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를 먹으니 죽고 싶지 않아"
MBTI는 이 시대의 명함이며, 동시에 이 시대의 AT필드 같습니다.
각 유형은 그러한 유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비난의 소재가 될 수도 있을 행위들에 대한 방어책이 되어주곤 합니다.
"나는 A형이라 소심해. 쟤는 AB형이라 변태고, 또 쟤는 B형이라 이성을 밝히고, 내 동생은 O형이라 사람만 좋은 바보야."
이러한 혈액형의 유형론보다 MBTI가 유리한 것은 가짓수가 4배나 많다는 것입니다. 4개의 방패보다는 16개의 방패가 인류평화에 더욱 일조할 것이라고 기대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방패라기보다는 왠지 자꾸만 섬으로 보입니다.
운전이 미숙해도 제발 비난하지 말아달라며 거꾸로 붙여놓은 '전운보초'의 문구처럼, 여기에서는 멀리서만 바라보고 제발 상륙하지는 말아달라는 섬의 안내판을 읽게 됩니다.
정체성의 영토를 규정하는 언어는 이렇듯 비난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한 AT필드입니다. 비난이 너무나 아픈 이들이 다들 섬이 되어 뿔뿔이 흩어져 갑니다.
예전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 말들을 자주 하곤 했지만, 이제는 섬과 섬 사이에서 우리는 네트워크라는 허공을 만납니다. 허공 위로 늘 화려한 신기루들이 그려지지만, 섬은 매일 방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잠시라도 방심해버리면 지루함이 찾아듭니다. 신기루에 몰입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늘 집중해야 합니다.
유튜브를 하루종일 보고 있는 것은 결코 방심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방심하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하나의 영상이 끝나면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다음 영상으로 뛰어들어간 치열함의 역사입니다.
섬이 되어버리니, 더 안전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로 여백의 위기가 더 자주 찾아옵니다.
잠깐의 틈만 생기면, 비난의 목소리들이 즉시 들려옵니다.
한 번 들어버린 비난의 소리는 무수한 신기루들의 음성으로 지워보려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너는 쓰레기야."
"인생 똑바로 못사는 병신새끼."
"남들은 다 성공했는데 너는 얼마나 못났으면 이렇게 사냐?"
이 환청들을 듣게 되는 정신분열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정신을 똑바로 붙들어매기 위해 유튜브와 넷플릭스와 인스타그램에 집중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려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붕괴되지 않기 위해 다들 필사적이었을 겁니다.
자기비난의 목소리에.
비난하던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혼자인 섬이 되면 더 크게 들려오던 것도 당연합니다. 자기만 있으니 섬은 자기비난의 목소리로만 가득 차게 됩니다.
자기비난은 자기에게 죽으라고 하는 목소리입니다.
한 편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맹렬히 죽이려고 하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나는 심리학적으로 이런 사람이라 그래."라는 천사의 방어막을 펼치려고 합니다.
영원한 섀도우복싱이라고도 말할 것이지만, 더 쉬운 표현으로는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은 고통만 있는 곳이 아니라, 고통을 준 뒤 그 고통을 낫게 해주고 다시 고통을 가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가스라이팅 속에서는 사람이 미쳐갑니다. 미치지 않고는 그 고문의 잔혹함을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지옥이 되어 있어서,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표면적으로 3차대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다들 심정적으로는 원자폭탄을 3000번은 맞은 기분일지 모릅니다.
자기비난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양육자로부터의 비난이 내사되었다든가, 모든 마음의 온전함을 확인하지 못해서라든가, 내면의 비난쟁이 토마스가 그 선한 의도를 인정받지 못해서라든가 등의 이유가 아닙니다.
에너지는 넘치는데 그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쓸 곳이 없어서입니다.
천장뿐만이 아니라 사방이 다 막혀 있습니다.
더러운 제도권의 권력자들과 사악한 기득권층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가 섬이기 때문입니다.
보이기에는 자유롭게 다 뚫려 있는 것 같지만, 섬은 사방이 다 막힌 곳입니다.
비난을 받는 것이 두려워 섬이 되었지만, 섬이 됨으로써 자기비난이 생긴 것입니다.
섬은 모든 것이 자기를 자유롭지 못하게 가두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 갑갑한 현실을 성공적으로 타파하고 멋있게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있지만, 섬 자신이 다만 섬이 되었을 뿐입니다.
온실 속 화초는, 침대 속 청춘은, 사육장 속 애완동물은 기꺼이 그것들이 되었습니다.
얼마든지 그것들이 되어도 된다는 '자상한 허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침대 밖으로 당장 나와서 알바라도 하지 않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겠다며 빠루를 들고 문가에 서있는 악마같은 엄마를 갖지 못한 행운으로 인하여, 섬은 안심하며 섬이 될 수 있었습니다.
침대 밖은 안전하지 못하다며 세상의 냉혹함에 조금 겁먹은 그 약한 아기의 심정을 무조건적으로 다 이해해주고 수용해주는 미리엘 주교같은 상냥한 양육자를 갖게 된 은혜로 인하여, 섬은 섬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비난의 조건은 과잉양육의 구조와 크게 관계됩니다.
과잉되게 보호받는 속에서, 할 일이 없으니, 인생은 심심하고, 에너지는 남아도니, 도파민의 쾌감을 만들어내고자 자극의 필요성은 생겨납니다.
최고의 자극은 언제나 자기비난입니다.
이걸 하고 있으면, 자극의 소재가 끊일 일이 없습니다. 평생을 지속가능한 도파민 공급템입니다.
이처럼 만성적인 자극중독이 되면 이제 통제력이 상실됩니다.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이, 중독재를 처음 접하는 이들은 자기가 다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착각 속에서 어느 중독자라도 자기통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걷잡을 수 없이 찾아오는 자기비난의 쓰나미가 이제 통제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 유튜브는 지옥의 출구로부터 드리워진 거미줄인 것처럼도 생각되지만 이것은 이내 끊어질 필연적 운명의 거미줄입니다. 거미줄에 매달렸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으면 자기비난의 강도는 더욱 심해집니다. 그렇다고 매달리지 않을 수도 없는 악순환입니다.
죽고 싶다고, 죽고 싶다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그렇게 절규만 반복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이 죽음의 말뚝을 박고 있는 지옥에서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가줄 엄마를 갖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불운이며, 지옥의 행운입니다. 행복한 지옥의 미소는 미리엘주교의 은수저처럼 언제나 상큼하게 빛이 납니다.
빠루를 들고 지옥으로 내려와준 엄마를 갖지 못했다면, 우리에게는 답이 없으니, 떡볶이나 해드세요.
엄마가 없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떡볶이를 해야 할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한다는 이 감수성이 익숙하지 않기에, 또 좀 낯뜨겁기에, 어떠한 천재들은 '마음'이라는 말을 생각해냈습니다.
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위해 하라고, 천재들은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이것은 '마음과 함께 춤추는' 주크박스의 장치입니다.
이미 둘로 나누어져 섀도우복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차라리 '자신'과 '마음'인 둘로서 함께 춤을 추도록 안내하고자 만들어진 장치입니다.
영화 '캐스트어웨이'에서 사람과 배구공이 함께 춤을 추듯이, 섬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생활'이라는 것이 비로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삶이 활동한다는 의미의 이 생활을 하면, 문득 죽고 싶지 않아집니다.
떡볶이를 먹고 싶어하는 마음을 위해, 자신이 친히 떡볶이를 해줘서 같이 먹다 보면, 전혀 죽고 싶지 않아집니다.
더 쉽게는,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들에 충만하게 생활하면, 조금도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생활의 기쁨이 가득 차오릅니다.
아무런 성공의 증표도 될 수 없고,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SNS에 게시할 소재도 될 수 없는데, 아무튼 기쁩니다.
그런 것들을 하지 않아도, 사는 일이 기쁘다는 사실이 이 섬의 이정표에 굵은 글씨로 새겨집니다.
마음이 채워졌기 때문이며, 자신이 충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섬생활도 할 만해집니다.
막힌 코로도 우리가 숨을 잘 쉬듯이, 막힌 사방 속에서도 에너지가 잘 운용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훌쩍 섬이 아니게도 됩니다.
마음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곧 자신의 눈앞의 것을 따라가서 충만해지다보니, 어느 사이에 '트루먼 쇼'의 세트장 밖입니다.
침대 밖으로 나온 자신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눈물을 훔치며 대견하다고 박수를 해주는 현실은 없습니다.
"우리 신지애기, 이제 AT필드 밖으로 혼자 나오는 놀라운 경험을 해냈구나. 축하해. 짝짝짝!"은 "그래 너에게는 침대 안에 있을 자유도, 또 침대 밖에 있을 자유도 있는 거란다. 무엇이든 다 해도 되는 그게 바로 너란다!"라고 하는 과잉양육자가 내는 '자상한 허락'의 목소리일 뿐입니다.
떡볶이를 해서, 빠루를 들고 지옥을 뛰어다니다 피곤해 잠든 엄마랑 같이 드세요.
가는 길에 실존상담자에게도 좀 나눠주세요.
살아서 좋다는 그 마음을.
자신이 직접 아주 작은 눈앞의 것만을 충만하게 채워가는 삶이 모든 것을 다 이깁니다.
살아서 좋다는 당신은 무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