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자로 살기 #27

"오늘날 우리는 왜 이리 화가 날까"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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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할 때 우리는 화가 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되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야기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섬기고 있는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막고 있기에 우리는 화가 납니다.


이 시대에 만연한 화는 이러한 이야기숭배의 방식이 지배적으로 만연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가장 널리 숭배되고 있는 이야기는 '좋은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저주에 의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거의 언제나 억압하곤 합니다.


효과적인 예로, 상담자인 척하는 가짜상담자들의 경우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가짜상담자들은 늘 내담자에 대해 화가 나있습니다. 초보 가짜상담자는 그 화를 꾹 눌러 참기에 상시 얼굴이 경직되어 있으며, 조금 더 노련한 가짜상담자들은 자기의 화를 내담자의 화인 것처럼 전가하곤 합니다. 자기는 중립적으로 여여한데 내담자의 화를 대신 온전하게 만나주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가짜상담자들의 화입니다. 가짜상담자들 자신이 화나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들은 똑바로 살지 못하고 아이처럼 자기를 의지하는 내담자들의 모습이 부담스럽고 또 불만스럽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잔소리를 하고 싶습니다.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시하고 명령하고 싶습니다. 내담자들이 성장하도록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담자들이 자기에게 상담을 받으러 오게 하기 위해 써놓은 홍보문구에는 이렇게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립니다. 자유롭고 당당하게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세요. 어떤 마음이라도 괜찮습니다. 누구도 당신의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고,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 온전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온전한 마음인지 우리는 함께 만날 것입니다. 모든 마음이 저마다 선한 의도로 드러날 수 있는 마음의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세요."


이처럼 자기가 해놓은 '이야기'가 있기에, 이들은 내담자를 실은 통제하고 싶어도 그 마음을 꾹 눌러 참아야 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행동하면 자기의 이야기와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가짜상담자들은 그 자신이 '좋은 부모의 이야기'에 취해 있습니다. 여기에서 '좋은 부모'란 강압하거나 통제하는 '나쁜 권위'를 행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스스로 온전하도록 다만 상냥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좋은 권위' 곧 '강력한 권위'이자 '진정한 권위'를 행사할 줄 아는 인물상입니다.


이러한 좋은 부모의 이야기와 자기의 행위를 일치시켜야 하기에, 이들은 늘 화가 납니다. 미친듯이 지적질을 하고 혼내고 싶은 마음을 억압하느라 화 또한 미친듯이 끓어오릅니다.


더 핵심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들은 신처럼 보이려고 하기에 늘 화 속에서 삽니다.


억압적 권위로 통제하는 일은 이들에게는 악마의 일과 같습니다. 자기가 자기 부모를 그렇게 유치한 방식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부모와는 다르게 신과 같이 좋은 부모의 모습이 되기를 꿈꿉니다. 그 꿈의 이야기에 끼워맞추어 자기의 삶을 임의로 조형하고자 합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이 과정 속에서 화는 필연입니다.


신이 되려면 마음을 잃어야 합니다. 마음 대신에 신념과 윤리와 대의라고 하는 이야기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억눌리는 데 화가 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다들 이 '좋은 부모'라고 하는 신을 추구하며, 또 자신이 그러한 신이 되기를 추구합니다.


마음을 잘 알아주고 돌보아주는 '좋은 부모'가 있어야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착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그 '좋은 부모'는 가장 마음을 억압하는 세력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가장 억압하는 이는 반드시 타인의 마음도 가장 억압하게 됩니다.


자기의 마음을 억압하면서 상대의 마음이 자유롭도록 돕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어미새가 자기의 날개를 묶은 채, 아기새들에게 자유롭게 날라고 하거나, 나는 법을 가르치려는 일은 근본부터 성립되지 않는 일입니다.


애초 불가능한 이 일을 하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좋은 부모는 권위로 통제하지 않는다는 미신적 이야기에 빠져, 모두가 더 많이 자유를 상실해가고 있기에 오늘날 사방에서 이토록 화가 많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좋은 부모'는 부모놀이를 하려는 주체만을 위한 것이지, 그 기능의 수혜자를 위한 것 또한 물론 아닙니다. 여기에는 실질적인 효용도 없습니다.


"내가 그래도 똑바로는 살고 있는 거야."


이 자기만족을 위한 이야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태를 자폐라고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줄게요."라는 외연을 취한다고 그것이 자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몰두하는 이야기에 대한 광신 속에서 발화하는 모든 대사는 자폐적 독백일 뿐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화는 '자폐의 화'이며, 그 근간에는 이야기숭배라고 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실존상담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살지 않을수록 그 대신에 이야기를 숭배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표현 그대로, 우상숭배의 행위와 같습니다.


특히나 '좋은 부모의 이야기'는 개인이 '부모의 이야기'를 살아야지 '자신의 삶'을 살면 안되는 것처럼 조장함으로써 가장 우상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정말로 좋은 부모를 '자신의 삶'으로 살고 있는 이들은 '좋은 부모의 이야기'를 우상으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좋은 부모'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자랑하거나 선전하지도 않습니다. 숨쉬는 일을 뽐내는 이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실은 자신이 정말로 좋은 부모로 살고 싶지 않은 이들만이 이야기를 삶의 대체재로 삼아, 그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진 '좋은 부모'라고 하는 가상의 자기정체성만을 소비하며 자폐적 만족에 빠져듭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화를 달래는 방식입니다.


전술했듯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 화가 납니다.


'좋은 부모'인 척하는 이들은 실은 부모를 그만 하고 싶어하며, 가짜상담자들은 실은 상담을 그만 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원입니다.


그만 하고 싶은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하기에 화는 끊임없이 발생하며, 이와 같은 화를 달래고자 '좋은 부모의 이야기'는 더욱더 탐닉됩니다. '나는 좋은 부모로서 잘해나가고 있어.'라는 가상의 이야기로 자신의 불만족스럽고 불일치한 상태를 합리화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분열입니다.


분열을 봉합하기 위한 접착제로 이야기의 소비는 시도되며, 그 결과는 자폐의 강화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열을 낳은 것 또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해야만 한다'의 집합입니다. 삶은 '하고 싶다'의 집합입니다. 이야기의 당위에 의해 삶의 소망이 눌릴 때 분열은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처럼 이야기로 인해 야기된 분열을 통합하기 위해 또 다시 이야기는 당위적으로 소비됩니다.


이것은 마치 병주고 약주고의 현실과도 같습니다.


이야기는 질병이자 동시에 마약입니다.


양극을 오가며 강도높은 자극을 제공하는 엄연한 중독재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화는 '자폐의 화'이자 '분열의 화'이며, 결국 '이야기중독의 화'인 것입니다.


모든 중독은 이야기중독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중독자들은 중독의 소재들을 통해 자기가 이야기로 꿈꾸어낸 이상적인 자기정체성의 상태를 경험하곤 합니다. 그러한 이야기의 지속을 위해 중독재는 거듭 소비됩니다.


그리고 이 중독재에 대한 의존 속에서 개인들은 아주 많이 화가 나곤 합니다. 중독재에 그만 의존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늘 분노합니다.


이야기를 예찬하고 숭배하는 이야기중독자들 또한 이처럼 실은 가장 이야기를 그만 하고 싶어하는 이들입니다. 그러지 못해 화가 가득 난 이들입니다.


정말로 살면 이야기가 사라집니다.


좋은 부모를 그만 하고, 상담을 그만 하고, 이야기를 그만 하고 싶어하는 삶의 소망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 살아버리면 모든 이야기는 지배력을 상실합니다. 원래 이야기에는 지배력 따위는 있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자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만들어내 고집스럽게 삶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삶과 싸우려는 일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며, 삶과 싸우면서 내는 화는 가장 어리석은 화입니다.


붓다에게서나 실존상담자들에게서나 이는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만 하고 싶은 것을 그만 할 자유가 있습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만 하고 싶은 것을 고집부리며 하고 있는 일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그 누구에게도 선의가 되지 않고 효용이 되지 않습니다. 모두를 분열과 자폐와 중독의 지옥 속으로만 몰아넣는 고통의 일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가장 빈번한 모순은, 자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마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인 것처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상황을 이제야 진정한 자기의 삶을 찾은 것처럼, 자신을 가로막는 억압과 독재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실현한 것처럼, 또 자신에게 운명적 재능이 있는 것처럼 여기곤 합니다.


다 이야기에 의한 착각입니다.


정말로 살 때는 이와 같은 '똑바로 사는 자신'의 과장된 자기감이 빠집니다.


숨쉬는 것은 그냥 숨쉬는 것이지, 똑바로 숨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과 일치해서 가장 그렇게 살고 있는 이에게는 그러한 자기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없음을 의도적으로 지향함으로써 모델링을 통해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는 플랫폼적인 주체를 표방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또한 이야기로 만들어진 가짜자기입니다. 무아(無我)를 흉내내는 거짓도사연입니다.


이렇게 다들 이야기를 통해 깨달은 척하고 있고, 진정한 자기인 척하고 있고, 신인 척 하고 있어서, 이 시대에는 화가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제 '자아의 화'라고 말해보겠습니다.


자아의 꿈은 진정한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이고, 그 길의 끝에는 신의 옥좌가 있습니다. 자아는 신이 되고자 합니다. 가장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합니다.


자기가 그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자아 중의 자아, 가장 자아인 것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무지의 미소를 지으면서 모든 것을 자상하게 알아주고 돌보아주려는 일입니다.


자아는 이런 일을 하고 있어서 엄청나게 화가 납니다.


아무리 이렇게 신인 척하고 있어도, 그는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근본적으로 아무 의미없는 이 일을 그만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자아는 늘 화로 뜨겁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분열되어 있고, 자폐적이며, 중독에 빠진 자아라는 사실이 노출되지 않기 위해, 자아는 자기가 자아 아닌 척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날조해내는 일에 이 화의 에너지를 가용합니다.


자기는 착하고 약한 자아들을 돌보는 초월적 주체여야만 하지, 자아여서는 결코 안되기 때문입니다.


자아면, 자기는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아 아닌 척 자기를 기만하며 살아온 이 모든 삶의 궤적이 전적으로 허망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범람하는 '좋은 부모의 이야기'가 은폐하고자 하는 '죽음에 대한 자아의 두려움'이며 동시에 '삶에 대한 자아의 당위적 강박'입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가 부모를 그만 하고 싶어하고, 가짜상담자가 상담을 그만 하고 싶어하듯이, 자아도 실은 당위적 강박으로서의 삶을 그만 하고 싶어합니다.


자아는 언제나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자아의 꿈은 죽음입니다.


자아는 죽어서 자유로워지기만을 소망합니다.


이 자아가 바로 이야기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발명품입니다.


자아가 죽을 때 우리는 이야기에서 자유로워져 '자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자아의 죽음은 곧 이야기의 죽음입니다.


이야기가 없는 곳이 바로 자유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은 세상도, 타인도, 우리 자신의 한계도 아닙니다. 오직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이야기만이 우리의 자유를 봉쇄하고 억압합니다.


화는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우리의 존재를 덮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존재의 반응입니다.


이 시대에 만연한 화는 우리의 존재가 이야기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이야기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하는가를 드러내는 방증입니다.


화가 '존재의 화'로 알려지는 이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오늘날 왜 이리 화가 나고 있었는가에 대해 정말로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되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쓰인 그 모든 좋고 나쁜 이야기들을 모두 다 날려버리고 우리는 다만 자유롭게 숨쉬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쁜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로 바꾸어야 우리의 존재가 회복되고 우리의 삶이 건강해진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아의 주장입니다. 그러한 자아가 파놓은 자가당착의 함정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일에는 이야기가 조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존재는 그 어떤 이야기없이 존재하기에 온전한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는 이야기로 보완해주어야 할 결함이 없이, 온전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시간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르며, 여기에는 이야기라는 불순물은 단 1mg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영원성은 우리의 삶이 정말로 이야기가 아님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의 감각입니다.


소위 깨달은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합니다.


"아, 내 삶이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이야기없이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이구나."


우리가 이야기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죽음이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화가 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화이며, 이야기숭배로 인한 착각이 낳은 화입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의 모든 두려움은 이야기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이야기는 삶을 '나쁜 놈'으로 상정합니다. 삶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우리에게 집요하게 설득한 다음, 자기는 삶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악마의 유혹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선사한 후에, 자기가 그 치유제인 척하는 기만적인 권위를 얻는 일에 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실 이야기에 대해 화나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들어 우리의 자유를 봉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로 살아가지 않는 이들을 실존상담자라고 부릅니다.


실존상담자로 산다는 것은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두려움을 넘어서 원래 우리의 것인 존재의 자유를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은 늘 화난 길이 아니라, 늘 환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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