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 콤플렉스: 작은 것이 참 안타깝네"
조선시대 시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권세에서 밀려난 이들, 낙향한 정치인들, 속절없이 나이만 먹은 이들이 언제나 자연과 하나된 물아일체의 경지니, 유유자적하는 안빈낙도의 삶이니를 노래하며, 자기가 도인인 척해왔습니다.
또 그러한 이들을 아이콘으로 삼아, 광대들, 남사당패들, 환쟁이들, 점술사들, 당파싸움의 약소세력들 등이, 시대의 큰어른이니, 참양반이니 등의 수식어를 헌사해 이 도인화 작업을 성공시키는 일에 더욱 일조해왔습니다.
일종의 신화만들기인 셈입니다.
어떤 가난한 집의 초딩일진이 자기 아버지는 장풍을 써서 멀리서도 가스레인지의 불을 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신하는 눈초리로 히죽대는 아이들을 초딩일진은 마구 팹니다.
"너 지금 우리 아버지 무시했냐?"
사생결단입니다. 장풍을 쓸 줄 아는 진정한 도인인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열등감이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기 위해 누군가는 도인처럼 보이려 하고, 누군가는 도인의 신화를 만들어주려 합니다.
도인 콤플렉스가 작동해서 생기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특히나 권력에 대한 열등감이 만들어내는 콤플렉스입니다.
통속적으로 속세를 초월한 것이 도인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런데 이 초월이라는 것은 마치 상승의 방향성을 가지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에 따라 속세 위에 정좌하는 것이 도인이 됩니다.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그래서 속세의 권력에 가장 집착하는 이가, 현실적으로 그 권력을 획득하거나 유지할 수 없을 경우, 도인 코스프레를 하게 됩니다. 속세의 권력보다 더 높은 것을 가진 자로서 자기를 드러내려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종의 정신승리입니다.
오늘날 심리학이나 마음과 관련된 담론들은 이러한 류의 더 많은 정신승리의 방편이 되어 있곤 합니다.
재미교포처럼 보이려는 영어 이름을 쓰고, 힙스터 워너비 같은 얌생이 수염을 기르며, 이상한 영단어 조합의 마법주문 같은 선전문구를 활용해, 자신들을 근미래적 SF 도인인 것처럼 입지화하기를 시도합니다.
조선시대나 오늘날이나 권력에 경도된 이들은 늘 이 도인 콤플렉스에 지배되어 동일한 일을 합니다.
도인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이들의 주된 특징은, 세상 모든 곳에서 늘 작고 약한 것만을 본다는 점입니다.
"저 작은 게 어찌도 안타까운지...... 그래 인석아. 네 녀석도 살아보겠다고 그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냐? 작아도 이리 온전하다고 네 자신을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냐? 기특한 것, 참 용한 것, 우리 한번 같이 살아보자꾸나."
이들에게는 작고 약한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있습니다. 그 집착이 형상화된 자조적이며 퇴폐적인 미학이 있습니다.
외로우면 사람이 좀 미치는데, 이들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지금 도인 콤플렉스의 핵심을 이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도인 콤플렉스는 자기가 집착하던 권력에 대한 패배 내지 상실을 경험한 이가, 항구적인 형태로 자기가 얻지 못하게 된 권력 대신에 권위를 얻으려고 하는 역동입니다. 권력에 의한 열등감을, 권위를 통한 우월감으로 보상받으려고 하는 기제입니다.
그리고 그가 과거 권력에 집착했던 이유와, 이내 권위를 추구하게 된 이유는 동일합니다.
그것들이 있으면, 자기 주변에 늘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임으로써, 자기가 외롭지 않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보는 그 '작고 약한 것'의 정체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의 신세가 그렇게 외적으로 투사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뒷방 늙은이가 거울을 볼 때 느끼는 그 심정입니다.
늙었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며, 나이를 먹는 만큼 마음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관계 속에서 남을 위해 살지 않고, 대체불가능한 존재로서의 자기의 삶을 사는 만큼 우리는 지혜로워지고 성숙해집니다. 아무리 이 말이 불편하게 들려도, 이것은 심리학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로 사는 이는 이 세상에서 작고 약한 것들을 보지 않습니다.
알아서 잘 사는 생명들에게, 건방진 말을 할 도리가 없습니다.
자기가 스스로를 작고 약한 존재로 경험한다고 해서, 그 관점을 자기중심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에 적용하려는 독재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을 살아 정말로 자기의 존재를 엄청나게 대견하게 느끼는 이는, 타자의 존재를 함부로 작고 약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존재한다는 이 사태에 대해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게 됩니다.
틈만 나면 눈시울을 적시며 "아이고, 저 작고 약한 것이 또 소외되었네. 얼마나 안타깝누."라고 하는 것은 뒷방 늙은이들의 상투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것은 도인이 아닙니다. 도인 콤플렉스가 만들어낸 자기도취적 정체성입니다. 병들고 취약한 것에 집착하는 자기도취적 연민입니다. 니체는 이것을 인간이 가장 몰락한 병적인 상태라고 말합니다.
도인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이는 세상에서 온통 작고 약한 자기만을 봅니다.
남을 위해 산다고 말하던 이의 실체가 이러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로 살아가지 않을 때의 귀결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우리는 왜 외로워지고, 속절없이 나이만 먹은 것 같아 더 외롭게 스스로를 느끼게 되는지의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아서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 자유를 부정하면 우리는 외로워지고, 열등감이 생겨나며, 사람들을 자기 옆에 있게 할 권력을 추구하게 되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더욱 자기를 청할 권위에 집착하게 되며,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의 탄식만을 더해간 채, 그렇게 뒷방 늙은이가 되어갑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늘 젋고 깨어있는 영혼의 힙스터인 줄 압니다.
실제의 도인은 속세 '위'의 것이 아니라 속세 '밖'의 것입니다. 초월은 바깥의 의미입니다. 속세 안은 통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속세 바깥의 도인은 단순하게, 통제하지 않는 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통제의 논리를 적용하려 하지 않을 때, 그에게서는 탄식도 사라집니다. 탄식은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자기의 무력함이 자아내는 것입니다. 계속 무력해지니 자기 자신이 작고 약하게 경험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도인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이들은 극기의 활동을 좋아합니다. 퀘스트를 깨듯이 난이도가 있는 육체활동 등을 통해 자기의 무력감을 지우려고 곧잘 시도합니다.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의 도움을 받아 잠시간은 작고 약한 자기감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선비라고 생각하겠지만, 중독일 뿐입니다.
도인 콤플렉스의 실제적인 행동원리가 통제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유익합니다. 친절한 언변으로 포장해도 통제는 통제입니다. 이것이 통제이기에, 모든 것은 그 앞에서 작고 약한 것처럼 굴절됩니다.
반면 자유는 존재하는 것들을 원래의 크기로 되돌립니다. 이것을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자기 자신일 자유를 개방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크기 또한 함께 회복됩니다.
회복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는지는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너도 약했던 거잖아. 너도 불쌍했던 거야. 너도... 너도... 사람이라구. ㅠㅠ"
세상 모든 것에게 이처럼 자기의 모습을 강요하는 찌질한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 회복된 것입니다.
회복된 그 면모를 우리는 바로 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존재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 모두는 이미 그 길 위에 서있는 길사람(道人)이라는 사실이 자명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