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51

"선택의 문제: 시간운동을 하는 자기살림의 주인공"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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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상담이 '시간을 다루는 활동'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이것은 거듭해서 말하지만 '시계의 시간'이 아니다. 즉, 내담자가 달력이나 사회적 일정에 준거한 생활계획표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 등을 조력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간'이다. 이 말은 '시간'이 의미하는 바가 언제나 '자신의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은 큰 유감이다. 무대의 중심에서 다른 들러리들이 경배하는 가운데 혼자 멋드러진 독백을 하면 이에 따라 엄마와 같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는 그 인물이 바로 주인공인가?


이.것.은. 삶.을. 이.야.기.로. 착.각.하.기.에. 생.겨.나.는. 오.해.다. 이러한 주인공은 '이야기를 지속해가는 이'다. 이야기가 지속되려면 갈등이 지속되어야 한다. 때문에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갈등의 중심인물'이다. 그가 갈등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로 인해 갈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과 같은 만화를 보면 분명하다.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를 지속하려는 그 의도만큼 살인사건은 발생하며 사람은 죽어나간다.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주인공'과는 정반대편의 자리에서 '삶의 주인공'은 성립된다. 삶.의. 주.인.공.은. 이.야.기.를. 지.속.하.는. 이.가.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를. 종.결.하.는. 이.다. 그래서 삶의 주인공은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시간낭비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치워야 할 것'이 많아짐으로써 시간을 더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주인공의 속성을 눈치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책임성이다. 이 책임성은 '자신이 시작하고 자신이 끝낸다.'라고 하는 실천적 모습으로 기술될 수 있다. 시.작.과. 끝.을. 자.신.이. 책.임.지.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주.인.공.이.다.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 새벽에 게임을 하다가 배고파서 라면을 끓이는 일을 시작한 이가 있다. 끓이다보니 김치와 스팸도 넣게 되고, 면 위에 치즈도 올리며, 엄마가 보내준 갓김치도 썰어 만찬을 마련한다. 밥까지 말아 꾸역꾸역 먹방을 찍은 뒤,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 배수구망에 고인 음식물찌꺼기까지 청소한 그는 지금, 그의 삶의 주인공이다.


이것은 아무 이야기가 아니며, 단순한 존재의 활동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존.재.할.수.록. 주.인.공.이. 된.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당연한가? 바로 '선택'이다. 선.택.이. 당.연.하.게. 존.재.하.는. 이. 방.식.이. 우.리.를. 삶.의. 주.인.공.으.로. 드.러.나.게. 한.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라도 우리의 선택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반.드.시. 선.택.한.다. 이것은 빅터 프랭클의 잘 알려진 진술이다.


"우리는 사건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사건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는 우리의 선택과는 별 상관없어보이는 '우리가 태어난 일'조차도 실존주의는 결국 이 선택의 범주로 말하고자 한다. 하이데거의 묘사에 따르면 우리는 이처럼 세상에 '던져진' 우리 자신을 다시 세상에 '던진다.' 카뮈가 '시지프의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카뮈의 해석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에게 형벌처럼 주어진 운명을 그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선택하는' 존재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의 개념 또한 이 운명적 삶을 자신이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방식이다.


윌리엄 글래서의 '현실치료(Reality Therapy)'는 실존상담의 분파는 아니지만 '선택'의 개념에 대한 유사한 관점을 실존상담과 공유한다. 글래서는 인간은 '좋은 세계(quality world)'에서 살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항시 선택해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래서 현실치료는 '선택이론'이다. 선택이론의 입장에서는, 내담자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상담소를 찾는 일은 무용한 일이다. 특히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아무리 '말해봤자'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는 선.택.해.서. 행.동.하.고. 책.임.지.는. 일.이 현실치료에서는 권장된다.


명상적 기제와 결합한 인지치료의 제3의 유형들로 분류되는 DBT, MBCT, ACT 등과 같은 접근들 중에 특히 스티븐 헤이스의 'ACT(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수용전념치료)'도 이 '선택과 책임'의 문제를 강조한다. 애초에 commitment라는 개념 자체가 자.신.이. 선.택.한. 것.을. 책.임.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ACT의 교과서인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Get Out of Your Mind and Into Your Life)』는 제목만으로도 이러한 주제의식을 강조하고 있는 책이다.


상기한 접근들의 공통점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 대체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일'이지, '이야기를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하.다.


효과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우리가 어떠한 대상의 권유로 모종의 일을 시작했다. 하나의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그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누가 강압하더라도 일은 시작될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한 일이 우리가 기대한 결과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그 대상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사악한 독재자가 강제로 시킨 일 때문에 인생을 망치게 된 순결한 피해자로서 자기를 위치시킨 뒤, 그 억울한 비극의 이야기를 집필해나가곤 한다.


이것이 바로 내담자가 이야기를 통해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방식이다. 이 비극의 주인공은 자기와 똑같이 상.담.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알.아.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상담자를 만나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인정받고자 한다. 이 인정은 결국 이.야.기.를. 통.해. 주.인.공.의. 자.리.를. 획.득.하.는. 기.제.에 대한 인정이 된다. 그러니 이야기에 대한 집착은 강화되며, 이야기는 지속된다. 특히 이제는 '희극의 이야기'를 통해 '희극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 상담자와 내담자의 야합으로 함께 궁리된다.


재미있는 점은, '비극의 주인공'에서 '희극의 주인공'으로 정체성을 바꾸려는 이 일을, 이들 또한 '선택'이라고 곧잘 부른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새롭게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이 선택된다."라는 전제에 따라 이들은 자기들이 정말로 '삶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소년만화의 등장인물처럼 "나는 진정한 나의 운명을 다시 선택했어!"라고 외치며, 그 외침에 스스로 감격한다.


그러나 엄마는 일을 본 뒤에 변기의 물을 내리지 않는 이들의 모습이 여전히 꼴보기 싫고, 아빠는 자신이 어렵게 일자리를 부탁한 지인의 회사에 대해 "이곳은 독재적이라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며 출근한지 며칠만에 인사도 없이 때려친 뒤 '당당한 나의 이야기' 운운하는 이들의 모습에 늘 화가 치민다.


물론 이들도 선택했다.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이들은 왜 이러한 선택을 했는가? 자신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서다.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망상을 지속하고 싶어서다.


선택한다는 것은 언제나 포기를 동반한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다 할 수는 없다. 이것은 결단의 의미다. 결.단.은. 곧. 모.든. 것.을. 생.각.대.로. 다. 하.고.자. 하.는.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로 사는 이에게는 이것이 어렵다. 이.야.기.로.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은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기 자신의 현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곧, 이들은 '사실적 삶' 대신에 '허구적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침대 위에 누워 백일몽을 꾸는 이가 마치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습과 같다. 그래서 문제는 원천적인 통제의 불가능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마음을 얼마나 빨리 먹느냐에 대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의 시간'에 대한 문제는 '시계의 시간'에 대한 문제인 것처럼 굴절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하다.


빨.리.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치.워.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만 해야 하는 것이다. 상담자를 찾아가 마음을 '잘 먹는 법'을 학습해보려 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 굳이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동.안. 마.음.을. 너.무. 많.이. 먹.었.으.니. 이.제.는. 운.동.을. 좀. 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많이 먹을 때 생겨나는 상태들이 있다.


1) 생각이 많아진다.

2) 감정이 과잉된다.

3) 몸이 비대해진다.


하나 이상의 상태가 경험된다면 이.제.는. 마.음.을. 그.만. 먹.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이야기'다. 자기를 주인공처럼 만들기 위한 환상의 소재다. 이러한 '마음이야기'를 포기하는 것이 곧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


한번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못하고 있을 때는 열심히 마음만 먹고 있을 경우다. 자기가 생각한 시나리오대로 모종의 주인공연기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궁리하는 동안 우리는 실제로 그 일을 못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어.떠.한. 일.을. 해.내.는. 이.들.은. 단.순.하.게. 그. 일.을. 한.다. 이것은 '운동'의 의미다.


마.음.의. 비.만.자.들.에.게.는. 시.간.을. 운.동.하.는. 일.이. 필.요.하.다.


상담소는 이 '시간운동'을 하기 위해 내담자가 찾는 장소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내담자는 상담을 통해 자.신.이. 어.떠.한. 것.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그 자각을 분명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선택했으면서도 그에 대해 무책임했던 그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든다.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진다는 것이다.


모든 사건 속에는 자.신.의. 선.택.이. 당.연.하.게. 존.재.했.다.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당연하게 존재하는 일, 이것은단순성이며, 곧 정직성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정직해지면 우리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야망'을 포기하게 된다. 야망이란 무엇인가? '촌스러운 욕망'이다. 왜 욕망은 촌스럽게 되었는가? '자신의 몸'을 무시하고 '자기라고 하는 이야기'로 살려 했기 때문이다. 몸에도 맞지 않는 색채 및 형상의 옷을 입고 다니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너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최고로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야망'으로 가득찬 이들이다. 그래서 촌스럽다.


할. 수. 없.는. 일.을. 하.고.자. 하.는. 모.습.은. 촌.스.럽.다. 자신의 유한성을 무시하며 회피하고 있는 이는 촌스럽기 그지 없다. 꽃과, 새와,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유.한.성. 속.에.서. 시.간.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는 '의미'라고 하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중요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살고자 하는 이들은 자기의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왜 부여하는가? 거.기.에. 실.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적으로 그 모든 이야기에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는 부여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임의로 부여될 수 있는 의미라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가짜다. 의.미.는. 다.만. 드.러.날. 뿐.이.다.


존.재.는. 의.미.로. 드.러.난.다. 이 말은 조금 더 명확하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의.미.로. 드.러.나.게. 하.는. 일.이. 바.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그. 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간운동'을 회복함으로써 '존재자각'의 '의미발견'을 이루는 그 책임자가 바로 '삶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혹시 개념어들로 인해 이것이 추상적인 현실에 대한 묘사로 들린다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1) 어렸을 때 자기를 진정하게 사랑해주지 않은 부모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화장실 변기의 황변을 제거하는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


2) 늘 자기만 못살게 구는 과장에 대해 억울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자기 자리에 정신없이 어질러진 서류들을 정리하는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


3)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당신의 소중한 이야기를 이제 제가 듣겠습니다."라며 자기를 스승으로 봐달라고 구걸하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모니터 앞에서 먹은 라면그릇을 설거지하는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귀하신 이야기의 주인공님'에게는 하찮게 경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커피에 버터를 넣고, 민트에 초코를 섞고, 피자에 파인애플을 올릴 만큼이나 높은 의식수준에 도달해 있는 '진정한 자기'를 오히려 억압하는 일들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주인공'은 잘난 척하며 늘어놓은 이것들을 묵묵히 치우는 운동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자신의 시간을 운동하는 이 일에 대한 아주 공식적인 이름이 있다. '살림'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요리를 하기 위해 주방을 이세계의 던젼처럼 만드는 이에 대해 우리는 살림을 잘한다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싼. 똥.을. 잘. 치.우.는. 이.가. 바.로. 살.림.을. 잘.하.는. 이.다.


살림은 표현 그대로 '살리는 일'이다. 이 '살리는 일'이 '치우는 일'과, 곧 '끝내는 일'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깊다. 역으로 말하자면, 어떤 것을 잘 끝내는 이는 그것을 성공적으로 잘 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분명 자신을 잘 살리는 이다. 그리고 잘 살리는 이는 잘 끝내는 이다. "자신이 시작하고 자신이 끝낸다."라는 말은 이 경우 "자신을 시작하고 자신을 끝낸다."라는 표현으로 변주될 수 있다. 자신으로 살다가 자신으로 죽는다. 태어나서 죽게 되는 이 과정은 통째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선.택.한. 자.신.이.다. 이것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바.로. 자.기.살.림.의. 의.미.다.


우리는 '자기살림'을 잘해야 한다. 이것만 하면 삶의 주인공으로서의 품격이 생겨난다. 왜인가? 그것이 바로 삶.이. 우.리.를. 주.인.공.으.로. 세.우.고.자. 하.는. 그. 신.성.한. 의.미.인 까닭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우리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삶의 그 의도에 기꺼이 응답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을 우.리.쪽.에.서.도. 선.택.한.다.는. 것.이.다.


국내의 종교철학전문가인 정재현 선생님은, 삶은 그 자체로 '살아라.'라는 명령이라고 말한다. '생명(生命)'이라는 표현에 대한 그의 해석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여 이 명령을 다시 묘사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가능할 수 있다.


"네 자신을 살려라."


우리가 이 명령을 받들기를 선택하여 우.리. 자.신.을. 살.리.는.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무.대, 그것이 바로 삶인 셈이다.


이러한 '살림'의 무대는 두 군데가 있다. '이야기'와 '삶'이 그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이야기는 '자신'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역할'을 살리는 곳이다. '관계 속의 역할'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그러니 이야기는 자신 대신에 정체성을 살리는 무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이야기'란 결국 '기능'과 '껍데기'를 위해 작동하는 것이다. 껍데기만 남아 기능화된 인간, 이것을 우리는 '인간소외'라고 부른다.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일이다. 방청소와, 설거지와, 옷정리의 시간을,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실감 속에서 운동해나가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해 인간을 회복하게 된다. 엄마도 말할 것이다.


"이제 사람되었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는 일은 더 멋질 수 있다.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 했어요."


당연하다. '인간답게' 등과 같은 촌.스.러.운. 야.망.의 윤리적 표현은 원래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언제나 '자신답게'이다. 자.신.다.운. 것.이. 인.간.이.다. 자신다움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기를 선택하는 그. 구.체.적. 인.간.이 언제나 이 삶에서 '선택되는' 진짜 주인공이다.


이것은 분명 선택이다. 내담자가 되고 싶은 당신에게나, 또는 상담자가 되고 싶은 당신에게나, 이것은 엄연한 선택이다. 선택하는 일 자체가 '시간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양자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선.택.되.기.를. 선.택.하.는. 그. 삶.의. 선.택.이.다. '자기살림'의 일을 선택하면, 당신의 선택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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