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정치, 양립하지 않는 길"
실존의 입장에서 분명한 것은 '닥치고 정치'가 아니라, '닥치라 정치'라는 점이다.
실존이라는 개념과 그 구현된 실제가 국내에서 자주 오해되는 방식은, 그것이 마치 386세대가 자기를 투영하는 자화상처럼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역사 앞에 선 개인으로서 정치적 부조리를 목격하고 그에 반항하기를 결단함으로써, 진정한 공동체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고독하고 비극적인 정조의, 그러나 다분히 의지로 충만한 눈빛을 가진 지사와 같은 모습이다.
물론 말년의 사르트르와 카뮈라면 이러한 그림을 좋아하겠지만, 이는 이미 실존주의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 멀리 가버린 그들의 모습일 뿐이다. 즉, 여기에는 실존주의를 버린, 또는 실존주의를 굴절시키는 결론을 채택해버린 카뮈나 사르트르에 대한 묘사만이 있을 뿐이다.
시대를 앞선 명저인 『아웃사이더』와 『종교와 반항인』의 저자인 콜린 윌슨은 실존주의가 전개되어나간 두 방향성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정치적 지향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지향이다. 그리고 전자는 실존주의의 종말을 가져왔다. 전자로 빠진 이들은 실존주의의 생기를 잃고 전멸하고야 말았다.
실존은 어원 그대로 '밖에 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실존은 태생적으로 구조를 해체할 수밖에 없다. 특히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본질적인 가치로서 자기규정을 이루고 있는 구조일수록, 실존은 더욱 그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끝없이 구조 밖으로 빠지려는 이 실존의 특질을 우리는 자유라고 말한다. 때문에 실존은 자유에 대한 것이지, 구조에 대한 것이 아니다. 구조는 언어로 구축된다. 그리고 언어는 불안을 통제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즉, 구조는 안정을 위해 운영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은 안정을 제공하는 울타리 안에 머물기보다는, 울타리 밖에 펼쳐져 있는 불안의 숲을 향한다. 벽 밖의 자유를 향한다. 진격의 거인이다.
그래서 실존과 가장 유사한 전통으로 말해지는 것은 바로 선(禪)이다. 특히 조사선(祖師禪)은 부처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구조 안의 정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구조 밖에 있다고 말하는 격외선(格外禪)의 풍모를 보임으로써, 실존과의 핵심적인 공유점을 형성한다.
이를 대상의 문제로 이야기하자면, 구조는 구조 안에 있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추구로 갈무리되며, 실존은 구조 안에 있는 모든 대상에 대한 추구를 무화하는 것이다.
대상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기 대상이다. 곧, 자기가 투사된 것이 바로 대상이다. 때문에 구조는 대상에 대한 추구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은 대상을 무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자기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처럼 구조와 실존은 각기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정치는 바로 이 구조의 문제다. 그래서 정치적 방향성으로 흐른 실존주의가 구조의 논리 속에서 자멸하게 되는 일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단순하게, 저항적인 독립투사처럼 형상화되는 정치적 지향의 실존주의적 인간상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존재감을 자기가 저항하고 있는 대상을 통해서밖에는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는 마치, 반항적인 자식이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순간 속에서만 자기의 존재감을 실감하게 되는 모습과도 같다.
곧, 자기의 유일한 존재의 이유가 바로 아버지라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존재에 앞서,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특정한 대상을 설정한 결과, 그 대상은 이제 본질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 어떤 본질로도 규정될 수 없으며, 그 모든 본질에 앞서있는 실존의 개념은 이와 같이 근간에서부터 붕괴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지향의 경우, 특정한 대상에 대한 찬동과 반동은 실상 동일한 의존을 의미한다. 의존은 위탁이다. 정치적 지향은 자기의 존재감을 대상에게 위탁하려는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독립투사 같은 면모로 그의 모습이 묘사된다 하더라도, 이는 아버지와 같은 대상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그저 나쁜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로 갈아치우겠다는 아버지 개혁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그 개혁의 의도는, 아버지 없이는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서 자기의 실존을 몰락시킬 뿐이다.
이에 반해, 종교적 지향을 갖는 실존주의는 전혀 다르게 드러난다. 그것은 키르케고르에게서 선언되어, 우리가 정말로 실존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함의를 지닌 바로 그 실존주의다.
종교적 지향의 실존주의는 아버지를 개혁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버지와 같은 대상에 의존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갈아치우고자 한다. 곧, 내면의 혁명이다.
실존주의는 결코 외적 구조의 개혁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적 자기의 혁명에 대한 문제다.
실존은 부조리한 환경과 싸워 그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적 주체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외적 환경을 변화시킨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존의 기획이 아니다.
실존신학자인 폴 틸리히의 제자이자, 미국의 실존심리학의 대부인 롤로 메이는, 어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의 외적 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 부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는 여전히 돈이라는 개념을 본질적인 정답의 구조로 놓고 있는 까닭에, 이 경우 그가 실존적인 삶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개혁은 동일한 구조 위에서 A를 B로 대체하는 것이며, 혁명은 그 구조 자체를 뒤집는 것이다. 때문에 개혁은 그 구조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지며, 반면 혁명은 구조로부터의 필연적인 좌절이 그 핵심이 된다.
구조에 대한 좌절, 이를 키르케고르는 더 극단적으로 절망이라고 묘사한다.
분명하게 우리는 한계로 인해 절망한다. 그리고 그 절망을 통해, 한계 밖을 소망하게 된다. 전자는 유한성이라고 명명되며, 후자는 초월성이라고 명명된다.
실존은 바로 이 유한성과 초월성의 역설적 공속이다. 한계 속에서 소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실존이다. 그래서 실존은 언제나 소망형의 동사다.
때문에 소망은 해결의 문제가 아니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통제의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소망은 언제나 삶을 향한 소망인 까닭이다. 그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또 살고 싶다고, 이런 나도 살 수 있겠냐고 외치는 바로 그 소망인 까닭이다. 바로 그렇게 삶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 까닭이다.
이 지점에서 가브리엘 마르셀은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의 이 삶은 풀어야 할 문제(problem)가 아니라, 오히려 묵상해야 할 신비(mystery)라고.
따라서 소망은 구원자의 논리에 복속되지 않는다. 삶을 향한 소망으로 사는 이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다. 그 어떤 유능한 구원자라 할지라도, 나의 삶과 죽음의 신비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존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다. 삶과 나 사이에서만 펼쳐지는 가장 은밀하면서 매혹적인 실재에 대한 묘사다. '할 수 없으나, 하고 싶다'를 소망하며, 삶을 자기 자신에게로 어떻게든 초대하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이다. 그리고 그렇게 초대된 삶이 그 전까지의 자신을 해체시키며, 다시 새로운 자신을 구성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내적 혁명의 서사다.
그러나 정치는 이와는 반대로 해결의 논리다. 정치는 역설을 용납할 수 없다. 한계를 인정할 수 없다. 정치는 역설을 모순으로 보며 이를 해결하려 하고,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집단주의의 힘으로 한계를 억지로 뚫어내려 한다.
그래서 정치는 소망이 아닌 당위다. 해결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당위다. 이에 따라 정치의 주체는 자연스레 자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부모와 같은 구원자로서 형상화된다. 그리고 이 구원자가 이내 우상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일은 필연이다. 특히나 정치가 한계를 부정하려 하는 의지의 경향성을 크게 내포할수록, 이 우상화는 더욱더 가속화된다.
틸리히는 우상화를 '유한한 것이 똑같은 유한한 것에게 무한한 것을 기대하는 행위'로서 정의한다. 정치는 결코 개인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유능하게 응답할 수 없다.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언제나 구조 밖에서 밀려오며, 정치는 구조 안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태생적으로 유한한 정치가 자기도취된 형태로서 모든 것의 해결을 꿈꿀 때, 정치는 마치 자기가 유한한 것을 무한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색채를 띠게 된다.
이것은 곧 자기도취된 정치가 집단주의적 도취로 확대되는 거대한 우상화의 징후다. 특히나 정치의 문제가, 인품, 정의, 도덕, 천명, 역사의 뜻 등과 같은,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개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구조 속에서는, 이러한 우상화는 준비된 예언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 어떤 우상화도, 우상에 대한 집단주의적 도취도, 한 개인에게 의미를 제공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의미의 시대다.
이를테면, 니체나 포이어바흐와 같은 이가 신의 죽음을 선언했을 때, 거기에 담긴 진정한 함의는, '설령 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였다.
의미가 없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때문에 이 없음으로 인해 자각되는 만성적인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 의미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실존상담의 한 분파에 속하는 로고테라피(의미치료)를 주창한 빅터 프랑클과 같은 이는 이러한 사실을 일찌감치 포착하고 있었다. 그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자기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이는 어떠한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현대성이다. 현대의 인간은 의미로만 구원될 수 있다.
그리고 의미는 오직 삶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처럼, 의미는 삶과 독대하는 개인만이 고유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정치가 주는 것은 의미가 아니다. 정치가 제공하는 것은 가치다. 그리고 가치는 의미에 대한 집단주의적 대체물이다.
가치는 보편적인 것이며, 의미는 특수한 것이다. 때문에 가치는 개인의 특수한 구체성에 응답하지 못한다. 가장 깊은 개인의 심연에 닿지 못한다. 동시에 가치는 남이 만든 것이며, 의미는 스스로 창발한 것이다. 때문에 가치는 가치를 받아들인 개인을 종속시키며, 의미는 의미로 말미암아 개인을 자유롭게끔 한다.
특정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집단적 구조는 개인의 생존을 보다 증진시킬지는 몰라도, 개인의 의미를 결코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근대가 허물어지면서, 이 사실은 더욱 명백히 드러났다. 아니, 오히려 이 사실의 자각을 통해, 위대한 집단정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근대의 망상은 종언을 고했다.
생존이 먼저 가능해야, 의미 또한 가능하다는 말은, 정치권의 진영논리만큼이나 공허한 말이다. 그 둘은 애초 분리된 것이 아니다.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랑클은 정확하게 이를 방증한다. 실존은 언제나 '의미 있게 생존하기'의 문제다. 이는 물론 전술한 것처럼 '가치 있게 생존하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성의 것이다.
이와 같이, 삶과 개인을 연결시킴으로써, 의미 있게 생존할 수 있는 현실을 안내해온 전통이 바로 실존의 전통이고, 동시에 무수한 고등종교의 전통들이다. 이른바, 종교적 지향을 갖는 실존주의의 맥락에 속한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붓다와 예수는 종교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었다. 붓다는 모든 것을 통치하는 전륜성왕의 가능성을 버리고 깨닫기를 선택했으며, 예수는 하나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을 철저하게 분리했다. 그들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 어떤 정치의 영역에서도 개인의 구원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정치는 인간 구원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는 인간 복지의 문제다.
그리고 인간은 복지 없이도 살 수 없지만, 구원 없이는 살 수 없다. 즉, 인간은 가치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다. 모든 자살자는 무가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의미하기 때문에 삶을 포기한다. 이와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복지가 필요한 시대인가, 구원이 필요한 시대인가? 가치가 필요한 시대인가, 의미가 필요한 시대인가?
필요가 소망을 낳는다.
이 시대의 소망은 바로 이것이다.
'나도 제발 사람답게 살아봤으면 좋겠다.'
이 소망은, 이미 여기에 사람이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필요를 시사한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싶어한다는 것,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싶어하다는 것, 사람이 소외로부터 그 자신을 회복하고 싶어한다는 것, 이것은 결코 복지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구원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정치가 아니다. 바로 실존이다. 실존만이 이 시대의 답이다.
우리는 누구나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 왼편의 정치인도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고, 오른편의 정치인도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
죽음 앞에서는 이와 같이 모두가 평등한 조건이다. 누구도 특혜를 갖고 있지 않다. 누구도 죽음에 대해 더 우월한 조건을 확보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정말로 똑같이, 죽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이 말은,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삶에 대해 중요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정치적 주체들은, 이처럼 우리만큼이나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이다.
때문에, 보다 나은 생존방식을 확보해야만, 그로 인해 생겨난 여유로 말미암아 삶의 질적인 차원을, 곧 의미의 문제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애초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렇게 정치적 헤게모니를 위해 봉사하는 언어들이 축조해낸 구조의 바깥쪽에서, 그 언어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삶은 이미 매순간 우리에게 들이닥쳐오고 있는 까닭이다.
의미는 미래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붙잡지 않으면 영영 없는 것이다. 근대가 자행한 강렬한 최면인 진보사관의 환상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현재적 감수성을 상실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이 삶이 우리에게 있어 단 한 번뿐인 기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기회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구조를 뚫고 들어오는 삶을 영접하지 않으면, 동시에 구조의 바깥에서 흘러 들어오는 자유의 공기를 따라 우리의 몸을 구조 밖으로 내밀지 않으면, 곧 실존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의 유토피아와 같은 것은 없다.
눈을 떠야 할 때다. 정치가 아닌 삶을 만나야 할 때다. 삶이 개방해주는 나를 알아야 할 때다. 그리고 그 나를,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가장 존귀한 나를 부르짖어야 할 때다.
깨어나라.
나로부터의 혁명이다.
Mad Season - Wake Up
Wake up young man
깨어나라, 젊은이여
It’s time to wake up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