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자신을 키우는 기쁨"
그대들은 혹시 온전해야만 한다고 들었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속고 있다.
그대들은 온전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온전하게 될 수도 없다.
이미 온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온전하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수육하는 그 즐거움을 누려도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키울 수 없다고 믿을 때, 중요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문화고, 정보며, 곧 관계다.
관계라는 것은 자기를 수육할 기능을 여러 대상들에게 분산시켜 놓은 것이다.
분산해놓은 기능을 다시 한 데로 모으는 것이 통합이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밥해주는 엄마, 안마해주는 엄마, 청소해주는 엄마, 사과 깎아주는 엄마, 라면 끓여주는 엄마 등을 전부 다 자신에게 수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기능적 모성으로 만들어 자기를 위한 봉사재로 활용하고자 하는 야심찬 생각이다.
낡은 인간들은 이것을 꿈꾼다.
인간의 정신이 낡을수록 모성은 신격화된다.
새로운 인간은 모성을 착취하지 않는다. 그의 어미를 낡은 멍에에서 해방하고자 한다.
통합은 서로가 서로에게 쇠고랑을 채우라고 종용하는 문화의 논리다. 모든 관계는 이 통합의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 관계 속에 갇힌 인간의 소망은 반드시 이러하다.
"나를 사랑해줘."
자신이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통합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관계의 모두를 두루 만족시키는 관계의 연금술사가 되려 할수록, 우리는 사랑의 무능력자가 되어 간다.
그대들이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대들의 살결에는 생기가 돌아온다. 별빛이 작은 마굿간에 내려앉아 이제 신성한 수육의 공간이 된 그곳을 따스히 비추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로 되어 있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스스로 살이 된다.
스스로 살이 되는 이 일을 스스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것이 자신이 자신을 키우는 일이다.
내 살이 나에게 딱 맞듯이, 나는 나에게 가장 온전한 것이다.
내가 바라는 조건에 맞게 가장 취향껏 라면을 끓일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나밖에는 없다.
나는 나에게 가장 완전한 양육자며, 가장 좋은 엄마다.
그대들은 언제나 그대들 자신에게 가장 좋은 엄마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자기를 자기 자신에 대한 못난 양육자로 보며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자책에 빠지고 참담해지는 일이 멎게 된다.
그대들에게 이제 나는 가장 아름다운 비밀을 말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만족되어야 할 인간은 바로 그대들 자신이다.
그대들은 가장 완전하게 만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들 자신뿐이다.
나는 나에게 가장 완전한 것, 가장 맞춤형의 것이다.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것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기쁨이다. 나를 키우는 기쁨이다.
모든 기쁨에는 깊음이 있다. 깊이 내려갈수록 더 기뻐진다.
나의 깊이를 향한 이 기쁨의 여정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깊이를 모를 메마름 없는 물길처럼 나에게서 시작되어 나를 향해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양수에 젖어 태어나듯, 이미 태어난 우리의 삶이 이 사랑의 물길에 젖어있기에, 이것을 이미 온전하다고 말한다.
그대들의 뿌리가 곧 그대들에게서 자라날 왕성한 기쁨의 가지다.
이 기쁨을 아는 그대들은 새벽별 아래서 행복하다.
쩌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