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구루병과 젊은 꼰대"
많은 심리적 질환 중에서 불치병이라고 불리는 것이 심리적 구루병입니다.
물론 이 심리적 구루병은 생리적 구루병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비타민 D의 결핍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가 결핍되어 생깁니다.
자기의 존재가 결핍된 이들이 그 상태 그대로 굳어진 채 커버려 결국 항구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상실한 상태가 된 것이 심리적 구루병을 앓는 이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미롭게도 생리적 구루병의 핵심적인 증상들을 심리적 개념으로 치환해보면 아주 많은 부분이 심리적 구루병에 대한 묘사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뼈가 휘어진다.
2) 쉽게 뼈가 부러진다.
3) 발달장애가 있다.
4) 두개골이 기형적 형상이 된다.
5) 새가슴이 된다.
6) 근육이 수축된다.
심리적 구루병에 대한 묘사로 바꾸어보겠습니다.
1) 중심이 없어 관계에 휘둘린다.
2) 자존감이 낮아서 자존심을 대신 세우기에 그만큼 금방 무너진다.
3) 심리적 발달장애가 있다.
4) 머리가 이상해진다. 그래서 하는 생각도 이상하다.
5) 늘 쫄아 산다. 특히 돈에 쫄아서 돈을 정복하려고 한다.
6) 남들에게 위대한 인생스승으로 잘 보이려 하기에 긴장이 많다.
남들이 모르는 인생의 비밀을 얼리어댑터처럼 먼저 알아, 그 비밀을 최신의 방식으로 힙스터처럼 널리 알린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꿈꾸는 모습이 바로 구루(guru)입니다. 신비로운 고급정보로 남들을 가르치는 인생스승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루병은 이것이 병이라는 사실에 대한 진술입니다.
구루병은 일그러진 열등감이 만든 병입니다. 열등감은 자기 존재가 결핍되게 만듭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대단히 잘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걔네 엄마가 그렇게 말했답니다. 이 개인적 신화를 바탕으로 자기를 구성한 이는 자기가 기대하는 만큼 자신을 정당하게 대우해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열등감이 커집니다.
그래서 점점 이상한 지름길 같은 것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융의 페르조나 개념 같은 것을 본 뒤 "아하, 이게 어디서나 유연하게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관계의 비밀이구나. 이 놀라운 비밀만 알면 되는데, 비싼 돈 내고 심리학대학원 다니는 애들 진짜 병신같네. ㅋㅋㅋ"라고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어디 오컬트 카페에서 고대 중국의 신비한 전인사상 같은 것을 보고 경동시장에 가 이상한 한약재들을 조합한 뒤 "하, 내 몸을 진정으로 건강하게 해줄 놀라운 진리가 누구에게나 쉽게 가능한 일인데, 의사새끼들 사람 속일 줄이나 알지 존나 허섭한 기술로 잘난 척하는 것들. ㅋㅋㅋ"라고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떤 앵글로색슨계 백인남성이나, 턱수염을 기르고 힙해보이는 일본작가가 쓴 자기계발서들 몇 권을 읽은 뒤 "부와 권위를 진정한 주인공인 나에게 끌어오는 인생법칙이 여기에 있었구만. 서울대 뭐하러 가고, 삼성 뭐하러 다니며, 공무원은 뭐하러 되냐? 시대가 진정 똑똑한 자유인들에게 유리하게 변했다는 것도 모르고 낡은 제도권에 의존하는 무지한 등신들. ㅋㅋㅋ"라고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들러는 이걸 '병적 우월감'이라고 부릅니다. 커다란 열등감에 대한 과잉된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것이 병적 우월감입니다.
구루병은 이 병적 우월감을 앓는 심리적 질환입니다.
심리적 구루병환자들의 더 일상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꼰대'입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젊은 층에서 구루병을 호소하는 빈도가 높습니다. 잠깨어서 오는 젊은 꼰대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표현 자체도 아주 흥미로운데, 실제로 심리적 구루병을 앓는 젊은 꼰대들의 많은 수는 자기가 깨어났다든가, 각성했다든가, 진리에 눈을 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아주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꼰대로 새출발을 이루게 되는 구루병의 시작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한 개인이 방구석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돈도 없고, 사회적 자원을 획득할 능력은 안 되는 것 같고, 총체적으로 미래가 막힌 것만 같습니다. 답답하고 속만 타들어 갑니다. 그렇게 일종의 극한 상황을 경험합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의 극한 상황은 아닙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위대한 자기의 모습에 적합한 현실을 얻지 못했기에 그것이 극한 상황처럼 착각될 뿐입니다. 나아가서는 그러한 위대한 자기의 모습이 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격렬하게 혼날 것 같기에 그것이 또한 극한 상황처럼 경험될 뿐입나다.
자기 앞길 찾아서 똑바로 살지 못한다고 숨통을 조이듯 극심하게 비난할 것 같은 그 대상은 거의 대부분 자기의 부모입니다. 자기의 부모에게 혼나면 자기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 같아 너무 두렵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위대한 모습이 되어야 부모에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들이 경험하는 극한 상황의 정체입니다.
요는 이러한 가상의 극한 상황 속에서, 그 긴장이 너무나 커져가서 정점에 이르게 되는 어느 한순간, 이들은 갑자기 시야가 확 열리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 경험 속에서는 마치 새의 시선으로 보듯이 자기가 객관적 사물처럼 투시됩니다. 물리적 좌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좌표 또한 종합적으로 객관화됩니다.
그러면서 그걸 새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그 시선이 자기 자신이라고 경험됩니다. 밖에서 보니 알 것 같습니다. 정말 소소한 일을 극한 상황이라고 여기며 두려워하고 있던 자기의 모습이 아주 작게 보입니다. 가엾으면서도 또 귀엽게 보입니다. 그렇게 쫄아 있었다는 게 남의 일 같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온전하고, 쫄아있던 저 작은 자신조차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괜찮게 경험됩니다. 웃음이 나옵니다. 아 이거였구나, 뭔가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 같은 감흥도 스며듭니다. 이제는 무엇을 해도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감하게 스스로를 당당히 드러내며 멋진 이야기를 써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메타인지라고 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위빠사나 같은 명상수행을 한 1개월 정도 하면, 또 늦어도 3개월 안에는 아주 쉽고 빠르게 경험하게 되는 그 상태입니다.
또는 삶에서 어떠한 마음을 경험하든 "그것도 괜찮다."라는 주문을 암송하고만 있으면, 마찬가지로 아주 쉽고 빠르게 경험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해봤자 아무 의미없는 상태입니다.
특히나 깨달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상태입니다.
더 재미있게는, 학창시절 수험공부를 열심히 하던 수험생들은 이미 오래 전에 한 번 이상씩은 경험해봤던 상태이기도 합니다.
공부는 안 하고 무협지나 읽으며 살던 이들에게만, 이처럼 나중에 마치 극적인 어떤 것처럼 경험될 뿐인 그 상태에 불과합니다.
핵심은 집중입니다. 긴장으로 의식이 집중되어 있을 때, 근육작용처럼 그 끝에서 긴장이 자연스럽게 이완으로 바뀌면서 경험되는 상태입니다.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된 것도 아니고, 신비한 종교체험 같은 것도 아니며, 자신이 어떤 경지에 올라서게 된 레벨업의 증거와 같은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자위를 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현자타임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자위를 많이 해서 현자타임을 더 많이 느낀다고 자기가 더 놀라운 존재로 레벨업을 하는 게 아니듯이, 이 또한 같습니다.
그러나 구루병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메타인지적 경험을 통해 자기가 뭔가 대단한 존재로 각성했다고 믿게 됨으로써 구루병의 증상들이 발현됩니다.
자기가 갖고 있던 열등감과 그로 인한 병적 우월감이, 메타인지적 경험과 결합됨으로써, 구루병의 조건들이 충족되어 젊은 꼰대가 활짝 개화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유튜브나 SNS 등지에서 젊은 꼰대들은 자기의 '놀라운 경험'을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해병대 컨테이너 할아버님들과의 변별점은 오직 자기를 홍보하는 미디어 활용의 여부일 뿐입니다.
오늘날 구루병을 앓는 젊은 꼰대들이 많아진 것처럼 보이는 표면적인 이유는, 이처럼 개인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가시권 안에서의 노출이 더욱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젊은 꼰대들이 실제로 증가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마마보이, 마마걸들이 너무나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부모에게 기대하고 의존하는 그 크기만큼, 자기를 평가할 부모의 시선은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에 대해 좌절한 게 아닙니다. 자기가 부모에게 기대하는 만큼, 자기가 부모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것 같은 그 관계의 상황에 좌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늘 비난되고 혼날 것 같아 긴장이 쌓이고, 긴장 끝에 메타인지의 환상으로 도피합니다.
메타인지의 환상은 부모와 자신의 입장을 역전시켜주는 것만 같습니다. 새의 시야로 보니 부모도 작은 존재입니다. 바닥을 기어다니며 참 사소한 것에 목숨걸고 사는 불쌍한 양반들입니다.
자기는 그처럼 가엾은 부모에게 잘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모처럼은 살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합니다. 이제 부모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DNA의 속박과, 낡은 사회의 관습과, 생물학적 본능에서 벗어나 자신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세상 위의 초월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세상에 갇혀 답답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갈매기 조나단처럼 세상의 비밀을 그들에게 알려줘서, 그들도 언젠가는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진심으로 조력하고 싶습니다.
세상 위에 선 초월자가 상냥한 마음으로 세상에 다시 참여하기 위해 돌아가는 이 모습이, 깨닫고 저잣거리로 돌아간다는 바로 그 일인가 싶습니다. 힘이 납니다. 뿌듯해집니다. 세상이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세상사람들아. 당신들이 성공할 수 있게, 그리고 초월할 수 있게, 이제 당신들의 이야기를 품으러 내가 갑니다.
이들이 모르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이들의 부모가 이들과 비슷한 나이일 때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일을 했다는 것을.
이들은 부모나 사회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자기들의 부모 및 사회와 동일한 모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젊은 꼰대입니다.
이들이 이제 자기는 진리를 얻게 된 사람이라고 경험할 때, 이들이 얻은 진리란 결국 이들의 부모가 과거에 얻었던 그 진리입니다. 그런 즉, 이들은 부모의 진리를 인생공식과 같은 최고의 진리로 삼아 세상에 전도하려 하고 있는 셈입니다. 표현 그대로, 꼰대의 정신을 이어받은 젊은 꼰대입니다.
구루병은 일종의 정신적 유전병입니다.
부모에게 자기의 존재를 위탁하고 있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질환입니다.
이들에게 그 자신의 존재가 결핍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원래 자기의 존재를 남에게 위탁하고 있으면, 존재는 상실된 것처럼 경험됩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존재라는 것은 결여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든 해냅니다. 그만큼 이들이 자기의 부모를 신격화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신격화된 부모는 언제나 반전되어 악마화되곤 합니다. 부모가 자기의 인정욕을 채워주지 않거나, 경제적 지원을 충분히 해주지 않을 때, 그 기대가 깨진 만큼 부모는 악마처럼 입지화됩니다.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자기를 비난하기만 하는 부당한 존재인 것처럼 인식됩니다.
그리고 메타인지적 경험을 통해, 이제 구루병환자들은 자기가 자기의 부모처럼 신격화되는 그 수순을 밟습니다. 이제 같은 신이 되었으니 부모는 더는 위협이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이제 진정한 자기의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이 국면조차도 자신의 부모가 이미 다 했던 생각들이고, 이미 다 걸어봤던 과정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들이 경험한 그 부모의 모습입니다. 이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젊은 꼰대는 늙은 꼰대가 될 뿐입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지는 자명합니다.
구루병이 존재망각의 질환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기를 바라봐주는 만큼 자기의 존재가 확보된다고 믿던 이들이, 이제 부모와 갈등을 경험해 더는 부모로부터 자기 존재의 보증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해 두려움과 긴장이 심화되었을 때, 불현듯 메타인지적 경험이 출현함으로써 이제는 자기를 바라봐주는 새의 시선 같은 것을 통해 셀프 존재감을 확보하는 현실로 이행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새의 시선처럼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 주체를 자기 자신이라고 믿게 되며, 이제는 자기가 모든 것을 바라봄으로써 모든 것이 온전하게 존재하도록 만들어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엄마가 바라봐줘야 자기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던 아이가, 엄마를 잃은 뒤 이제는 자기가 엄마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이 엄마 흉내를 내는 아이는 다른 이들을 존재하게 해줌으로써, 그렇게 다른 이들을 의존해 자기도 더욱 존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또한 실제의 자기 엄마가 자기에게 했던 바입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이는 없습니다. 서로 바라봐줘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존재하게 해주는 바로 그 일에 의존해서만 자기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계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의 논리가 바로 존재망각의 현실을 만듭니다.
존재는 언제나 스스로 존재합니다. 메타인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관계의 논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근본사실을 억지로 뒤집고자 하는 이가 바로 구루병환자들입니다. 부모없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너무나 두려운 현실입니다. 자기가 부모가 되어서라도 두려운 현실은 사라져야 합니다.
존재의 근본사실이 왜 이들에게는 두려울까요?
너무 단순합니다.
부모가 사라지면, 자기가 자기의 삶을 다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끝.
메타인지의 개념을 살짝 변주하면, 외적으로는 페르조나의 개념이 성립되고, 내적으로는 소인격체의 개념이 성립됩니다.
진정한 자기는 메타인지의 주체입니다. 나머지는 다 게임의 부캐 같은 것들입니다. 그 특성을 보듬어 잘 알아주며, 매순간의 상황에 따라 잘 활용하면 되는 부자재들입니다. 이게 메타인지적 경험을 통해 구루병환자들에게 형성되는 구조입니다. 진정한 자기는 초월적이라서 손상받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가볍게 다양한 마음을 가면처럼 유용한 정체성으로 운용해가면 된다는 식의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책임을 회피하기에 가장 탁월한 구조입니다.
하나의 부캐로 행위한 상황이 잘못되었을 때, 이 메타인지의 주체는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제 자신이 아닙니다. 많이 부족했던 제 안의 내면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참 많이 아프고 속상했습니다. 너무 그렇게 화를 내지 마시고, 이 아이도 얼마나 온전했는지 한번 같이 살펴봐주시면 안될까요?"
마치 잘못한 아이를 보호하는 엄마와 같은 입장으로 빠져, 자기의 책임은 회피됩니다.
반대로 하나의 부캐로 행위한 상황에서 성공적인 일들이 일어났을 때, 이 메타인지의 주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싸, 보라구요. 내가 이렇게 잘났다구요! 대단하죠? 이게 나예요. 여러분도 나를 따라하시면 다 성공하실 수 있어요."
잘된 것은 그대로 자기의 영광으로 삼으며, 잘못된 것은 불쌍한 아이를 내세웁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 아닙니까?
바로 이들의 부모가 하던 일입니다.
자식이 잘한 것은 잘난 부모의 영광이며, 자식이 잘못한 것은 모자란 자식의 실수입니다.
리스크 없이 인생에서 좋은 것만 골라먹을 수 있는 마법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기 부모의 모습과 똑같이 되어 이 구루병환자들은 목소리를 높여 주장합니다.
"자기 인생에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이득만 얻을 수 있는 놀라운 마음의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부모처럼만, 그리고 지금의 자기처럼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구루병환자들을 중세에는 연금술사라고 불렀습니다. 쓸모없는 돌멩이를 황금과 교환하겠다고 말하던 이들입니다. 자식이 어쩌다가 황금을 산에서 주워오면 그걸 자기 것으로 삼는 일로 이 부당거래는 성립됩니다. 아무 가치없는 돌멩이를 주워오면 "이 쓸모없는 못난 자식 같으니."라고 말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 리스크 없이 황금만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사가 될 수 있습니다.
구루병을 앓는 이들이 연금술의 위대함을 주장한 융을 미친듯이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구루병환자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무슨 꽉 막힌 벽이랑 대화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들이 자기의 부모와 대화할 때 경험했을 그 감정입니다. 자기가 지금 자기 부모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좋습니다. 자기가 부모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부모에게 종속된 상태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지지 않기 위해 이 상태를 자발적으로 만듭니다.
어떤 상황이 평탄치 않을 때, 바로 그 상태가 욕을 먹게 만들고, 즉 부모가 욕을 먹게 만들고, 자기는 뒤로 살짝 빠지는 이득을 누립니다. 물론 상황이 좋을 때는 자기 영광으로 삼을 겁니다. 자기 부모가 자기에게 했던 짓을 이제는 자기가 똑같이 하며, 이 책임회피의 기제는 세습됩니다. 그래서 심리적 유전병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회복하기 전까지 이 구루병의 역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자기의 존재를 회복한다는 것은, 메타인지적 관점에서 자기의 감정이나 생각을, 또 타인의 마음을 다 알아주는 부모놀이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인생에 대해 자기가 지불할 때, 우리의 존재는 회복됩니다.
부캐나, 자기 안의 어떤 내면아이, 또는 7361번째 정체성이 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이 한 일입니다.
한 건 자신이 했으면서, 그 심리적 지불의 몫은 다른 것에게 돌리는 일을 할 때, 우리의 존재는 계속 망각됩니다.
구루병을 낳는 열등감은 부당거래의 망상이 만듭니다. 자기가 부모와 부당거래의 관계 속에 있다보니, 그걸 세상의 구조라고 착각하고, 나아가서는 부당거래가 세상에서 성공할 비밀의 열쇠라고까지도 망상하게 된 것입니다.
남들 공부할 때 혼자 무협지를 보며 낄낄대고 있으면 원래 서울대를 못갑니다.
자기 같은 천재를 서울대에 허락하지 않는 부당한 사회구조에 그 몫을 돌리려 하는 것이 오히려 부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복수심에 불타, 코흘리개들에게 마약을 판 돈으로 잘난 척하며 어리석게 서울대 다니는 병신들을 비웃으려 하는 일은 자기 존재만 상실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 모든 바보같은 일들은 한 번에 정리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는 무협지가 좋은데, 부모는 서울대에 가기를 원하는 딜레마를 통합하고자 시작된 일일 수 있습니다. 그 위대한 하늘과도 같은 부모의 시선에 의존해 자기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다보니, 열등감이 생기고, 병적 우월감이 생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딜레마는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통합은 가장 조잡한 책임회피의 기제입니다.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는 것처럼 상정되는 메타인지로 도망가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쪼잔한 일입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독재입니다. 자기 부모의 모습입니다. 부모도 자기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 네 취향을 우리는 전적으로 존중한단다. 무협지도 많이 보고, 또 서울대도 가면 그게 제일 좋지 않겠니. 너는 다 할 수 있어. 자랑스러운 우리의 자식이잖니. 가장 너다운 개성도 쌓으면서, 또 그걸 지속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도 갖춤으로써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지도록 하렴."
말은 논리적으로 다 맞는 것 같지만, 통합은 절대로 작동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말과 삶의 분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구루병은 자기의 존재를 잃은 이들이, 이 통합의 기제로 가장 풍요롭고 멋진 자기를 만들고자 하는 망상병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존재는 무언가를 더 통합해간다고 회복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결단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덕지덕지 붙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칼에 잘라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관계를.
구루병은 관계병입니다.
관계에 의존해 자기의 존재를 발견하고자 할 때, 우리는 병이 듭니다.
메타인지는 관계논리의 궁극입니다. 그건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입니다. 조(鳥)같은 자기와, 조(鳥)도 안되는 자기가 맺는 가상현실의 관계입니다. 유사 부모-자식의 환상입니다. 진짜 조같은 일입니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를 멀찍이 지켜보는 엄마의 입장이 메타인지입니다. 자기의 심리적 성분 속에까지 엄마를 끌고 들어오는 그 행위는, 자기 인생에 엄마가 없으면 안된다는 아이의 행위입니다.
열등감의 가장 본질적인 차원은, 우리가 미숙한 아이처럼 우리 자신을 경험할 때 열등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우리의 심리적 지불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성숙한 척하려다가 안되니, 메타인지적 부모의 자리로 튀어 또 아닌 척하지 말고, 우리는 지불해야 합니다.
미숙해도 괜찮고 부족해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 이게 내 인생입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내 인생에 우리는 지불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의 탓도 아닌, 자기의 책임입니다.
그러면 언제라도 반드시 돌이킬 수 있습니다.
구루병의 회복기로 들어섭니다.
빵이라는 것이 너무 좋아서 훔쳤다며, 사회봉사도 열심히 하는 자상한 노현자인 척하는 일을 그만 두고, 장발장은 빵집에 빵 만드는 법을 배우러 출근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깜빠뉴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또 자기가 바로 그러한 것을 훔쳤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말로 이해하며, 어쩌면 우리는 명장 장발장 베이커리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변화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마마보이, 마마걸이 놀라운 구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루병이라는 망상의 꿈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젊은 꼰대여, 마법진 구루구루는 그만 그리고, 어서 정말로 잠깨어 오세요.
불치병에서도 생환하는 당신 존재의 평범한 당연함을 보여주세요.
당신이 이제는 병에서 회복되고자 할 때,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