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울리는 말"
당신에게는 아직 가능합니다.
늦지 않았고, 지금부터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가능한 존재입니다.
당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창조력입니다.
당신의 유일한 문제는 당신이 창조력을 잃었다는 것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창조력을 잃어 생겨납니다.
성실하게 자기 역량을 키우기보다는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쫓기고, 아무리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성공을 약속해주지 않는다면 그에 대해 시간을 쓰기가 망설여지지고, 남들도 다 하는 확실해보이는 것들만 따라하려고 할 때가 바로 창조력을 잃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창조력을 잃은 인간은 소비자로만 전락합니다. 남이 만든 것에 의해 자기의 행복이 결정되는 삶을 삽니다.
대표적인 소비자는 아동입니다. 그의 부모가 제공하는 것에 의존해서만 아동은 행복을 경험합니다.
더는 부모가 효과적으로 자신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것 같을 때, 또는 부모의 상실로 인한 서비스의 중단을 경험했을 때, 아동은 절망에 빠집니다.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집니다. 왠지 모르게 계속 화만 납니다.
부모가 자신의 세상을 행복해줄 그 원천으로 보던 아동에게는 표현 그대로 부모가 자기 세상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아동들은 이 현실의 세상을 자기 부모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니 절망에 빠진 아동은, 세상에 대해서도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집니다. 세상에 대해 자꾸만 화가 끓어오릅니다.
자기를 더는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부모-세상에 대하여 아동들은 매우 자주 혁명의 깃발과 촛불을 두 손에 들곤 합니다. 소위 진보라고 하는 정치성향을 표방하게 되고, "아이를 지켜야 한다."라는 표어에 맹목적으로 결집하며,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부당한 것들에 맞서 싸우는 정의의 윤리적 히어로를 자처하곤 합니다.
이 아동들이 심리학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면 이 행위들은 새로운 외연으로 변주됩니다.
최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를 표방하게 되고, "착한 아이의 의도와 같은 모든 마음이 온전해야 한다."라는 표어를 내걸게 되며, 오히려 자기가 제대로 된 마음의 윤리적 수호자라도 된 양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기성의 정통심리학들을 비판하게 됩니다.
친히 자신이 건강한 안목으로 선별하고 통합해서 알려주는 것이 진짜 심리학이라며, 제도권의 심리학들은 다 실용적이지도 못하면서 어려운 용어들로만 착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사악한 권력자들의 도구인 것처럼 묘사하곤 합니다. 자기가 쉽게 알려주는 것만 따라오면, 심리학에 대해 그 모든 핵심을 알게 되며, 더는 지성을 악용하는 나쁜 권위자들에게 속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아동들은 자신이 부모와 세상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 권위자인 가상의 적'을 만들어 부모 및 세상을 투사한 뒤 자기는 그에 맞서는 히어로인 것처럼 행세하려는 것입니다.
부모-세상이 늘 안정적으로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했기에 이들은 부모-세상이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천국에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가장 큰 죄악으로 이들은 간주합니다. 그만큼 이 아동들은 부모-세상을 '신'으로 보고 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광신도들은 신에 대한 가장 큰 반역자가 됩니다.
"저 신을 믿지 마세요. 저거 믿고 따라봤자 시간만 낭비하고, 돈도 못벌고, 여러분의 생활만 더 불안해져요. 얻는 것도 없는데 시간만 많이 써서 저런 걸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진짜 신이 무엇인지 그동안 놀라운 경험을 통해 알아낸 것을 쉽게 그 핵심만을 전해드릴게요. 여러분도 저처럼 인스타랑 유튜브하시며 자신의 이야기만 당당하게 하면 됩니다."
오늘날 아주 많은 이들이 제도권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내뱉는 말입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반지성주의'의 단골대사입니다.
부모-세상으로 상징되는 제도권을 신처럼 숭배하며 제도권이 자기를 절대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망상'을 갖던 아동들이, 그 망상이 위협받을 때 이처럼 반지성주의의 반골적 투사들로 거듭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아주 유의미한 점은, 제도권을 존중하며 그에 대한 성실함으로 살지 않은 이들이 특히 이 반골투사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러한 아동들은 세상을 부모의 연장물로 보며 세상이 자기에게 부모처럼 '무조건적으로 잘 해주기'만을 기대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자신은 학벌이나 자격이 있지 않아도 서울대박사만큼이나 심리학권위자로 세상에서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발상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부모투사'에서 비롯합니다.
오늘날의 아동들은 이처럼 모든 곳에 자기가 꿈꾸는 부모상을 투사한 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원망하는 일만을 반복해 나갑니다. 이 세상 모두에게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는데, 왜 그 의무를 이행하는 윤리적으로 올바른 이가 없냐며 세상의 불공정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늘 화만 내다 지쳐가는 아동들에게 내밀어지는 손길이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화만 내는 당신은 사실 얼마나 여리고 약한 존재였을까요. 그만큼 얼마나 착하고 배려심많은 사람이었을까요. 당신의 선한 의도가 얼마나 차갑게 거절당해왔길래 당신이 그토록 화가 난 것이었을까요. 당신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선한 의도가 욕망에 눈이 먼 이들에 의해 매몰차게 부정된 것뿐입니다. 그런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온전한지를 우리 함께 알아가보면 어떨까요. 풍요롭고 아름다운 당신의 그 선한 마음을 함께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아동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자신이 가진 '망상'의 자기정당화를 위해 심리학이라는 소재를 남용하고 있던 사이비심리학 아동을 많은 아동들은 구원자처럼 보게 됩니다. 이제야 자기를 나쁜 부모-세상에게서 지켜줄 좋은 선배 히어로를 만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망상'은 '망상들'을 만나 그 세력이 강해집니다.
망상끼리 결합되는 이 과정을 아동들은 이렇게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힐링(healing)'
모든 힐링은 다음과 같은 목소리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과거는 다 맞습니다."
"당신이 과거에 해온 일은 다 온전합니다."
"당신은 과거에도 이미 다 올바른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힐링은 '과거세탁'입니다.
퐁퐁아동들은 힐링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과거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행복했다고 느낀 그 어떤 영광의 순간, 바로 그 순간으로 회귀하기 위해 힐링은 추구됩니다.
현재를 부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과거를 세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과거로 다시 퇴행해 그 자리에 머물러도 되는 정당성이 생겨납니다. 현재는 사악한 악마들로 인해 더러우니, 깨끗한 과거가 진정 자기가 거할 곳이라는 자기합리화가 가능해집니다.
힐링은 이처럼 반드시 과거지향적 현상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서, 아동이 엄마 품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힐링입니다.
그래서 힐링은 이 시대에 약삭빠른 아동들이 자기의 권력 및 권위를 증진시키기 위한 인기소재이기도 합니다.
자기는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인 척하려는 이들이, 또 자기는 더는 무력한 아동이 아니라 성숙한 인생스승인 척하려는 이들이 '마음의 힐러'로서 자기를 선전해 상담이라는 힐링상품을 팔아댑니다.
아동이 또 다른 아동을 착취하는 구조를 위해 오늘날 심리학이 악용되는 방식입니다.
모든 착취의 구조는 과거의 영광을 강조합니다. 지금은 없는 추상과 허구의 것에 목숨을 걸게 합니다.
노예는 그 자신이 과거에 매여 있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도 매이게 됩니다.
과거세탁을 하고 있는 이는 과거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과거에 매여 있는 이입니다. 자신의 과거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믿고 있기에, 그 과거를 하얗게 착한 천사처럼 표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구. 나는 분명 올바른 최고의 왕자공주였다구"의 힐링을 위해 사는 동안 인간에게 가장 빠르게 상실되어 가는 것이 바로 창조력입니다.
창조력은 현재를 살 때만 가능한 힘입니다.
현재라는 것을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현재는 부모가 없는 시공간'
그런데 많은 아동들은 부모를 자기 세상의 전부이자 신으로 보며 살아왔으니 이 말은 다시 이렇게 표현됩니다.
'현재는 신이 없는 시공간'
현재를 살아가는 일을 그래서 실존이라고 합니다. 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곧 실존입니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실존의 자유를 말했지만, 카뮈는 오히려 그 자유가 쓰이는 방식을 되묻습니다.
"신이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정말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카뮈가 『페스트』에서 던진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그리고 대답은 다음과 같이 암시됩니다.
"신이 없는 세상 속에서 인간에게 정말로 가능한 일,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해주어야만 하는 당위'를 가진 신이 없어졌을 때, 사랑은 이제 오롯이 인간의 주제로만 귀결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할 자유'를 가진 자기 존재의 참면목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창조력이란 바로 이 '사랑할 자유'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자유'는 먼저 생존을 안정화시킨 뒤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듯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무관하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은 생존의 현실보다도 더 시급하게 인간이 소망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자유'를 통해 창조해냄으로써 자신이 인간임을 실감합니다.
인간은 생존이라는 조건을 넘어서, 무조건적으로 자신이 인간임을 실감하기를 원합니다.
"창조의 대가는 생존을 걱정하지 않고 전적으로 창조를 선택한다."라고 하는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의 말은 그것의 출처가 뉴에이지영성이라 할지라도 분명 의미있는 실존적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생존은 언제나 '나의 생존'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갇힌 자기폐쇄적 관점입니다.
그러나 창조는 다릅니다. 창조는 언제나 '너를 향한 창조'입니다.
창조란 이처럼 '나를 넘어 너를 향하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타자철학자인 레비나스는 사랑을 구체적인 얼굴과 묶습니다.
사랑은 어떠한 관념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앞에 있는 바로 그 얼굴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고, 그 얼굴에 가득한 정성을 쏟을 때, 그러한 인간의 안에서는 엄청난 창조력이 쏟아져나옵니다.
타자의 얼굴에 정성껏 응답한 그 사랑의 결과가 바로 창조인 것입니다.
부모-세상이 반드시 자신을 사랑해주어야만 한다는 강박적 믿음 속에서는, 인간은 이러한 사랑의 능력, 바로 창조력을 잃게 됩니다. 그는 '사랑의 무능력자'가 됩니다. 창조에 좌절합니다.
그 결과 『고도를 기다리며』의 심정으로 언제 올지 모를 구원자만을 기다립니다. 구원자가 나타나 로또나 코인처럼 자기의 인생을 단번에 마법처럼 바꾸어주기를 꿈꿉니다. 꿀이 흐르는 샘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 안정적인 낙원을 만들어줄 것을 기대합니다. 즉, 힐링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힐링(healing)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필링(feeling)입니다.
느낌(feeling)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제적 작용입니다. 마음의 운동 그 자체입니다.
현상학에서는 마음의 핵심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밝힙니다. '마음은 언제나 어떤 것에 관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에 관해 있는지 그 흐름을 드러내고 있는 운동이 느낌입니다.
느낌이 언제나 '나를 넘어 너를 향하는 일'로 드러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깊습니다.
이것은 너를 나에게 수렴시킴으로써 너를 구원하겠다는 식의 일이 아닙니다. "그 대신 느끼고 있었는데 이 마음도 온전하네요." 같은 무속극이 아닙니다.
너에게 응답할 창조력이 지금 나에게서 샘솟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그 뜻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분명 자유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자유'입니다.
그리고 자유란 언제나 미래를 향한 쪽에 있습니다.
미래에서 현재로 불어오는 바람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 공기를 느낄 때 우리가 미래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반가워지는 것입니다.
'나의 생존'에 갇혀 있는 개인은 언제나 과거에 집착합니다.
'너를 향해' 사랑할 자유를 행사하는 개인은 언제나 미래로 열려 있습니다.
그는 강하고 왕성한 존재입니다. 창조력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력도 미래에서 온 것입니다. 창조력은 미래가 개인을 끌어당기고 있는 힘입니다. 창조는 자기가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가 끌어당기는 그 힘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래가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당기며 그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기에 그의 존재는 든든합니다.
미래가 그의 편에 서서 그를 지지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가능합니다.
당신에게 아직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성공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의 과거를 세탁해서 환상의 낙원으로 만들 수 있는 위대한 마법의 퐁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과거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의 미래는 아직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아직 사랑할 수 있으며, 아무 것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미래가 아직 당신을 잃지 않았기에, 당신도 아직 당신의 미래를 잃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힐링을 바라는 자폐의 일을 이제 그만 멈추고, 당신에게 다가오는 필링이 연결되어 있는 '당신이 아닌 타자'를 향할 때, 당신은 동시에 미래를 향해 끌어당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타자가 미래입니다.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는 또한, 실존상담자에게는 당신이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해야 한다면 인간을 울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느낌으로 인간의 몸이 진동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미래를 향한 말입니다.
실존상담자는 거의 모든 순간 당신에게 이러한 말을 하고 싶어합니다.
아직 아무 것도 늦지 않았다고, 가능하다고, 당신의 미래가 당신을 향해 간절히 전하고 싶어하던 그 말을 너무나 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