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엇인지를 물으신다면"
실존상담자에게 누군가가 진지하게 마음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수십 년을 공부하고 체험했어도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배워갈수록 더 모르겠어요."
진짜 전문가들은 원래 자기의 전문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알면 알수록 끝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짜 전문가들은 '통합' 같은 말을 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분야만 하더라도 끝이 없는데 다른 분야까지 통합해낼 정도의 전문성을 한 사람의 짧은 인생 동안 갖추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비전문가들이, 그리고 인근 초등학생들에게 맥가이버라고 불리는 동네전파상 기술자아저씨의 감수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모든 분야를 다 아는 척하며 자기는 그것들의 장점만을 모아 통합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원래 비전문가의 상태일 때는 모든 것이 쉽고 만만해보입니다. 유튜브 등에 올라와 있는 일종의 '메뉴얼' 같은 것을 보고 따라하면 자기도 잘 하는 것처럼 착각됩니다.
로스팅도 할 줄 모르는 이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보편적으로 추천되는 산미있는 원두를 사서 메뉴얼에 따라 드립커피를 내린 뒤, 이제 자기가 커피계에서 중간 이상은 하는 실력자가 되었다고 남들 앞에 당당하게 말하는 일도 자주 생겨납니다. 거기에 버터가루를 넣은 뒤, 커피를 잘 아는 진정한 메니아들만 마실 줄 아는 특별한 음용법을 즐기는 소수의 문화적 특권층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유독 상담심리학 분야에서는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특히 별다른 능력이나 직업을 갖지 않은 30-40대 남성들이, 상담을 '못배운 아줌마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악질적인 편견을 갖고서는, 자신의 똑똑함으로 금방 상담계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이런 이들의 특징은 마음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척한다는 것입니다.
"아, 마음이란 우리의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먼저 배에서부터 느껴지고요. 그 다음엔 가슴으로 올라오고, 마지막엔 머리에서 경험됩니다."
"마음은 그냥 모르는 채로 가만히 바라보고, 듣고, 관심만을 갖고 있으면, 자기가 알아서 찾아와 우리에게 느낌으로 다 알려주는 놀라운 것입니다."
"모든 마음은 다 선한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 선한 의도의 마음을 그냥 모델링하기만 하면 우리가 다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성공하게 됩니다."
"마음에 대해 융이랑 양명학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선불교의 강점은 취하고 단점은 극복한 형태인데요. 마음은 결국 느낌을 잘 느끼고, 그 느낌을 윤리적으로 잘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진짜 전문가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에 대해 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맞는 척하더라도, 무엇보다 그 의도에서부터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개 말도 이상합니다.)
여기에는 진리에 대한 우악스러운 폭력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일방적 기술화'입니다.
이렇게 기술화된 진리는 반드시 환원됩니다. 팔다리가 잘린 도구적 용법으로만 남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진리성이 상실됩니다.
나아가 그 오체분시된 진리는, 거의 반드시 그러한 기술적 진리를 말하는 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착하게 보이기 위한 목적에 봉사하는 액세서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대해져야 할 왕자와 공주로서의 주체임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현대적 자아가 만들어낸 프레임입니다.
획일적이고 당위적인 목적을 위해 기능하는 특정한 프레임 속에서 마음이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진짜 전문가는 자기가 갖고 있던 바로 그 프레임을 깨려고 계속 나아가는 정직한 연구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임의적으로 언어화한 것들을 매번 스스로 해체합니다. 그러니 더욱더 통합이란 것이 가능할리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다락방의 마법서들처럼 쌓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두 발로 밟아가며 여행하는 길의 풍경에 따라 늘 다르게 묘사됩니다.
때문에 이 '불확정성'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음이 무엇이죠?"라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만 바꾸어도 이는 분명해집니다.
"당신은 누구죠?"
여기에 대해 하나의 정답을 자신있게 말하는 이는 인생의 하수입니다.
잠깐 뜸을 들였다가, 자기가 주로 쓰는 페르조나 6개와, 부속된 그림자 6개를 말하는 이도 인생의 하수입니다.
자신은 이 모든 마음의 온전함을 알아주고 바라보며 감동받는 자라고 말하는 이는 인생의 최하수입니다.
가장 미성숙한 아이만이, 그것이 마치 궁극의 대답이기라도 한 양 놀이터에서 자상한 엄마처럼 모든 아이를 알아주고 바라보며 감동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마음을 알아주는 엄마가 된다거나, 또는 그런 엄마의 시선 속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가 되는 '엄마지상주의'의 소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모험은 엄마의 시선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엄마의 시선 밖은, 자기 자신이 착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될 목적으로 구성된 프레임 밖입니다.
'착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그 정답 밖입니다.
그래서 모험을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알았다 싶던 것들도 잘 모르겠고, 점점 더 헷갈리기만 합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는 "모든 마음은 뭐시기다!"라고 소리치는 초등학교 웅변대회 연사가 더는 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계속 모험하게 되는 것은, 알다가도 모르겠고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불확정성 속에 놓일수록, 자유를 실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이 대자유의 사실을 발견해가고, 또 이 사실에 무르익어가는 것이 모험입니다.
모험을 떠나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래서 모든 것이 실은 정해져 있습니다. 자리가 다 정해져서 숨겨져 있을 뿐인 그 '비밀'을 알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척하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해진 가상의 인공놀이터에 앉아 자기는 이제 마음의 온전함을 봐주며 잘 감동하기만 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다 알았고, 이제 자기가 할 일은 그것뿐이라고 간주합니다.
이렇게 넷플릭스 소비자가 되는 것이 마음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 됩니다. 마음의 이야기를 감상할 뿐인데 오히려 큰 돈도 받으니 마음인플루언서의 생활입니다. 인생 살기 참 쉽다 생각도 듭니다.
실존상담자가 극장에서 떠나는 것은, 극장에서 반복상연되는 이러한 이야기들에 가슴뛰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공하는 이야기, 내가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는 이야기, 내가 사람들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내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야기, 내가 참된 왕인 이야기 등의 그 모든 '자유를 가장한 이야기'가 한 자리에 앉아 수천억 번은 반복한 부루마블 게임처럼 지루합니다.
그는 다만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현실에서 살고 싶습니다.
신들이 분주하게 굴리는 마법 주사위도 싫고, 자신이 가만히 있으며 느끼기만 하면 다 된다는 마약 주사기도 싫습니다.
그는 영원히 마음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어 갑니다.
나는 누구인지를 영원히 배우러 갑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그 사실을 배우고자 실존상담자는 영원한 학생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물으신다면, 당신이 그 학생입니다.
자유가 무척 아끼고 있는 자유의 학생, 그 물타는 성냥처럼 빛나는 자유 자신의 영혼입니다.
그러니 물타는 성냥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