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깨닫는마음씨 Sep 07. 2019

독점의 세대와 깨달음의 세대

"연극판 밖으로의 탈출"



  지금의 시대상황은 왜 화를 유발하는가?


  모든 화는 감옥에 갇힌 반응이다. 즉, 모든 화는 자유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촉발된다.


  자유가 상실되는 곳에는 반드시 독재가 있다.


  그렇다면 독재라는 것은 무엇인가?


  특정한 이야기만을 강조하는 것이 독재다. 즉, 특정한 이야기가 다른 모든 이야기에 대해 우선권을 점하며 지배적인 위력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독재다.


  그리고 이 독재의 이야기는 반드시 연극으로 구성된다.


  연극은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를 널리 알리기 위해 채택되는 형식이다. 연극을 통해 특정한 이야기의 주제는 매순간 역동적으로 재현되며, 그 역동성으로 말미암아 이야기는 진짜 삶인 것처럼 우리를 착각시킨다. 곧, 연극은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가 마치 진정한 삶의 핵심인 것 같은 인식적 착각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가상현실이 제공하는 착각이다.


  모든 건국영웅들의 탄생설화가 다양한 극의 형식으로 반복되어 상연되는 이유가 이와 같다. 그들의 지배력에 대한 정당성을, 극이라는 효과적인 가상현실의 형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독재다. 하나의 연극만을 반복하며, 그 연극이 담고 있는 특정한 지배주체의 이야기만을 강화해가는 일이다. 그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극장에서 나가는 일이 도덕주의적 비난에 의해 은밀하게 금지된 채, 하루 종일 극장에서 상연되는 똑같은 연극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것이 바로 창살없는 감옥이며,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지옥이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바로 그러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한국사회의 독재의 주체는 누구인가?


  과거에는 386으로, 지금은 586으로 불리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가 바로 그 독재의 주체다.


  그러나 물론 이는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개개인은 결코 이러한 독재의 주체가 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집단주의적 정신, 융이 제안한 개념에 따르면 집단무의식이 개개인을 그러한 영향권하에 놓이게 한다. 하나하나는 다 선량했던 독일인들이, 집단무의식에 뒤집어 씌워져 무자비한 폭력을 아무 거리낌없이 타자에게 당연한 것처럼 자행했던 그 현실과도 같다.


  586이라는 집단정신이 지금 이 한국사회를 감옥으로, 또 지옥으로 만드는 연극을 끝없이 반복하는 의지의 주체다. 곧 독재의 주체다.


  여기에서 독재는 곧 독점이다.


  과거에는 권력독점의 주체에게 저항했던 586세대가 이제는 경제독점의 주체로서 자리잡고 있다. 아니 비단 경제뿐이 아니다. 도덕, 윤리, 정의, 진실 등처럼, 바람직한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과 같은 그 모든 소재들을 이 586세대가 독점하고 있다.


  586은 분명하게 독점의 세대다. 좋은 것은 전부 다 독점하고자 하는 세대다.


  이 강렬한 독점에의 의지는 어떤 사회에서든 간에 모든 베이비붐 세대에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전쟁의 황폐함을 딛고 이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주인공들로서, 이 베이비붐 세대에게 모든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베이비붐 세대는 모든 사회가 몰아주는 자원의 독점적 수혜자가 되었다. 표현 그대로, 베이비붐 세대는 부모의 양육을 독점하는 것이 당연한 자식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이것은 586세대가 정말로 무엇을 독점하고 있는가를 시사한다.


  586세대가 정말로 독점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은 주인공이다. 연극에서의 주인공의 자리다.


  부모의 관심이 그들에게 집중되어서 얻게 된 바로 그 연극의 중심의 자리, 곧 주인공의 자리를 586세대는 당연한 특권으로 유지하려고 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은 자신이 주인공이고자 위력을 행사한다. 정치력, 경제력, 도덕주의적 담론, 인생경험, 지적 지위 등등, 그들이 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한 소재는 끝이 없다. 어떻게든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가장 유용한 도구를 때마다 적절하게 활용해낸다. 그들에게 집중된 자원이 많았던만큼,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도구 또한 다양하다.


  이처럼 586세대는 연극의 주인공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 주인공이 되려는 의지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586을 제외한 나머지 세대는 이 주인공을 둘러싼 들러리 역할이 된다. 때문에 이 구조 속에서는 무엇을 하든 간에, 586세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일에만 모든 이의 힘이 착취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기에서 가장 최악인 점은, 586세대는 자신들이 다른 모든 세대들에게 힘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신이 주인공인 것이 너무나 당연한 기지(旣知)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늘 희생하며 자기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환경 속에서 자라온 이들이 부모를 벗어나서도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부모의 희생처럼 자기로 인해 희생되는 누군가가 반드시 생겨나야 한다는, 너무나도 단순한 이 사실을 그들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기들을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죄책감을 자극하는 까닭이다.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았지만 여전히 부모에 대한 원망을 갖고 있는 586세대의 정서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죄책감에서 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갖는 죄책감의 크기만큼, 586세대는 자기들의 성취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통해 명징하게 알려진다.


  586세대의 노력보다 수십 배는 더 노력하고 더 많은 스펙을 쌓고 있는 젊은이들이, 586세대가 그 당시 얻어낸 것의 수십 분의 일도 못 미치는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586세대가 누리고 있는 현실이 결코 그들 자신만의 힘으로 성취해낸 현실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586세대가 젊은이들을 보며, 자기네들처럼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는다고 훈계하는 전형적인 훈장님과 같은 경직된 태도를 취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그들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기 때문이다.


  경직된 태도는 언제나 쫓기고 있을 때 생겨난다. 즉, 스스로의 노력이라는 가치로 정당화해오며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누려온 현실이 바로 그 '스스로의 노력'을 그들보다 더 많이 하고 있는 젊은 세대 앞에서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 586세대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들이 세운 자기보호의 논리에 의해, 586세대는 주인공 자리를 필연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내줘야만 하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 논리적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식은, 훈장님이 되어 무조건 혼내는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졸지 말라고 해놓고는 막상 자기가 졸고 있는 모습이 학생들에게 노출되었을 때, 오히려 격하게 학생들을 혼내는 모습과도 같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비록 586세대는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꼰대로 드러나 있는 세대는 바로 이 586세대다.


  586세대가 자신들의 부모를 인식한 바로 그 방식대로, 지금의 젊은 세대는 더 강렬하게 586세대를 꼰대로 느끼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유의 수호자이며, 열린 정신의 소유자고, 평등한 현실의 주창자라고 생각해온 586세대에게 있어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면 그들의 정체성은 붕괴되는 까닭이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누려온 주인공의 자리에서 추락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전략적으로 이에 대처한다.


  꼰대는 일견 그 단어가 주는 어감처럼 결코 무식하지 않다. 오히려 꼰대는 영리함의 대명사다.


  자기 정체성의 붕괴를 막기 위해 586세대가 전략화하는 그 기획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젊은 세대에게 586세대의 정체성을 이식하는 것이다. 곧, 자기들의 젊은 시절의 모습과 똑같이 젊은 세대를 변이시키는 것이다.


  연극의 주인공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연극판 자체가 붕괴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때문에 586세대는 자신들이 주인공의 자리를 독점하던 이 연극판을 유지되도록 하는 데 총력을 동원한다.


  그런데 이 연극판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희생의 연극판이다.


  부모가 자기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자기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오직 희생으로 성립된 바로 그 연극이다.


  그래서 586세대는 이제 이 희생을 미화하고 예찬한다. 자신들이 그 신성한 희생자임을 어필한다. 마치 이순신 장군처럼 모든 이를 위해 거룩한 희생을 이루는 영웅의 모습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고자 시도한다.


  그렇게 이 희생의 연극을 숭고한 것으로 미화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부모세대에 대한 죄책감을 더는 한편, 그 죄책감을 이제 젊은 세대에게 떠넘길 수 있는 구조를 확보하게 된다.


  자신들을 한없이 희생하는 부모처럼 묘사함으로써, 이제 그들의 자식들이 그 앞에서 죄인과 같은 위축된 존재감을 느끼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젊은 세대 앞에서 자신들의 모순이 노출된 끝에, 586세대가 취하게 되는 전략이다. 모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마치 젊은 세대를 위한 자기들의 희생 때문이었던 것처럼 프레임을 구축함으로써, 역으로 젊은 세대를 자기들에게 복속되도록 하려는 고도의 통제논리다.


  여기에서 1차적인 세뇌가 작동한다.


  586세대의 죄책감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인 일군의 젊은 세대는 이제 이 586세대를 수호하기 위해 기꺼이 이 희생의 연극판에 뛰어든다. 그럼으로써 연극판을 유지시키고, 586세대를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보전시킨다.


  그리고 이 1차 세뇌에 걸리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586세대는 또 다른 세뇌의 기제를 작동시킨다.


  그것은 바로 젊은 세대를 더욱더 화나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젊은 세대가 단결하고, 공분을 통해 이 586세대의 독점에 저항하고자 집단주의적인 활동을 전개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이것이 2차적인 세뇌의 방식이다.


  그렇게 젊은 세대가 집단적인 저항의 정치활동을 펼치게 함으로써, 586세대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과 같은 모습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를 변이시키려는 것이다. 586세대 자신들의 자아상을, 자기들에게 저항하는 형식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이식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의 적이 되어줌으로써, 자식이 진정한 삶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자식이 아버지 앞에 회개하고 눈물흘리며, 그렇게 아버지는 신성한 영웅으로 거듭나 만족스럽게 그 자신의 삶을 자식에게로 계승시키는, 대단히 신화적이며, 대단히 통속적인 삼류연극의 그림과도 같다.


  즉, 이것이 꼰대의 가장 영리한 전략이다.


  "개인은 무력하고, 집단은 강하다."


  바로 이것이 이 삼류연극을 통해, 586세대가 끝없이 젊은 세대를 세뇌시키려고 하는 연극의 규칙이다.


  개인의 힘이 어느 때보다도 강한 지금의 젊은 세대를 끊임없이 약화시키고, 시대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오히려 집단주의를 예찬하게 만들고자 하는 은밀한 전략이다.


  왼쪽의 세력이든, 오른쪽의 세력이든 간에, 586세대는 공통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입한다.


  "유능한 부모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즉, 자식에게는 반드시 부모가 중요하다는 프레임을 어떻게든 주입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식뻘인 젊은 세대에게 부모뻘인 586세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세뇌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힘이 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부모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모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곧 깨달은 존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586세대는 젊은 세대가 이 깨달은 세대라는 사실을 최대한 무시하고, 은폐하며, 굴절시키려는 세대다.


  깨달음보다는 오히려 집단주의가 제공하는 양육의 논리로 퇴행하도록 586세대는 조장한다.


  그래야만 이 희생의 연극이, 곧 양육의 연극이 유지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연극이 유지되어야만 자신들이 주인공으로 계속 남을 수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 586세대의 비애가 있다.


  586세대는 자기 자신을 잃은 세대다.


  부모로부터의 기대와, 전례 없이 새시대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 속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기회를 쉽사리 갖지 못했다.


  개인보다는 집단이, 역사가, 민족정신이 늘 그들 앞에 세워진 당위적 기치였다.


  그렇게 586세대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부여받은 세대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그 짐이 너무나 무거웠기에, 그들은 집단일 수밖에 없었다. 집단주의의 정신 속에 자신을 위탁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 역사처럼, 집단 속에서만 586세대는 비로소 자신을 주인공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586세대는 부모 없이는 살 수 없으며, 가족 없이는, 또 집단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느끼는 세대다. 그 안에서만 그들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집단을 벗어나 혼자서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버겁고 무서운 현실인 까닭이다. 586세대 특유의 공동체에 대한 낭만적인 희구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이른바, 그들의 천국은 집단으로 손을 잡고 입장해야 하는 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586세대가 이제 중장년층을 지나 노년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문턱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눈치채가고 있다.


  그 어떤 집단주의의 힘으로도, 그들이 죽게 된다는 운명적 사실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마냥 주인공일 것만 같던 그 연극판을 붕괴시키는 것은, 실은 젊은 세대가 아니라, 바로 시간 그 자체다.


  모든 연극의 막은 시간으로 인해 내려진다.


  586세대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연극은 반드시 종식된다.


  그래서 그들이 오늘날 이토록 치열한 것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 가시권에 두고서,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그들 자신의 삶이 대체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실존적 의문에 그들은 직면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삶의 의미에 대한 자각이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결코 집단주의적 정신 속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사적이고도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인 까닭이다.


  그래서 586세대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지금까지 차마 엄두를 내보지 못했던 개인으로서의 삶을 이제 처음으로 돌아봐야 하는 까닭이다. 연극의 주인공이 아닌, 삶의 주변인으로서의 자기의 입장을 정직하게 직시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 삶의 의미를 궁구하는 데 있어서의 가장 큰 기만은, 자기를 가치화하고, 그러한 자기의 모습을 동일하게 타자에게 이식하려는 행위다. 곧, 자기동일성의 복제를 통해, 그것이 마치 의미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가치로 대체하려는 이 부정직한 기획은, 반드시 삶을 굴절시켜 더 많은 고통을 양산한다.


  이를테면, 어떠한 일의 무의미성을 경험한 이가 자기 자신도 의미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일을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고집스럽게 전파하는 모습과도 같다. 군대와 같은 조직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이는 그 무의미성으로 인해 자신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그것을 억지로 가치로 삼아 지향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 역시도 그 무의미한 일을 자기처럼 가치화하도록 종용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는 보편적이어야만 그것이 가치가 되는 까닭이다. 즉, 자기 혼자 채택하면 그것이 가치롭게 되지 않는다. 더 많은 이들에게 그것이 가치로서 보급되어야만, 그 가치에 투신한 자기가 구원될 수 있다. 이처럼, 자기 삶의 의미를 확보하지 못한 이들이, 특정한 행동양식을 가치로 삼아 그 가치를 사람들에게 종용함으로써, 자기를 위협해오는 무의미성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보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가치는 결코 의미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작동하지 않는다.


  어떠한 가치에 투신한다고 해도, 무의미성은 언제라도 불현듯 그러한 개인을 습격해온다. 그리고는 그가 투신했던 그 모든 가치들이 전부 다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끔 한다.


  이것이 부모가 그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듯, 그들 자신 역시도 집단주의적 가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해온 586세대가 오늘날 맞이하고 있는 현실이다.


  의미라는 것은 언제나 자기와만 관련된 것이다.


  그 자기를 잃은 한, 의미는 결코 드러나지 못한다.


  이것은 그래서 586세대의 위기다.


  위기이기 때문에 더욱 고집스러워진다. 강퍅해진다. 꼰대가 된다.


  586세대가 집요하게 독점하려 하는 그 모든 움직임은, 의미를 얻고 싶은 그들의 절박한 마음을 반영한다.


  곧, 586세대는 깨닫고 싶은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이 우주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싶은 것이다.


  집단주의적 가치를 수호하지 않아도, 민족적 사명의 대행자가 되지 않아도, 희생하는 정의의 히어로로 살지 않아도, 그 모든 것들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절대적으로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곧, 이 지난한 삼류연극판에서, 희생의 연극판에서 누구보다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586세대 그들 자신이라는 의미다.


  이처럼 독점의 세대는 깨달음의 세대를 꿈꾼다.


  꿈꾼다는 것은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586세대는 실상 지금의 젊은 세대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 어떤 집단주의적 가치에도 매몰되지 않고, 티없이 자유로운 그들의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 자유의 향기를 따라 같이 놀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586세대가 가장 취약한 바로 그 지점이다.


  586세대는 노는 법을 모른다. 자기를 잃었기 때문에, 자기를 즐겁게 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들은 알지 못한다. 자기 나라, 자기 민족, 자기 가족, 자기 부모, 자기 자식, 자기 공동체를 즐겁게 하는 일만 알지, 그들은 그들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낯설다.


  자신이 없다.


  감히 내가 스스로 즐거워도 되는 것일까, 정말로 나를 위해 사는 현실이 나에게 허락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자신이 없다.


  이처럼 586세대는, 놀 줄 모르는 촌스러운 이들이다. 너무나 촌스러워 가슴이 메어지게 한다.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의 어머니가, 우리의 삼촌이, 우리의 이모가, 우리의 형이, 우리의 언니가, 이토록 촌스러워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자기가 없었던 까닭에, 자기를 위해서는 단 한 번도 살지 못한 채 오직 남들만을 위해 살아오다가, 이제 죽음을 가시권에 두고 있는 이들의 삶이, 우리의 가슴을 서럽게 적셔온다.


  독점은 결핍이 만드는 것이다.


  자기라고 하는 삶이 결핍된 이들이 이처럼 삶을 독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독점했다고 믿은 그 삶이, 그 누구도 빼앗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시간에 의해 새어나가기 시작한다.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것이 너무나 허무하게 사라져간다.


  이 독점의 세대가 아파한다. 소리없는 비명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그 비명을 들은 이가, 그 아픔에 감응한다. 자기를 잃은 이의 서러움을 이해한다. 이해는 얼음을 녹인다. 따듯한 눈물이 되어 흐른다.


  이처럼, 좋은 연극은 언제나 연극판을 벗어난 자리에서 그 감동이 흐르게 한다.


  연극판 위에서 억지 감동을 세뇌시키려는 통속적인 삼류연극은 그 누구의 가슴도 흔들지 못한다. 곧,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다.


  연극을 벗어난다는 것, 그것은 다시 한 번, 곧 깨닫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무수한 삼류연극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집단주의적 제전의 무대 밖으로 나가, 이 연극이 정말로 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곧, 연극을 벗어난 개인만이, 그럼으로써 연극과 독대하는 개인만이 깨달을 수 있다.


  자신들만이 연극의 주인공 자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독점의 세대는, 결국 이 종속의 연극판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들을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바로 이 깨달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독점의 세대는 깨달음의 세대를 일깨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세대로 말미암아, 자신들 또한 구원될 수 있기를 꿈꾼다. 고통스러운 삼류연극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연극판 밖으로의 탈출을 희망한다.


  깨달음의 세대는 이처럼 사실은 독점의 세대가 그토록 간절히 그리던 그 모습이다. 그 어떤 독점으로도 속박될 수 없이 그저 자유로운 인간의 참모습이다. 연극판을 벗어나, 더욱더 담대히 달려나가는 그 인간의 뒷모습이, 결국 이 독점의 세대를 일깨움으로써 그들 자신이 발견하게 될 의미가 된다.


  586세대는 인간의 자유를 꿈꾸었고, 꿈꾼 자의 꿈과 같은 형상대로, 바로 그 자유로운 인간이 출현하였다.


  자유로운 인간을 보고 싶어한 그 소망은 이처럼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실현된 자유로운 인간의 형상을 본으로 삼아, 이제 꿈꾸던 자도 꿈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연극판을 벗어난 그 뒷모습을 따라 스스로도 연극판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놀고 싶었으나 놀지 못했던 이가, 이제 연극판의 밖에서 같이 어울려 놀 수 있게 된다.


  독점의 연극(play)은 비로소 자유의 놀이(play)로 전환된다.


  이는 독점의 세대와 깨달음의 세대가 상호구원을 이루게 되는 현실이다. 같이 깨닫는 현실이다.


  오늘날의 우리 모두가 함께 꿈꾸는 바로 그 현실이다.






Goo Goo Dolls - Rebel Beat



작가의 이전글 상담이란 무엇인가? 상담자란 누구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