쩌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0

"왜 마음의 병이 낫지 않는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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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는 정신위생학이다.


병과 건강, 이것들은 양립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병으로 수심이 깊은 우울한 자일지, 건강으로 시간을 춤추게 하는 활기찬 자일지를 그대들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리라.


그러니 그대들은 진실로 병이 낫기를 희망해야 하고, 희망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하리라.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분명한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병에 탐닉하고 있어서다.


작고 약하고 병든 것에 끌려하는 도착의 증세가 시대에 만연할 때, 그것은 병든 시대다.


또 그것은 이상성애의 시대다.


작고 약하고 병든 것에 끌려하는 것은 일종의 소아성애다. 요정가루를 뿌려 하늘을 날아다니는 녹색요정의 왕국은 이 소아성애로 가득 차있다.


친절하고 달콤한 혀놀림으로 녹색요정들은 더 많은 병을 세상에 전염시킨다. 자기의 쾌락을 증대시키기 위해 더 많은 대상들을 소아로 둔갑시킨다. 작고 약하고 병든 것은 그 장점이 예찬되고, 그 형상이 지켜지며, 죽을 때까지 작고 약하고 병든 성질로 지속된다.


요정왕국으로 유괴된 인간의 영혼은 부드럽고 자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정이 마법으로 만든 병 속에서 작고 약하고 병든 것으로 태어나 그 병 속에서 죽어간다. 병든 세월이다.


오늘날 요정들은 마음의 의사라는 이름을 걸고 있다.


녹색 옷 대신에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다.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병에 탐닉하고 있는 이 마음의 의사로 둔갑한 요정들에게 그대들의 정신건강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혹시 요정이 조제해준 마법의 약을 복용해본 적이 있는가?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다시 말하고자 한다.


병이 낫지 않는 것은 약에 탐닉하고 있어서다.


약봉지를 들어 처방전에 써있는 마법의 약의 이름을 살펴보라.


'연민'이라고 써있다.


연민은 마약이다.


한 번이라도 복용하면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끝없이 취해간다.


작고 약하고 병든 것에 투여하는 것이 연민이다. 이 일은 짜릿하다. 작고 약하고 병든 것에 연민이 투여될수록 작고 약하고 병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듯한 감각이 지배해간다.


연민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이제 작고 약하고 병든 것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작지 않고 약하지 않고 병들지 않은 것이다. 힘과 활기로 이 세상의 모든 작고 약하고 병든 마음들을 구하고 지켜낼 수 있는 마음의 의사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이 병에 걸려있다는 사실은 망각된다.


작고 약하고 병든 것에 탐닉하여 투여하는 연민의 마약을 통해 쾌락의 절정감은 찾아들고, 그 절정의 순간은 더욱 갈망된다. 그리고 갈망은 반복된다.


이 과정 자체가 오직 망각을 위한 장치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작고 약하고 병든 것으로 착취하여 자기의 이상성애를 채우려는 일은 망각의 목적만을 갖는다.


모든 불건강함은 망각하려 하기에 불건강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망각, 이것이 모든 마음의 병의 이유다.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병에 탐닉하기 때문이며, 약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병약한 자신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병약한 자신에 탐닉하고 있는 이 상태다.


여기에는 이득이 있다. 병약한 자신에 탐닉하면 실제의 자신을 망각해도 되는 정당성을 얻게 되는 것만 같다.


"나는 병약하니까 그래도 돼."


그러나 나는 하늘을 활공하는 힘찬 새들로부터 그러한 말은 듣지 못하였다.


자기연민이야말로 최대치의 자기오만이라는 말만이 영겁의 시간 동안 지옥의 문에 새겨져 있었다고만 나는 들었다.


일찍이 먼 서쪽 게르만인의 땅에서 인간의 최후를 경고하기 위해 부르짖던 한 현인은 이렇게 말했다.


"병약한 것을 탐닉하는 것이 악이다."


악은 고통을 부르며, 병약한 것에 취해 자신을 망각하려 할 때 고통은 필연이다. 마음의 병의 고통은 결코 멎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들이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고통의 기능이다.


고통은 긴 시간 동안 병자처럼 누워 있다가 기지개를 켜고자 하는 이의 귀에 들려오는 근육과 뼈와 혈관의 소리다.


그대들 자신의 소리며, 살고자 내지르는 삶의 절규다.


악이 고통을 야기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언제나 악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작고 약하고 병든 것으로 착취하려 하는 악 앞에서, 삶은 그에 저항하는 고통의 목소리를 우리 자신의 귀에 들리게 해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깨어나도록 한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영겁의 시간 동안 우리 자신의 근육과 뼈와 혈관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


건강한 것은 삶이다.


삶이 스스로를 치유한다.


정신위생학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


그대들이 만약에 탐닉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대들은 차라리 삶에 탐닉하라.


삶을 더욱 살아갈수록 그대들은 건강해진다. 과잉복용해도 해가 되지 않는 약이 있다면 삶만이 그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을 병약한 것으로 만들어 탐닉하지 않을 때 그대들은 정말로 산다.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멈출 때 그대들은 또한 정말로 산다.


그리고 그대들이 정말로 살아있다면, 그대들에게는 병약함에 탐닉하거나 그에 대해 연민을 가져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마음의 병은 이처럼 그대들의 마음에 병약이라는 것이 아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 즉시 낫는다.


삶의 내적 과정인 마음은 언제나 스스로 치유하기 때문이며, 이미 치유했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귀가 이 소리를 들으려고 아주 긴 시간 동안 새벽별의 속삭임에 열려 있었다.


마음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은, 그런 것이 원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기지개를 켜라.


쩌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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