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자로 살기 #17

"결단하는 자신으로 사는 것이 작가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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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기의 언어로 전능하게 존재를 창조하는 조물주가 아니라, 존재를 정직하게 자신의 삶으로 말하는 증인입니다.


적어도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인이란 그러한 존재이며, 시인은 존재론적 작가입니다.


부모님을 잃은 뒤 남겨진 유산이라곤 아버지가 사준 세계문학전집이 전부였던 한 아이에게도 작가란 그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친구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기에, 전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싯다르타』처럼 『나생문』을 붙잡고 『구토』를 반복하며 『무진기행』을 떠났습니다.


머리로는 잘 접수되지 않으면서도, 어떤 감정이라고는 특정해서 정의할 수 없는 아주 미묘한 느낌들을 가슴에 가득 채우며, 그렇게 그 순간들 속에 분명히 가슴의 공간이 넓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는, 가슴에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학은 분명 사람의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문학은 이야기들로 사람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더 비워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포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실존상담자로서 상담을 하는 데 지금껏 어떠한 것이 가장 도움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단연 문학과 철학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들이 아니라, 존재를 향해 그것들이 작용하는 '비움의 방식'이 상담자로서의 태도를 뿌리깊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비움'이라는 것은 '모름'이자 동시에 '없음'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영화를 보고는 평론가나 영화전문블로거의 해설을 찾아 읽으며 이제 영화를 이해한 척하는 일은 이 '비움의 방식'과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그 내용이 평생 이해가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을, 그렇게 우리가 '모르는 것'과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체험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문학은 조금 자기 안에서 숙고하다가 "아하!"하는 소재가 아닙니다.


그러한 모습은 다 이야기의 문법에 집착하고 있는 태도입니다.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정보에만 경도된 기술자적 태도입니다.


문학은 이야기로 표현되지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와 같습니다. 다른 지평으로 이동시켜주는 기능을 한 뒤, 사다리는 버려집니다. 사다리에 집착하는 것은 아직 다른 지평으로 이동하지 못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문학이 정말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삶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말하고자 작가는 글을 씁니다.


그러기 위해 작가 자신의 삶을 글에 담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쓰인 낱말들의 뭉치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것들을 써내는 이들이 더욱 자기 자신을 작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마보이가 칭얼대며 "엄마엄마 이리와, 요것 좀 보세요. 제가 또 놀라운 경험을 해냈어요."라고 하는 보고서들도 분명 하나의 삶에 대한 기록이라지만, 자아도취의 냄새가 두리안만큼이나 역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맛있지도 않습니다. 맛이 없으니 멋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제안할 수 있는 아주 거친 기준으로는, 멋있지 않으면 작가가 아닙니다.


작가란 사실 아주 멋있는 존재입니다.


그의 멋이란 '결단'에서 나옵니다.


'멋'이라는 것은 칼을 얼마나 잘 쓰는가에서 비롯되는 요소입니다.


음식도, 옷도, 영화편집도, 다 칼을 잘 써서 그 멋이 생겨납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작가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모르는 것입니다.


진짜 작가는 칼로 글을 씁니다.


칼로 그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결단해서 살아가는 만큼 그 자신이 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단하는 것입니다.


결단은 다른 이들의 의견을 다 모은 뒤 이를 종합해서 최종판단을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더 단순하게, 결단은 판단이 아닙니다. 참조할 정보들 속에서 가장 좋은 정보를 선별해서 통합하는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결단은, 블레이크의 싯구처럼, 이 세상에 의지할 것 없이 스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향해서만 돌격맹진하는 것입니다.


몰라도 되고, 심지어 없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것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가장 촌스러운 작가들 내지 실은 작가가 아닌 이들은, 온갖 좋은 것은 다 수집해서 한데 뭉치려고 합니다.


그러니 글을 못씁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선생님에게 칭찬도 받고, 모범생들이랑도 잘 지내고, 일진들이랑도 잘 놀고, 친구엄마들에게 예의바르다며 사랑을 독차지하고, 전교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고, 이성친구도 있는 '완벽한 아이'와 같은 것을 자신의 이야기랍시고 만들어내려고 할 때, 이것은 사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것입니다.


자신의 삶 대신에 좋아보이는 것들만 모아놓은 뭉치는 그저 쓰레기산에 불과합니다.


작가는 이러한 쓰레기산에 칼질을 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다 잘라내갑니다.


더 많은 우량의 것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만을 밝히려 합니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결단을 통해 더 많이 비워감으로써 어엿한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사는 방향성의 가장 반대편에서 우리가 하게 되는 대표적인 일은 모든 마음을 알아주려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결단하지 않으려는 자기합리화입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다 자기가 갖겠다는 망상의 표현입니다. 쟤 말도 맞고 얘 말도 맞다며, '쟤'와 '얘'에게 자기가 가장 권위있는 인물로 자리잡으려는 솔로몬놀이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 글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문학을 통해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은 모든 마음을 그 공간에 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담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자신의 삶만을 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비워진 공간에 자신의 삶만이 오롯이 담겨 우리는 자신을 얻습니다. 자기 자신이 됩니다.


문학은 이처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 이들이 남긴 알 수 없는 향기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놀이가 아니고 캐릭터설정게임이 아닙니다.


결단하는 실존입니다.


작가란 언제나 다른 것을 다 포기해서라도 사랑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이 결단의 삶에 대해서만 붙을 수 있는 이름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기를 결단한 이들의 이름입니다.


실존상담자라고도 불러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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