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아(Memoria, 2021)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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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창세기.


이 영화를 이렇게 말해보자.


기독교적 신화에서는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으로 계몽이 시작되었다. 빛은 세계를 만드는 질서다. 그리고 말씀은 빛보다 앞서 빛을 만들었다. 이처럼 세계를 만드는 질서 자체를 만드는 것, 그것은 질서 중의 질서다. 보편 중의 보편이며, 진리 중의 진리다.


이 말씀(logos)이라는 것은 이처럼 최고의 메타적 권위를 얻게 되었다. 때문에 데리다는 말씀을 음성언어와 연결지으며, 음성언어가 서구사상사에서 타자들을 획일적으로 규정짓는 폭력을 행사해왔다며 비판하지만, 이것은 다만 음성처럼 발화된 문자언어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것이 더 정당할지 모른다.


불교적 창세기는 이 지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쿵!"


아주 묵직하게 중심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와 함께 세계는 펼쳐졌다.


텍스트의 다의성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의 사건이다. 다만 체험의 영역이다. 해석을 거부하는 순수체험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키르케고르를 위시한 실존주의의 영토다.


실은 기독교적 신화 역시도 마찬가지다.


모세가 그의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떨기나무처럼 덜덜 떨기만 했다. 그 만남은 언어를 초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하나님이 그를 여러 번 청한 뒤에야 모세는 가까스로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라고 응답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모세는 자기에게 울려퍼진 소리를 통해 처음으로 그 자신의 실존을 용인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내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모세의 신이 자신을 알리는 소리이자, 모세가 그 자신을 알리는 동시적인 소리다.


그렇게 존재의 중심을 하나로 꿰뚫어 흔드는 음성 속에서 모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온전한 존재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는 실존하는 인간으로 깨어난 것이다.


버려지고 버려진 끝에 자신의 시간을 잃고 주변인으로 방황하던 모세는 이처럼 장대한 소리와의 만남을 통해서야 자신의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세계가 그 소리만큼이나 장대하게 펼쳐졌다.


창세기는 언제나 이러한 비유다.


그것은 물리적 세계이기보다는, 개인의 심리적 세계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에 우리는 알 수 없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여주인공이 깨어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세계는 언제나 깨워짐으로, 곧 깨어짐으로 시작된다.


불안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들은 소리가 무엇인지 그 근원을 찾으려 하는 여주인공의 여정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생명과 존재의 근원을 향하는 여정으로 드러난다. 그 끝에서 그녀는 꿈꾸고 살지 않으며 죽음을 쉼으로 잠들 수 있는 이를 만나게 되고, 지금껏 자신의 마음이라고 착각했던 것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저 '마음'이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근원에서부터 공유되는 것이었으며, 깨어나 산다는 것, 실존한다는 것은 그 근원에 닿아 사는 일이었다.


처음처럼 또 소리가 울려퍼지며, 태초의 지구처럼 빗소리가 가득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게 다이지만, 말했듯이 이것은 체험이다.


영화 내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관객에게 돌격해오는 영화라는 소리 자체의 체험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이렇게 만들었다.


왜 알 수 없는 소리는 커다란 충격으로 돌격해오는가?


이쪽에서의 언어를 멈추고 침묵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 침묵이 바로 근원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소리들은 침묵(空)이라는 근원을 안내하는 이정표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불교적 창세기다.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를 통해 인간은 소리보다 앞선 태초라는 것을 기억해내고야 만다. 죽음과 잠과 쉼이 의미하는 바로 그 '존재의 뿌리'를 직관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사히 안착한다.


"쿵!"


이것은 인간이 중심에 장중하게 안착한 바로 그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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