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기다리던 지적이고 과격한 심리학 #14

"전두엽의 신화를 사는 포켓몬 아이들과 문해력의 문제"

by 깨닫는마음씨




전두엽께서 전두환처럼 모든 문제를 탱크로 밀듯 해결해주실 거라는 신화가 오늘날 우리를 지배합니다.


게임을 하면 전두엽의 발달이 저해되어서 인간이 무식하고 폭력적인 동물의 수준으로 추락한다고도 말합니다. 오늘날 게임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부족한 것을 그 방증의 사례로 제시하곤 합니다.


그런데 문해력이 '읽어서 뜻을 파악할 줄 아는 언어능력'을 의미하는 협의적 개념으로 정의된다면, 게임이 언어능력의 발달을 저해한다는 것은 유효한 주장은 아닙니다. 요즘 게임들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게임만큼 고도의 언어적 문법으로 구성된 문화적 소재는 없습니다. 메뉴얼이 없으면 게임의 문법구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정도입니다. 게임을 잘 하려면 분명 그 게임이 요구하는 문법을 정교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새로운 게임에 적응하는 것과 외국어를 익히는 과정은 거의 동일합니다. 게임은 분명하게 하나의 언어습득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언어능력의 발달을 자연스럽게 내포합니다.


때문에 전두환, 아니 전두엽의 신화를 지지하는 것은 오히려 게임입니다.


분석하고 통합하는 전두엽의 언어기능이 촉진되기에 게임은 좋은 생태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게임세대는 문해력이라고 하기보다는 특정한 어휘력이 부족한 것이며, 그게 부족해진 이유는 지극히 실용적인 분석과 통합 작용에 의해서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실용적으로 필요하지 않다는 합리적 판단이 이루졌기 때문에 굳이 증진시켜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게임 내에서 활용되는 언어에 대해서는 게임에 익숙한 세대는 충분한 어휘력을 갖고 있습니다. 창발적인 표현들이 나오기까지 합니다. 현대에 생겨난 신조어들의 아주 많은 수는 게임에서 비롯한 어휘들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게임으로 인한 전두엽의 발달저하 및 문해력의 부족이 정말로 아닙니다. 오히려 게임세대는 과거의 어떤 세대보다도 전두엽이 더욱 발달되어 있고, 이에 따라 언어기능 또한 아주 잘 발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성사회의 꼰대들이 좋아하는 고답적인 어휘를 이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문해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사회적으로 상식적인 어휘도 이해 못하는 게 정상이냐고 묻는다면, 게임세대들에게는 게임의 문법이 상식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집니다. 게임용어도 모르는 게 정상이냐고 그들은 분명 반론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모든 문화적 소재들의 경쟁자는 게임입니다. 자기들끼리 치고 받아야 할 때가 아니라, 게임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전전긍긍해야 하는 시절입니다. 게임의 문법이 역으로 사회를 지배하게 된지도 오래입니다. 게임을 하는 감각으로 주식을 하고, 코인을 사며, 재테크를 합니다.


최신의 게임문법도 모르면서 낡은 사회문법으로 잘난 척하는 일은, 게임세대에게는 너무나 우스운 일일 뿐입니다. 그러니 애초 진지하게 듣지 않습니다. 꼰대가 또 성깔부리며 입바른 소리하는구나, 피식 비웃으며 흘릴 뿐입니다.


진짜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언어학 및 교육학에서 문해력의 의미는 더 광의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타자라고 하는 것은 자신과 동일한 문법을 사용하는 언어집단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타자의 경계에 참여하여 타자의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결국 우리는 타자의 문화를 존중하고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문해력의 광의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문해력은 오늘날 총체적으로 실종되어 있습니다.


꼰대는 꼰대집단의 동일성에 기반해 타자를 무시하고, 게임세대는 게임집단의 동일성에 기반해 타자를 무시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의 문법을 절대화함으로써 서로를 혐오하는 현실을 창조해냅니다.


오늘날 꼰대라고 자주 불리곤 하는 대표적인 세력은, 세대적으로는 586세대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들에게는 중요한 문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지애'의 문법입니다. 멋진 전우들과 더불어 어깨동무를 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간다는 신화가 이들에게는 중심적으로 작동해왔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집단동질성은 아주 강합니다. 우리 편은 죽어도 사수한다는 그 굳은 의지는 이들이 저항한 전두환의 탱크만큼이나 튼튼합니다. 전두환의 탱크가 만든 집단심리적 탱크입니다.


그리고 이 꼰대들의 심리적 탱크가 또 다른 심리적 탱크를 만들어냈습니다.


게임을 통해 자기들만의 왕국인 온라인세계를 구성하는 데 성공한 세대는, 게임의 문법으로 동지애의 문법에 저항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비합리적으로 인정에 기대어 사는 꼰대의 '집단주의'에 대해, 재미와 성장을 기치로 해 서로가 합리적인 필요성으로 더 넓고 개방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게임세대의 '개인주의'는 활짝 개화되었습니다.


전두환의 탱크가 만든 연쇄작용인 셈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다 전두환의 탱크들입니다.


이 시대의 갈등은 '집단주의' 대 '개인주의'의 양상을 갖지 않습니다. 이것은 피상적이며, 촌스러운 구도입니다. 지금의 갈등은 '배타주의' 대 '배타주의'의 갈등입니다.


어떤 것을 배타하는 일에는 반드시 소유의식이 작동합니다. 내 것, 내 가족, 내 사회, 내 공동체라고 하는 집단동질성의 문제가 크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배타주의에 물든 이들은, 타자와 소통하기보다는 타자를 소유하는 방식에 더 익숙합니다.


게임세대를 이제는 포켓몬 세대라고 불러보겠습니다.


포켓몬 게임은 수집해서 소유하는 재미를 자극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일이 성장의 증거가 됩니다.


좋아보이는 소재가 있으면 몬스터볼을 던져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소유물이니 이제 그 권리도 자기에게 담보되는 것만 같습니다.


가족들과 자연 속에서 잘 살고 있던 피카츄를 강제로 유괴한 뒤, 그 외모와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착취합니다. 그러다가 질리면 버리는 일도 너무나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곳간에는 '최고의 것'만을 모아 컬렉션을 완성해갑니다.


오늘날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표절, 모방, 약탈, 전문성에 대한 무시, 넓고 얕은 것에 대한 찬미 등의 감수성은 이렇게 촉진되고 강화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변명이 있습니다.


그 좋은 것의 진가를 자기가 알아봐서, 그것을 더 좋은 것으로 성장시켜주려고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트위터에서 하는 SM 놀이와 같은 것입니다. 노예를 소유한 주인님이 노예에게 더 좋은 상태를 체험시켜주고, 결국에는 노예를 레벨업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하는 명목 속에서 이루어지는 놀이입니다.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부릅니다.


이 게임의 방식이 매우 폭력적으로 강제됩니다.


약탈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도 일방적인 폭력을 가합니다. 마치, 제발 음식을 해주지 말라고 눈물로 간절하게 부탁하는 자식에게, 자식이 아직 철이 없어 부모 있을 때 해주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몰라 그런다며 돈까스 2000개를 강제로 떠안기는 엄마의 태도와도 같습니다.


트레이너에게 육성되는 일을 포켓몬들이 반기는 일은 포켓몬 게임 내에서의 문법일 뿐입니다. 그러한 문법을 타자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적용하려는 일이 오늘날에는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이 폭력인 줄도 모르고, 자행하고 나서 웃기까지 합니다. 비판받으면, 자기는 대단히 순수하고 선한 의도로 그랬다는 듯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무고한 표정을 짓습니다.


전두엽의 신화가 만들어낸 일입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 발명되었지만, 이내 소유의 목적이 더 커졌습니다. 오늘날의 언어는 정보라는 이름으로 더욱 직접적인 생산수단이자 사유재산으로 기능합니다. 이 시대에 언어는 정말로 자본입니다.


전두엽의 신화는 언어자본을 증대시키기 위해 더욱 예찬됩니다.


더 많은 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고, 소유된 것들을 포켓몬처럼 돌보고 관리하며 양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언어는 더욱 발화됩니다. 그러한 소유의 방식으로 발화할 수 있는 언어능력을 키우기 위해 더 많은 이가 매진합니다.


그만큼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둔감해집니다.


광의적 의미로서의 문해력은 사실 공감력입니다. 거의 같은 말입니다.


전두엽의 신화가, 게임의 문법이, 그리고 소유를 위한 그 문법의 폭력적인 활용방식이, 결국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은 공감의 능력입니다.


공감은 언어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몸에서 비롯합니다. 전두엽의 관장영역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지과학 및 뇌과학에서 첨예하게 관심을 갖는 분야는 바로 몸입니다. 전두엽에 가려져 있던 뇌의 다른 영역들이 연구의 주제로 크게 대두됩니다. 현대철학에서 몸은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심리학도 사실 다 몸에 대한 담론들입니다.


언어가 아니라 몸입니다.


그런데 전두환은, 아니 전두엽의 신화는 이 몸을 탱크로 깔아뭉개려는 경향성을 갖습니다.


언어로 몸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게 건강하고 올바른 인간의 모습이라고 개소리를 피워댑니다.


게임중독은 게임을 통해 몸을 망각하려는 현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표현 그대로 언어를 통한 몸의 망각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게임들 속의 아바타처럼 다양한 가상신체가 있는 것만 같고, 그만큼 몸이라는 것은 상황과 용도에 맞게 활용하고 즐기다가, 얼마든지 갈아탈 수도 있는 것처럼 상정됩니다.


너드들이 만든 SF 영화들이 이러한 환상을 더욱 강화합니다.


네트워크에 자신의 기억정보를 업로드하면 마치 자신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처럼 묘사되곤 합니다. 자기는 무한히 복제될 수도 있고, 그 모든 것이 다 자기로서의 존재론적 위상을 갖기라도 하는 것처럼 간주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우리 자신과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그 새끼일 뿐입니다.


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보편성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몸은 그 반대편에 놓인 핵심적인 속성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대체불가능성'입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실존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몸은 일회적이고, 유일하며, 대체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몸이 그러하듯이, 타자의 몸도 그러합니다.


포켓몬처럼 피카츄 15마리를 잡아, 그 중에 스탯이 높은 개체를 골라 육성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애초 아닙니다.


그 자신만의 고유한 몸을 가진 타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소유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슈퍼마켓 매대에서 좋아보이는 타자들을 골라 자기의 컬렉션으로 삼을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닙니다.


고유한 몸이 있기에, 고유한 언어가 생겨납니다. 타자의 언어를 존중하며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은, 결국 타자라고 하는 대체불가능한 그 몸의 경외성을 만나고자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몸을 함부로 대하는 이가 남의 몸도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포켓몬의 몸을 소유하려 하는 포켓몬 트레이너들은 자기의 몸도 소유하려고 합니다.


더 이득이 될 수 있는 것 같은 자본적 가치로서의 언어를 발견하면,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몸에 그 언어를 이식하려고 합니다. 유튜브 등을 보면서 성공적으로 보이는 문법을 모방해 그걸 자기의 것으로 취득하려고 하는 식입니다.


이처럼 남의 언어를 따라하는 것은, 실은 남의 몸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병신같은 일이 남의 몸을 따라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남의 언어를 따라하면, 그 사람과 같은 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더욱 병신같은 이들입니다.


몸에서 느낀 어떤 감각이 음성이 되어 새어나옵니다. 그게 언어의 시작입니다. 몸의 표현이 언어입니다. 언어가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기능을 주관하는 전두엽도 몸 안에 있습니다. 몸이 더 큽니다.


인간의 몸을 자기의 소유물로 삼아 막 대하는 전통이 아주 긴 시간 동안 세습되어 왔습니다. 전두엽의 신화가 확장되어 온 그 역사이기도 하며, 한국의 실체적 근현대사이기도 합니다.


문해력의 문제는 이러한 역사의 결산으로 드러난 지표입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도구적 언어능력를 신화화함으로써, 소통할 수 있는 몸의 언어능력을 우리가 얼마나 심대하게 상실해왔는가의 그 지표입니다.


오늘날 심리상담이 신흥분야로 세력을 급격히 확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소통의 현실을 회복하고자 하는 필요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심리학의 흥행에 힘입어 언어로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이비심리학들 또한 창궐해왔습니다. 그만큼 이 전두엽의 신화는 뿌리깊습니다.


전두환에게 가장 치를 떨었던 이들이 전두환이 되어 있듯이, 문법적 집단동질성이 낳는 배타주의는 또 다른 배타주의만을 양산합니다. 자기들만의 포켓몬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은 결국에는 오박사의 연구소에서 원자폭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포켓몬스터 아토믹 버전입니다. 아마도 시리즈의 가장 최신작이자 최후작일 것입니다.


전두엽의 신화로 사는 이들이 가장 무식하고 폭력적입니다.


순수하고 따듯한 포켓몬 게임의 문법을 현실에 적용하면 공포영화가 됩니다.


문해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언어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최후의 심판에서의 선고처럼 타자의 몸에 대한 지배적 폭력으로 행사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를 만지지 마라』라고 하는 낭시의 책제목은 아름답습니다. 타자의 고유한 몸을 함부로 하지 않고, 그 몸에서 비롯한 타자의 고유한 언어를 함부로 하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문해력입니다. 공감의 힘입니다. 소통은 여기에서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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