킨다. '최고의 엄마'로서 뉴비의 결핍감을 채워줄 무조건적인 헌신을 시도한다. 모든 것을 다 알아주고 수용해주고자 하는 이 자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최상의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절반의 진리에 불과합니다. 자극을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대극으로서 쉬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자극을 원하는 마음만 진리로 여기면 온전함을 잃게 됩니다. 쉬고 싶은 마음도 살아갈 때 우리는 자극도 더 즐겁게 누릴 수 있습니다. 즐겁게 유튜브를 보는 현실과, 걱정없이 푹 쉬는 현실을 우리는 둘 다 가질 수 있습니다. 두 마음을 다 수용해서 풍요로움을 증대시키는 이것이 바로 최고의 진리인 황금의 마음입니다."
자아는 지금 엄마라고 하는 것이 최고의 언어적 알고리즘을 활용하는 언어술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언어술사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언어, 그것은 바로 수용이라고 이름붙인 '통합의 언어'다. 이 통합의 언어로 자아는 모든 절반의 진리들을 균형있게 잘 '양육하고자' 한다. 곧, 통.합.의. 언.어.란. 양.육.의. 언.어.다.
'양육의 언어'를 통해 자아는 중독에서 벗어나 오히려 도파민을 행복의 소재로 지혜롭게 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극이라는 쌍둥이를 다 수용하는 이는, 쌍둥이의 좋은 엄마이며, 결국 대극을 초월해있는 대극의 양육자다. 그러니 이러한 양육자는 대극이 만드는 모든 자극 위에 서서 오히려 자극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자아는 생각한다.
중독자들은 자기가 대단히 현명하다고 간주하며 하나같이 다들 이와 같은 생각을 품는다.
모.든. 중.독.자.는. 자.극.을. 초.월.한. 입.장.이. 되.어. 자.극.을. 통.제.하.기. 위.해. 중.독.의. 상.태.를. 가.장. 심.화.시.켜.간.다.
이것은 단순하다. 통제자는 투쟁자다. 중.독.은. 본.질.적.으.로. 통.제.감. 증.진.을. 위.한. 자.기.투.쟁.의. 행.위.다. 이처럼 어떤 것을 지배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이는 그 자신이 싸움의 원리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다. 주인을 꿈꾸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노예가 된다. 동일한 이유로, 중.독.재.를. 통.제.하.려.고. 하.면. 더.욱. 중.독.에. 빠.지.게. 된.다.
양육이라는 행위를 떠올려보면 이것이 통제를 위한 자기투쟁의 중독적 행위라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유능한 양육자는 아이를 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아이 앞에서의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일에 성공해야만 한다. 양육자는 일종의 자기투쟁의 승리자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와. 싸.워. 이.기.는. 이. 일.이.야.말.로. 가.장. 자.극.적.인. 일.이.다. 이것은 양육이라는 '자기통제'이자 '자기투쟁'의 행위가 어떻게 도파민을 가장 많이 분비시키는 행위가 되는가에 대한 그 핵심적 이유다.
언어가 이 자기투쟁의 과정을 촉진하며, 나아가서는 승리를 약속한다. '최고의 언어'로 자신의 존재를 찍어누르며 더 이상적인 자아정체성을 메타인지의 관점에서 구성하려는 고귀한 '연금술적 투쟁'을 이루는 만큼 영광의 시절이 찾아올 것이라고 우리는 세뇌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구조 자체가 우리가 경험하는 결핍감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고의 언어'란 곧 '최고의 결핍'을 만드는 언어다. 이러한 양육의 언어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더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결핍된다. 자아가 양육의 언어로 하는 일의 실상은 바로 전체주의의 지배다. 이것은 '전체착취'다.
엄.마.를. 끝.없.는. 자.기.투.쟁.에. 몰.아.넣.어. 착.취.하.는. 일.이. 문.화. 전.체.를. 투.쟁.의. 논.리.로. 착.취.하.는. 일.이.다.
문화 전체가 엄마라고 하는 희생양에게 의존해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필연이다.
우리는 원래 결핍된 것이 아니라, 착취로 인해 결핍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자기를 착취하니 자기가 결핍되었다고 경험하고, 타자를 착취하니 타자가 결핍되었다고 경험하며, 전체를 착취하니 전체가 결핍되었다고 경험한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엄마를 착취하니 엄마가 결핍됨으로써, 더욱 엄마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엄마에 대한 착취를 심화시킨다.
현대에 들어와 문화를 이루는 문법의 구조들이 더욱 복잡해진 것은, 이 도파민 착즙의 목적만을 위해 문화가 기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착취의 문화'의 출현이다. 이것을 욕망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욕.망.은. 언.어.의. 분.열. 속.에.서. 태.어.난.다. 언어구조가 복잡해졌다는 것은 분열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간극에서 무수한 욕망들이 태어나 도파민을 희구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언어로 만들어낸 이상적인 자아정체성과 사실적 자신과의 분열로 인한 결핍감이 '이상적 자아'에 대한 욕망을 낳고, 결국 그 욕망을 충족시켜줄 도파민의 착즙활동에 매진할 수밖에 없게끔 조장된다는 뜻이다.
언어에 의한 결핍감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언어를 소비함으로써 도파민의 분비를 증진시키려는 이 일이 실제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더욱 결핍되게 만든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당당하게 너의 이야기를 해봐! 내가 다 들어줄 거야."라는 식으로 우리가 더 많은 언어를 소비할 수 있는 정당성을 제공해줄 기능적 장치로서 '엄마'를 내세워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마치 어떤 초등학생이 "엄마가 마약 복용해도 된다고 허락해줬어요."라고 말하는 현실과도 같다. 그러나 이는 그 아이가 엄마에게 왜 자신을 '이상적 자아'의 모습으로 낳아주지 않았냐며 인생 망친 것에 대해 책임지라고 온갖 지랄발광을 하는 바로 그 '도파민착즙과정'에 엄마가 불가피하게 기능화되어 있는 것일뿐이다. 또한 능률적인 도파민 소비를 위해 '최고의 엄마'를 '이상적 자아'로 재설정해 그것와 동일시한 자아가 효과적으로 엄마를 팔아먹고 있는 것일뿐이다.
현대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욕망에 치이고, 그 욕망의 속죄양으로서 엄마를 내세운다. 결핍과 착취를 반복하는 중독의 운동은 고스란히 엄마에게로 귀결되어 '엄마중독'의 양상을 띠게 된다. 모든 쾌락의 원천도 엄마, 모든 고통의 원천도 엄마가 된다. 엄마 덕분에 웃고, 엄마 때문에 운다. 여기에는 심대한 착각이 작동한다.
엄.마.가. 무.조.건.적.인. 수.용.의. 힘.의. 담.지.자.라.는.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곧잘 자신이 결핍감을 경험하는 이유가 엄마가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거나, 공감해주거나, 수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정답'을 내리곤 한다. 우리가 '반푼이'가 된 이유를 엄마에게서 찾는 것이다. 양육이 최고의 고통 및 쾌락을 제공하는 자극의 소재가 된 이유는, 우리가 이 무조건적인 수용을 얻어내기 위해 엄마와 힘들게 투쟁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혹여 엄마가 아무리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해도 이것은 쉽사리 달성되기에 어려운 목표였다.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다. 왜 줄 수 없는가? 이것이 완벽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무조건적인 수용을 해줘야 하는, 또 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게서 신을 기대하는 행위다. 심지어 엄마에게는 기대 정도가 아니라 강요다. 그렇게 신을 강요해놓고, 엄마가 충분히 신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결핍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엄.마.는. 우.리.의. 결.핍.감.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
엄.마.가. 아.니.라. 언.어.가. 결.핍.감.의. 모.든. 이.유.다.
우리를 '반푼이'로 만들어 중독의 신세에 이르게 한 것도 언어다. 중독에서 치유해주겠다며 더 심화된 중독의 상태로 몰아넣은 것 또한 언어다. 병.주.고. 마.약.주.며. 우.리.를. 농.락.하.는. 신.의. 자.리.에. 정.좌.해.있.던. 것.은. 바.로. 언.어.다. 엄마가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를 속인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언.어.가. 진.리.를. 자.임.함.으.로.써. 생.겨.났.다. 곧, 언어로 인해 진리성이 몰락한 자리에 언어가 대신 진리의 신처럼 군림함으로써 비극은 시작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진리성을 말할 수 있는 핵심적인 표현은 바로 '의미'다. 의미란 언제나 '내 자신인 의미'다. 그렇다면 이제 분명하다. 우리가 진리성을 잃어 결핍감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임을 잃어 결핍감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잃고 반푼이가 되었는가? 언어로 우리 자신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아정체성'을 '나'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를 속인 것은 곧 자아정체성으로서의 우리 자신인 셈이다. 이 또한 실증적이다. 우리는 거울을 보며 이상적인 자기의 모습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적인 모습이 우리를 저버리고 다른 곳으로 사라진 것처럼 경험한다. 남은 것은 너무나 추한 사실적 자신의 모습뿐이다. 결핍감만 한가득이다.
이러한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중독재들이 시도된다. 언어가 만든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은 언어들이 도입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망.각.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핵심이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언어를 취하며, 바로 그렇게 언어에 취한다.
이 '자기망각'은 본질적으로 '자기통제'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상적 자아에 배신당해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통제하고 싶은 이가 술을 마심으로써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취한 그 결과로 그는 더욱 통제될 수 없는 현실로 자신을 내몰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사실적인 우리 자신을 배신한다. 이상적 자아로부터 배신당한 그 분노와 원망을 사실적인 우리 자신을 배신하는 형태로 집행한다. 이것을 '자기파괴'라고 부른다. 자기투쟁의 필연적인 결과다. 자.기.를. 이.기.고.자. 하.는. 중.독.자.들.이. 결.국. 자.기.를. 파.괴.하.게. 되.는. 모.습.이.다. 언어가 우리를 이 자기파괴의 현실로 몰아간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념의 순교자들을 떠올려보면 된다. 언.어.는. 원.래. 사.람.을. 죽.인.다. 한 언어를 위해 더 많은 사람이 죽는 만큼 그 언어는 더 큰 권력을 담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그 태생에 기인한다. 무엇을 해도 언어는 반쪽이기에, 반대편을 지배할 권력이 있어야 온전함을 얻을 것만 같다. 이 권력적 의도를 가장 교묘하게 표출하는 것이 바로 양쪽을 다 알아주고자 하는 '통합의 언어'다. 그러나 상대적인 반쪽들을 다 수용하고자 하는 그 통합의 언어도 반쪽이다. 아무리 확장해가도 상대적인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언어는 언제나 반쪽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엄밀한 언어의 경계다.
이러한 언어에 의거해 살아갈 때 우리도 늘 반푼이다. 그러나 반푼이는 다른 반쪽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반.쪽.이. 아.니.라.는. 사.실.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외로움이 이 회복을 돕는다. 우리는 외로웠던 적이 없고 내내 결핍감을 경험했을 뿐이다. '외로움'이라는 표현에서 연상되는 부정적인 어감들은 다 결핍감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자.신.과. 싸.우.지. 않.고. 있.는. 경.험.이.다.
다시 말하자면, 통.째.로. 자.신.으.로. 존.재.하.는. 경.험.이.다. 우리는 자신으로 존재하는 이 외로움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언어에 취해 자신을 망각함으로써 자신과 투쟁하고 자신을 통제하려고 한다. 절대적인 존재가 언어에 의해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된다. 반푼이가 되어 결핍감이 생겨난다. 힘겨운 결핍의 상황만이 누적되어 엄마를 부르짖는다.
중.독.자.들.은. 이.처.럼. 자.신.으.로. 있.는. 것.이. 힘.들.어.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들.이.다.
이.들.은. 실.은. 자.기.통.제.가. 힘.들.어. 엄.마.가. 대.신. 자.기.를. 통.제.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도파민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시는가의 그 이유도 분명해진다. 이들은 자신이 아직도 엄마를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기에 억지로 어른스러운 척하며 에스프레소를 들이키는 것이다. 자극들을 주체적으로 경험하며 수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성인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 위해 도파민에 가득 취해가는 것이다.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훌륭한 어른처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더 많은 자극들을 수집하고 소비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엄마중독'의 증세일 뿐이다.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 이들에게는 엄마가 가장 큰 자극의 소재로 채택되며, 엄마로부터의 자극이 있어야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간주된다. 엄마로 기능할 마땅한 대상적 소재가 없다면 자기 자신이 엄마가 된 자위의 형태로라도 이 자극의 공급을 지속한다.
언어가 이들을 이 비참한 몰골로 만들었다. 이들은 언어의 노예였다. 언.어.에. 의.지.하.지. 않.으.면. 똑.바.로. 살. 수. 없.다.는. 믿.음.이. 이.들.에.게. 지.배.적.으.로. 자.리.잡.았.다. 언어에 의지한다는 것은 통제의 원리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통제의 긴장은 이들로 하여금 여러 이완의 중독재들에 눈을 돌리게끔 만들었고, 이러한 이완에의 의도는 최종적으로 엄마에게로 귀속되었다. '궁극적 이완'의 기제로 자기를 대신 '상냥하게' 통제해줄 신적인 엄마가 요청되었다. 이처럼 '최고의 엄마'를 찾아 무수한 대상들을 배신하고 착취해옴으로써 이들은 훌륭한 투쟁적 일꾼으로 거듭나는 일에 성공했다. 이 모든 과정은 도파민 공장의 효율좋은 생산공정이 되었다.
이것이 전모다. 마치 억압적인 언어의 폭력이 있었고, 그에 대한 구원책으로서 '수용하는 엄마'가 제안되는 것 같지만, 실은 시작부터 끝까지 다 언어의 계략일 뿐이다. 언어가 도파민 사업을 위해 끝없이 인간을 노예화시켜가는 방식이다.
우리가 이 중독된 노예생활을 그만두고 싶다면, 우리는 외로워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자신과 싸우고 있었는가? 언어에 의지해 그 언어를 우리 자신처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생겨난 그 모든 상대적 언어들의 모순을 해결해주리라고 기대되는 엄마에 의지해 그 엄마를 우리 자신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연금술의 항아리의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고, 도파민 에스프레소 머신의 압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을. 의.지.처.로. 삼.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자.신.과. 싸.우.게. 된.다. 그렇게 자신을 상실한 뒤, 자신을 대체해줄 중독적 경험만을 찾아 헤매게 된다. 다른 것에 의존해 자신을 경험하려 하기에 우리는 결핍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냥 외로워버리면 이 모든 역사가 단순하게 끝난다.
외롭다는 실상을 한번 들여다보자. 심심한가? 싸우고 있지 않아서 안심되는 것이다. 지루한가? 싸움이 없어서 평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외.로.울. 때. 우.리.는. 실.은. 가.슴. 깊.이. 안.심.하.며. 평.화.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내 자신을 의지하면, 내 자신이 이 안심과 평화를 스스로 지키게 되기 때문이다. 남을 의존하면 근본적으로 싸움밖에는 나지 않는다. 나.는. 나.로. 있.을. 때.만.이. 평.온.하.다. 내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이 평온함을 누리다보면 어느 순간 이런 감각이 찾아들기도 한다.
"생각보다 나는 행복한 것 같다."
이상하다. 아무 일도 없는데 숨을 쉬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그것이 가벼운 웃음이 된다. 이것은 왠지 자연스럽다. 우리가 결핍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자연스럽다. 우리가 언어에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이 방식은 이토록 자연스럽다.
우리가 그저 외롭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언어에게서 바로 승리할 수 있게 된다. 언어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존귀한 분으로서 우리 자신이 알아봐진다. 잡스러운 언어게임이 이 성스러운 의지처에는 머물 곳이 없다. 불허한다. 나는 나에 의지해 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것을 이제 외로움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는 없다.
이.것.을. 바.로. 존.재.감.이.라.고. 한.다.
존재감으로부터 도망치니 결핍감이 경험되고,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 양육감을 만들어낸다. 양육자로서 고양된 뿌듯한 상태를, 이른바 도파민의 과잉상태를, 존재감을 느끼는 상태라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마음을 돌보고 있는 동안 난 지금 살아있는 거야! ㅜㅜ"라며 마약중독자처럼 울부짖는다. 더 심화된 결핍감의 표현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존재하도록 하자. 그러면 점점 더 존재의 사실들이 명확해진다. 한순간 우리가 이 모든 곳에서 사라져도 문제가 없겠다는 감각이 들어오면 아주 근사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없어도 이 모든 것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아주 커다란 신뢰를 확인한 것이다. 자극에 중독된 양육자는 알아봐주고 수용해주는 자기가 있어야만 모든 것이 온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양육자는 자기의 결핍감만큼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결핍감 속에서 본다.
그러나 명쾌하게 존재하는 우리는, 우리만큼이나 존재하는 것들을 신뢰한다. 우리가 없어도 잘 될 것들이다. 좋은 세상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행복하다. 자신을 의지처로 삼을 때 이처럼 모든 것이 든든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외로운가?
외.롭.지. 않.고. 경.외.롭.다.
존재감이 망각된 것이 결핍감이라면, 존재감이 상기된 것이 경외감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로 스며들어오는 향기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우하는 감동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은 분명 이 감각을 노래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자유하는 이것이 우리가 언어로 인해 망각한 진리성이며, 우리 자신인 의미다. 외로움의 가능성은 분명 경외로움이다. 투쟁의 열기로 지지고 볶으며 싸우지 않아도, 오히려 그러지 않아서 이룰 수 있는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걸어볼 만한 가능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걸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