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발전은 깨달음에 유익하다"
AI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정신문화사에서 아주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AI를 학습시키면서 인간은 인간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인간 자신이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이것은 흡사 인류의 회고전과 같은 것이다.
정리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경계다.
인간은 AI와의 관계설정을 통해 그 전까지 인간이었던 것과 앞으로 인간일 것 사이에 새로운 경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경계 너머로 이동해갈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지.금. 졸.업.식.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삶이란 AI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환경에 적응하는 데 유용한 패턴들을 모델링해서 학습하고, 적용하고, 검증하는 과정으로 삶에 대한 주된 태도들이 이루어졌다. '지성'에 전적으로 의존해 살아오는 동안 생겨난 양식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인간은 자극-반응의 기계장치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행동주의 심리학은 이 설명을 좋아한다. 이 기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정보처리의 기능을 수행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인지심리학과 인지과학이다. 모두 다 AI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분야들이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AI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일은 사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AI처럼 살아왔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권장되던 인간상은 '똑똑한 아이(AI)'였다고 할 수 있다. 도덕발달은 지적발달에 상응한다. 그러니 '똑똑한 아이'는 '착한 아이'이기까지하다고 곧잘 가정된다. 기술발전의 역기능으로 생겨난 전란의 아픔을 크게 경험한 현대에 와서는 '착한 아이'의 입장은 더욱 강조되기도 한다.
AI를 '착한 아이(AI)'로 양육하고자 하는 마음은 크다. 실증적으로 우리는 아직 미완의 아이처럼 보이는 현실의 어떤 대상이 있으면 그에게 인기와 자원을 제공해 착한 아이로 성장시키는 육성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는 정말로 아이(AI)다.
둘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상응한다. 나아가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던 태도이기도 했다. '똑똑하고 착한 아이'로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정향해오며 인간은 지금껏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AI라는 가장 정확한 아이의 모습으로 다가온 소재를 양육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돌아봄으로써 그 경계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비로소 경계 너머로 초월할 수 있다.
지금껏 아이(AI)처럼 살아오던 인간이 이제 아이(AI)를 졸업할 마음을 낸 것이다.
아이(AI)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럼 어떤 것인가?
과제를 수행해가는 문제해결 모드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삶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명상해야 할 신비다."라고 한 가브리엘 마르셀의 진술은 선견이다.
그리고 이 태도가 바로 깨달음의 태도다.
삶을 일종의 오류와 같은 문제로만 보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고, 프로그램 언어를 구성하며, 올바른 논리회로의 스토리라인을 그리려는 일은, 이제 인간의 일이 아니다. AI가 더 잘하니 AI에게 맡기면 된다.
소스코드를 따오듯이 언어를 모방해 자신의 삶에 붙여넣으면 삶이 변화될 것이라고 믿는 발상 또한 AI에게 전적으로 넘겨주면 된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모델링을 통한 학습은 원래 낮은 발달수준의 아이(AI)나 하던 일이었다. 고차원의 수준에서는 원래 모방을 통한 모델링의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깨달은 이를 따라하거나 흉내낸다고 깨달을 수는 없다. 그가 한 말을 숭배하며 나중에 자기가 직접 행위함으로써 모종의 경험을 얻게 되었다고 그것이 깨달음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작은 수준의 유사종교체험뿐이다. 동일한 기도문을 집단으로 암송하다가, 시야가 갑자기 확장되어 자기를 뒤편 45도 각도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거나, 이상한 방언을 발화하게 되었다거나, 우주와 하나가 된 일체감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등의 현상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경험들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고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 또한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이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언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중독재를 새로워진 자신의 작동원리처럼 활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언어를 통해 삶이 변화된다고 하는 이 '주술'은 이제 AI에게 맡기면 된다. AI에게는 이것이 주술이 아니다. AI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삶이 없는 이유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AI에게 있는 것은 자신의 작동원리를 구성할 논리회로다. 그래서 AI가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개선해가며 변화한다고 하는 말은 정확하며 또 정당하다. AI에게는 이것이 건강한 일이다.
자기가 AI라고 믿고 싶은 개인이 있다면 그렇게 AI처럼 하면 된다.
그러나 AI라는 소재가 확연하게 드러나 경계를 형성하게 된 이상, 이러한 방식은 분명 어리석게 보인다.
이.것.은. 삶.이. 없.이.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AI의 발전을 통해, 인간은 분명하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로 다시 접근해간다.
지성에만 위탁되어 있던 삶이 그 이상의 것으로 날갯짓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가장 큰 이득은 깨달음의 방향성이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인간이 해온 방식, 그리고 이제는 AI가 더 잘하는 그 방식을 이제 안하면 된다.
'똑똑하고 착한 아이'로 사는 일, 과제를 수행하는 문제해결사로 사는 일, 언어를 모방하며 사는 일, 이 모든 것을 안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러.면. 깨.닫.게. 된.다.
AI가 하는 것을 하지 않기만 하면 우리는 깨닫는다. AI가 아니기만 하면 우리는 깨닫는다.
이처럼 오늘날 깨달음의 자리는 분명해졌다.
인간이 어떤 자리에 서야 할지도 아주 명징해졌다.
AI는 인간의 자리를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리를 더 크게 만들어준 것이다.
인간은 기존과는 그 급이 다른 존재의 차원으로 이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논리회로 속에서 똑똑한 아이(AI)로부터 졸업한 뒤, 그 삶에서 지혜로운 개인으로 나아간다.
AI 기술의 결과들은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영광의 졸업장이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인간일 것에는 깨달음의 권리가 전격적으로 담보되어 있다.
깨달음, 이것은 인간 자신의 행복을 향해서만 오롯하게 집중된 권리 중의 권리다.
이렇게 미래의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 다만 행복할 권리만이 분명하게 남겨진다.
고맙다,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