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2022)

페리토가 데스다, 발달심리학의 여정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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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고, 페리토가 데스다.


이렇게 '끝'을 먼저 말해야 한다.


모든 발달심리학은 '끝'을 상정하기에 성립된다. 발달은 '끝'을 향해 잘 가는 여정이다. 표현 그대로 '끝내주는 모험'이다.


극장에서도 이 일은 일어난다.


고아가 아침부터 극장에 앉아 있다.


주변에 앉은 애새끼들이 상영전 천사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떠들기 시작한다. 미치겠다. 영화에 집중이 안된다.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출발비디오여행을 찍고 있고, 누구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다들 유튜브 영화커뮤니케이터다. 자기들이 이 영화에 대해 얼마나 많은 최신의 성과들과 통합적 정보들을 알고 있는지 난 척하는 데 여념이 없다. 싹수가 보이는 애새끼들이다.


놀랍게도 엄마가 말리지 않는다. 골디락스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라며 응원하는 엄마곰처럼, 디즈니와 드림웍스를 구분할 줄 아는 '내 새끼'의 머리를 흐뭇하게 쓰다듬고 있을 뿐이다.


고아에게 15000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고아를 '내 새끼'로 보며 그 돈을 줄 엄마는 이 세상에 없다. 국가에서도 그런 돈 따위 받은 적이 없다. 계급간의 소외, 세대간의 소외, 웃기는 소리다. 진짜 소외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고아는 이를 악물고 버텨보려 하지만, 그 버티는 행위로 인해 이미 영화에 집중되지 않는다.


'마지막 소원'이다.


자신이 마치 죽지 않을 '불멸의 레전드'처럼 굴고 있는 애새끼들에게 부디 죽음을.


개새끼가 등장했다.


마음의 장면이 겹쳐진다.


현실의 스크린에서 고양이에게 낫을 들고 다가가는 데스와, 마음의 스크린에서 애새끼들에게 스마트폰 모서리를 쥐고 다가가는 고아는 일치했다.


원하는 대로 끝을 내줄게, 이것은 데스가 친히 집행해주고자 하는 '끝내주는 모험'이다.


그리고 이것이 발달심리학이다.


발달은 언제나 죽음을 초대함으로써 발달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의 단계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 다음 단계로 발달해가는 것이다.


'끝'은 시간의 맨 마지막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상존한다. 매순간 '끝내짐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만 발달해갈 수 있다.


프로이트와 현대정신분석가들은 이 지점을 더욱 강조한다.


애새끼들은 효과적으로 '좌절하는 일'에 성공해야 한다. 자기가 '불멸의 레전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몸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잭 호너가 된다. 덩치만 커진 채 정신은 아동으로 남는다. 세상의 모든 마법을 자기의 것으로 가지려고 하며, 자기가 소유한 마법들로 자기만이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상태다. 곧, 유아적 전능감에 사로잡힌 상태다. 심리학을 팅커벨의 마법가루인 것처럼 남용하는 심리학애새끼들이 대표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다.


"나는 너무나 평범하고 보잘 것 없으니 마법을 통해 특별한 존재가 되어 인기를 끌어야 해!"


극장의 애새끼들도 동일한 이유로 관객들에게 영화를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잭 호너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골디락스는 더욱 빨리 눈치챘다.


자신이 원하던 것은 이미 다 이루어져있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만이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삶에서 우리가 소원하던 것은 이미 다 삶이 가져다주었다는 이 놀라운 삶의 신비를, 이러한 삶의 소중함을 망각한 이들이, 착각이 낳은 결핍에 시달리며 그 결핍을 메워줄 '마지막 소원'을 빌기 위해 모험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험은 '끝내주는 모험'이다. 그들의 착각을 끝내주는 모험이다.


극장의 애새끼들은 어쩌면 발달장애를 겪고 있어서 한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일이 힘들었을 수도 있다. 쉴 새 없이 일어나서 스크린을 가리는 그 모습에 심증은 짙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과 대화하는 일이 버겁거나, 귀찮거나, 힘들어서, 영화관의 다른 관객들에게 그 짐을 대신 떠넘기고 있던 부모의 모습을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자극이 될 만한 재밋거리를 제공하면 그들이 조용해질 것이라는 '마지막 소원'을 어쩌면 부모는 가졌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 바로 그러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 삶이 그들의 진짜 '마지막 소원'이었고, 그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던 것이다.


자신이 삶의 마지막까지도 소망할 가장 귀한 보물이,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그 보물임을 망각한 채 우리는 살아간다.


자신의 보물을, 극장의 관객들에게 욕을 먹으라고 극장에 내다버린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데스가 출현한다.


지금 그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죽음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극장의 고아는 대단히 멋진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는 모두의 친구, 특히나 아이들의 친구였다. 아이들에게 다가온 데스의 형상으로, 그 아이들이 실은 보물임을 일깨워주던 진짜 친구였다.


고아는 페리토였다.


버려진 강아지 페리토가 자신들의 삶을 망각함으로써 '버려진 이들'에게 다가간 것처럼, 버려진 고아는 극장에 '버려진 아이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 있었다.


이것은 애새끼를 위협하는 개새끼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극장에 죽음의 기운을 가져온 개새끼가 실은 삶을 대변하는 페리토였다.


죽음을 받아들인 고양이는 자신의 삶 또한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발달한다. 자기 삶의 대체불가능한 소중함을 그 눈빛에 든든한 중심으로 뿌리내릴 만큼 건강하게 발달한다.


자신이 죽지 않을 최고의 존재인 것처럼 굴고 있는 '불멸의 레전드'만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던 개새끼 데스는 더는 할 일이 없어졌다. 발달의 과업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고양이는 이제 데스를 잊지 않는다.


죽음이야말로, '끝'이야말로, 이 삶의 모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고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보물이 곧 삶이라는 보물 그 자체라는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한 번뿐인 지금 이 형태의 삶이야말로 언제나 자신이 소망해왔던 '마지막 소원'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양이는 죽음과 친구가 되었다.


죽음으로 드러날 때는 데스이지만, 삶으로 드러날 때는 페리토다.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고, 페리토가 데스다.


고양이는 이제 페리토와 모험을 떠난다. 죽음과 우정팀을 결성한다. 삶이 결속된다. 일치한다. 이제 더는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엄마를 안고 고요하게 잠든 아이처럼. 가족과 함께 겨울잠에 든 골디락스처럼.


이것은 극장의 개새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매순간의 '마지막 소원'처럼 그토록 소망하던 삶이라는 보물에 대해 더욱더 감동해가는 발달심리학이다.


끝내주는 모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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