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자로 살기 #24

"버려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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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날 버리지 않냐는 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늘 자신이 속한 집단과 사람들에게 도전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오히려 힘든 것들에 대해 일부러 어떻게든 못알아들은 척을 하며, 실수와 그로 인한 자책을 반복하고, 턱을 꽉 다물고는 비판을 견뎌내며, 그럼에도 자기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 집단을 위해 얼마나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를 호소하고, 또 자신도 잘해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속상하다고 멋들어진 비극의 연기를 하곤 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한심하고, 무력하며,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버리지 않을 수 있냐고 지금 도전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 도전의 방향은 '버려지지 않는 쪽'이 아닙니다.


자신이 '최대한 효과적으로 버려지는 일'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튈 준비를 한참 전에 마쳤습니다.


현재의 집단에서 기능하기에는 실제적으로 자신의 역량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정체성의 수준은 저 하늘 꼭대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미 탈출을 궁리하면서도, 자신이 먼저 나서서 집단에서 나가겠다는 말은 한사코 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자기가 먼저 하면 자신의 패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역량이 없어서, 또 역량을 만회해줄 성실함도 없어서, 적응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공고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절대로 자기가 졌다는 말만은 하지 않고자 끝까지 버티며 도전합니다.


이 상황에 질릴대로 질린 그 집단의 책임자가 자신을 쫓아내주기만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도전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나면 이들의 도전은 성공을 거둡니다.


'최대한 효과적으로 버려지는 일'이라고 할 때의 그 효과란 바로 '도덕적 승리'입니다.


자신이 쫓겨나가는 그림이 생겨야만 이들은 도덕적으로 자기가 승리한 척할 수 있습니다.


자기는 끝까지 남아 최선을 다하고 정말 잘해보려고 했지만, 그러한 자기의 진심과 자율성을 무시하는 폭력적 독재의 권위자로 인해 부당하게 쫓겨나가는 거짓된 인식의 그림 속에서, 이들은 사실 쾌재를 부릅니다.


남들에게 연민어린 정서적 지지도 받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천재인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역량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폭력적 권위자가 알아보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러한 독재의 강압 속에서도 자신은 다만 열심히 하려고 했던 선량한 피해자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최면을 통해,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은폐하고, 자기정체성은 안전하게 보호한 채, 도덕적으로 자신을 우위에 세워 일종의 정신승리를 거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정확하게 이것을 원한감정이 만들어낸 '약자의 도덕'이라고 명명합니다. 약자의 도덕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한 것이 선한 것이다."


역량이 없는 것이 오히려 선한 것으로 둔갑되어 예찬됩니다.


이것은 지금의 시대의 조류를 반영합니다.


강하고 근본있는 것은 나쁘다는 굴절된 편견 속에서, 약하고 미숙한 것이 오히려 사랑받습니다. 연예인만 보더라도, 과거와는 다르게 뭔가 좀 어설프고 덜 익은 듯한 모습의 인물상이 선호됩니다. 이런 인물들을 엄마의 치마폭 안에서 키우듯이 지지하는 것이 요즘 연예인들을 소비하는 풍조입니다.


그래서 연예인들도 어떤 때보다 자기의 약함을 도덕성으로 바꾸어 강조합니다. 못나고 부족하지만 그만큼 착하고 말을 잘 듣겠다는 입장을 취하며 대중들에게 흡사 진리를 향해 보낼 법한 열렬한 지지를 호소합니다.


비단 연예인뿐이 아니라 사회전반적으로 이 도덕을 통한 '진리쟁탈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정말 재미있는 것은, 이 진리쟁탈전을 조장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사람들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진리가 있다."라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자신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진리로 말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수평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선구자적 인물인 것처럼 이들은 자기를 입지화하곤 합니다. 이것이 또한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도덕적이라고 자평하는 주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들의 계략 또한 존재합니다.


모두가 다 각자의 정당한 진리를 갖고 있으니 이는 말만으로는 수평적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래도 자기가 조금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싶고, 조금 더 높은 권위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취해지는 것이 '도덕적 승리'입니다.


다 똑같이 수평적인 각자의 진리 위에 자기만은 도덕의 무게를 더해 '조금 더 특별한 진리'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교묘한 계략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의 실상은 이와 같습니다.


"모두는 다 저마다의 정당한 진리를 갖고 있으니 완전히 동등하다. 역량의 차이는 없다. 그러나 나는 도덕적이니 그 몫은 조금 더 평가될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은 자기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주 억지스럽게 평면화시킨 뒤, 마치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소재인 것처럼 만든 뒤, 자기만은 도덕적 승리를 통해 유일하게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쉬운 비유로 이는 열심히 공부한 이들이 정당하게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한 뒤, 자기만 획득할 수 있는 도덕점수를 통해 자기 혼자 서울대에 가려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약자의 도덕'이 만들어내는 일이며, '도덕적 승리'가 의미하는 모든 것입니다.


역량이 없는 이가 억지로 자기만 유일한 왕이 되고자 고집할 때 쓰이는 그 사기의 도구가 바로 '도덕적 승리'인 셈입니다.


버려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의 상태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현재의 집단에 있으면 자기가 유일한 왕이 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이들은 탈출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탈출의 상황 자체를 자신이 도덕적 승리를 획득할 소재로 활용합니다.


경계선성 성격장애가 자주 보이는 모습입니다. 관계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이들은 관계의 종말까지도 철저히 남용합니다.


"빨리 버려줘. 나는 절대 내 입으로 먼저 나간다고는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지지 않았어. 니가 잘못한 거고, 니 잘못으로 내가 쫓겨나가는 거지,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언제나 도덕적이고 올바르다구. 여기에서 나를 왕이 되게 해줄 거 아니면 빨리 쫓아내달라니깐. 나가서 나는 자유를 찾아 진정한 왕이 될 거라구."


그래서 이러한 이들은 이미 떠나기로 판단을 끝낸 집단 내에서는 끝없이 저항만을 반복합니다. 물론 이 저항은 수동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전방위로 위축되어 무력해진 피해자와 같은 양상을 보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 애처로운 바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다 연기입니다.


쫓겨나기 위해 하는 순도 100%의 연기일 뿐입니다.


빨리 나가서 왕이 되기를 꿈꾸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입니다.


쫓겨나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지면 이들은 마치 집단의 구성원들을 걱정하는 듯한 태도로 구성원들 사이를 오가며 이간질을 하곤 합니다. 특히 해당집단의 책임자와 구성원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데 더욱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책임자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도덕적 승리'를 지지해줄 '증인들'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순수하고 선량한 희생자로서의 자신의 '수난극'을 목격해줄 관객들을 더욱 확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수난극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이들은 민주주의의 혁명가라도 된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독재하지 않는 진정한 무위의 권위를 자신이 보여주겠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어떻게 행위해야 하고, 진정한 집단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들은 열변을 토합니다. 자신이 쫓겨나온 그 집단과는 다르게, 자기는 진정한 마음의 자유와 평등이 있는 집단을 참된 왕으로서 만들겠다고 다짐합니다.


경계선성 성격장애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B군 성격장애들이 매우 자주 보이곤 하는 모습입니다.


단순하게 역량이 없었을 뿐인 자신의 문제를 인간의 운명적 비극이라도 되는 것처럼 극화시켜 스스로 도취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장애와 같은 일이 오늘날에는 심지어 사회적으로 권장되곤 한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경험하는 진짜 비극입니다.


약한 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약한 것입니다.


강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그냥 강한 것입니다.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것은 폭력의 의도를 내재합니다.


자기가 무조건적인 왕으로 대우받지 못하면, 다른 이들을 언제나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경계를 흐리는 이들이 행사하는 폭력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 '버려지는 일'이란 실은 자신이 '버리는 일'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도구로 보며,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주기에 유용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버리려는 의도로만 가득하지만, 자신은 무엇인가를 버리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버려지는 형태로 버립니다. 투기의 의도도 달성하고, 도덕적 승리도 성취합니다.


이처럼 철저히 관계에 의존해 인간을 착취하는 삶의 양상을 '비실존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실존은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관계가 아닌 것'은 '한계'이며 곧 '경계'입니다.


이 경계를 존중하며 사는 일은, 버리거나 버려지는 관계의 연극판 자체를 떠난 것입니다.


경계를 흐린 채 관계를 통해 왕이 되기 위해 살아가면, 버리거나 버려지는 현실이 늘상 출현합니다. 이것을 소위 배신이라고 부릅니다.


배신은 관계에 대한 의존이 만듭니다.


배신하는 이는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의존이 배신당할 것 같아 자기가 먼저 배신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가엾은 선의의 피해자인 척만 합니다.


자기가 배신할 준비를 이미 마치고 있기에, 배신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사실은 의식 밖으로 빠르게 사라집니다. 자기는 누군가를 배신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착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작용입니다.


가장 도덕적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배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 모습은 오늘날에는 일상입니다.


'약하기에 선한 것'으로 더 많이 자신을 선전함으로써 관계의 힘을 끌어와 왕이 되고자 하는 현실은 언제나 배신만이 가득한 현실이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좀처럼 믿기 어렵게 된 이유이며,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실존적으로 사는 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실존상담자는 버려지기 위해 절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실존은 이미 버려졌기[던져졌기] 때문입니다.


버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버렸기[던졌기] 때문입니다.


삶에 자신이 던져져서, 삶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바다에 물방울이 버려졌지만, 실은 물방울이 바다에 자신을 던진 것입니다.


자신이 진짜로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렇게 사는 당신은 바다입니다. 버려진 섬들이 아니라, 원래 버려질 수 없는 당신이 바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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