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53

"상담자를 위한 상담철학의 중요성"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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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한 것은 철학을 끝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언어를 끝내기 위해서였을까?


그 둘 다 아니며, 비트겐슈타인은 다만 '삶의 철학'을 시작하고 싶었다. 결국 그가 끝내고 싶어했던 것은 언어와 철학에 대한 착각이었던 셈이다. 그 착각의 내용은 쉽게 말하자면 이러하다.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다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식의 언어용법을 '철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이것은 철학이 아니다.


언.어.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철.학.은. 한.계.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 속에서 작업하는 것을 우리는 정당하게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의도로 잘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전지하게 다 설명한 이가 아니라, 우리가 정확하게 한계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현인이었다.


철.학.은. 한.계. 속.에.서. 작.업.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 하자면, 철.학.이.란. 자.신.의. 한.계.를. 아.는. 일.이. 된.다. "네 자신을 알라."라고 하는 델포이 신전의 비문의 의미다.


철학이 언어를 엄밀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이유는 언어의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경.계.가. 명.확.해.야. 우.리.는. 경.계. 너.머.로. 초.월.할. 수. 있.다. 언어를 초월한 그 자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이것이 분명했다. 그 자리는 바로 '삶'의 자리다.


비트겐슈타인이 직접적인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실존주의와 궤를 함께한다. 그렇기에 선(禪)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활용법을 비교하는 일도 의미깊다. 선의 기획은 '언어로 언어를 깨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 자체가 진리와 동일시되는 '언어의 우상화'를 해체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개방되는 것은 존재의 지평이다.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는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이것이 '비유의 언어'다. 선의 언어활용방식이다.


말이 되면 그것은 된다는 생각이 있다. 선에서는 역으로, 말이 되지 않아도 그것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언어에 대한 강박이 해지된다. 인간은 진리처럼 행세하는 말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동시에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말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이다.


'초월성'이라고 하는 것을 이 '가벼움'의 속성과 연결지어 이해하는 일은 언제나 유익하다. 무거운 것은 '유한성'이다. 유한하다는 것은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끝이 두려우니까, 자꾸만 말이 많아진다. 말을 쌓아 자신을 방비하면 끝이 오지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적체시킨 말의 무게로 인해 오히려 우리는 자멸해서 '끝'을 맞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월'이라는 개념의 반대편에 놓이게 되는 것이 바로 '통합'이라는 개념이다. 통합은 언어적으로 유려하게 적체시키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사라지지 않는 테트리스'와 같은 것이다. 바벨탑의 비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언어적으로 끼워맞추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러한 통합의 소재들은 실은 철학적 태도 속에서는 결코 연결될 수 없는 것들이다.


철학자들이 바보라서 그 반대편을 보지 못한 채 누구는 경험론을 주장하고, 다른 누구는 합리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장 정직하게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가장 어리석은 이들은 자.신.이. 다. 보.는. 척.하.면.서. 모든 것을 언어로 통합하려는 이들이다. 왜 그러한가?


정.말.로. 다. 보.고. 있.다.면. 그.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 보고 있는 이'에게는 그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거짓말이 된다. 언어는 언제나 상대적인 반쪽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차라리 침묵한다. 만약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이 명백한 한계를 가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자각 속에서 말을 한다. 이것은 언어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태도다. 우리가 언어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일은 불가피하지만, 불가피하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인 것은 아니다. 철.학.은. 이. 진.리.에. 열.린. 태.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철.학.이. 없.는. 이.들.이. 통.합.을. 주.장.한.다. 자신의 '말'이 어떠한 상대적 근거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모르기에, 즉 자신의 언어는 상대적이지 않고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에 통합은 주장되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진리성'에 대한 맹신이 '통합의 종교'를 구성한다.


이러한 연유로 누구보다도 상담자들에게는 철학이 중요하다. 상담자들의 철학이니 '상담철학'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상담철학은 언어를 통해 작업하는 상담자들이기에 더욱 섬세하게 갖추어야 할 미덕이다. 상담자에게는 반드시 그 자신의 작업이 핵심이 되는 상담철학이 있어야 한다.


실존상담에서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한 내담자가 "저는 그 사람과 헤어져서 많이 우울했어요."라고 말한다. 실존상담자는 이에 대해 "어떤 분과 헤어져서 많이 우울하셨군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울하다는 내담자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인가를 조금 알겠다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이렇게 묻는다.


"우울이라는 것이 당신에게는 어떤 것이죠?"


이것은 상담자가 생각하는 '우울'이라는 언어의 '상대적 의미'를 넘어서고자 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내담자의 세계에서 '우울'이라는 언어가 활용되는 그 방식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탐색하고자 하는 일이다.


내담자의 언어에 자동적으로 동의하는 상담자는 이해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기에 그러한 일을 한다. 이미 내담자의 언어세계보다 큰 범주로 자기의 언어세계를 가정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언어가 있으며, 자기 자신은 그러한 언어의 숙련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하게, 그.에.게.는. 지.금. 철.학.이. 부.재.한. 것.이.다.


개인마다 각자의 세계가 있다는 말은, 우리가 서로 다른 언어를 갖고 있다는 말과 같다. 상담은 이 언어적 경계의 확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상담자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내담자가 발화할수록 좋다. 경계는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가장 상담이 어려운 경우는, 상담자가 내담자의 말에 즉각적으로 동의할 경우뿐만 아니라, 내담자가 상담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동의할 경우다. 이는 상담자가 내담자도 알 수 있게끔 무엇인가를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상담자의 언어가 가진 권위에 바로 동의하는 이것이 내담자의 진짜 문제인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의 '장인신화'를 말할 때 언급되는 내용은, 장인이면 어떤 고객이 오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척척 알아서 응대해준다는 식의 판타지다. 장인에게 이러한 '앎의 권위'가 부여되듯이 우리는 상담자에게도 동일한 권위를 곧잘 부여하곤 한다. 이것은 상담자에게도 '상담자의 자기신화'가 된다. 흡사 '앎의 초능력자'와 같은 면모를 갖추려고 상담자들은 매우 자주 노력한다.


그러나 상담철학을 가진 상담자들은 자기의 유한성을 무엇보다 먼저 살필 수 있게 된다. 대표적으로 '수용'이라고 하는 개념을 논해보자. 상담에서의 수용은 '내담자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주는 일'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이해며, 그렇기에 비현실적인 이해다. 틸리히는 수용에 대해 보다 엄밀한 정의를 택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용은 자신이 그것을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적 정신분석가인 어빈 얄롬은 자신이 수련생일 때 경험한 하나의 사례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에게 레즈비언 내담자가 의뢰되었을 때의 일이다. 얄롬은 자신이 레즈비언에 대한 보수적 편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상담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를 깊게 고민했다. 그 결과 그가 선택한 일은, 자신의 편견을 내담자에게 정직하게 고백하는 일이었다.


"저는 사실 동성애자들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제 자신의 편견에 대한 것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당신께서 저에게 동성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입장에서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


얄롬에게나 그의 내담자에게나 큰 감동으로 기억된 이 사례는, 얄롬이 수련을 받았던 정신과 슈퍼바이저들에게도 참.다.운. 수.용.의. 사.례.로서 큰 찬사를 받았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또 하나 있다. 한 유태인 실존심리학자가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이슬람교도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될 때였다. 그는 이슬람교도들을 존중하기 위해 최대한 예의바르며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선량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좀처럼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며칠간 지체되었다. 그리고 회의의 마지막날 도저히 이 상황을 참을 수 없던 심리학자는 이슬람교도를 향해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저는 솔직히 당신들이 견딜 수 없이 싫습니다. 당신들을 품어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봤지만, 실은 이처럼 당신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합니다."


그러자 상대편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이 환한 미소를 띄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야 당신이 우리를 사람으로 봐준 것 같아요."


그리고 회의는 경쾌한 분위기 속에서 급진전되어 서로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상담자가 자신의 '편견'을 통해 작업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편.견.이.란. 곧. 그.의. 언.어.적. 한.계.다. 편견이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척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편견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편견 너머에서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철학적 태도'는 자신의 편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태도다. 즉, 경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 경.계.를. 통.해.서.만. 열.릴. 수. 있.다. 경계를 무시하면 그것은 열린 것이 아니라 '침범된' 것이다.


자신이 전방위로 열려 있다고 '착각하며' 모든 인간을 품어줄 것처럼 '도사연'하는 상담자에게는 상담철학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을 위해 좋다. 자신이 무거운 '신의 과업'을 짊어져야 하는 일로부터 이제는 해방될 수 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내담자 앞에 설 수 있다. 그리고 그 인간은 내담자가 상담소까지 찾아와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했던 바로 그 인간이다.


인.간.이. 신.이. 아.니.라.서. 하.는. 일.이. 철.학.이.다.


철학은 인간의 자기증명이라고 말한다면 거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철학한다는 것'을 어려운 철학서 원전을 독해하는 일로만 국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또 다른 편견이다, 개인이 자기의 삶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고 알고 싶어하는 일이 바로 철학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데 있어 모종의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기술'의 반대편에 있다. 철학은 인간의 삶이 도구적 기술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상.담.철.학.은. 상.담.자.가. 상.담.기.술.자.로. 소.외.되.는. 일.을. 방.지.해.주.는. 것.이.다.


상담기술자는 상담언어의 진리성에 봉사한다. 그는 또 하나의 진리의 노예다. 이를테면 "엄마가 아이에게 잘 공감해줘야 아이가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자란다."와 같은 말이 있다. 이 말을 '절대적인 진리'로 삼아 그 진리에 상담활동을 전적으로 수렴시키고 있다면, 그는 상담기술자다. 또는 그 반대편에서 "엄마가 자기 자신의 마음에 공감해야 아이가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자란다."라고 발화되는 말에 전적으로 봉사하고 있다면, 그 또한 상담기술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철.학.을. 싫.어.하.는. 이.유.는. 철.학.이. 어.떻.게. 하.라.고. 콕. 집.어.서.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도저도 못하는 곤란한 딜레마의 상황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으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딜레마의 문제라는 것을 그대로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계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경계를 분명하게 확인한 이에게, 이제 철학은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철.학.은. 정.말.로. 상.냥.하.다.


어떠한 상담자가 정말로 상냥한 질감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그의 인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상담철학은 인간을 보는 태도다. 인간은 상대적인 언어로 만들어진 유한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늘 딜레마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바로 그 딜레마 속에서도 인간은 그 자신의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상담철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을 본다.


유한하지만, 우리에게는 가능한 것이 있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있다. 한계는 있지만 무력할 수는 없는 그것이 인간이다. 이것은 흡사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말한 "인간은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다."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자기가 있어야 내담자가 구원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는 충분히 좋은 상담자다. 그에게는 상담철학이 있다. 리차드 바크의 『환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것으로 이 우주를 상상해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신은 당신의 상상보다 더 멋진 것으로 이 우주를 상상했음을."


상담철학은 인간을 '더 멋진 것'으로 보는 방식이다. 이것이 언제나 그 전모를 '말할 수 없는' 인간 앞에서 당신이 '침묵하는' 이유다. 당신은 침묵 속에서 지금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더. 멋.진. 존.재.로.서.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상담자의 '철학적 태도'를 체화할 수 있도록, 때로는 무례하고, 때로는 공격적이며, 때로는 냉정한 방식으로 집필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통상적인 편견에 대해 또 하나의 편견을 충돌시키는 형태로 전복과 혼란을 의도하기도 한다. 생각보다는 웃기지 않다는 점은 명백한 비극의 요소다.


분명한 것은 정.말.로. 당.신.을. 위.해. 쓰.고. 있.다.는. 점.이.다. 상담자를 꿈꾸는 당신이 당신의 상상보다 더 멋진 존재라는 사실을 함께 만나고 싶어서, 우리는 그 언어 너머의 자리에 같이 도전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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