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앎으로부터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지니"
나는 떨어져간다.
그대들로부터 떨어져간다.
나는 그대들을 보고 있지만 그대들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대들의 말을 듣고 있지만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나는 그대들이 누구인지 심지어 알지도 못한다.
그대들이 그 누군가로서 나의 앎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이 얼마나 경사로운 축복인가!
나에게 납득되기 전까지는 그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내 앞에서 긴 행렬로 늘어선 채 자기를 설명해내야만 하는 임무만을 떠맡아 있는, 끔찍한 내 앎의 감옥에서 그대들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이 얼마나 기적같은 선물인가!
나는 무지의 어둠 속으로 떨어져간다. 나는 두렵고, 더 설렐 것이다.
내 앎의 구속에서 풀려난 그대들이 자유롭게 날아가는 일에 가슴이 터져오를 것이다.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대들이 몰라서 문제인 경우는 거의 없다. 언제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대들은 문화에 속았다.
문화는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나는 너를 다 알고 있어."
문화가 만들어낸 이야기들 속에서 그대들 자신의 모습을 찾으며 "와 저게 내 모습이야!"라며 그대들은 환호성을 질러왔다. 네가 좋아하는 것쯤은 다 알고 있지, 라며 문화의 빅데이터가 내민 추천목록을 전해받으며 그대들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해왔다.
그대들은 다만 그대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던 것뿐이다.
문화도 그대들을 모른다.
그대들에 대한 문화의 앎은, 그대들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문화가 꿈꾸던 그 모습이었을 뿐이다.
문화도, 또 그대들 자신도, 그대들이 정말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누구도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이 척박한 세상 속에서 그대들이 모질게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숨이 가빴는가? 생각만큼 잘 쉬어지지 않았는가?
그대의 숨쉬기의 표현, 쉼표가 봉쇄되어 있었다.
문화는 다 허용하는 척해왔지만 실은 그럴 듯한 자신의 이야기로 구성해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표현을 억눌러 왔기에 디프레션(depression)이다. 우울증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원래 숨쉬는 것만으로도 익스프레션(expression)이 틀림없었으리라. 시작된 때부터 그 끝까지 그대들의 인생은 성대한 자유의 표현, 그것에 다름없음이 분명했으리라. 바로 그러라고 이 세상에 난 것이 영원한 언약이었음이리라.
내가 그대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쩌리일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얼마나 갸륵한 은총인가!
가장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인간들은 기회를 얻는다고 나는 들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장님이 되어 더욱 몰라갈수록, 인간을 위한 문은 더욱 선명하게 빛나게 된다고도 나는 들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몰라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배웠다.
상대를 자기의 앎의 감옥에서 자유롭게 하는 일이 사랑의 유일한 사업이라고 나는 분명하게 동녘 햇살로부터 전해배웠다.
내 앎의 선한 영향력으로 그대들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햇살이 그대들을 환히 비추어가도록 내가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고도 삶에서 배웠다.
나는 태양이 비추는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목격하는 자, 그대들의 자유를 한정없이 노래하는 자다.
가장 어두운 칠흑의 골짜기에서도 운명과 같이 태동할 그대들의 날갯짓을 바라보며 마침내 좋아 죽을 자다.
쩌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