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터널리즘에서 실존으로, 해결에서 의미로"
해결이 포기되는 자리에서 상담은 시작된다.
이것은 상담의 황금률이다. 상담이 상담일 수 있는 핵심적인 정체성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담의 이 고유한 정체성은 굴절되고 있다. 시대를 지배하는 해결의 논리에 의해 그 빛을 잃고 퇴락하고야 말았다.
이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의 거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해결의 논리, 그것은 바로 퍼터널리즘(paternalism)이다.
father의 고어(古語)인 pater에서 비롯한 이 용어는, 표현 그대로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은 가부장적 관계 도식을 의미한다. 이를 아주 쉽게 묘사하자면, “아빠가 네 인생 다 책임져줄게. 대신 너는 아빠 말에 잘 따르기만 하면 돼.”와 같은 관계의 원리다.
‘자식의 실수는 다 부모의 책임이다.’
‘내 자식을 비난하지 마라. 부족한 아빠인 나를 탓해라.’
‘우리 아이를 대신해 내가 다 책임진다.’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이 퍼터널리즘이 지배하는 사회다. 또 예찬되는 사회다. 그것도 아주 과잉되게, 여러 세력들이 저마다 자기가 ‘최고의 아빠’임을 주장하며 서로 피튀기게 다투기까지 하는 사회다.
퍼터널리즘은 이처럼 분명하게 파더컴플렉스가 소영웅주의로 변이된 형태의 행위논리다. 아들러가 병적 우월감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듯이, 아버지의 부재, 무능력, 무관심, 과보호, 과잉간섭 등으로 인해 생겨난 열등감을 스스로가 더욱 위대한 영웅적 아버지처럼 행세함으로써 극복하려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등감 극복에 있어 핵심이 되는 두 키워드는 바로 해결과 책임이다.
퍼터널리즘의 소영웅주의에 빠진 이는 언제나, 그 자신이 자식의 문제를 해결할 최고의 유능함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 남다르다는 특성을 강력하게 어필하고자 한다.
이것은 이른바 우상의 우상됨의 자기어필이다.
해결과 책임은 언제나 이 우상 및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희생양의 구조를 만드는 핵심적인 원리다.
그리고 이것이 우상인 까닭에, 사람들이 이 우상적 주체에게 자기들의 힘을 양도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주체는 마치 신과도 같은 권능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부여받은 권능을 통해 다시금 우상적 주체는 더 큰 자기도취를 이룬다.
그 결과, 정말로 자신이 어떠한 문제든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간주하게 되며, 또한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을 것처럼 확신하게 된다. 그렇게 도취된 감정이 넘쳐서 사람들에게로 흘러든다. 이로 인해, 우상의 자기도취는 시대의 자기도취가 된다.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신적 권능에 구성원들 모두가 취하던 원시시대의 제전과도 같다. 히틀러의 집권 당시 독일사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이처럼, 이 자식의 문제에 대한 유능한 해결사로서의 우상적 주체를 꿈꾸는, 곧 마치 지구라도 지킬 듯한 최고의 아빠를 꿈꾸는 소영웅주의가 이 시대를 지배하다보니, 동시대에 기능하고 있는 상담 및 상담자도 그 난기류 속에 함께 휘말리게 되었다.
그로 인해, 상담은 병리적 증세를 해결해주는 작업인 것처럼, 상담자는 증세를 경감시켜주는 해결사인 것처럼 인식되게 되었다. 심지어는 상담자 자신도 이러한 해결의 논리에 동의하며, 스스로가 유능한 해결사임을 자칭하기까지 하게 되었다. 상담자가 부모와 같은 입장이 되어, 자식과 같은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책임져주는 일이 마치 상담인 것처럼, 상담자 자신도 오해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상담 및 상담자가 결코 가지 말아야 할 바로 그 길이다.
왜냐하면, 상담은 해결의 논리에 복속되는 한, 그 전문적 권위가 반드시 몰락되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치료라는 해결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담자는 정신과의사보다 해결의 전문성을 더 담보하지 못한다. 또한 복지라는 해결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담자는 사회복지사보다 해결의 전문성을 더 담보하지 못한다. 더불어 교육이라는 해결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담자는 교사보다 해결의 전문성을 더 담보하지 못한다.
이처럼 해결의 프레임 위에서는, 상담은 언제나 다른 분야보다 열등한 입장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추락시키게만 될 뿐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거장인 칼 로저스가 당대 정신과의사들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상담 및 상담자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려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서 로저스가 그 어떤 분야와도 변별되는 상담의 핵심적인 정체성으로 수호하려 했던 기치는 바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 힘이었다.
이는 위대한 역설이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듯이, 해결하는 것이 힘이 아니라,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을 로저스는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 진정한 힘을 사람들이 스스로 자각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고유한 활동이 바로 상담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표현 그대로, 해결하려는 의도가 포기되는 자리에서 상담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묘사되는 상담은, 종교가 그 생명력을 다한 자리에서, 종교가 기존에 다루던 영역을 대신 새롭게 이어받아 다루는 활동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영역은 바로 의미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 의미의 영역은 해결의 영역과 철저하게 그 경계가 분리되는 영역이다.
이를테면, 죽음의 문제는 결코 해결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어떤 의학으로도, 복지로도, 교육으로도, 또는 정치로도, 예술로도, 경제로도, 우리는 결코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죽음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죽음과 같이 해결될 수 없는 의미의 영역에 속한 것들이 바로 상담이 다루는 정당한 주제들이다.
어떠한 것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의미를 필요로 한다. 곧, 의미는 해결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구원책이다.
이와 같이, 의미는 해결의 정반대편에서 작동한다.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가 꽃피고,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가 창조된다.
곧, 해결을 포기할 때, 의미가 드러난다.
여기에서 해결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바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겸허한 존재로 스스로를 다시 안다는 것이다.
이 겸허한 존재는, 더는 자신이 누군가를 대신 책임진다고 감히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위대한 아버지처럼 감히 행세할 수 없게 된다. 자신만 따라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감히 호소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우상화는 여기에서 멎는다. 스스로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우상으로서의 자기도취를 끝낸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
인간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가장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있던 시절에 일어난 거대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반동으로서 실존주의가 출현해 그 자기도취를 해체했듯이, 퍼터널리즘의 소영웅주의는 반드시 실존의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술에 취해 아이언맨이라도 된 것처럼 활개치던 다음날 아침 세면대의 거울을 통해 바라보게 된 자신의 모습처럼, 모든 우상은 실존 앞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그대로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우상이 해체되고, 해결이 포기되는 바로 이 정직한 순간, 의미의 길은 열리기 시작한다. 상담이란 것이 상담으로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상담자가 상담자로서 정말로 할 일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실존은 상담의 전제조건이다. 실존이 회피되면 상담은 이미 상담이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부모를 꿈꾸며 퍼터널리즘에 봉사하는 또 다른 소영웅주의의 표현이 될 뿐이다.
로저스는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로 상담에 있어 수용의 가치를 중시했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을 수용한 후에야, 비로소 나는 변화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유한한 내 자신이다. 그래서 수용이라는 것은 언제나 유한성의 수용이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며,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수용이다.
그래서 수용은 실존의 주된 실천적 표현이 된다.
실존한다는 것은 즉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용이 바로 의미의 촉매다.
이를테면, 여자의 얼굴을 대단히 못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할 때, 그 못 그린 그림 자체를 수용해야, 그렇게 그림 실력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엄마의 얼굴을 그려보고자 했던, 그렇게 오래전 세상을 떠난 엄마의 얼굴을 기억해보고자 했던, 그 간절함의 의미가 거기에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언제나 사실 이상이다. 그러나 사실이라는 한계를 정확하게 딛지 않고서는 의미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용이 변화를 야기한다는 로저스의 진술은 지당하다. 우리는 의미를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는 까닭이다.
의미는 언제나, 반드시, 기필코,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묘사한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더욱 빛난다. 그렇게 우리는 의미를 통해 언제나, 반드시, 기필코,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다시 기억한다. 그렇게 온전한 우리 자신으로서 회복된다. 바로 이것이 변화다. 모든 변화의 과정은 온전성을 향한 사랑의 여정이다.
이처럼 상담은 바로 사랑의 여정인 그 무엇이다.
그리고 상담자는 바로 이 여정에 동행하는 이다.
유한성의 수용에서 시작되어, 끝내 사랑의 담지자로 거듭나게 되는 이 역설의 여정을 함께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상담자는 지장보살이라는 상징으로 은유될 수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있는 이를 돕기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내려간 존재다. 지옥은 고통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지장보살은 그 고통에 동참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지장보살은 현재 고통을 느끼고 있는 내담자와 같은 것을 느끼고자 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이에 따라, 상담자의 정의는 이러하다.
‘상담자는 같이 느끼는 자다.’
무엇을 같이 느끼는가?
내담자의 한계를, 그의 유한성을, 그로 인해 내담자가 미처 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그 모든 후회와, 자기비난과, 죄책감을, 상담자는 같이 느낀다.
같이 느끼는 이 일이 바로 공감이라 불리는 것이며, 같이 느낀 그 결과로서 수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수용을 통해 의미는 개방된다.
그렇게 상담자는 의미의 안내자(sherpa)다.
상담자는 고통의 지옥 속에서도 내담자가 혼자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는 인간애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동시에 부모와 같이 더 높은 자의 눈높이에서 더 낮은 자에게 시혜를 내리는 입장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의 한계 속에서 함께 의미를 궁구하는 평등한 관계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나아가, 스스로 기꺼이 내담자의 세계에 뛰어드는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자유가 쓰여야 할 방향성은 곧 타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유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이처럼 상담자는 지옥 속에서도, 사랑이, 평등이, 자유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내담자에게 안내하는 존재다. 이 임의적인 개념들이 모두 수렴될 수 있는 그 표현, 바로 의미를 안내하는 존재다.
아주 단순하게, 상담자는 내담자의 삶을 그의 것처럼 함께 느끼고 살아냄으로써, 유한성으로 인한 고통으로만 경험되었던 내담자의 삶이, 실은 그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의미로 빛나고 있었는지, 그 역설적인 삶의 신비를 함께 발견하는 자다. 그렇게 상담자는 그 누구보다도 이 삶의 신비에 반한 자다. 삶을 사랑하는 자다.
이처럼 상담자는 바로 삶을 사랑하는 그 누구다.
그래서, 상담자가 상담을 한다는 것은, 곧 삶을 사랑하는 자가 사랑의 여정을 나선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이 하는 인간의 일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다.
상담자는 바로 이처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모든 인간은 상담자로 태어나서 상담자로 죽는다.
그 시작도 끝도, 오직 사랑뿐이다.
Goo Goo Dolls - Let Love In
There's nothing we can do about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The things we have to do without
해야만 하는 일 같은 것도 없지
The only way to feel again
다시 느끼기 위한 유일한 길
Is let love in
그건 사랑을 받아들이는 거야
There's nothing we can do about
정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The things we have to live without
우리가 의존해야 하는 것도 없지
The only way to see again
다시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길
Is let love in
그건 바로 사랑을 받아들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