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초오류와 바보떠넘기기 주술"
누군가가 최면을 해서 모든 마음을 온전하게 한다고 말할 때, 자연스러운 우리의 반응은 이럴 수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군가가 이대로만 따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마법의 법칙이 있다고 말할 때, 자연스러운 우리의 반응은 이럴 수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연작글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이래야 할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주술에 걸려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영성과 심리학의 학제적 관계를 정립하고자 시작된 자아초월심리학의 선구자인 켄 윌버는 전초오류(Pre/Trans Fallacy)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매우 유용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을 통해 심리학적 자기의 문제를 풀어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집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없어서 자기라고 하는 것에 집착합니다.
대체로 친구나 부모와 같이 자기가 의존하던 애착대상에게 돌발적으로 내쳐진 경험을 한 이가 그 순간 자기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집착은 사람을 힘들게 만듭니다. 자기를 얻으려고 집착하는 이들은 그 삶이 아주 피곤해집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문득 활로를 찾아내게 됩니다.
"아하! 멋있고 권위있게 보여야 할 자기라고 하는 것에 집착해서 내가 힘들었던 거구나! 그런 쓸데없는 자의식을 내려놓자. 진정한 자기에 집착하지 말고 자유롭게 부캐들을 만들어내서 상황에 맞게 유연한 페르조나를 활용하도록 하자. 내 개성을 고집하지 말고 그냥 성공적인 걸 모방해서 단순하게 원하는 걸 얻으면 되겠구나."
그러면서 마치 자기를 초월한 척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도 되지 못한 미발달의 상태입니다.
초월의 개념은 단순합니다. 자기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그것의 초월도 가능합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윌버는 전초오류라는 개념을 통해 바로 이 문제를 시사합니다.
더 낮은 수준에 있는 것을 흡사 더 높은 수준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인지적 오류가 바로 전초오류의 내용입니다.
윌버의 입장에서는 더 낮은 수준에서의 발달과업들은 아무리 더 높은 수준인 척 기만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전초오류 속에서 더 높은 수준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은 자기에게 더 낮은 수준의 것이 없는 것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있는 것이 없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걸 없는 것처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집에는 쓰레기가 없는 무오하고 청결한 환경인 것처럼 위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할 때, 주술의 의도가 출현합니다.
모든 주술의 내용은 '떠넘기기'입니다. 자기는 최대치의 이득을 얻으며, 그에 상응하게 발생할 부작용 및 위험성은 어딘가로 떠넘기는 것입니다.
더욱 고급인 주술은 쓰레기가 떠넘겨졌다는 사실을 상대가 모르게 떠넘기는 주술입니다.
요즘 투자시장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그 주술들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새 병신이 된 이 현실이 우리에게 아주 큰 고통을 가져옵니다. 고통의 이유라도 좀 알면 나을 것 같은데, 그 이유조차 짐작이 가지 않으니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심하게 자책합니다.
정말로 바보 같습니다. 완벽한 바보가 되었습니다.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오늘날 횡행하는 주술의 전면적 내용입니다.
실은 대단히 투박하고 무식한 이들이 유튜브와 나무위키 또는 삼류계발서들에서 잡다한 정보를 끌어모아, 자기가 천재인 척하려 합니다. 아니, 그러한 방식으로 자기가 천재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이 시대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정보라는 지식자본의 보유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은 여전히 정보라는 것에 의존하여 휘둘리며, 정보의 소유여부로만 자기의 존재가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 바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더 높은 수준의 천재라고 착각하는 전초오류가 일어난 상황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적 수준에 대한 전초오류를 범한 이들은, 이제 자기가 지적으로 못나보일 일은 결코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남들 앞에 자기의 지적 수준이 노출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보다 못나보이는 이들을 대상으로만 활동을 펼칩니다.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패가 된 이유는, 전초오류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실제의 바보에게는 실패라는 것이 없습니다. 전부 다 아름다운 배움의 과정입니다. 자기를 천재라고 착각해버린 이만 이제 모든 곳에서 자기의 지성이 실패할 가능성을 봅니다.
자기를 천재라고 생각해서, 더욱더 도전하지 않게 되고, 유튜브에서 주워본 성공적인 알고리즘만 따라 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 이 지성의 수준에 대한 전초오류가 만연해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서재에 꽂힌 책의 양이 자기의 지적 수준과 동일하다고 착각하는 방식으로, 온라인에 널려있는 정보량이 자기의 지적 수준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정보를 대상화해 자기를 얻으려 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날의 자기라고 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지적 자기입니다. 다들 이러한 자기를 얻으려고 집착합니다.
자기가 천재가 아니라서, 천재에 집착합니다. 자기 엄마는 자기가 천재인데 공부만 안한다고 했기에, 더욱 천재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들을 위해 나무위키가 있고, 무수한 유튜브의 친절한 선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일주일 정도 익혀 소화한 이들은 이제 천재로 스스로를 다시 세우게 됩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서울대에 들어가고 삼성연구소에 들어간 전형적인 구시대적 천재가 아니라, 비제도권에서 메타인지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부캐들을 활용해가며 더 넓은 지성을 실용적으로 유연하게 가용할 수 있는 뉴타입의 천재로 자기라는 것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는 (낡은 인습에 갇혀 있던) 자기를 초월한 참자기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초월의 참자기는 바보들을 향해 활동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이는 세상에서 더 많은 바보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는 바보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보가 눈에 잘 안 띄면, 바보를 만들어야 합니다. 주술을 가동합니다. 성공의 공식이 뻔하게 있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바보같은지를 열심히 언술합니다.
자기 빼고는 다 바보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도 삽니다.
자기만은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주술은 필사의 의지에서 나옵니다.
필사적으로 웃습니다.
비웃습니다.
주술은 언제나 주술의 대상을 우습게 보며 그 존재의 위상을 추락시키려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주술의 실체는 이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초오류에 빠진 천재들이 아무리 친절한 교사처럼 행위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대상자들을 향한 심리적인 조롱과 무시의 의도 속에서 활동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별하고 통합해서 그 정수만을 팝니다."라고 말하는 그 이면에는 "이런 걸 비싼 돈을 주고 정말로 사네 병신들."이라는 내심이 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바보가 되지 않도록 상대에게 떠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보떠넘기기 주술'입니다.
이걸 요즘에는 잘해야 성공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며느리도 모르는 새 더 많은 이들을 바보로 잘 만들어야, 그들이 바보가 된 줄도 몰라야, 주술은 성공적입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바보떠넘기기 주술'의 대상자들을 추켜세워주느라 열심입니다. 이 정도만 아셔도 이미 인류의 상위 퍼센트에 속한다는 둥, 단기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고 높은 레벨이 되셨다는 둥, 이것만 하면 금방 성공할 거대하고 묵직한 자질을 가지셨다는 둥, 뻥튀기 튀기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대상자들은 더욱 철저하게 조롱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이러한 주술을 집행하곤 했습니다. 순결한 어린양을 잡아 제단에 올리며, 죄를 대신 떠넘기는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제물이 된 그 어린양을 조롱하지는 않았습니다.
제물이 조롱될 때, 우리는 제물에게 자기의 존재를 위탁하고 있는 더 웃긴 일을 하고 있는 주술자를 역으로 조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술을 깨는 방식입니다.
정확하게는 주술을 되돌리는 일입니다.
조롱이 날아온다면, 역조롱으로 반사하는 것입니다.
바보 같은 자기가 싫어서 그걸 초월한 천재가 된답시고 다른 이들이 대신 그 바보가 되게 하려는 이들에 대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신이다! 병신이 나타났어!"
주술은 수치심과 함께 깨집니다.
완벽한 언어의 성벽을 붕괴시키는 것은 언제나 수치심입니다. 수치심으로 인해 언어의 성벽은 스스로 무너져내립니다.
사실은 원래 있지도 않았던 것이고, 그저 허공을 향한 언어였을 뿐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것은 대상을 향한 언어로 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으로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쌓다 보면 스스로의 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가 자기를 초월하는 자리입니다.
자기를 쌓는 일과 자기를 초월하는 일은 방향성은 달라보여도 실은 같은 일입니다.
바보 같은 일입니다.
실제의 바보가 되는 일입니다.
바보를 조롱함으로써 떠넘기지 않고, 바보를 자기로 삼아 자기의 삶을 정말로 배워가는 일입니다.
"ㅎ"
인간이 더는 주술적 제물을 바치지 않게 된 것은, 제단에 누워서도 자기의 삶을 긍정하며 배우고 있는 바보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보의 신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선한 눈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ㅎ"
가장 그리운 얼굴입니다. 당신의 얼굴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