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7

"앵무새 만나기: 우리에게 명상이 필요한 순간"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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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는 반드시 명상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명상을 오래 해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며, 태어나서 한 번도 명상을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이 깨닫는 경우도 아주 많다.


그러나 깨달아 사는 삶은 분명 어떠한 명상적 향기를 갖는다.


명상은 깨달음의 전후로 배치될 때 유용하며, 특히 깨달은 뒤 명상을 하는 일에는 이득이 많다.


여러 전통들마다 고유한 명상법들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명상이라고 하는 활동의 본질이다. 이것은 왜 명상을 하려고 하는가의 그 정직한 이유와 연결된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해보자.


명.상.은. 내.면.의. 앵.무.새.를. 만.나.기. 위.한. 활.동.이.다.


우리는 내면의 앵무새를 만난 적이 거의 없다. 그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성가시고 꼴보기 싫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보기 싫은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되는 이 내면의 소리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외부의 소음들에 매우 자주 몸을 위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내면의 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내부와 외부가 동시에 소란스러워진다. 시끄러워서 편히 잘 수가 없게 된다. 쉼이 우리에게서 실종된다.


이.것.은. 인.류.의. 불.면.증.이.다.


오늘날 편히 잠들 수 없는 불면증은 일종의 거시적인 심리재난의 양상을 띤다.


가장 잔혹한 고문 중의 하나는 피고문자가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한다. 잠을 봉쇄당한 이는 살의가 들끓게 된다. 사소한 시비에도 파국적인 결말이 예언된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 같은 상태다.


쉼이 없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편히 숨쉴 자리가 없어진다는 뜻과 같다. 죽으라는 명령이다. 사형선고다.


현대인은 이처럼 인류의 불면증을 선고받아 비극적인 사형수처럼 살아간다.


너무나 시끄럽게 떠드는 내면의 앵무새로부터 도망치려고 한 그 결과다.


그런데 앵무새의 생리를 떠올려보자. 앵무새가 하는 말은 다 다른 대상으로부터 듣게 된 말이다. 앵무새는 외부의 음원을 흉내내며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


정보사회에 진입하면서 세상에는 무수한 정보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이 정보들은 이내 앵무새가 따라하게 될 모방의 소재들이었다. 외부세계가 소란스러워진 것만큼이나 내면의 앵무새 또한 더욱 소란스러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내면의 앵무새를 피해 외부의 자극들로 도피하려고 하는 행위는 실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앵무새는 더 시끄러워진다. 견딜 수 없는 악성의 소음으로 화한다.


명상은 이러한 때 더없이 훌륭한 치유재로 기능한다.


명상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인위적으로나마 외부의 자극을 먼저 차단해보는 활동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외부의 자극을 갈망하는 자극-반응 동물로 살아온 까닭에, 처음에는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 된다. 내면의 앵무새가 광적으로 발작하는 기분이다. 그래도 조금 참으며 활동을 지속하다보면, 어느 순간 앵무새의 소리가 청취할 만한 음량으로 들려오는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 소리에는 많은 심정들이 담겨 있다.


너무나 속상했는데 울 수 없던 심정,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했던 아픈 심정, 또 간절히 소망했던 심정과 홀로 좌절했던 심정, 그 무수한 심정들이 목소리에 담겨 공간에 메아리친다.


그러다가 명상의 수행자는 눈치채게도 된다.


이. 공.간.이. 아.주. 크.다.


내면의 앵무새가 실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도 생겨난다.


세계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였다.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전체의 구조는 이렇다.


어마어마하게 큰 어떤 공간의 중심이, 지금 세계와 독대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그 공간 안에 가득 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다.


명.상.은. 스.스.로.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세계가 존재하는 크기와 자신이 존재하는 크기는 일치한다. 명상의 수행자는 자신의 존재가 실은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던가를 깨닫고는 소스라친다. 전율이 찾아온다. 경외감이 밀려온다.


그는 지금 자기 자신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한 것이다.


자신이 정말로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지를 그만 눈치채버린 것이다.


눈을 뜨고 다시 바라본 현실은 이제 더는 자신이 원래 알던 현실이 아니다.


자신의 안에 다 있고, 전부 자신의 것이었고, 자신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이제 세계와 적대하지 않는다. 세계는 자신의 것이고, 자신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상은 깨달은 뒤에는 특히나 유익하다.


깨달은 이들은 깨닫기 전이나 그 후나 변함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살다보면, 세계의 소란스러움에 조응하여 앵무새의 소리가 커지고, 그 소리가 지배적으로 들려오니 앵무새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결국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지는 충동이 저도 모르게 들게 되는 어떤 헤맴의 순간을 자주 맞게 된다. 그럴 때 명상은 이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하게끔 도울 수 있다.


명.상.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 기.억.하.도.록. 돕.는. 방.편.이.다.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잊은 이들이 세계를 적대하며, 늘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인류의 불면증을 호소하게 된다. 이러한 인류에게 명상은 아주 좋은 것이며, 지금 필요한 것이다.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내면의 앵무새는 반드시 생겨난다. 세계 속에 있는 깨달은 이들의 내면에는 아무 것도 없는 여여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내면의 앵무새를 사라지게 하는 일이 아니라, 내면의 앵무새를 사랑하는 일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앵무새를 죽이는 형태로 사랑은 활동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앵무새가 실은 불사조라는 사실을 사랑 속에서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가 세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곧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세계를 존재와 엮은 하이데거는 이 공속성을 내면으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시인들에게 이 내면의 깊이로 내려가 존재의 노래를 건져올 임무를 맡긴다.


이러한 방식으로, 내면의 앵무새가 내던 소음은 노래로 전환된다.


앵무새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하며, 그것은 우리의 귀에 아주 좋다.


외부와 잠시 단절한 채 자신만의 공간에서 앵무새와 독대하고 있는 이는 결코 세계를 소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명상가야말로 세계를 가장 오롯하게 만나려 하는 참이다.


눈을 감고, 그는 세계를 만나러 간다.


세계 속으로 미소가 되어 들어간다.


앵무새의 노래가 울려퍼진다.


이것이 멋진 일로 느껴진다면, 우리에게는 명상이 필요한 순간이다.


자신이 이 세계를 사랑하고 있다는 너무나 멋진 사실을, 이제 깨달을 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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