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48

"꿈의 실존적 이해: 윤리의 꿈자리와 자유의 몸자리"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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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의 윤리화


우리는 왜 꿈을 이루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경험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꿈이라는 것이 없으면 왜 우리 자신을 조금 모자라거나 시시한 사람으로 경험하게 되는가?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이름으로, 왜 이토록 꿈을 찾으려는 활동에 매진하는가?


꿈.이. 윤.리.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윤리는 특정한 이야기[담론]가 인기를 얻어 진리화됨으로써 만들어진다. 즉, 아주 쉽게 말하면 '권력을 얻은 이야기'가 곧 윤리로 행세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캉의 선구적인 업적은 그가 "무의식은 언어다."라고 하는 주장을 펼쳤다는 데 있다. 물론 이러한 함의를 더욱 섬세하게 밝혀낸 것은 하이데거다. 그러나 무의식이라는 직접적인 심리학적 언술로 인간의 심리구조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뒤집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라캉의 주장은 높게 평가될 만하다.


무의식이 언어라면, 그것은 언제나 권력화될 수 있다.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기능하는 담론의 작동방식은 모든 담론에 적용된다. 이것은 무의식의 잠정적인 폭력성을 시사하는 예언적 진술이며, 오늘날 이 예언은 실현되어 있다. 꿈.이. 윤.리.가. 되.어. 권.력.을. 집.행.하.고.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꿈'이라고 부르는 것은 포괄적인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목록들을 모두 포함한다.


1) 잠들 때 꾸는 꿈

2) 실현해야 한다고 상정된 목표

3) 가상현실

4) 이야기

5) 환상

6) 이념 및 신념 또는 가치관

7) 자아정체성

8) 시스템/구조/관계

9) 욕망


이는 곧 인.간.의. 행.위.를. 추.동.하.는. 역.동.으.로.서.의. 추.상.적. 구.성.물.을. 통.칭.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라는 것은 이 역동에 당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은 '해야만 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왜 해야만 하는가? 더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해야만' 윤리는 보다 큰 권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어떠한 담론이 윤리로 작동하려는 이유는 오직 권력을 증대하기 위한 목적일 뿐이다.


이 '꿈의 윤리'가 권력을 얻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은 '디즈니 제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람들에게 환상의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하게 함으로써 제국의 지배력은 커져간다. 오늘날의 이 '꿈의 제국'은 결코 사람들을 억압적인 규칙들로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들.의. 지.갑.과. 영.혼.을. 열.게. 만.든.다. 사람들은 멋진 환상들을 위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도파민을 얻어내어 쾌락감에 빠지고, 나아가 그들의 삶 역시도 언젠가는 '환상적인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더욱 키우게 된다.


이처럼 꿈.의. 윤.리.는. 인.간.을. 자.발.적.인. 노.예.가. 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노예의 상태라는 것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지배력을 더욱 막강히 공고화한다. 꿈을 윤리화하는 일은 이 독재를 실현하기 위해 도입된 기획이다. 이 기획은 오늘날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시도되고 있다. 왜 그럴까?



# 허무주의와 윤리의 상관성


이 시대는 니체가 활동하기 좋은 무대다. 그는 투덜거릴 것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이 데카당스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다. '데카당스'는 흔히 퇴폐주의 등으로 번역되지만, 이것은 그 함의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데카당스는 허무주의를 그 근간으로 한다. 그 위에 자폐적이고, 탐미적이며, 자학적인 것들이 쌓아 올려진다. 니체에 따르면 이것은 '약한 것에 대한 동경'을 원동력으로 삼는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같은 소설이나, 1990년대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이, 우리로 하여금 데카당스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아이... 약해서 그랬던 거예요. 알아줬어야 했는데... 우리가, 그 '사람'의 옆에 있어줘야 했는데... 이러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고, 너도 사람이기 위해 태어난 거라고... 그런 너도, 온전하다고, 이 떨리는 손길을 건넸어야 했는데..."


대충 이런 감각이다. 항마력이 높지 않으면 조금 견디기 힘든 사조다. 어떤 부분에서 분명히 이것은 '중2병' 내지 '이고깽'의 감각과 교집합을 이룬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중2병'이나 '이고깽'의 서브컬쳐물이 매우 자주, 아니 언제나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윤.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흔하다. 너무 흔하다. 현실에서 사회부적응자로 살던 고등학생이 이세계로 날아가 독재왕정을 타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세상을 만드는 스토리는 흔해 빠졌다. 이처럼 이 '자아도취의 주체'는 자기의 담론을 윤리화한다. 그것은 '탈중앙화'를 외치면서, '소확행'의 쾌락을 노래하고, '너의 이야기를 하라며' 자기도취적 탐미의식을 권면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윤리며, 곧 '데카당스의 윤리'다. 데카당스는, 오, 윤리적이다. 데카당스는 결코 반윤리가 아니다. 데카당스야말로 허무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정립된 윤리론이다.


허.무.주.의.가. 범.람.할.수.록. 윤.리.는. 더.욱. 시.도.된.다. 허무주의를 통제하기 위해서다. 통제하려면 그 핵심을 알아야 한다. 허무주의란 결국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왜 허무를 경험하는가?


커다란 공허감을 우리가 경험할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무엇인가 여기에 있었어야 할 크고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우.리.가. 허.무.를. 경.험.하.는. 것.은. 곧. 그. 자.리.에. 크.고. 중.요.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의. 믿.음. 때.문.이.다.


불교와 실존주의는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그. 자.리.는. 원.래. 자.유.를. 위.해. 비.어.있.는. 자.리.라.고. 그러나 이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 불만을 데카당스의 윤리는 공략한다.


"고객님 채워져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어 많이 당황하셨죠? 그래서 제가 우리 고객님께 좋은 상품 하나 알려드리려고 해요. 이 상품을 구입하시면 빈 자리가 금방 채워지세요. 일론 머스크 사장님 아시죠? 그 분도 저희 상품 많이 구매하셨어요. 자 고객님, '꿈' 한번 어떠세요?"


사람들 사이에 공허감이 만연한 이 시대에, '꿈의 윤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회원수를 늘려간다. 이 윤리상품은 요즘 유행하듯이 '구독제'의 형태를 띤다. 소위 SNS 셀럽이니 스피커니 하는 이들에게서 이 '꿈의 윤리'의 신간호는 정기적으로 발행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업데이트해나간다.


대개 이 과정은 회원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을 제공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세뇌의 성격을 갖는다. 언제나 자기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는 사이에 업데이트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노예가 자는 동안, 다정하고 자상한 주인산타가 들어와 머리맡에 사랑스러운 메모를 붙여놓고 가는 일과 같다. 거기에는 노예가 내일 일어나 할 과업의 목록들이 적혀 있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엑스박스를 시동한 이는 게임패스에 자기가 '꿈꿔오던' 바로 그 게임이 올라와 있는 것을 아침에 발견하고 환호를 한다.


"좋았쓰! 바로 시작해볼까!"


환상의 경험들이 이렇게 '타발적으로' 펼쳐지며, 환상세계를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열리게 한다. 윤.리.적.이.다.



# 경험중독과 레벨업의 착각


"더 많은 경험을 통해 나는 성장할 수 있어."


이것은 '경험중독'에 빠져있는 이가 곧잘 발화하곤 하는 말이다. 경.험.중.독.은. 윤.리.가.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 경험을 반복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라는 소재를 통해 비유하면 쉽다. 더 많은 양질의 이야기를 소비할수록 우리가 더 멋진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윤리적 이야기'를 소비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소.비.하.는. 일. 자.체.가. 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윤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올바르게 사는 법이다. 오늘날 이 '올바르게 사는 법'은, 더 많은 꿈의 이야기를 소비함으로써,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경험들' 속으로 더욱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경험들만큼 '인생경험치'가 누적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경.험.중.독.은. 인.생.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무협지와 라노벨을 많이 읽은 이들이 다양한 잡지식으로 무장해 자기를 대현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들은 왜 대현자가 아닌가? 전문서적을 읽지 않아서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이 인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이 아는 것은 단지 특.정.한. 언.어.규.칙.이. 작.용.하.는. 특.정.한. 환.상.세.계.에 대해서일 뿐이다.


게임으로 이해하면 쉽다. 어떠한 온라인 RPG에서 썩을 대로 썩은 고인물이 된 유저는, 진짜 세상(real world)에서도 그러한 위상을 갖고 있는가? 게임 속에서 만렙을 달성해 모두의 존경을 받는 그는 실제의 인생에서도 동일한 존경을 받고 있는가? 아주 희소하게 그럴 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그럴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게임 속에서 누군가가 쌓은 권위가, 현실에서의 권위로 이어진다는 말은 얼토당토 않은 말이다. 게임 속 현자직업을 마스터한 이에게는 국제학술대회에 나가 양자물리학을 논의할 학술적 권위가 주어져야 하는가? '멘탈리스트' 같은 미국드라마의 열렬한 시청자에게는 심리학전문가라는 권위가 부여되어야 하는가? 성립될 수 없는 억지다.


그.러.나. 이. 억.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꿈.의. 윤.리.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하는 '꿈의 윤리'를 함축한 이 표어는 실상 이렇게 쓰여야 정확한 것이다.


"하고 싶은 거 다 해야만 해!"


당위다.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당위는 또다른 당위의 착각을 낳는다. 그것은 무엇일까?


'해야만 하는 것'은 반드시 '되어야만 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착각이다. 물론 이것은 당위를 실현하고자 하는 주체에게는 당연한 인식이다.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명령을 받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오해하고 있다.


꿈.의. 윤.리.는. 원.래. 부.당.한. 당.위.의. 명.령.을. 한.다.


욕망의 속성을 떠올려보라. 우리는 왜 욕망에 치이는가? 욕망이 왜 힘든 것이 되어 있는가? 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자꾸만 몰아붙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의 윤리'의 우수한 충성고객은 이 명령을 의심하지 않는다. 빅데이터의 알고리즘이 알아서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제시해주었다고 믿으며 명령에 맹목적으로 충성한다.


그. 결.과. 그.는. 아.주. 엄.청.나.게. 화.가. 난.다.


자신은 충실하게 게임 속에서 경험을 쌓아가며 레벨업을 했는데 현실에서는 자기를 정당한 '고렙'으로 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다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아.. 저기... 아르키우스 랜달님 맞으시죠?"라며 사인을 청하고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데,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심리소재의 영화를 꾸준하게 많이 시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뒤로 놀라 자빠지며 "오옷! 멘탈리스트님께서 저희 편의점에 방문해주시다니! 대박!!!"이라고 하는 사건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부당하다. '꿈의 윤리'의 신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도 '경험'을 많이 쌓았는데, 왜 심리학 학위가 있는 이들의 경험만이 심리학전문가로서의 권위를 얻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먼저 '너그럽게 양보해서' 심리학 학위를 '만렙'이라고 인정해줄 때, 자기도 똑같은 '만렙'이니 대등하게 인정받아야 하는 일이 그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을 '망상장애'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경험중독의 상태에서는 이 망상장애가 의도적으로 가속화된다. 왜인가?


경.험.하.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주식을 손절하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경험중독'이라고 부를 정도의 경험치라면 거기에는 막대한 자원이 투여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선량하게 '윤리에 따라' 인생을 갈아넣었다. '꿈의 경험'을 더 많이 쌓으면 '현실의 경험'으로 그것이 전환될 것이라는 '신성한 언약'을 믿으며 꿈의 윤리에 충성했다. 그가 속았던 것이다.


우리는 통속적으로 "꿈이 나를 배신했어."와 같은 말을 하곤 한다. 본질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게임은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할 수도 없다. 하지 않으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리.화.된. 꿈.은. 언.제.나. 반.드.시. 인.간.을. 배.신.한.다.


이 모든 것을 더욱 쉽게 말해볼 수 있다. 꿈의 윤리를 통해 인간은 무엇을 실현하려 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좌절되어 배신감을 경험하게 되었는가?


꿈의 윤리는 결국 단 한 가지만을 인간에게 당위로 요청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러하다.


"너는 왕이 되어라."


경험들을 소비하고, 그럼으로써 경험치를 쌓아 레벨업을 하면, 우리는 왕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배신당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왕'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 꿈자리와 왕게임


경계의 문제는 영토의 문제다. 영토의 주인이 바로 왕이다. 그런 즉, 경계의 확인만 분명하면 왕이 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실증적으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이 거주하는 방의 왕이다. 방을 다른 이와 같이 쓴다고 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침대의, 또는 이부자리의 왕이다. 침대도 같이 쓴다면, 그냥 베개의 왕이라고 하자.


그러나 '꿈'은 이 영토의 문제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경계를 모른 채 추상의 영역에서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꿈자리'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꿈자리는 언어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마치 이야기만 늘어놓으면 자기의 영토가 커지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것이 착각이다. 그.것.은. 이.미. 남.의. 땅.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언어가 인간을 공유시켜주는 도구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공유재'이며, 그런 즉 꿈자리는 이미 '공유지'다.


자기가 자기의 영토인 것처럼 말뚝을 박고 등기를 치려 하는 그 자리에는 이미 권리자가 있다. 이미 거기에는 '문화'가 들어서 있다. 사회제도, 학계, 법률, 예술시장, 금융시스템 등의 문화적 소재들이 선점하고 있다. 이것들은 해당의 문화가 작동하는 권역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언어로 구성된다. 이 '왕국'은 일종의 공동통치구역인 셈이다.


여기에서 자기가 '특별한 왕'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누구에게도 없다. 자기의 '환상적인' 통치이념에 따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일은 대개 유용하지 않다. 이것은 심지어 이러한 주장을 펴는 본인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심리소재의 통속극을 많이 소비하는 활동을 통해 누구나 심리학전문가가 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주장을 펴는 이가 있다. 그에게 한번 선택하게 해보자.


"지구 최고의 멘탈리스트 드라마 권위자가 되는 일과,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일 중 어떤 것을 선택할래요?"


자신에게도 분명한 이 선택을, 남들에게는 다르게 주장하는 것은 사기다. 만약 사기가 아니라면 이것은 무시다.


"어차피 서울대에는 못 들어갈 것들이니, 멘탈리스트 드라마라도 보며 '조금 낮은' 심리학전문가가 되는 일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뿐이라구욧."


이것이 '특별한 왕'이 하는 일이다. 이를 '왕게임'이라고 불러볼 수 있다. 이것은 남.의. 게.임.의. 규.칙.은. 무.시.하.면.서. 자.기. 게.임.의. 규.칙.만.을. 적.용.하.려.고. 하.는. 활.동.이다. 왕게임의 주체는 이러한 활동의 정당성을 '탈중앙화'에서 찾는다. 자기를 마치 부당한 기득권에 저항하는 독립투사와 같은 입장처럼 묘사한 뒤, "심리학전문가가 될 자유를 모두에게!"와 같은 식의 표어를 부르짖는다.


그는 지금 신설 다단계사업체 내지 신흥 컬트종교의 출범을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왕의 꿈'을 꾸는 이들을 모집하는 일로 시작된다. 기득권이 이루어진 방식으로 '동의'를 통해 '꿈자리'의 공유된 교집합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선전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이곳에 오시면 진정으로 마음의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는 억압되지 않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존귀한 왕으로서 당당히 서실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과 함께 마음의 민주주의를 실현해나가고 싶습니다."


아주 쉽게 이는 왕게임의 주체가 모.두.를.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약장수의 원숭이 심벌즈 소리에 혹해 어떠한 이들은 이 '꿈총각네 왕가게'를 방문한다. 자신이 가장 '왕이 되고 싶은 이'가 '왕이 되고 싶은 꿈'을 선전수단으로 활용해 똑같이 '왕이 되고 싶은 이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이렇게 신생 왕의 '꿈의 왕국'은 만들어진다.


그러면 선전만큼 이 왕국에서는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왕은 하나뿐이다. 이 선동을 실행한 그 '특별한 왕'만이 왕이 된다. 물론 언어적으로는 모두가 왕인 것처럼 대.접.된.다. 그러나 실제적인 차원에서 왕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은 왕게임의 주체뿐이다.


이것은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 수단은 '수용'이다. 왕게임의 주체는 가장 투명하고, 공정하며, 무오한 시선을 통해, 이 공유지에 모인 모든 이를 '알아주는' 일을 한다.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킹메이커'의 일이다. 그 실체는 '수렴청정'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왕게임의 주체가 '왕의 엄마'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소위 '왕 위의 왕'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왕'으로서는 은폐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영토에서 자신이 정말로 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효과적인 '조력자'도 있으니,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부당한 세상과는 다르게 여기에서는 자아실현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때문에 영토를 구성하는 언어적 규칙에 동의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속한다. '꿈의 왕국'은 존속되며, 왕게임의 주체의 권위도 함께 존속된다.


독재의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바야흐로 '꿈의 독재'다.



# 꿈의 독재를 해체하는 상담자의 '편견'


이 '꿈의 독재'가 성립될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착각 때문이다. 물론 이 착각의 강도는 높다. 쉽사리 깨지지 않는 착각이다. 그 내용을 말해보자.


"엄마는 나를 수용해주는 사람이니까, 가장 투명하고, 공정하며, 무오한 사람이야. 즉,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사람이야."


수용하는 행위를 통해 '엄마처럼 보이는' 일에 성공하면, 수렴청정을 통한 독재의 구조는 알아서 이루어진다. 엄마의 자식인 '왕들'은 자발적으로 엄마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함으로써, 엄마에게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해준다. 정.말.로. 자.기.를. 위.해.서. 엄.마.가. 순.수.하.게. 행.위.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부연할 것도 없이 이것은 가스라이팅의 구조다. 가스라이팅은 더 큰 영토를 가진 왕이 더 작은 영토를 가진 백성을 품는 '수용'의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가스라이팅의 주체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다 품어주는 일종의 '플랫폼'인 것처럼 형상화된다.


엄마에게는 '편견'이 없다! 엄마는 가장 거대하고 청정한 메타인지의 구현자다. 즉, 가장 넓은 꿈자리를 갖고 있으며, 그 꿈자리는 모두가 쉴 수 있는 '보금자리'다. 이러한 착각 속에서, 엄마의 실질적인 지위가 위대한 '왕 위의 왕'으로 옹립되는 일은 당연하다. 가장 넓은 꿈자리, 즉 가장 넓은 영토를 갖고 있는 이가 가장 높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겸손하게 왕을 거절한다. 자신은 다만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자유로운 왕이 될 수 있도록 일하고 싶을 뿐이라며 겸양을 떤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엄마에게는 '왕' 대신에 '신'이 부여된다. 물론 그렇게 부르면 '싫은 척'을 하기 때문에 속으로만 부르며, 왕들 사이에서만 부른다. 그러나 누구나 여기에 '신'이 현신했다는 것을 다 안다.


이처럼 '꿈의 독재'는 결국 '신의 독재'로 자리잡는다. 독재는 이제 완성을 넘어서 완고해진다. 모든 것을 다 품어주는 척 '신'을 연기하는 그 미소가 역겹기 그지 없다.


우리에게는 희망은 있는가?


'편견'으로 가득한 상담자가 희망이다.


상담자는 편견없이 투명하고, 공정하며, 무오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면 완전히 잊는 것이 좋다. 상.담.자.는. 오.히.려. 편.견.을. 통.해. 활.동.하.는. 이.다. 곧, '편견의 전문가'다.


왜 그런가? '현상학'이 상담자의 실천론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곧잘 편견을 '괄호에 넣고' 보는 일이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괄호는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수식에 넣지만 않을 뿐 괄호 그 자체는 그 자리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니 역으로 현상학은 '괄호가 있다는 사실에 의지해' 보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곧, 이것은 편.견.을. 활.용.해. 보.는. 일.이다. 하이데거에게는 특히 이러한 점이 분명하다.


'편견'은 그 자체로 개인의 고유성이다. 즉, 이것은 구체적이며 명징한 경계다. 편견이 개인의 세계를 구성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편.견.은. 곧. 개.인.을. 개.인.으.로. 만.든.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편견이 '무경계'의 신의 독재로부터 '경계'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다.


나아가 이것은 상호적이다. 하나의 경계는 다른 하나의 경계를 분명히 만든다. 편견의 활용에는 이 이득이 있다. 편견을 일종의 렌즈라고 비유해보자. 우리가 지금 어떠한 사물을 보라색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낀 렌즈는 빨간색이다. 그렇다면 그 사물의 사실적인 색은 파란색이라고 우리는 직관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눈에는 여전히 보라색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편.견.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편.견.을. 넘.어.서. 그. 사.물.의. 사.실.성.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법'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지혜'라고 말한다. 지혜의 시동처는 편견이라고 이제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일한 원리로, 상담자가 '독재하는 신' 앞에 선다. 신은 계속 신이고자 상담자를 더 큰 품으로 수용하려고 한다. 그렇게 편견이 없는 척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의 사실적인 경계들은 충돌한다. 실존하는 상담자의 '편견'은 반드시 실존하는 상대의 '편견'과 충돌한다. 바로 이것이다! 상담자는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다. 무경계의 신인 척하던 그에게는 뚜렷한 경계가 있다!


이 자리에서 상담자는 신을 추락시킨다. 그를 인간의 자리로 되돌린다. 그가 얼마나 높은 언어들을 활용했고, 얼마나 많은 경험들을 축적했으며, 그럼으로써 얼마나 넓은 꿈자리를 확보했든 간에, 상담자는 그 모든 '꿈의 독재'의 작용을 해체하여 그를 현실로 되돌린다.


상담자의 이 희망적 활동은 우리에게도 희망이지만, 신의 자리에서 추락한 그에게도 희망이다. 꿈은 독재를 멈추고 이제 자유로워질 수 있다.



# 기쁨으로 몸짓하는 몸자리: 꿈의 경험에서 꿈의 체험으로


우리에게 '편견'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각기 다른 풍토에서 각기 다른 몸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편.견.은. 우.리.의. 몸.이. 조.건.화.된. 방.식.이.다. 그러니 이를 역으로 이해하면, 편.견.을. 가.진. 이.는. 반.드.시. 그. 자.신.만.의.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접촉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실존상담이 꿈을 다루는 고유한 방식과 연결된다. 실존상담에서 꿈은 비밀스러운 경험을 안내하는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더 직.접.적.인. 체.험.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꿈을 언어적으로 분석할 이유가 없다. 다만 실존상담은 그 언어가 발화된 입장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어.떠.한. 체.험.이. 꿈.의. 언.어.를. 만.들.었.는.가?


이것이 유용한 질문이다. 체.험.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체험은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동일한 체험의 차원을 지시한다. 여기에는 모종의 구체적인 '몸의 양태'가 있다. 체험은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꿈.은. 그. 자.신.의. 몸.을. 말.하.고. 있.다. 동작과, 질감과, 온도 등의 총체적인 요소를 내포한 몸의 실제가 꿈의 표현들 속에는 담겨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꿈을 이해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인물, 사건, 배경 중에서 '사건'이다. 사건은 보다 직접적으로 몸이 드러내고 싶은 바를 전해준다. 특히 꿈속에서 인물과 배경은 곧잘 환유된다. 그러나 사건의 핵심적인 사건성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일어난 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모.든. 사.건.은. 존.재.사.건.이.다.


존재가 곧 몸이다. 사건은 필히 몸을 계시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왕이 되고 싶어하는 꿈을 꾸는 이가 있다. 꿈속에서 현실에서나 그는 그 꿈을 꾼다. 이러한 꿈은 이내 윤리가 된다. 명령하며, 매진시킨다. 경험들을 축적함으로써 레벨업을 해나간다. 왕게임도 펼칠 것이다. 장면을 빨리 앞당겨서 엔딩을 먼저 봐보자.


그는 왕좌에 올라 춤을 추며, 모두가 환호한다. 그가 동작을 취하는 만큼, 모두는 왕을 찬미하며 자지러진다. 만약 '편견' 가득한 몸으로 우리가 그의 근처에 있다면, 마구잡이로 '자유롭게' 침범해오는 그의 움직임에 불쾌감을 경험할 것만 같다. 경계를 너무 함부로 넘나든다. 지나치게 '자유롭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왕의 꿈이란 '자유로운 몸'의 표현임을.


그러면 누가 이 꿈의 언어를 발화했는가? '자유롭지 못함의 체험'이 이 꿈을 만들어냈다.


자.기.의. 몸.을. 자.유.롭.지. 못.하.게. 체.험.한. 이.가. 왕.이. 되.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기.를. 꿈.꾸.고. 있.던. 것.이.다.


왜 왕인가? 왕이라는 최고의 권위를 얻어야 자기가 몸의 자유를 갖는 일이 방해받지 않을 것 같아서다. 이것은 그가 왕이 되어야만 자기의 손가락 하나라도 자기 뜻대로 까딱할 수 있는 자유를 비로소 얻게 될 것처럼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욕망이라는 것이 어떻게 '과잉'되는지를 그대로 시사해준다. 마치 목이 마른 이가 바닷물을 다 마셔야 갈증이 해소될 것처럼 구는 일과 같다.


이것은 언어의 속성이다. 작은 것을 부풀려 거대한 이야기로 만들어내듯이, 꿈의 욕망은 언어를 타고 과잉된다. 그렇게 과잉된 형태로 실현되어야 욕망이 채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간주된다.


동시에 언어는 과정을 만든다. '인과과정'이 그것이다. 언어의 기획은 수단을 취해야 목적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왕'은 수단이고 '자유'는 목적이다. 이 과정을 '경험'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착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실은 목적을 이룰 수 없다. 과정만을, 곧 경험만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경험중독'의 일이다.


반면, 언어가 아닌 몸의 입장에서 이루는 체험은 '수단 없는 목적'이다. 바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것이 이룰 수 있는 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꿈은 외적인 욕망의 형태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몸의 양태로 바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왕의 꿈을 꾸는 이는 왕을 실현하려는 대신에, 방문을 잠그고 커튼을 친 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막춤을 춰볼 수 있다. 징글맞고, 기괴하며, 추악한 여러 몸짓들을 표현해볼 수 있다. 어떠한 몸의 형상이라도 가능하다. 누구도 그를 막지 않는다. 그는 자유롭다. 자유로운 몸이다.


이렇게 몸이 바로 자유해버리면, 몸의 자유를 위해 왕을 이루려는 발상이 사라진다. 이것은 마법같다.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까마득하게 생각될 만큼 꿈은 홀연히 사라진다.


꿈.도. 자.유.로.워.진. 것.이.다. 꿈의 해방이며, 꿈의 해탈이다. 꿈이 '독재자'에서 '자유인'으로 전환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몸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곧, 자.유.의. 원.천.이. 꿈.에.서. 몸.으.로. 정.확.히. 자.각.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우리가 몸이 부자유하다고 생각해서 자유로운 꿈을 꾸었다. 즉, 몸이 마치 우리를 억압하는 윤리의 기제이고, 꿈은 반대로 자유의 기제인 것처럼 상정되었다. 오늘날에는 정확하게 그 반대다. 꿈이 윤리고, 몸이 자유다.


몸이 자각되는 곳에서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 그 자리를 '몸자리'라고 불러보자. 이것은 실.존.하.는. 우.리.의. 사.실.적.인. 영.토.다. 우리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우리 자신일 수 있는 곳이다. 때문에 '몸자리'는 그 자체로 이미 '몸자유'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을 '몸짓'이라고 말한다.


'꿈자리' 위에 언어로 지어지는 것은 언제나 모래성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짓' 한 번에 무너져내린다. 몸짓이 일어나는 그곳에 우리의 신성한 '몸자리'가 있다. 꿈의 성벽은 존재의 성역을 결코 가릴 수 없다. 우리는 무너져내린 독재의 왕국 위에서 큰 웃음으로 그 사실을 증거한다. 우리의 몸짓이 기쁘다. 자유하는 몸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고자 했던 꿈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꿈은 경험되어야 하는가? 경험을 많이 할수록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이것은 전적인 환상이다. 꿈은 체험되어야 하며, 단 한 번만 체험되면 된다. 자폐적이고, 탐미적이며, 자학적인 언어들을 무너트리는 단 한 번의 몸짓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여.기.에. 있.었.어.야. 할. 크.고. 중.요.한. 바.로. 그. 자.유.의. 몸.자.리.가.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것이 곧 실존상담이 기쁨으로 몸짓하며 꿈을 다루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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