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수쟁이의 문화: 왕자병이 낳냐 공주병이 낳냐"
왕자병이 낳습니까, 공주병이 낳습니까?
둘 다 낳습니다.
훈수쟁이를.
왕자병 및 공주병 바이러스의 변이가 바로 훈수병입니다. 더 전염력이 강하고, 이 시대에 만연해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명절이 즐겁지 않은 것은 세상이 각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훈수쟁이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모이기만 하면 늙은 것이나 어린 것이나 집단의 과반수 이상이 훈수쟁이들입니다. 저마다 인생을 가르쳐댑니다. 용돈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이 훈수쟁이일 경우에는 더욱더 명절에 집에 가기가 싫습니다.
자기는 더 최신의 인생공식과 첨단의 트렌드를 아는데, 낡고 후진 구시대의 것들에게 훈수를 들어야 한다는 현실을 참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훈수쟁이들은 다양한 소집단들과 플랫폼 공간을 찾아 다닙니다. 심리학 독서모임, 대방동 좋아요 커뮤니티, 자기계발강연, 인문학 소모임 등을 방문합니다.
"사람 만나는 걸 워낙 좋아해서요."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좋아요."
"내 자신을 더 성장시키고 싶어서요."
대체로 다 거짓말입니다.
잘난 척하며 훈수를 둘 곳을 찾아 이들은 분주하게 온오프라인 공간을 떠돌아 다닙니다.
그래서 이들의 눈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모임에서 제일 약하고 불쌍하며 멍청해보이는 인물을 향합니다. 바보온달을 키우는 평강공주의 마음으로 그 인물을 위해 선의의 훈수를 두려고 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훈수의 소재로 자주 쓰이는 것이 단연 심리학입니다.
심리학이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것은 자기도 갖고 있는 것 같은 자원인 마음을 다루고 있어서입니다. 자기 마음의 불쾌를 쾌로 바꾼 경험이 있으면, 자기도 놀라운 심리학선생인 것처럼 쉽게 대접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리학 훈수쟁이들은 늘 '놀라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전적 경험을 통해 보편적 공식을 창작해서 사람들에게 보급합니다. "내가 이만큼 성공했으니, 너희도 나처럼 하면 돼."라며 짓는 그 미소는 훈수쟁이들의 종족특성입니다.
혹시라도 개인적 차원에서 '놀라운 경험'이 없는 이는, 그 놀라운 경험들을 근거로 무수한 훈수쟁이들이 저술한 자기계발 삼류소설들을 많이 읽으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그 경험담들 속에 공통적으로 담겨 있는 모종의 비밀스러운 공식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이제 그 공식을 사람들에게 보급함으로써 자기도 성공적인 선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훈수병 바이러스는 이처럼 더 많은 훈수쟁이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전염됩니다. 좀비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가 훈수를 두기 좋아한다는 것은 국룰입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사는지의 그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철학의 부재라고 합니다. 철학의 부재가 훈수를 두게 만듭니다.
재미있게도, 훈수쟁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분야인 심리학의 학문적 약점은 많은 경우 철학이 부재하거나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안정애착을 형성해주어야 아이가 건강한 심리를 갖게 된다며, 부모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안내하는 심리학 접근이 있습니다. 요즘 대부분의 대중심리학적 이해가 이러합니다.
이러한 접근에 내포된 철학이란 고작해야 '인간은 엄마가 중요한 존재다.'일 뿐입니다. 너무나 비루합니다.
철학은 인간의 자기이해입니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얼마나 거대하고 멋진 존재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그 묘사입니다.
"난 엄마가 없으면 병신이에요. ㅠㅠ 커서도 인스타에서 다른 이들이 나한테 엄마처럼 안정적으로 우쭈쭈 많이 해줘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병신이에요. ㅠㅠ"
이게 철학입니까?
이건 왕자병이며, 또 공주병입니다.
왕자와 공주는 왕의 존재로 인해 왕자와 공주일 수 있습니다. 곧, 왕자와 공주는 부모에 의존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지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아이들은 자기의 부모가 자기가 꿈꾸는 만큼 특별한 왕자와 공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고 경험합니다.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너무나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환상들이 그들의 인생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럼으로써 그 환상들이 자기들의 기대치가 됩니다. 환상에 의거해 자기의 인생을 평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스타나 순방하며 화려한 남들의 사진 앞에 열등감을 경험합니다. 자기 부모가 돈이 많아 전신성형을 시켜줄 수 있었다면 자신도 저 화려한 세계에 참여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환상은 환상을 촉진하고, 그 영향력을 더욱 강화합니다.
이 환상의 지배하에, 자기가 실제 수행하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을 바라는 심리는 생겨납니다. 환상적 기대입니다. 실제의 부모는 이 기대를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환상의 아이들은 자기를 진정한 왕자와 공주로 만들어줄 새롭고 강력한 부모를 찾게 됩니다.
그 부모의 이름이 바로 대중입니다.
왕자병과 공주병의 유망주들은 대중을 향해 호소합니다.
"지구의 모든 엄마아빠들, 당신들의 힘을 나에게 나누어주세요."
원기옥이 아니라 인기옥을 모으려 합니다.
그러면 그 인기의 힘으로 자기의 기대치만큼의 환상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지랄은 단기적으로 성공적인 전략인 것도 같습니다. 잠시간은 왕자인 척할 수 있고, 공주인 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방 밑천을 드러냅니다. 대중은 쉬이 질리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장기자랑을 선보이는 원숭이가 되지 않으면 대중의 관심은 차갑게 식습니다.
그러면 환상의 열기도 차갑게 식어갑니다. 이제 조금만 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그 낙원에의 열쇠가 눈앞에서 멀어져 갑니다.
이때 바이러스의 변이가 일어납니다.
왕자병과 공주병을 지속하겠다는 바이러스의 의지가 훈수병으로의 진화를 이끕니다.
대중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자기에게 향하게 하는 길, 그것은 바로 대중을 구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광대는 메시아로의 변화를 기획합니다.
자기도 왕자와 공주가 될 수 없어 한때 좌절했지만, 그 좌절을 극복한 '놀라운 경험'을 통해, 이제는 대중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대현자 마법사가 된 것처럼 자기를 홍보합니다.
놀라운 훈수를 통해 당신들도 왕자와 공주 같은 특별한 존재로 거듭나는 현실을 만들어주겠다고 대중에게 약속합니다.
왕자병과 공주병의 광대들은 이처럼 자기를 왕으로 입지화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왕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그 필요를 절감하며 왕에게 영원한 인기를 제공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는 그저 훈수쟁이일 뿐입니다.
더 껍질을 벗겨보면, 왕자병 및 공주병에 걸린 망상의 아이입니다.
이 시대의 문화가 이 망상의 아이들을 지지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망상에 빠진 이들은 환상상품에 대한 최고의 소비자가 되는 까닭입니다.
서로가 진정한 고수로서 다른 이들의 도움이 되는 만남을 이루는 장, 이것이 요즘 플랫폼이라고 하는 것의 정의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에 왕자공주들이 노는 장을 만들어 놓았으니, 와서 커피도 한 잔 하며 신나게 잘난 척하세요."입니다. 돈을 버는 것은 플랫폼을 만든 이들뿐입니다. 구토감을 잘 견딜 수 있는 비위만 좋다면, 오늘날 플랫폼 사업은 가장 성공적인 아이템입니다.
전 국토가 마치 탁아소 내지 영유아 놀이방이 된 것 같은 상황입니다.
환상적 기대를 갖는 아이들에게 환상을 보상으로 떠먹여줌으로써, 그들이 더 환상에 굶주리게 되는 악순환만이 반복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창조해낸 환상이,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하게 된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환상에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환상의 주인이라고 착각합니다. 환상들 위에서 환상을 거느리며 마법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라고 스스로를 착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바로 훈수쟁이입니다.
훈수쟁이들은 훈수를 통해 환상들 속에서 자신들이 길을 밝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훈수 자체가 가장 큰 환상입니다.
명절 때 우리는 왜 큰고모가 하는 훈수를 듣지 않습니까? 환상이라서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체적인 상황은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머릿속에서 짜낸 환상으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기 인생을 도무지 왜 사는지 모르게 깜깜한 이가, 남에게 어떻게 사는지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환상에 갇혀, 왕자병 및 공주병의 증세에 갇혀, 인생이 막힌 이가, 다른 이들에 대한 메시아처럼 굴며 훈수를 두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인생의 깜깜함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리고 망각도 전염됩니다.
훈수를 두는 이나, 그 훈수에 대한 수용 또는 저항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이나 망각이라는 상호적 이득을 얻습니다.
"얘한테 도움이 되는 걸 준 거라구요."
"맞아요. 저에게 도움이 되는[쓰레기 같은 걸] 걸 주신 거예요. 흐뭇[씩씩]."
이 둘은 지금 더불어 서로의 인생을 망각하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훈수로 인해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는 착각을 지속할 수 있으며, 또는 어떤 것이 안 되는 것은 훈수두는 이 때문이라는 착각 또한 지속할 수 있습니다.
훈수쟁이는 인생을 망각하기 위해서만 그 모든 것을 합니다.
어떠한 게임에 대해 놀라운 경험을 좀 쌓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뉴비들이 모이는 마을에 가서 훈수를 둡니다. 누군가는 호응하고, 누군가는 거부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게임을 재미없게 만드는 일에만 성공하면 됩니다.
자기가 지금 게임이 재미없기 때문에, 훈수쟁이는 이러한 일을 합니다.
재미없는 데도 게임을 계속 붙잡고 있는 이유는, 자기의 인생이 더 재미없게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재미없는 인생을 극복하려고 재미없는 게임을 하고, 재미없는 게임을 극복하려고 더 많은 이를 재미없게 만듭니다.
왕자병과 공주병이 반드시 도달하게 되는 이 상태, 이것이 우울입니다.
우울은 환상적 기대가 만든 것입니다.
환상의 보상에 대한 기대치에 따라 늘 자기를 평가하는 이가 경험하게 되는 필연적인 상태입니다.
훈수쟁이로의 진화를 꿈꾼 바이러스의 의지는 이 우울의 증상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처럼 왕자병과 공주병이 낳는 것은 다만 우울입니다.
이 시대의 문화적 질환입니다.
유튜브에서 해맑게 웃는 연기를 하며 인생에서 성공하는 법에 대해 신나게 훈수를 두는 이들을 끝없이 우울을 낳는 이들로 다시 볼 수 있으면, 우리는 최소 '낫다'를 '낳다'로 착각하는 환상에서는 벗어난 것입니다.
우울이 낫는 것은 좋습니다. 우울을 낳는 것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환상에 농락당하는 인간의 비루한 현실을 지시하는 까닭입니다.
요즘에는 특히나 못생긴 애들이 더욱 왕자병, 공주병입니다. 못생긴 애들이 자기의 모습과 똑같이 낳은 환상에 농락당하면 기분이 더 나쁩니다.
거울을 보면 언제나 환상이 깨집니다.
거울 속에 비치는 그 모습이 조금 심할 정도로 얼마나 자유롭게 생겼는지는 망각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자유입니다.
자유는 훈수를 두지 않습니다. 자기가 훌쩍 날아갑니다.
자유는 셀카 속 왕자나 공주가 되어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는 왕자와 공주를 만들어줄 부모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낳은' 환상들에서 눈을 돌려, 자기 마음이라는 거울을 보는 일, 그렇다면 이것은 철학입니다.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인간의 자기이해가 필요한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