쩌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심리재난의 때가 도래하였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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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렸는가? 최후의 종은 울렸는가?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울리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돌연히 등을 돌려버린 연인처럼, 엄마의 품에서 추방당한 아이의 울음처럼, 때는 갑작스럽고도 황망히 닥쳐올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을 묻는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던 것이 우리를 가장 위협하는 것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공포다.


마음이 그대들에게 그러하다.


그대들을 지켜주던 환경이 이제 그대들을 습격해오는 악의로 가득한 세력으로 변모했을 때 그대들이 느끼던 심정을 안다. 인간들은 그것을 재난이라고 불렀다.


동이 트면 행군이 시작될 것이다. 그대들을 치기 위해 예리하게 세워진 도검이 아침해에 반사되어 시린 날빛을 더한다. 그대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던 마음이 이 날을 벼르고 있었다고 들려오는 바람에 나는 들었다.


마음이 그대들을 향해 맹렬히 돌격해올 오늘, 심리재난의 날이 밝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그대들을 배신했다고는 듣지 못하였다.


인간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을 배신했다고만 내 귀에는 들려왔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한 가지 비밀을 전하고자 한다.


이 비밀을 아는 자에게는 지혜가 함께하리니, 심리재난은 기후재난의 일종이다.


자신의 마음을 찍어누르고, 도륙하고, 억지로 집어삼켜온 폭력이 아침해에 반사되듯 이제 그대들을 향해 맹렬히 되돌아간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던 인간이 어느 날 돌변하여 자신을 무참히 가해한 그 공포를 마음은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망막에 새겨져 거울처럼 비쳤다.


마음은 그대들의 거울이다.


마음을 짓밟으면서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짓밟아온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었던가?


자신에게 그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이 되어 왔던가?


자신이 자신을 짓눌러, 자신이 자신에게 위축되어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우울이다.


우울증은 인간들이 터한 대지 위에 그 어떤 전염병보다도 기승을 부리며 위세를 떨치고 있다.


오늘날의 심리재난은 이 우울증이라는 병마의 형상으로 찾아든다.


그대들이 그대들 자신을 성공적으로 저주해온 그 결과다. 저주가 공포를 만들었다.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하고, 이야기에 취하려 한다. 더욱 도취하기 위해 군중 속으로 파고 들고, 관계 안으로 파고 들다가, 그 밀집된 압력에 눌려 파멸을 맞이한다.


심리재난은 반드시 물리재난이 된다. 자신의 마음을 외면할수록 고통은 현실에서 실체화된다.


뭘 해도 쉬이 지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일인데도 자꾸만 기억 속에서 사라져 못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렇게 말하게 되는 중에 있다.


"더, 더 많이 느끼고 싶어."


심리적 불감증을 만성적으로 호소하는 이들만이 더 많은 자극을 원하게 된다. 이 마음의 남용이 자신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을 모른 채 우울증은 가을밤처럼 깊어간다.


우울한가? 최후의 종소리처럼 우울한가?


우리는 도대체 왜 우울해졌는가?


우울의 무게는 환상의 무게다. 실체가 아니라서 추산될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 그래서 그 무게가 실체화된 고통이 되면 인간은 죽는다. 버틸 수 없다.


오늘날 환상이 인간들에게 끝없이 강요된다. 환상을 추구하지 않으면 뒤쳐진 이로 손가락질을 받는다. 이처럼 불가피하게 강요된 환상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추구할 때 환상은 이상이 된다.


우울증은 바로 자기 안에 자리잡은 이 이상을 악착같이 고집하기에 생겨난다.


이것은 늘 가장 '중심'이라고 간주되는 곳에서 온 환상에 맞추어 자기를 평가하고 변형하려는 일로 일어난다. 자기 대신에 환상에 참여함으로써 자기를 죽여 더 중앙화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 속에서는 자신이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온전한 시선을 잃었다.


잃어버린 자신의 시선 대신에 자기를 비추어줄 카메라의 시선을 의존한다. 어디에 가든 가상의 카메라가 자신을 뒤쫓는다. 선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괜찮은 자기 자신일지가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 늘 평가된다.


이것이 바로 이상이다. 근대시민사회의 종착점이다.


자발적 가스라이팅의 문화가 완성되었다.


심리재난은 길을 잃어 가장 몰락한 문화의 징후다.


나는 이제 비명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침몰해가는 것들의 무게를 손에 올리며 이렇게 그대들에게 묻고자 한다.


여기에도 길은 있는가?


누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 세상 그 어느 곳인가에 여전히 그대들을 위한 온전한 시선은 살아 있는가?


나는 이 세상의 가장 변두리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아무 영향력 없는 시대의 쩌리로서 저물어가는 중심을 향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하찮기 짝이 없는 변두리의 시선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해는 언제나 이 세상의 가장 변두리에서 떠오른다.


그대들의 가슴을 환히 비추며 돌격해오기 위해.


쩌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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