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현상으로서의 마음: 실존적 성격심리학의 구성"
'마음'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으로는 '몸의 체험'이다.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공중에 둥둥 떠다니다가 전기신호를 타고 온라인세계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영생불멸할 것처럼 묘사되는 그러한 '마음'은 말 그대로 판타지의 소재일 뿐이다.
'몸의 체험'이니 '생명작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지각활동'의 의미다. 쉽게 말해 '느껴서 아는 일'이다. 이 지각활동은 언제나 내외부의 양방향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신체현상학자들은 이를 잘 묘사한다. 외부의 세계를 느껴서 아는 일은 동시적으로 내 자신을 느껴서 아는 일이다.
생.명.은. 스.스.로.를. 알.아.가.는. 존.재.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생명을 말할 때 그 핵심적인 특성으로 정의되곤 하는 '번식'이라는 자가증식행위는 결국 '스스로에 대한 앎'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유전학은 이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지각된 앎의 내용들은 그 중요도에 따라 '기억'으로 저장된다. 여기에서 중요도란 '체험의 강도'다. 이것은 생존에 유리한 특성들의 성취와도 연관된다. 전쟁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뿐이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이처럼 어떠한 기억이 아무리 고통의 정동으로 경험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기억된다면 거기에는 생존과 관계된 모종의 '승리의 역사'가 있다. 상담에서는 대개 이 '기억의 반전'을 꾀한다.
'기억'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억들끼리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 현재의 느낌과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로 말할 수 있다. '정체성'이 바로 갈등의 이유다.
'정체성'은 전적으로 '생존의 문제'과 관계되어 있다. 한 개체의 역사 속에서 생존에 효과적이었다고 '기억되는' 특질들을 선별해 하나의 통합적 형상처럼 조형한 뒤, 그것에 '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효과적인 기억집합들의 자기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부정적이라고 평가되는 특질들, 이를테면 소심성, 우울성, 의존성, 나약성, 퇴행성 등과 같은 것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체성이라 하더라도, 그 개체에게는 그.것.들.이. 생.존.에. 우.수.한. 효.과.를. 보.였.기.에. 현재 채택되어 있는 것이다.
조악한 예를 들어보자면, 한 가족 내에서 형은 공부를 잘하고, 누나는 외모가 탁월하며, 남동생은 운동을 잘하고, 여동생은 예술의 천재다. 그러면 본인은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덜.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부모의 관심을 끌어내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생존전략'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다. 우리는 어쩌다보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 아니라, 실은 대단히 전략적이다. "제 자신을 알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상담소를 찾는 이들이 정말로 자신을 아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정체성의 전략'이 왜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않고 실패했는지를 분석해달라고 일종의 '작전참모'를 찾아오는 것이다. "공명선생, 형주의 처우에 대해서 말인데..."와 같은 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강화됨으로써 하나의 역전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성공적인 생존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성립된 정체성이지만, 이것을 개체가 자기화하고 있음에 따라 이제는 정체성이 '목적'이 되어버린다.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이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만 개체는 '자존심의 고집'으로 활동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정체성은 개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에까지도 이르게 된다. 이것은 '정체성의 역기능화'이며, 분명한 '자기파괴'의 현실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이들은 '정체성 게임'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집'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니, 이를 보완하거나 해결해줄 또 다른 정체성들을 '유연하게'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마치 게임의 부캐릭터를 만들어내듯이 '새로운 경험들'을 수집해서 '새로운 기억들'을 축적하는 방식으로 개체가 동일시할 수 있는 다양한 정체성들을 '키워내고자' 한다.
'정체성 게임'은 이처럼 일종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러한 게임을 하는 상태까지 오게 되면, 이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의 핵심은 '양육'의 기제가 되어버린다. 마.음.을. 아.이.처.럼. 상.정.한. 뒤. 그.것.을. 돌.보.고.자. 하.는. 일.이 '마음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처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그렇게 잘 양육해낸 아이들과 '결합하는' 일이 이 '정체성 게임'의 최종목적이다. 그러니까 '정체성 게임'의 주체는 '다양한 마음'을 잘 돌봐서 그것들에게 '형상'을 부여한 뒤, 자.기.가. 그. 형.상.들.과. 합.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다양한 정체성'이라고 하는 개념이다. 도식화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잘 양육된 마음들 + 양육하는 자기 = 다양한 정체성
이것은 아이언맨이 '다양한 수트'를 만들어낸 다음 그것과 합체해서 '다양한 아이언맨'이 되는 구조이기도 하며, 더 극단적으로 묘사하기로는,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을 가스라이팅한 뒤 고아원 원장이 그 아이들과 (대개 성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일이기도 하다. 소위 '키잡'의 일이다.
이 '마음에 대한 가스라이팅'을 집행하는 주체는, 자기는 다양한 정체성들을 키워내는 '정체성을 넘어선 메타인지적 상위주체'인 것처럼 스스로를 묘사하고 싶어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정체성이다. 바로 '양육자'라는 정체성이다. 그리고 이 '양육자의 정체성'이야말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그. 유.일.한. 목.적.을. 위.해. 전.략.적.으.로. 집.행.된. 궁.극.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한 이들이 '정체성 게임'을 펼침으로써, 게임을 즐기는 자기가 동일시된 '양육자의 정체성'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고자 획책한다. 그래서 그 표어는 "다양한 마음들의 온전함을 위하여."이지만, 실제의 내용은 "내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양육자의 정체성'은 가장 역기능적인 정체성으로 드러나게 되는 일이 빈번하다. '마음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실제로는 '생명작용으로서의 마음'을 가장 위협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마.음.에.는. 양.육.이. 필.요.한.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양육자의 정체성'의 허상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양육자란 결국 무엇인가?
양.육.자.는. 잘. 기.억.하.는. 자.다.
이는 단순하면서도 아주 명쾌한 이해다. 양육자는 자기가 양육하는 것들을 알아봐주며 가장 잘 기억하려고 한다. 동시에 자기가 기억하는 여러 정보들을 통해 효과적인 양육활동을 이루려고 한다. 이를테면 '화상이 생겼을 때는 뜨거운 물로 환부를 찜질한다.' 등과 같은 정보들이다.
이것은 중요한데, 양육자의 만족감은 자기가 기억하는 정보의 실제적인 유용성보다도, '바로 그런 것도 기억할 줄 아는' 자기 기억력의 우수성에서 더욱 크게 경험된다. 무수한 양육자들이 오컬트에 빠지는 이유다. 쓸 데 없는 것들을 더 많이 기억할수록 '양육자의 정체성'은 강화된다. 그리고 이 '기억기능'의 최고점은 바로 '메타인지'다. 양.육.자.는. 반.드.시. 메.타.인.지.적. 주.체.가. 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이 일이야말로 '양육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핵심이다. 이것은 '기억 위의 기억'이기에, 결국 '정체성 위의 정체성'이 된다. 항구적인 정체성을 꿈꾸는 주체의 '고집'은 이렇게 달성되리라고 기대된다.
그러나 생명의 지각활동이 언제나 '스스로를 아는 일'을 기본적으로 포함한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보자. 메.타.인.지.는. 호.들.갑.을. 떨. 기.능.이. 아.니.다. 생명의 기본단위에서부터 원래 자동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기능이다.
개체가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목적에만 매진하고 있을 때 생겨나는 역기능적 요소들에는 이 메타인지적 기능의 망각이 포함된다. 망각한 이 기능이 상기된 것은 생명체로서의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지, 자기가 성장하거나 발전한 상태에 이른 것이 전혀 아니다.
이를테면, 30세가 넘어도 아기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보행기에 타고 있던 이가, 보행기에서 내려와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며 사람들에게 "짜잔! 제가 또 해냈습니다!"라고 뽐내는 일은 '퇴행'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그는 퇴행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퇴행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양육자의 정체성'은 바로 이 '퇴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양육자에게 메타인지의 기능이 상기된 이유 또한 그가 퇴행했기 때문이다. 퇴행하니 군더더기가 빠져 조금 더 '기본적인 원점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아.이.처.럼. 보.며. 돌.보.려.는. 이. 일.은. 분.명.한. 퇴.행.이.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이다. 아이로서의 자기에 대한 기억을 '고집하고' 있기에, 바깥의 모든 것이 아이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양육자의 핵심기능인 메타인지도 실은 양육자를 다른 것보다 우세하게 만들어주는 기능이 아니며, 양육자라는 정체성의 실체 또한 다른 것보다 결코 우세할 수 없는 퇴행의 정체성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다른 것'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마.음.은. 양.육.자.의. 양.육.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기억해보자. 생명의 지각활동은 내외부의 방향성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이름에 경도되어 언제나 내적인 작용에만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외.재.적.인. 것.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가 비가 오는 것처럼 축축한 '마음'을 느껴서 알 때, 우리는 동시에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늘.에.서.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음'은 내적 지각이자, 동시에 외적 지각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은 형식들로 묘사해볼 수 있다.
- 마음은 인격적이면서 무인격적이다.
- 마음은 생명이면서 비생명이다.
- 마음은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지 않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절반뿐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마음을 마치 '의인화'하여 인격적인 아이처럼 만들고, 그것을 '양육'하려 하며, 또한 사회적 '윤리'를 적용하려 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마.음.에. 대.한. 억.압.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천둥을 불쌍한 아이처럼 바라보고, 비바람을 자상하게 키우려 하며, 폭설을 엄히 윤리로 꾸짖으려 한 어.처.구.니. 없.는. 현.실.과.도. 같.다.
이제 우리는 차라리 이렇게 이해하도록 하자.
마.음.은. 기.상.현.상.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비라는 것에는 그 '중심씨앗'으로서의 실체가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단지 하나의 운동으로서만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기상현상이 정말로 예측이 가능한가? 과거의 기억들에 의거해 '확률적 기대'만 가능할 뿐, 실제로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는 번번이 배신되어 왔다. 예측할 수 없으니 법칙이란 것이 세워질 수도 없다. 마.음.의. 법.칙.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기상현상이 정말로 대극의 원리 같은 것에 의해 작동하는가? 이 말은, 가뭄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비도 같이 내린다는 말과 같다. 정말로 그렇다면 농사꾼들은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지 않기에 '주술'이 생겨났다. '주술적 의식'은 대극의 원리와 같은 '주술적 원리'를 의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남자 태양신이 노해 날이 가물었으니 여자 인간아이를 울려 '대극의 균형을 맞춰주면' 비가 올 것이라는 주술적 의도를 위해 무고한 아이는 죽어야 했다.
매섭게 몰아치는 저 폭풍은 그렇다면 우리의 다정한 돌봄이 필요한 어린 양인가? 자기를 온전하게 알아주지 않아 지금 저 폭풍은 뿔이 난 것인가? "그래 너도 많이 아파서 그렇게 화가 난 거구나."라고 말해주면 폭풍이 훌쩍이며 "나도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어요."라며 부드러운 미풍으로 바뀌게 되는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기상현상을 대상으로 '소날씨체 클리닉'을 집행해야 하는가?
이것은 핵심적인 질문이다.
정.말.로. 우.리.는. 기.상.현.상.을. 통.제.할. 수. 있.는.가?
'기상'은 매일매일 변해가며, 장기간의 기상현상의 총체인 '기후'도 실은 계속 변해간다. 이 '변화'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왜인가? 이것은 '거대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기.상.현.상.은. 원.래. 우.주.적. 사.건.이.다. 발생하는 곳은 대기권 안이지만, 그 발생의 이유에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우주적 운동이 작용한다.
그러니 마.음.을. 통.제.한.다.는. 것.은. 우.주.를. 통.제.하.겠.다.는. 의.미.와. 같.다. 심지어 마음을 '내면아이' 같은 것으로 상정한 뒤 그것을 양육하려 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주에게 딸랑이를 흔들며 우주를 착한 아이로 키우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아하, 너도 온전했구나. ㅜㅜ"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해왕성은 해왕성으로서 온전하게 존재하기 위해 우리의 인정을 지금 필요로 하고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잘못했네.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해왕성까지 갈 수 있는 유인로켓을 만들지 못해서, 해왕성을 꼭 끌어안고는 "너무 오래 기다렸지. 어린 것이 이 태양계 끝에서 얼마나 홀로 외로웠을꼬. ㅠㅠ"라는 감동의 상봉을 이룰 수 없는 것은 분명 인간의 과오다. 많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성하는 대신에, 곧 '반성'이라는 메타인지의 기능을 쓰는 대신에, 다만 제대로 '주제파악'을 한다면 이 '마음'이라고 하는 주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우리에게 이해될 수도 있다.
실시간의 '우주적 운동'이 '기상'을 낳고, '기상'은 '기후'를 이룬다. 그리고 '기후'는 '풍토'를 만들며, '풍토'는 '기질'을 형성하게 한다. 이것이 개인에게는 '성격(personality)'이라는 것이다.
성.격.은. 곧. 우.주.에. 대.한. 개.인.의. 태.도.다.
그렇기 때문에, 성격은 '관계'를 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를 만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개인성'을 가진 개인이라는 그 의미는 이처럼 우주를 향해 있는 것이다.
개.인.이.라.는. 그. 자.체.가. 우.주.적. 사.건.에. 대.한. 우.주.적. 사.건.이.다.
그것도 실시간적 사건이다!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존재론적 의미'를 우리의 '자존감'의 원천으로 삼아 출발한다면 이제 방향성은 이렇게 정향된다.
우리는 우리의 성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기질을 바꾸기란 어렵다. 풍토를 바꿀 수 없는 까닭이다. 물론 우리가 새로운 풍토의 조건 속으로 이동한다면 적응양식의 미세한 변화들은 생겨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성격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몸의 문제다. 몸.이. 곧. 성.격.이.다. 하나의 풍토에 의해 키워진 몸은, 곧 성격은 고유한 특성으로 지속된다. 인위적인 노력으로 '물리적 몸'을 늘리거나 줄여도, 이 '성격적 몸'은 풍토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미 최적으로 '완성된' 고유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체성 게임'을 하더라도 이 고유한 성격은 변화되지 않는다. 성.격.은. 정.체.성.과.의. 동.의.어.가.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쓰고 벗는 가면놀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애초에 '정체성'에 대해 신경써야 할 이유가 없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한국에 있을 때는 소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유럽으로 여행을 가면 이성에게도 쉽게 말을 거는 대범한 모습이 되는 것은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관계'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의 성격은 한국에서나 유럽에서나 동일한 '껄떡쇠'의 면모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관계양상의 차이에 따라 동일한 성격이 한국에서는 소심함의 이유로, 유럽에서는 대범함의 이유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만약 대범함을 경험하게 해주는 관계양상을 그가 자기의 '정체성'으로 채택한다면, 그는 늘 한국에서는 화가 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그러다가 마치 무엇인가를 깨닫기라도 한 양 "그래, 한국에서는 '소심함'의 정체성으로 유연하게 살아가면 되겠구나!"라고 하는 것은 '관계의 착각'이 만든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리고 자기기만은 언제나 운명에 대한 기만이다.
쉽게 말해, 성.격.은. 운.명.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운명지어진 우주적 사건의 결과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현재 가진 바.로. 그. 조.건.으.로.도. 우주와 정당하게 독대할 수 있다는 바로 그 허락이기도 하다.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우.주.적. 허.락.이.다.
우리는 이 조건으로 '나'를 시작한다. 이것은 '나'라고 하는 이름의 정체성이 아니다. 나.라.고. 하.는. 실.시.간.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예시할 수 있다.
비가 온다. 누군가는 우산을 편다. 다른 누군가는 카페로 들어간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대로 가던 길을 간다. 어쩌면 어떤 누군가는 비를 맞으며 춤을 출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격에 따라 반응양식은 다르게 일어날 것이며, 어떠한 반응양식이라도 좋다.
비.가. 온.다.는. 이. 우.주.적. 사.건.을. 반.가.움.으.로. 맞.이.하.면. 된.다.
이 반가움은 또한 성격에 따라, 우울의 감정으로, 짜증의 감정으로, 슬픔의 감정으로,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다. 반가움이 꼭 긍정적 감정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비를 통제할 수 없다는 그 선명한 실감을 느끼면 지금 반가움이 있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으니 우울하고, 짜증나며, 슬퍼진다. 여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우주를 통제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있다. 이것은 무슨 사실인가?
자유다. 자.유.의.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우주의 자유를 맛본 것이며, 그것을 동시에 우리의 자유로 맛본 것이다. 우울하고, 짜증나며, 슬퍼질 수도 있는 '자유'를 분명 체험한 것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이. 우.리.의. 모.든. 반.가.움.의. 이.유.다.
'마음'은 우주적 자유의 표현이다. 마.음.은. 언.제.나. 자.유.의. 주.제.다. 이에 대한 어떠한 반응양식이어도 좋다. 성격대로 그.렇.게. 반.응.해.도. 좋.다.는. 자유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래서 또한 성.격.은. 자.유.다. '운명'과 '자유'는 성격 안에서 하나다. 이것은 전술했듯이 '관계'에 대해 기능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주'를 향해 있는 것이다.
관.계.가. 우.리.를. 운.명.짓.거.나.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없.다.
우리를 온전하게 허락하는 운명과, 우리를 온전하게 우리 자신이도록 하는 자유는, 오직 우주의 축복으로 우리에게 내린 것이다. 우리의 성격은 우주로부터의 그 선물이다.
우리는 순수하고, 무오하며, 투명한 '초성격적인' 양육자의 정체성으로 마음이라고 하는 아이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지랄맞은' 성격으로 마음이라고 하는 우주를 만나는 것이다.
합체해서 자궁 속으로 돌아가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로 더 먼 우주를 향해 가기 위해서다. 이것은 '돌아오지 않는 오딧세우스'의 비유다.
우리가 '마음'이라는 것을 주제로 삼을 때, 곧잘 바라곤 하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어.떤. 마.음.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에. 치.여. 고.통.받.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다.
어떠한 이들은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내면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획은 두 방식의 실천론을 갖는다. 첫 번째는 어떤 마음이 오더라도 그것을 다정하게 품고 있으면 그 마음이 괜찮아진다는 방식이고, 두 번째는 더 적극적으로 "모든 마음, 드루와! 드루와!"라고 하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인내로 '버텨내는' 양육자의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실천하는 이는 마음을 양육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근육'을 쓰기보다는 '칼'을 쓴다. 이것은 엄중한 무사의 길이다. 마음은 단지 부질없는 감정 내지 생각에 불과하다며, 정신이 약하기에 마음에 흔들리는 것이라고 이들은 간주한다. 그래서 드높은 이념과 목표를 설정한 뒤, 거기에 이르고자 하는 팽팽한 긴장의 '칼'로 이들은 마음을 베어내고자 한다. 물론 이 또한 또 하나의 양육의 방식이다. 한석봉의 어머니가 무사처럼 엄중하게 떡을 써는 그 방식이다.
'근육'과 '칼' 대신에 '비폭력'을 활용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어떤 마음이 일어나든 간에 '무시'한다. 무사처럼 굳이 차가운 태도도 아니다. 그보다는 무표정하다. 칭얼대는 아이를 품에 안지도, 잘라내지도 않는 이들이 곧잘 짓곤 하는 그 표정이다. 결국 이 또한 양육의 한 태도다.
이 모든 양육의 방식으로는 고통받지 않을 수가 없다.
비를 품거나 비와 싸우며, 또는 비를 베기 위해 칼을 휘두르며, 또는 내리는 비를 무시하며 있는 일은, 언제나 몸이 고통스럽다.
이것은 다 비를 수단으로 삼아, 모종의 '항구적인 중심'과 같은 것을 얻는 일을 목적하기에 생겨나는 고통이다. 곧, 마음이 고통의 소재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중심'을 얻으려 하는 기획이 고통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주제는 '중심'에 대한 주제가 아니라 '운동'에 대한 주제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아파트 분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비가 오면 비와 함께 여행하면 된다. 비가 오는 김에 외출을 관두고 미루어둔 책을 읽는다거나, 비옷을 입고 한강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간다거나, 창가의 빗소리를 들으며 편안하게 잠에 빠져드는 일이 곧 비와 함께 여행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우리의 유한성의 자각이 오히려 그것을 창조적으로 누리게 되는 현실을 낳는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인간이 높은 파도 앞에서 경험한 유한성은 서핑의 문화를 창조했다. 통제불가능한 화산의 열기는 온천의 문화를 만들었고, 매서운 바람은 풍차를 돌려 보리떡을 나눠먹는 축제의 문화를 열어갔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 여.행.한. 그. 결.과.물.이. 바.로. 문.화.다.
마음은 이처럼 '고통의 소재'가 아니라 '창조의 소재'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마.음.은. 곧. 문.화.다.
우리의 유한한 성격이 마음을 반가움으로 만나 여행할 때, 개인마다의 문화는 꽃피어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은 그 자체로 예술가다. 마음으로 말미암아 모두는 예술가로 거듭난다.
마음이 기상현상과 같고, 기상현상이 우주적 현상이라는 것을 기억해보자. 그렇다면, 마음을 예술한다는 것은 우주를 예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우주적 사건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우주적 운명이다.
그리고 말했듯이, 운.명.은. 성.격. 속.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 때.문.에. 고.통.받.지. 않.을. 자.유.도. 성.격. 속.에. 있.다.
당신이 다른 누구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성격 그대로인 당신 자신으로서 비오는 날을 반갑게 맞이할 때, 그러한 당신 자신의 모습도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당신이 지금 이미 자유로운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