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5

"사랑의 배우미"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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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잘 알게 되고, 알게 된 마음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감정이나 생각에 시달려 생겨났던 긴장과 불편감이 모두 사라지고 이완되어 평온해진 상태가 있다.


그 결과, 그동안 긴장하느라 낭비되었던 에너지가 효율적으로 기능하게 됨으로써 힘이 넘치고 활력이 가득해지는 상태가 있다.


그러한 상태가 체험되는 잠깐의 순간이 있다.


대개는 이 순간적인 상태가 항구적인 구조로 바뀌어 유지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정의하곤 한다.


21세기의 깨달음은 이런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물론 이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긴장과 이완의 기제만을 반복하는 기계적 상태에 불과하며, 기계가 항시 이완상태로 지속되도록 조작하려는 새로운 지침[메뉴얼]을 도입하고자 하는 상태다.


과거에는 "긴장해야 한다."라는 메뉴얼을 따라, 이제는 "이완해야 한다."라는 메뉴얼을 따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언어가 삶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깨달음에는 지침이 없다.


어떻게 깨달아야 한다든가, 그 깨달음을 어떻게 유지해야 한다든가 하는 등의 정해진 규범이 없다.


그러나 방향성은 분명하다.


깨달음은 사랑을 향해서만 나아간다.


잠들어서도 사랑을 향해 잠들어 있고, 깨어서도 사랑을 향해 깨어 있다.


자다 깨다 하면서, 계속 사랑을 향해 한결같다.


깨달음의 지침[메뉴얼]을 따르다가 지침[소진]을 경험하는 것은 어떠한 수행자들이다.


수행자들은 사랑이 두려워 수행자가 된다.


수행의 원형을 '손을 씻는 일'이다.


이들은 깨끗하게 손을 씻으려고 한다. 씻고 또 씻으려고 한다. 그래야 따듯한 품에 안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러운 손으로는 안길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 민폐다. 수치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바짝 긴장한 채 열심히 손을 씻는다. 씻어도 씻어도 그 더러움이 씻기지 않는 손을 계속해서 씻기만 한다. 그러다가 그들 중의 어떠한 이들은 어느 날 이렇게 경험한다.


"다들 이렇게 냇가에 모여 열심히 손만 씻고 있구나. 이게 사람이었구나. 원래 다들 손이 더러운 게 당연한 거였구나.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구나. 사람이라는 것은 원래 깨끗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한, 그렇게 양극성으로 이루어진 존재였구나. 깨끗하고 동시에 더러운 이게 바로 사람의 온전함이었구나."


이들은 냇가에서 자신의 바깥으로 휴머니즘의 눈물을 뿌린다.


커다란 이완감이 찾아온다. 안심이 된다. 무엇인가 큰 잘못으로부터 해방된 것 같다. 웃음도 나오고, 햇살이 이렇게 밝았던가, 세상이 새롭게도 보인다. 처음으로 숨쉴 만한 세상이다. 주막에 내려가 주모에게 커피 한 잔 청해야겠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이전까지의 자기의 모습처럼 죄지은 표정으로 힘들게 손만 씻고 있는 사람들의 온전함을 알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고통을 멈추고 싶다. 죄인이 아닌데 왜 그렇게 스스로 죄인이 되냐며, 사람은 원래 다 더러운 거라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더럽기도 한 그게 바로 사람이라고, 간절하게 전하고 싶다.


자신의 손을 씻던 이는 이제 다른 이의 손을 씻겨주려는 이가 된다.


자신이 그가 안길 수 있는 상냥한 품이 되어주려고 한다.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이지만, 깨달음은 아니다.


이러한 수행자들은 정말로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들이지만, 깨달은 사람들은 아니다.


이것은 수포자들의 모습이다.


수행의 중도포기자들이 이 길로 간다.


정직한 수행자들은 냇가에서 계속 손을 씻고 있다. 손을 씻는 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죽더라도 이것만은 반드시 이루고 싶다.


그들은 울면서 계속 손을 씻는다. 언젠가는 손이 깨끗해져,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되어, 영원의 따뜻한 품에 안길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소망에 목숨을 걸고 정직할 뿐이다.


그러다가 이 정직한 수행자들은 불현듯 눈치를 채게 된다.


손을 씻고 있는 자신이 안겨져 있는데, 안고 있는 그것이 자신의 발을 정성스레 씻겨주고 있다.


늘 그래왔다.


손은 매일 씻어도 늘 꿀단지도 훔쳐먹고, 꼬추도 만지고, 남의 반찬도 뺏어먹느라 더러웠는데, 발은 늘 깨끗했던 이유를 알았다.


손만은 자신이 씻겠다고 고집하고 있어서 발만을 씻겨주었다. 자고 있을 때도 씻겨주었다.


늘 그래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말을 잇지 못하는데, 그것이 말을 건넨다.


"나는 늘 여기 있었다."


이것은 견성의 순간이다.


눈맞춤의 순간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만난 순간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사랑받아본 순간이다.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보다 커다란 것에게 사랑받음에 열려 있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자신보다 커다란 것을 향해 일어나는 느낌이다.


우리는 자신보다 작다고 경험되는 것을 돌보고, 지키고, 그것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설렘이 없다.


사랑의 설렘은 우리 자신보다 커다란 것을 향한 운동이다. 중력작용과도 같다. 그것에 끌어당겨진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더 함께 호흡하고 싶다. 그 뒤를 따라가면 너무나 행복해질 것 같아 신발도 신지 않고 길을 나서게 된다. 예수를 따라나선 마리아의 심정이다.


스즈키 선사는 "모든 깨달음의 안에는 눈물이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살짝 바꾸어 이렇게 말해본다.


"모든 깨달음의 안에는 설렘이 있다."


있다. 깨달음에는 분명하게 아주 거대한 설렘이 있다.


설렘은 자기 자신을 잊게 만든다.


단지 하나의 심장박동이 되어, 커다란 그것을 향해 한길로 달려나갈 뿐이다.


보고 싶은 님을 맞으러 오직 일편단심이다.


사랑을 향해 매일같이 나아가 사랑에 안길수록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잊을 수가 없다. 세포에 녹아들어 새겨진 것이다. 이것은 유전자보다도 강하다. 사람은 바로 이것으로 산다.


깨달음은 이 사랑을 배워가는 길이다.


나날이 배워가고, 나날이 깊어진다.


동일한 상태가 구조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심연이다. 그 깊이에는 끝이 없다. 공(空)이 드러나 활동하면 사랑인 까닭이다.


그래서 이 깨달음의 길에는 지침이 없다.


사랑이 알아서 하기에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메뉴얼은 전적으로 무용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사랑의 품에 안겨 마치 파도타기를 하듯 이동해가기에 소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침이 있는 일은, 자신이 사랑인 척하려는 일이다.


아름답고 따듯한 문학적 효과가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이 아니며, 사랑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사랑의 배우미들이다.


사랑을 배우려는 이 배우미들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


손도 발도 깨끗하고, 무엇보다 영혼이 맑다.


누가 인간이 더러워도 온전하다고 하는가?


더럽지 않다.


단 한 번도 티끌이 묻은 적이 없다.


사랑하는 님의 얼굴을 똑 닮았다.


그렇게 사랑의 배우미는 사랑을 깨달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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