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혁명으로서의 상담: 잘못해서 외로운 줄 아는 인간의 문제"
모.든. 상.담.은. 외.로.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미학적 효과를 위한 표현이 아니라 상담의 대가들의 자기보고다. 특히 무수한 상담자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손꼽히는 '상담자 중의 상담자'이자, 공감, 경청, 무조건적 존중 등과 같은 오늘날 상담의 핵심으로 널리 알려진 개념들의 원출처라고 할 수 있는 '인본주의 상담'을 창시한 칼 로저스는 정확하게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사춘기 때 늘 소심해서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책만 보던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제가 외롭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부터 저에게는 인간을 알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났습니다. 그렇게 외로움은 인간을 향한 깊은 관심이 되어 제가 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분명하다. 상담자는 외로움과 친해야 한다. 누.구.보.다.도. 상.담.자.는. 외.로.움.의. 벗.이.어.야. 한.다. '외로움의 문제'가 '인간의 문제'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담자가 내담자 앞에서 "저도 외롭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약하고 외로운 것이지요. 그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사람좋은 미소를 보이며, 외.로.움.으.로. 치.장.한. 미.학.적. 효.과.를. 누.리.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혹시 그러면 내담자가 "아, 상담자도 나와 같구나.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 외로울 땐 친구들을 만나 삼겹살에 소주 한 잔하며 마음을 달래고, 슬픈 음악과 함께 커피 한 모금의 쌉쌀한 고독을 즐기기도 하며, 또 외로우니까 나를 가스라이팅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거겠구나."라며 대.단.히. 인.간.적.인. 치.유.적. 통.찰.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되는가?
어디 무슨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문창과 습작생들이 모여 나눌 법한, 자조와 연민이 반씩 뒤섞인 '인생 좀 아는 듯한' 닳고 닳은 대사들이 외로움의 주제를 다루는 상담에서 이루어져야 할 우아한 문학적 대화방식으로 권장되는가? 그것이 '외로움의 깊이'를 이해하는 지혜로운 교양인들의 모습처럼 연상되는가?
아니면 상담자는 "그 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그 마음, 온전했는데... 소중한 당신의 마음이었는데..."와 같은 '달달한 말'로 내담자의 외로움을 무량하게 채워주어야 할 호스트 내지 호스티스의 역할로 상정되는가?
이것은 일단 경제적이지 못하다. 소주값이나 커피값만 지불하면 할 수 있는 일을 비싼 상담비를 내고 하는 일은 낭비다. 그리고 이 경제적 낭비는 그대로 시간의 낭비가 된다. 나아가 시간의 낭비는 곧 인생의 낭비다. 물론 우리는 인생을 낭비할 자유가 있다. 오늘날에는 인생낭비도 하나의 패션코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많고 많은 낭비재 중에서 상담은 가장 그 효용이 떨어지는 소재군에 속한다. 일종의 '스왝'이 되기에는 상담은 왠지 모르게 '구질구질하다는' 대중적 인상 속에 아직도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떠올려볼 수 있다. "나 요즘 상담받아."라고 누군가가 친구에게 말하면 "오! 드디어 네 자신을 찾아가려고 하는구나. 멋있다. 네 삶의 의미가 명확하게 발견되면 좋겠다. 하나뿐인 인생인데 네 자신으로 행복하게 살아야지!"라고 회답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요즘 좀 힘든가 보구나...... 그래... 잘... 치유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과 함께 '그래 너는 좀 그럴 것 같더라. 첫인상부터 상담 같은 거 받을 애처럼 보이긴 하더라구. 그래도 친구니까 기존의 거리는 유지하되 깊은 얘기는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을 동반하여 반응되는 경우가 대다수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결국 어떠한 결과가 돌아오는가?
우.리.는. 외.롭.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담'을 소비하는 일은 우리가 외롭다는 이 사실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외로움에 대한 동어반복만이 지속될 뿐이다. 하나마나한 말은 차라리 안 하는 편이 낫다. 그러면 최소 지루하지는 않다.
지루함, 이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사실 외롭다고 말할 때, 외로움이 아니라 이 지루함을 경험하고 있다. 권태로워서 자극을 필요로 하며, 이에 따라 자신에게 새로운 자극을 공급하는 일을 '외로움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이 경우, 상담이라는 활동도 반.드.시. 새로운 자극의 소재로서만 기능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상담을 '상담'이라고, 상담자와 내담자가 야합하여 '날조해내고' 있을 때, 이것은 그저 하나의 사실만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상.담.자.도. 내.담.자.도. 없.다. 다만 지루한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상담자가 외로움의 벗이라는 의미는, 상.담.자.는. 외.로.움.을. 지.루.함.이. 아.닌. 외.로.움. 그. 자.체.로. 경.험.하.는. 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 점은 분명하다.
이.것.은. 외.로.움.을.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만약 거의 모든 이가 흰살생선회를 초고추장에 찍어 초고추장의 맛으로 먹는다면, 흰살생선회를 흰살의 맛 그대로 먹는 일은 분명 '새로운' 방식처럼 작동한다. 곧, 이것은 외로움을 지루함으로 버무리지 않고 외로움이라는 소재 자체로 경험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러운 통찰이 우리에게 찾아든다.
외.로.우.면. 지.루.하.지. 않.다.
회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지 않으면 초고추장의 맛이 나지 않는다.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럽다.
지루함이 오늘날 우리를 아주 많이 힘들게 만드는 소재라는 사실을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외로우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핵심적인 이유가 해소된다. 이것은 혁명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단순한 혁명의 이득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지루함의 고통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이유는 외로움에 대한 오래된 신화 때문이다. 그 내용은 무엇일까?
외.로.움.에.는. 누.군.가.의.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유기의 신화'다. '버리는 이' 내지 '버려지는 이' 어느 한쪽에 잘못이 있거나, 또는 둘 다에게 잘못이 있다. 어떻든 간에 누군가의 잘못이 있기에 유기가 생겨난다고 간주된다. 그런데 외로움의 감각은 거의 언제나 이 유기의 감각과 혼.동.된.다. 세상에 자기 혼자인 것만 같은 느낌은 자동으로 "내가 버려졌구나."라는 인식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제 외로움을 느끼는 개인은 자신이 버려진 것은 대체 누구의 과오인지를 묻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외로움'과 '죄'의 연합이 생겨나는 것이다.
많은 경우 1차적인 '죄인'은 대개 부모다. 우리가 외로움을 경험하게 된 그 시작점은 '부모의 잘못'과 연합된 기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원래는 외롭지 않았는데 부모가 자신을 버린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다. 일상에서 외로움이 느껴질 때마다 그 기억이 사무친다. 애인과 헤어져도 상기되는 것은 부모의 유기에 대한 기억이다.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생의 수치며 오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은 자구책으로서 자기들이 대신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한다. 실제의 자기 아이나, 친구, 학생, 내담자, 애인, 배우자 등을 대상으로 삼아, 자신은 '그 모든 아이'를 결코 외롭게 하지 않고 늘 만족시켜줄 최고의 '이상적인 부모역할'을 다하려 한다. 이처럼 아이들을 무한대로 충족시켜주려는 야망으로 인해 이들은 늘 커다란 무력감에 시달리며 만성적으로 화가 가득한 상태에 이르게 되나 그 화는 언제나 억압되어야만 한다. 화는 '좋은 부모'의 패배를 뜻하며, 동시에 유기의 현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떠한 이들은 사실 부모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도 된다. 부모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잘못해서 외로워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들은 스스로를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처럼 경험하게 된다.
"그 냥반들 다 불쌍한 분들이죠... 누구를 탓하겠어요. 다 마음을 몰라서 그랬던 건데... 저도 제 마음을 몰랐으니, 실은 제 어리석음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이들은 이제 자기 마음이라고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상담이나 명상 등의 소재를 찾아 열성적으로 매진한다.
그것이 타인이든 자신이든 간에 외로움의 이유를 대상에게 귀속시키고 있는 이들은, 표현 그대로 외.로.움.을. 대.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외로움의 대상화'는 '외로움의 문제화'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문제를 일으킨 죄인을 정죄하는 활동이다. 타인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형태도 정죄고, 자신을 부드럽게 수용하는 형태도 실은 정죄다. '너' 때문에 외로워졌으니 '너'가 정신차리고 잘하자는 의도의 모든 표현이다.
이로써 "누구 때문에 외로워졌는가?"라는 물음의 '답'은 찾아졌다. 이제는 그 답인 '너'만 잘하면 된다. 바야흐로 '답정너'의 출현이다. 정답은 정해졌다. 그 정답에 '너'가 잘 따르기만 하면 외로움의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된다. 긴 터널의 끝이 슬슬 보이는 것 같다. 오랜 숙제가 풀린 기분이다. 아, 그런데 왜 이렇게 졸립지. 지루하다.
우리가 외로움을 대상화한 이유는 유기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책임소재가 분명해지면 더는 유기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즉, 외로움의 대상화는 더는 외롭지 않기 위한 필사의 책략이었다. 그러나 이 책략은 악책이었음이 분명한데, 이것은 결국 외.로.움.을. 지.루.함.으.로. 뒤.바.꾸.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을 떠올려보자. 이.들.은. 외.로.워.서. 사.이.비.에. 빠.진.다. 정확하게는, 유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제일 자신이 버려지지 않을 곳을 찾아 사이비에 투신한다. 애초에 사이비의 대표적인 선전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한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와 같은 표어로 형상화된다. 사이비의 신도들에게 이것은 '정답'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정답'을 지키기 위해 끝내는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라도 해서, 어떻게든 버.림.받.지.만. 않.으.려.고. 이들은 비장하다.
그리고 이 정.답.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장.한. 상.태.가. 가.장. 지.루.한. 상.태.다. 이것은 좀 오묘한 상태인데 최대한 묘사해보자면, 화와 두려움이 번갈아 교차되며 그에 따라 사건들은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찾아와 몸을 분주하게 만들지만, 정신은 늘 몽롱하게 연극을 하는 듯한 비현실감 속에서 묵직한 권태의 저기압을 형성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변.화.를. 직.감.하.지.만. 그. 변.화.의. 기.운.을. 어.떻.게.든. 못.본. 척. 억.압.함.으.로.써. 만.들.어.진. 우.울.의. 상.태.다.
아주 단순하다. '정답'은 변화하면 안된다. 그러나 세상은 변해가고, 우리도 달라지며, 변화는 피할 수 없이 찾아온다. 이 변화의 필연성으로 말미암아 정답이라고 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모든 방면에서 위협된다. 그리고 이것은 곧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유기의 공포처럼 인식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유기'와 '변화'는 동일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유기되지 않으려면 변화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지루함을 경험하는 일은 필연이다. 변화가 없는데 어떻게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가? 또한 무엇을 해도 근본적으로 지루함을 벗어날 수 없는데 어떻게 우울하지 않을 수 있는가?
외로움을 '유기의 잘못'과 연결지음으로써 '외로움의 문제화'를 야기한 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상의 '정답'을 신앙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은, 결국 '변화에 대한 쇄국정책'이며, 그로 인해 생겨나는 '지루함의 현실'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늘 우리는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이 너무나 복잡해졌다.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좋을지를 모를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제는 단순하게 한번 '외로움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보자.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내.가. 누.구.와.도. 다.른.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는. 경.험.이.다.
내가 내 부모와도 다르고, 내 애인과도 다르며, 내 자식과도 다르다는 명.징.한. 존.재.의.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외롭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왜 달라졌는가? 이 질문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원.래. 다.른.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한 '다름의 가치'다. 코뿔소는 왜 돌고래와 다르냐고 묻는 질문에 우리는 대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코뿔소는 코뿔소로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돌고래는 돌고래로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그 둘은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는 현인의 대답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외로움은 이처럼 우리 자신이 그 누구와도 다른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존재의 사실을 발견하는 그 시작점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제니스 이안의 'At Seventeen'은 외로움의 감각을 아주 잘 묘사해주는 노래다. 그녀는 열일곱 살에 진리를 배웠다면서, 아무도 좋아해주지 않는 미운오리새끼 같은 자신의 모습과, 잘생기고 조건이 우수한 이들만 좋아하는 세상의 모습을 노래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노래함으로써 그녀는 제니스 이안이 되었다. 한 인간의 고유한 불멸의 아름다움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았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외.로.움.의. 경.험.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바.로. 그. 방.식.이.라.는. 의.미.다.
누군가가 외로울 때, 그는 지금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은 결코 유기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을 유기할 수 없다. 왜인가? 이.미. 외.롭.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죽은 자를 두 번 죽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로써 유기의 문제는 완전히 사라진다. 버려질까봐 전전긍긍하며 남의 눈치나 보던 비루한 인생과는 안녕이다. 비루한 정죄와 비루한 정답과도 작별이다. 이것은 이제 잘해야 할 '너'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잘한 '나'의 신비다.
'나'는 무엇을 그렇게 이미 잘했는가?
잘. 태.어.났.다.
남과 다르게 어쩜 이리도 잘 태어났는지.
이렇게 내가 남과 다.를. 수.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신.비.다.
"외로움은 신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에도 동일한 권위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가 외로울 수 있다는 자체가 신비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전체의 구조에 봉사하는 역할과 기능으로서의 부품조각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대체불가능한 '나'의 품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현 그대로의 '존재의 신비'다.
'변화'의 의미도 한번 되새겨보자.
변.화.란. 달.라.지.는. 것.이.다.
외로움과 변화 모두 '다름'과 관계된 것이다. '다름'을 통해 그 둘은 연결된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외로움은 변화의 징후며, 변화는 외로움의 결과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에서부터 '나'로 변화되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 외로움을 경험한다. 그리고 외로움의 경험을 잘 따라간 그 결과 우리는 더욱 '나'로서 거듭난다. 로저스는 이 과정을 '되어감(becoming)'이라고 부른다. 그의 상담접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인.간.이. 어.떻.게. 개.인.이. 되.어.가.는.가.의 그 문제였다.
그러니 전술한 것처럼 외.로.우.면. 지.루.할. 수.가. 없.다. 끝없이 '나'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변화 속에 있는데 지루할 틈이 없다. 변화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만이, 즉 외롭지 않으려 하는 이들만이 처절한 권태 속에서 시름한다.
'다름'은 언제나 '남다름'이다. 그리고 '남다름'은 바로 '나다움'이다. 이 '나다움'을 느끼는 것이 외로움이며 '나다워지는' 과정이 곧 변화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이.것.은. 혁.명.이.다.
외.로.움.은. 혁.명.의. 불.꽃.이.다.
외로움은 '나'를 성대하게 태워올리는 가장 신성한 혁명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상담자는 이 혁명의 성공을 증거하는 산증인의 입장에 선다. 상담자는 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로움을 벗함으로써 외로움으로 '나'를 이룬 이득을 누리는 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상담자는 이 이득을 나누기를 원한다. 상.담.자.는. 내.담.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가. 아.니.라. 나.로. 사.는. 일.의. 실.증.적. 이.득.을. 나.누.는. 이.다.
외로움에 크게 사로잡혀 (아마도 정확하게는 권태의 무기력이 낳은 자기폐색에 사로잡혀) 고통받던 내담자를 상담한 로저스의 한 사례는 상담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그 상담회기 동안 내.담.자.와. 아.무.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로.저.스.는. 그. 자.리.에.서. 외.로.워.하.고. 있.었.다. 즉, 그는 내담자의 바로 앞에서 '외로움을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을 실시간으로 시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외로움과 벗하는 그 방식이 정말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담이 종료된 이후 내담자는 이렇게 보고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공감'을 받은 것 같아요."
로저스는 그를 엄마처럼 '담아주고' 있었는가?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에게 하듯이 "그런 당신도 온전합니다."라며 '죄사함'을 해주고 있었는가? 또는 "사람이란 것이 원래 다 그렇게 조금씩 외로운 게지. 그런데 나는 외로운 자네가 참 좋으이. 막걸리 한 잔 걸치겠나? 헛헛."이라며 훌륭한 인품의 너그러운 사이비도사 흉내를 내고 있었는가?
그 모든 '외로움의 대상화'를 위한 수작을 기각하고, 로저스는 그 어떤 대상도 아닌 그저 '나'로서 그 자리에 존재했다. 이와 관련하여, 로저스가 제안한 '참만남집단(encounter group)'을 수십 년간 진행해왔던 국내의 집단상담대가인 김명권 선생님은 '공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감은 내담자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실은 내담자의 존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만.이. 존.재.를. 따.라.가. 만.날. 수. 있.다. 공감은 '존재'와 '존재'의 조우현상이다. '나'로서 존재하는 이가 정말로 공감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나.로.서. 외.로.울. 줄. 아.는. 이.가. 정.말.로. 상.담.할. 수. 있.다.
'외로움의 시작점'은 곧 '상담의 시작점'이다. 우리가 외로움을 경험할 때는 로저스가 그러했듯이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이 기회는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우리 자신이 외로운 줄 아는 그 착각만 해지한다면, 기회는 이미 우리를 찾아와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우리가 외로움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던 사춘기의 시절을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정말로 잘못한 누군가가 있었는가? 그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는 외로워졌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단순하게, 우.리.가. 커.졌.기. 때.문.에. 우.리.는. 외.로.워.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커진 것이 잘못인가? 우리가 성체로 자랐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가? 그 말은 결국 이 우주가, 생명이, 자연이 그 자체로 죄라는 말인가? 이처럼 우리가 '외로움'을 '잘못'과 연합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 전체에게 문제가 있다며 싸움을 걸고 있는 것과 같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정죄함으로써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궁극적인 자기부정으로 돌아온다.
존.재.의. 자.연.스.러.운. 현.상.인. 외.로.움.을, 모든 존재와 자기 자신을 문제시하는 '저주'로 뒤바꾸어 스스로 고통받는 이 경우가 오늘날 인간이 처한 보편적 상황이다. 외로워서 견딜 수 없다는 이들은 실은 '저주'의 억압을 견딜 수 없다며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정답'이라는 것이 바로 이 '저주'의 다른 이름이다. 외.로.움.이.라.는. 문.제.에. 대.한. 정.답.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저.주.다. 이 저주는 해주될 수 있는가? 정답을 기각하면 된다. 정답을 기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를 기각하는 것이다. 외로움에 대해 잘못을 찾으면서 외로움을 문제화하지 않으면, 외.로.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로움의 문제'는 잘못이 아니며, 그렇기에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잘못으로 인해 유기되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발달을 이룬 '건강한 존재'이기에 외로운 것이다. 이처럼 문제인 줄만 알았던 외로움이 탈문제화되는 현실, 이것은 다시 말해도 혁명이다. 이른바 '외로움의 혁명'이다.
이렇게 '외로움의 문제'가 해체될 때 '인간의 문제'도 해체된다. 버려진 줄 알았던 그 어떤 인간도 버려지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막 '나'로부터 하나의 고유한 신비로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제'를 '인간이라는 신비'로 전환하는 이 '외로움의 혁명'을 우리는 상담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모든 상담은 분명 외로움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