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의 화는 충분하다"
나는 잘났는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그럴 때 그대들은 화가 날 것이다.
자신이 잘나지 않았다고 정확하게 알면 그 화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다들 잘났다고 자기를 선전하고 있는데 자신만 잘나지 않은 이가 되면 낙오자가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자신도 잘난 자신을 고집해야만 한다.
잘났다는 것은 이제 최소한도의 필수적 생존조건이 되었다.
잘나지 못하면 죽는다. 이 두려움이 두터운 안개처럼 모두를 위압한다.
잘난 자신을 계속해서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선다. 잘날 수 있는 소재가 없는 이들은 가난한 알맹이에 광대 같은 옷을 걸치고는, 또는 그 반대로 옷을 벗어 던진 벌거숭이 광대가 되어서는 자신의 이야기라도 잘난 듯이 꾸며내고 있다.
네트워크라는 허공을 캔버스삼아 그려진 이야기는, 뇌의 주름 속으로 파고들어와 강박적 이상으로 자리잡는다. 먹이를 포획하기 위해 놓은 덫이 스스로에게 작동하는 함정이 된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지어낸 만큼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의 크기는 더욱 커지고, 현실을 월등히 추월해버린 이상에 의해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낙원의 신기루만 자욱해진다.
그대들이여, 우울증은 필연이다.
나는 도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은 왜 잘난 것이 나와 관계있다고 생각했던가?
엄마가 잘 낳은 것이지 내가 나를 낳지 않았다.
잘난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내가 잘 낳아진 존재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엄마일 것이다.
내가 잘나야만 엄마가 안심한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것은 엄마의 죄책감을 자기의 감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엄마의 죄책감을 뿌리로 해서 계속 잘나야 한다는 운동이 생겨난다.
그런데 엄마는 왜 죄책감을 갖게 되었는가?
자식이 계속 잘나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잘남의 사업을 엄마 자신이 효과적으로 돕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과 두려움이 여기에는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닭과 달걀은 갈등한다.
서로 자신이 부족해 미안하다며 역동의 수레바퀴는 격정적으로 회전한다. 끝간 데를 모르는 것은 수레바퀴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지 못한 것, 그것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충분하다는 그 말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충분한 엄마와 충분한 아이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누구도 그렇게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자기 자신에게 충분함을 허락해본 적이 있었던가?
허락하지 않으니 그것은 영영 갖지 못하게 된다.
가질 수 없는 그 결핍감에 언제나 화가 난다.
아무리 화를 내도 가질 수 없기에 화는 결국 바위산의 무게를 짊어진 거인처럼 만성적으로 억눌린 우울증이 된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도 분한가?
그렇지 않다. 충분하다. 그대들의 화도 이제 충분하리라.
낼만큼 냈다.
대지를 수천 번 불태우고 하늘마저 핏빛으로 물들일 만큼 화는 충분했다.
그러면 화가 사라진다.
마음은 충분하면 이제 멈춘다.
충분하다고 두 눈을 바로 떠 보지 않으니 잔에서 넘쳐 흐르고 결국 잔마저 깨지는 것이다. 화가 두려운 것은 이처럼 자기파멸의 암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로 파멸의 탄식이 아닌 어떤 것을 찾고 있다면,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충분하다.
충분하다.
이것은 그대들의 생리적 건강에 좋은 말이다.
그대들의 몸이 화가 아닌 다른 좋은 것으로 채워질 기회다.
분하기만 했던 지금까지의 것들이 다 충분했으니 이제 새로운 것이 온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분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했으니 또 다른 충분함의 만찬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와 독성어린 우울의 대기가 흩어져간다.
이제 그대들이 든 잔에서 넘치는 것은 결핍이 낳은 화가 아니라 충족을 아는 행복이리라.
충분함을 말하는 이는 화 속에 갇히지 않고 행복을 향한 조화 속에 흐른다.
잘 낳아진 사람의 향기로 흐른다.
쩌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