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소망"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격이 조금 유별나도 되고, 심리적 장애가 조금 있어도 되며, 관계에서의 갈등이 조금 있어도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다면 심리상담과 같은 활동은 애초 우리에게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가. 사.랑.하.기. 어.려.운. 우.리. 자.신.의. 삶.을. 남.에.게. 대.신. 사.랑.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여기까지도 아직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행사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란 없다. 남에게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할 의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 자신의 의무인 것 또한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다. 이것은 "아무도 내 삶을 사랑해주지 않으니 이제는 내가 직접 내 삶을 사랑해줘야지."라며 모종의 신성한 의무처럼 집행해야 할 소재가 아니다.
그러나 자아는 그렇게 한다. 사랑을 권리와 의무의 범주 위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자아의 특징이다. 자아는 신을 창출하려는 의도 속에서만 행위한다. 그 의도를 실현할 수 있는 범주 속에 모든 것을 밀어넣는다. 권리와 의무의 계약구조가 원형적 신인관계의 비유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이해하면 이 이해는 더 분명해진다. 더욱 쉽게 말해보자.
"너에게는 나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어."
이 말은 다음의 말과 동일하다.
"너에게는 나의 신이 되어줘야 할 의무가 있어."
신의 역할은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용서의 맥락으로 바꾸어보자. 그러면 그 역할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된다. 이 역할을 다하지 않은 신은 신의 자격이 없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추방되지는 않는다. 다만 악신으로 그 대우가 바뀔 뿐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제 용서받아야 할 쪽은 오히려 신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득이 있다. 우선은 우리 자신이 사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그럼으로써 용서가 필요하다고 가정하던 어떠한 삶의 특성을 이제 신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순결해진다. 나아가 우리는 비루한 죄인의 입장에서 어느새 신을 용서할 여부를 논할 수도 있을 정도로 신보다 높은 최고신의 입장처럼 전환된다. 종합하자면 효과적인 '정체성의 세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 이득들을 위해 우리는 신을 폐위하지 않는다. 악신으로서 비난받도록 신의 자리를 계속 남겨둔다. 물론 '용서'도 하지 않는다. 최고신으로서 신을 용서하게 되면 상황은 종결되고 우리의 입장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반갑지 않은 일이다.
여러 관계들에서는 이 '교착상황'이 자주 펼쳐진다. 싫다면서 떠나지는 않는다. 미워하지만 밥은 먹인다. 바보로 만들어놓고 살려는 드린다. 분명한 '정체성의 이득'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상대에게 끝없이 사과를 요구하는 일이 있다. 상담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로는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부모의 양육에 대한 문제가 대표적이다. 30년 전 7살 때 엄마에게 맞은 따귀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고 호소하는 내담자가 있다. 과장이 자신에게만 잔소리를 하는 것도 그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져 유독 만만하게 보이는 까닭일 것이다.
초기기억이나 원가족력을 다룬 상담회기 이후에 내담자는 집으로 달려가 통곡하며 엄마에게 사과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린 시절 아무 것도 모르고 저항도 할 수 없이 무력했던 자신에게 그 따귀가 얼마나 거대한 폭력이었는지를 코즈믹호러처럼 묘사했을 수 있다. 엄마는 조금 버티다가 대체로는 굴복한다. 엄마가 배운 것이 없고 무식해서 잘 몰라 그랬다며 너무 미안하다고 눈물로 회개한다. 조금 똑똑한 내담자는 감격의 화해 후에 엄마에게 심리학강의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경우로 다음 30년 후에도 유사한 장면이 반복될 가능성은 낮지 않다. 3년 후에는 매우 높고, 3개월 후에는 거의 확정적이다. 3주 정도는 그래도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지속되곤 한다.
연극의 상연이 조금 잦으면 엄마도 슬슬 이것이 반복되는 '연중행사'라는 것을 눈치채곤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이 연극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야합이 이루어져 있다. 악신이지만 그래도 신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고, 인간이지만 그래도 신을 혼낼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신인관계가 지속되는 한, 서로에게는 이득이 유지된다. 신.과. 인.간.이. 이.득.을. 위.해. 서.로.에.게. 집.착.한.다.
이러한 관계의 가장 큰 이득은 무엇일까? 각자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 이유를 상대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네가 이제 과거이야기는 좀 놓고서는 심리적으로다 건강해져야 엄마도 안심하고 엄마 인생 살지."
"그런 식이니까 안 되는 거야 엄마가. 엄마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 제대로 사과해야 나도 깔끔하게 내 인생 살 거 아냐."
용서할 마음이나 용서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저 이 '아름다운 구속'의 관계가 존속됨으로써, 권위가 필요한 이는 일정 부분의 권위를, 권력이 필요한 이는 일정 부분의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유지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도 이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면 그들이 얻기 힘든 소재들일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상기한 "용서할 마음이나 용서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도 없다."라는 이 문장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심도있게 숙고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용서라는 주제에 있어 실은 아주 핵심적인 진술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타인을 용서할 능력이나 타인에게 용서받을 능력이 없다."
진짜 용서의 문제는 이 사실적 진술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신을 가정하거나, 그러한 신을 가진 인간을 가정하는 일이 기각될 때, 우리는 진짜 용서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신.인.관.계.는. 모.든. 관.계.의. 원.형.이.다. 신인관계 속에서 용서의 문제를 논하려 하지 않는다면, 용서는 모든 관계의 논법에서도 빠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용.서.가.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해.를 갖는 일은 유익할 것이다. 그러니 용서는 권리와 의무의 문제도 아니다. 권리와 의무의 주장 속에서 위력을 집행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특히나 용서의 문제를 자아와 분리시키는 일은 중요하다. 자아는 자기가 타인을 용서할 수 있거나 또는 타인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자기가 타인에게 신이 될 수 있거나, 타인을 신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가 자기의 범주를 혼동하고 있기에 생겨나는 일이다.
자.아.는. 존.재.가. 아.니.라. 속.성.이.다. 속성의 범주에서 자아를 다루어야 정당하다. 그것은 무슨 속성인가? 바로 '유한성'이다. 자아는 유한성 그 자체다. 어떠한 자아도 이 유한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말은 무엇을 해도 자아는 유한하다는 말이다.
자아를 유한성으로 규정하는 이 일이 자연스럽게 용서의 문제와 자아를 분리시키는 작업이 된다. 유한한 것이 유한한 것을 용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유한한 것이 유한한 것에게 용서받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용서 자체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관계 속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늘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조금 더 품이 넓은 사람이 되면 상대를 용서할 수 있을 것도 같고, 관계의 논법을 따라 생각해보면 분명 상대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이 정당할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자아-관계 속에서 용서의 문제를 다루려고 할수록 우리는 수렁에 빠져든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관계의 상대는 왜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가? 또는 우리는 왜 상대를 용서하려 하지 않는가? 인.생.의. 시.간.을. 같.이. 멈.추.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함께 수렁에 빠트리려 하는 것이다.
용.서.는. 일.종.의. 분.기.점.이.다. 용서하는 일이나 용서받는 일이 일어나는 시점은 우리의 시간이 과거와 분리되어 새롭게 나아가야 할 그 시점이다.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용서의 사건은 변화의 징조와 궤를 함께한다. 용.서.의. 필.요.성.은. 곧. 변.화.의. 필.요.성.이.기.도. 하.다.
'용서'와 '변화'를 연결짓는 이 일은 생소한 일이 아니다. '회심(conversion)'이라는 종교적 표현은 이 용서와 변화를 동시에 함의하고 있는 표현이다. 용서의 문제를 변화의 문제로 이해하는 일은 진심으로 유익하다. 그러나 변화는 상대의 변화가 아니다. 관계의 논법으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변화는 오직 자신의 변화만을 의미한다.
용서의 문제가 관계 속에서 잘 풀리지 않고 있을 경우는, 관계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변화를 원하지 않고 있을 때다. 왜인가? 우리가 변화하면 해당의 관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는 우리를 붙잡아두려 한다. '용서할 수 없는 일'과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만들어 우리를 분노와 우울의 상태 속에 매이게 한다. 자아가 이러한 생각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해당의 관계 속에서 용서의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실현하라고 촉구한다.
자아는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사과와도 같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나그네가 길을 가는데 길 한가운데에 사과가 놓여 있었다. 나그네가 무심히 사과를 발로 찼더니 사과는 크기가 조금 커졌다. 그것을 본 나그네가 몇 번을 더 치니 그만큼 사과는 거대해졌다. 약이 오른 나그네는 이제 나무막대를 들고 와 사과를 사정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집채만큼 커진 사과는 나그네가 갈 길을 완전히 가로막게 되었다.
자아는 여기에다가 사과의 말까지 하는 사과다.
"메롱메롱, 나를 친 것을 어서 사과하라구."
물론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불쾌하게 만든 것을 사과합니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더 때려주세요."
어느 쪽이라도 아무 상관없다. 자아의 목적은 성취된다. 나그네의 갈 길을 막는 일만이 자아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까닭이다.
이 광경을 본 한 현인이 나그네에게 말한다.
"나그네여, 옆으로 돌아서 당신 갈 길을 가세요."
그리고 나그네가 옆으로 돌아가는 그 일을 할 때, 이것은 나그네의 '회심'이다. 그는 변화와 용서를 동시에 성취한다. 그는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유연해지는 변화가 이 시점에 필요했을지 모른다. 용서의 사건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렇다면 나그네는 무엇을 용서한 것일까? 또는 무엇을 용서받은 것일까? 여기에는 유한자의 고백이 있다.
"제가 용서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용서해주세요."
"제가 용서받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용서해주세요."
이 고백과 함께 자아는 죽는다. 무용해진다. 더는 자기가 신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속일 수 없다. 설령 신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삶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무용한 신'이다.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로.워.진. 인.간.이.다.
유한자의 고백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
용.서.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이 일이 언제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왜인가? 삶은 언제나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변화의 사건들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그 삶에 그대로 화답해 우리는 자유로이 변화되었다. 그 어떤 의무도 아니고 그 어떤 권리도 아니었다. 다만 사랑해서 한 일이었다.
동일한 유한자의 고백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어려울 수 있다. 유한자는 그래서 말할 것이다.
"저는 사랑할 능력이 없으니 사랑에 저를 열어둘게요."
우리가 그 어떤 문제많은 유한자여도 상관없다. 우.리.가. 열.어.두.고.만.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니며, 애초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열 능력이 없이 막혀 있어도 우리가 유한자이기만 하면 문제없다. 삶.이. 옆.으.로. 돌.아.서. 들.어.온.다. 직유가 아니더라도 은유다. 반드시 알려는 드린다.
삶.은. 우.리. 자.신.과. 사.랑.의. 대.화.다.
삶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 대화의 과정 자체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과의 대화가 사랑의 품속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몸을 열어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에게 용서할 능력이 없듯이, 우리는 변화할 능력도 없다. 변화의 주동자는 사랑이다.
용서의 원형적인 의미를 한번 살펴보자. 앤 라이스가 저술한 뱀파이어 연대기의 5권인 『악마 멤노크』에서 주인공인 레스타는 지옥에 내려가 지옥의 군주 멤노크에게 지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그는 대답한다.
"자신이 대체 무슨 일을 했는가를 정확하게 알게 하는 곳이네."
용.서.는. 이.처.럼. 사.실.을. 아.는. 일.이.다.
자아는 이것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자아로 살 때 우리는 도무지 이것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진실놀이'를 하며 권리와 의무를 논평한다. 그렇다면 이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잘 알려진 영성서적인 닐 도날드 월쉬의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소개된다.
"사랑은 지금 무슨 일을 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비추어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랑.이. 하.는. 일.이.다. 우리로 하여금 사실을 알도록 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와 용서의 과정에 초대하는 일이 사랑의 일이다.
사랑은 사실을 증언하며, 증언된 사실 자체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사랑의 힘이다.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다.
사.실.은. 사.슬.을. 끊.는.다.
다른 이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 용서는 오직 우리 자신의 자유와만 관계된 문제다. 그러나 그 자유가 사실 위에서 날개짓하는 참된 자유라면, 이제 우리는 이 표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자비'로 드러난다.
용.서.는. 자.유.하.는. 자.비.며. 자.비.하.는. 자.유.다.
이것은 무엇인가?
"정말 많이 아프셨을 거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이것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불쌍해보이는 이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도 참 많이 아팠을텐데. 자신이 온전한지를 몰라 얼마나 속상했을까."를 발화하는 '자아도취'의 일이 아니다.
자.비.는. 칼.날.같.다. 가장 정확한 사실을 엄정하게 보고하는 SCI 논문처럼 발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력하다. 정말로 우리가 알았음을 상대도 알게 된다. 사슬이 단칼에 끊어진다. 함께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자비의 힘이다.
전술한 것처럼, 사.랑.은. 사.실.을. 증.언.하.며. 자.비.는. 사.실.을. 집.행.한.다. 이 둘은 용서의 실천적 양태다. 겹치면서도, 활용도가 조금씩 다르고, 그러나 순환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도,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싶은 우리의 소망을 위해.
용서의 문제가 이처럼 용서의 소망으로 전환될 수 있을 때, 이것이 또한 분명 상담의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