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팽창과 영적팽창"
자아팽창(ego-inflation)은 전능한 신이라도 된 것처럼 자기 자신을 과잉된 형태로 경험하는 것이다.
융은 이것을 '의식의 퇴행'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자아팽창은 무의식 안으로 의식이 퇴행해가는 것이다(Inflation is a regression of consciousness into unconsciousness)."
이러한 묘사가 정확한 이유는 융 자신이 자아팽창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그렇게 보았다.
자아팽창을 더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비유해보자면 이러하다.
개.인.이. 아.이.로. 퇴.행.한. 뒤. 엄.마.의. 품.에. 안.겨. 우.주.대.장.인. 척.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가장 대장인 척하는 아이는 그 자신이 엄마의 모습으로 화하게 된다.
융은 이에 대해, 무의식의 힘들을 자아가 자신의 힘인 것처럼 소유하고 있을 때 팽창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그의 개념 속에서는 자아(ego)가 자기(self)인 척할 때 생겨나는 것이 자아팽창인 셈이다. 즉, 아이가 엄마와 융합된 채 하나의 세력이 되어 이제는 자신이 엄마인 척할 때 그러한 자아는 과잉되게 팽창한다.
팽창의 개념이 그러하듯이, 여기에는 경계의 문제가 있다.
팽창은 경계가 없는 것이다. 경계를 함부로 넘나드는 것이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서는 늘 이 경계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최초의 관계에서부터 경계를 짓지 못하기에, 개인이 사회에 나가 경험하게 되는 그 모든 경계에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애착이론을 통해 설명해도 분명하다. 건강한 애착은 아이를 잘 품어주고 이해해주는 성모마리아 같은 양육행위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양육자의 정직한 태도에 의해 형성된다.
이처럼 자아팽창은 건강한 애착관계를 맺는 일이 실패한 징후다. 경계를 구성하는 일의 좌절이다.
경계는 '끝'에 대한 개념이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반드시 끝이 난다. 이 '끝'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실감하는 만큼 개인은 경계의 문제를 잘 다루어갈 수 있게 된다. 건강한 개인이 된다.
이별을 잘 하는 이가, 잘 사랑하는 이다.
깨달음의 감수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배양된다.
깨달음을 죽음에 대한 친화적 감수성이라고도 말한다. '끝'에 대한 섬세한 접촉감에 대한 얘기다.
우리가 '끝'이라는 것에 대해 섬세해지는 만큼 우리는 깨달아간다.
그러나 '끝'이라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심리적 세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생물학적 모성이다.
이로 인해, 자아가 자아팽창을 멈추고 엄마의 품과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려고 해도, 역으로 붙잡힌다.
이 경우 생겨나는 것을 우리는 '영적팽창(spiritual-infla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융의 정의는 거꾸로 뒤집어 묘사될 수 있다.
"영적팽창은 의식 바깥으로 (의식을 품기 위해) 무의식이 퇴행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아이를 붙잡는 엄마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거래가 있다. 붙잡히는 대신에 이득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거래의 내용은 이러하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자아팽창은 자아가 무의식의 힘과 동화되어 자기가 그것인 척하려는 것이라면, 영적팽창은 무의식이 아예 자아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유한다.
자아에게 가장 고귀하고 수준높은 힘들을 제공해줄테니 그걸 마음대로 써서 대장으로 살라고 하는 것이다. 그 교환조건은 엄마[무의식]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이가 엄마를 붙잡는 퇴행이 자아팽창이고, 엄마가 아이를 붙잡는 퇴행이 영적팽창이다.
그래서 이 둘은 동일한 것이다. 어느 한쪽을 주동자로 보느냐에 따라 변별되는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이 팽창의 현상이 영적팽창의 양상을 보일 때면 더욱 문제가 된다.
이.것.은. 문.제.로.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를 위해 진심으로 하는 일이고, 선량한 의도로만 가득하며, 인간을 위한 어떤 고귀함을 행사하는 길이라고 영적팽창은 치장된다.
자아팽창은 "저 새끼 지만 잘난 줄 알아."라는 욕이라도 먹지만, 영적팽창은 "참 숭고하다..."라는 식으로 문제처럼 인식되는 일 자체를 은폐한다.
많은 깨달음의 스승들이 이 상태에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융에 대해서도 말해보자. 융은 깨달은 사람이었나?
이것은 아주 섬세한 대답을 요구한다.
많은 종교체험을 가졌고, 눈을 뜬 경험이 있지만, 눈에 렌즈를 끼고 있어서 그가 걷는 길이 다소 굴절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
융에게 특별히 혹독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깨어난 뒤에 어느 정도는 굴절된 길을 걷는다. 잭 콘필드는 '깨달음 이후 빨랫감'이라는 말로 이를 묘사한다. 아디야산티도 '깨어남'과 '깨달음'을 변별된 용어로 다룸으로써, 개인이 깨어난 뒤에도 얼마든지 깨어나기 전보다 더 어리석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눈을 뜬 뒤에 그 전까지 붙잡아왔던 것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붙잡는 힘 자체가 강해지기 때문이며, 이제는 그 붙잡는 행위가 자신의 신비체험의 권위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성을 심리학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분야인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에서는 깨달음에 대해 신비체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심리상담의 작업이 병행되어야 함을 주장하기도 한다.
융의 업적에 비추었을 때 분명 가혹한 면이 있을지라도, 이 시대에 융을 특정한 부분에서 문제시하는 이유는 그가 평생을 엄마에게 붙잡혀 살았기 때문이다. 융의 깨달음은 엄마라는 렌즈를 통해 해석된 면이 크다.
그리고 이것은 모권주의(maternalism)가 지배적인 오늘날에 있어 더 분명한 영적 굴절의 문제를 야기하며 또 지지한다.
프로이트는 융을 부성이 결핍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으로 간주했지만, 실은 융이 사로잡힌 것은 엄마다.
모.성.의. 과.잉.은. 모.성.의. 결.핍.이.다.
결핍된 것은 집착된다. 융에게 있어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모성적인 어떤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무의식에 집착했다.
융의 심리구조에서 자아(ego)와 자기(self)가 조화를 이루는 일은, 아이가 엄마에게 침범되지 않도록 엄마는 지혜로운 조력자로 남으면서, 아이는 엄마의 지지를 바탕으로 재미있게 머리를 써서 뛰어노는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융에게 있어 깨달은 이는 이 '똘똘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와 '수용적이고 자애로운 엄마'의 속성을 동시에 포함한다.
융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을 깨달음의 보편적 전형이라고 말하면 문제가 된다.
이.것.은. 엄.마.가. 꿈.꾸.는. 현.실.인. 까.닭.이.다.
깨달음의 기준이 엄마가 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깨달음의 터무니없는 환원이다.
영적팽창은 이처럼 모권주의로 환원된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많은 영적 스승들이 자기를 찾아오는 이들에 대해 가장 자비로운 엄마처럼 행세하려고 한다. 다 품어주고, 다 받아주며, 다 허용하는 행위를 통해, 역으로 자신이 깨달은 사람인 것처럼 증명해내고자 한다.
행위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는 것, 이미 여기에서부터 굴절은 시작된다.
이것은 엄연한 권위의 문제다.
영적팽창은 권위를 얻고자 하는 가장 뜨거운 몸부림이 만들어낸 상태다.
가장 권위를 얻을 수 있는 법, 그것은 상대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허용된 상대는 허용해준 이에게 권위를 자발적으로 헌납하게 된다.
조폭두목이 마음대로 날뛰던 이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그래... 창식이는 그래도 된다."
그러면 창식이는 눈물을 흘린다. 역시 형님의 도량은 다르구나, 라고 생각하며 '형님'의 권위를 더욱 공고화시켜준다.
이것이 대가족 사회에서 집안의 큰어른인 '마님'이 권위를 획득하는 방식이었다. 모권주의의 검증된 성공공식이다.
융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융의 생각들은 이 조선의 모권주의를 영적팽창으로까지 확장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대체로 마음에 대한 사상사적 이해들에 있어 헷갈리는 것들이 있을 때,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가는 일은 유익하다. 프로이트는 거의 모든 그런 순간들에 이유있는 승리를 거둔다.
물론 오늘날의 과학적 심리학에서는, 특히 인지과학에서는, 프로이트나 융이나 소설가들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소설은 소설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해체하기 위해 쓰였다. 소설을 깨기 위한 소설로 기능하는 측면은 프로이트에게서 분명하게 담보되어 있다.
영적팽창은 일종의 신비체험을 한 이가, 자신이 그동안 소비해왔던 소설을 진리로 정당화하며 그 소설로 살려고 할 때 생겨나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실을 체험한 뒤에도 여전히 허구의 렌즈를 끼고 살고자 하면 여기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 영적팽창은 많은 헤맴을 낳는다. 자신이 지금 헤매고 있는 것이라고 자각조차 못하게 되기에 더 큰 헤맴이 생긴다. 상처가 나고 많이 아프다. 그래서 자꾸 화가 난다.
영적팽창은 거의 화산과 같다.
활화산이다. 늘 뜨겁고 열이 난다. 그 뜨거움을 자신이 이제 깨어나 세상을 바꾸기 위한 혁명의 불꽃이라고도 곧잘 착각하며, 스스로 이에 도취되기도 한다. 깨달음독수리오형제의 탄생이다.
영적팽창된 이는 매우 자주 자아팽창을 비판한다.
자기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자아팽창이 아니라, 세상과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가진 고귀한 영웅적인 것임을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했듯이 그 둘은 같다.
활화산을 둥지삼아 그 봉우리에 정좌해 세상을 내려다보는 불의 군주다.
더 높은 권위를 갖지 못해 늘 욕구불만의 히스테리를 부리며 뜨겁던 모권의 모습이며, 거기에 사로잡혀 불타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리고 또한 바로 이 자리가 경계다.
아무리 팽창되어 높아져도, 이 산봉우리 이상으로는 갈 수가 없다.
하늘은 막힌 벽이다.
우리는 나비를 꿈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