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신비라는 것을 눈치채가는 이들
1994년을 배경으로 어느 중학생 소녀의 1년간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다양한 역설을 성립시킨다.
특별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고, 과거이면서 동시에 지금이고, 개인사이면서 동시에 시대사이며, 삶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사건이고, 자기의 마음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마음이고, 나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세계의 이야기다.
실존은 인간이 바로 이러한 역설적 존재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표현이다.
영화에서도 묘사되듯이 '하루하루 살아간다.'라는 표현과 '하루하루 죽어간다.'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동일한 하나의 실존에 대한 묘사다. 이처럼 한 개인의 실존은 언제나 역설로 성립된다. 아니, 오히려 역설이 포섭되는 자리에서 실존은 성립된다.
우리에게 실존이 성립되지 않을 때, 보다 정확하게는 실존이 자각되지 않은 채 기만될 때, 우리는 반드시 고통에 잠식된다. 이 말은 우리가 삶의 역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 속에 갇히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우리가 역설을 받아들이는 일을 스스로 어렵게 만드는 대표적인 방식은, 바로 역설을 모순으로 굴절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역설은 통째의 삶 그 자체에 대한 것이고, 모순은 애초 구조화될 수 없는 삶을 구조화시킨 결과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삶을 통째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분절시켜 구조로 만든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역설은 모순으로 굴절된다. 때문에 모순의 문제는 반드시 구조의 문제와 관련지어진다.
가부장제, 학력지상주의, 남녀차별, 계급사회, 빈부격차 등과 같이, 영화 속 소녀를 에워싼 여러 억압의 구조들은 그 자체가 커다란 모순처럼 소녀에게 경험된다. 부당하다. 이 모든 구조가 부당하다. 그렇게 소녀는 수없이 찔리는 방패가 되어, 반대편에 놓인 한없이 잔혹하기만 한 창들을 바라본다.
그렇게 창들을 미워하는 만큼 소녀는 자신의 자리를 공고화하게 된다. 불변의 피해자로 자리잡는다. 희생과 투쟁의 구조가 교차하며 반복된다. 이 구조 속에서는 고통의 원인인 창이 문제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고통을 해결할 답이 보이지 않는다. 혹은 보이는 것 깉아도 실현할 힘이 없다. 무력하다. 다만 숨죽이며 구조가 변화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버티는 삶이다. 창의 고통에 버팀의 고통을 더한, 더 커진 고통의 시간들만이 지속된다.
이것이 삶을 모순으로 여길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소녀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모순은 반드시 문제로 상정된다. 그것도 답을 모르는 문제다. 풀리지 않는 문제다. 그러나 반드시 풀어내야만 하는 당위의 문제다. 그래야 고통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끝없이 붙잡고 있다보니 답답해진다.
답답하다는 것은 갇혀 있다는 것이며, 곧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절은 소외다. 그리고 소외는 언제나 만남을 소망한다. 자신을 알아줌으로써 자신을 열어줄, 그렇게 열린 자신과 연결되어줄 만남을 소망한다.
그 소망에 따라 이윽고 소녀는 만나게 된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고, 열어주며, 연결해주는 학원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남의 결과, 소녀는 알게 된다.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준 학원선생님도 자신과 똑같은 구조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어 오랜 시간 치열하게 번민해왔다는 사실을, 모순 속에서 어지러이 헤매왔다는 사실을.
아무리 좋은 학벌을 가졌어도,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어도, 아무리 적극적인 운동권 투쟁의 체험을 했어도, 소녀의 학원선생님은, 소녀만큼이나 이 삶의 모순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소녀와 소녀의 학원선생님이 조금 달랐던 점은, 소녀의 학원선생님은 이 답을 모른다는 사실 앞에 정직하게 개방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순을 역설로서 다시 이해하고자 하는 일을 한 걸음 먼저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순은 반드시 답을 모른다는 사실로 끝난다. 그리고 이 모순의 끝은 동시에 역설의 시작이 된다.
우리가 계속 답을 모르는 고통 속에 놓여 있을 때, 그럼으로써 그 모른다는 사실 앞에 정직해질 때, 우리는 불현듯 눈치챌 수 있게 된다.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애초 답이 없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답이 없다는 것은 동시에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곧,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삶은 애초 문제가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문제에 대한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삶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삶은 있었다가도 없어지고, 동시에 없었다가도 있어지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구조화될 수 없는 것이며, 때문에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알다가도 모르겠고, 동시에 모르다가도 알겠는 역설이 또한 삶이다. 늘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늘 명료하게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진짜 이유다.
우리를 정말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고통의 자극이 되는 삶의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삶의 사건을 모순의 문제처럼 여기며 반드시 그 문제를 풀어내야만 한다는 우리의 당위적 의지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알려진다. 즉, 우리는 역설의 삶을 모순의 구조로 굴절시킨 결과,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그 고통의 구조 속으로 스스로를 더욱 몰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의 원인은 자기 자신이다."라고 말하는 붓다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사태를 직시하고 있는 통찰이다. "고통을 지속시키는 원인은 자기 자신이다."라고 살짝 변주해 표현하면 더 이해하기 수월한 이야기다.
우리가 삶을 모순의 문제로 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심화시킨 이 고통을 멈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삶에 정직한 태도일 뿐이다. 즉, 삶을 정직하게 모르는 것으로 인정하는 태도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붓다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실천적인 방법론을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비판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며 삶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일이다.
모름 앞에서 원래 우리는 자연스럽게 관찰하게 된다. 모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리의 실천적 태도다.
그리고 삶을 모르는 것으로서 바라보는 이 태도, 이 정직한 시선으로 말미암아, 모순의 구조는 해체되고 역설의 감수성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다.
이른바, 모순의 구조 속에서 피해자로만 자기를 규정하고 있던 착각들이 허물어진다. 자신을 두렵게 했던 것들 역시도 자기와 똑같이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방패에 답이 없었던 것처럼 창에게도 답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서로 답이 없는 창과 방패가, 서로에게 답을 내놓으라며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순의 구조 속에서는 모두가 동일하게 고통받고 있었으며, 모두가 동일한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정직한 시선은 계속해서 개방한다.
가해자라고 느꼈던 그 모든 것이, 피해자라고 느꼈던 그 모든 것이, 즉 끝없는 고통의 구조 속에서 시름하는 희생양인 것만 같던 이 모든 것이, 실은 얼마나 온전하고 정당한 것들이었던가가 알려진다. 창과 방패는 서로가 온당하다는 이 사실을 망각하고만 있을 뿐, 실은 더할 나위 없이 온당했다. 내가 사랑하던 삶이었다.
이것이 역설의 결과다.
역설은 언제나, 역설을 받아들인 자를,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 도약시켜준다.
그래서 우리가 실존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모르기 때문에 사랑한다.
동시에 우리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한다.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이미 살아간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손가락이지만, 우리의 손가락은 그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움직여진다. 그러한 삶이, 우리의 손가락이, 우리에게는 신비롭기만 하다.
이처럼 앎과 있음뿐만이 아니라, 모름과 없음으로 더 중요하게 이루어지는 이 삶이 신비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 그것은 바로 사랑을 배워가는 일이다.
사랑은 신비에 대한 매혹이다. 신비에 대해 끌리는 우리의 태도가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신비란 있었다 없었다 하는 까닭에, 알다가도 모르겠는 바로 그것이다. 즉, 삶의 근본적인 속성 그대로 역설로 드러난 삶 그 자체가 바로 신비다. 때문에 모든 사랑은 바로 삶을 향한 사랑이다.
소녀의 학원선생님은 정확하게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여 소녀에게 전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녀의 학원선생님은 소녀를 떠난다. 있다가 없어진다. 없음이 된다. 이제는 없는 것이 된다. 소녀에게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소녀는 정말로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을 상실했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상실의 고통이 사랑을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고통은 그렇게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사랑의 대상이 동일한 형상으로 계속 우리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고통이었고, 그 사랑의 대상이 우리를 떠나게 되었을 때 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부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고통이었다. 우리의 고통의 크기만큼, 우리는 사랑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있다가 없어지는 이 삶의 역설을, 고통의 정확한 이름인 사랑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우리는 동일한 역설의 원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없어진 것을 다시금 있어지게 할 수 있게 된다.
그 전에는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했던, 가끔씩 문득 세상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던 학원선생님의 모습을, 소녀는 이제 정확하게 이해한다.
반 아이들의 살아 있는 표정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 자신의 모습이, 기쁨도 슬픔도 모두 그 한 얼굴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신비롭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 자신의 시선이, 바로 그녀가 잃었다고 생각한 학원선생님과 같았다. 소녀가 잃었다고 생각한 그것은 어느새 이미 소녀 자신이 되어 있었다.
있었다가 없어진 것은, 어느새 없었다가 있어진 것이 되어 있었다.
알다가도 모르겠던 것은, 어느새 모르다가 알아진 것이 되어 있었다.
신비하다.
삶이 이토록 신비하다.
몰라서 더 섬세히 알게 되고, 없어서 더 생생히 있게 된다.
모름과 없음이 사랑을 꽃피워낸다.
신비가 사랑을 노래하게 한다.
이 영화는 이처럼, 앞서 이 삶이 신비라는 사실을 눈치채간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한 시대를 사랑으로 살아간 한 개인의 이야기다. 있었다가 없어져간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도, 마음 속에 영원히 있는 이야기다. 사랑의 노래를 끝없이 흥얼거리는 작은 벌새의 집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야기다.
그렇게 알아줌으로써, 그렇게 알려주는 이야기다.
삶이 신비라는 사실을 눈치채가며, 삶을 향해 이미 시작된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곧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우리 자신이 언제나 사랑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가장 보편적인 우리의 가장 특별한 이야기다.
하와이 - C`est La Vie
밤이 쓸쓸하게 흔들린다
지친 어깨를 내게 기대온다
내어줄 어깨가 내게도 있다면
좋을텐데 친구가 될텐데
텅빈 바람이 불어온다
피할 수 없는 날이 파고든다
내어줄 심장이 내게도 있다면
좋을텐데 친구가 될텐데
C`est la vie C`est la vie
인생은 짧고 이 순간은 길다
C`est la vie C`est la vie
내일은 내일의 태양에게 맡기자
C`est la vie
어두운 그림자 너머로
눈부시게 태양이 빛난다
동전의 양면에 선택을 맡길 수
없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
C`est la vie C`est la vie
인생은 짧고 이 순간은 길다
C`est la vie C`est la vie
내일은 내일의 태양에게 맡기자
C`est la 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