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럽고 웃겨서 그 눈물이 맑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 또한 여느 현자답게 인생의 정수를 꿰뚫는 통찰의 메시지를 남겼다.
흔히 하는 깨달음에 대한 오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깨달으면 늘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듯이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일정하게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가슴은 더 많은 느낌들로 가득 찬다.
눈빛은 슬퍼서 더 깊어지고, 입가에는 배에서 올라온 웃음이 늘 출항 직전이다.
하덕규 시인은 현대인의 비극에 대해 "웃는 너의 입술과 우는 네 눈동자 이어줄 다리가 없는."이라고 노래했지만, 이것은 다리 정도가 아니다. 웃음과 울음이 하나인 것이다.
깨.달.아.진. 눈.에.는.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보.인.다.
비극 속에 희극이 숨어 있다거나, 비극과 희극의 양극성이 덧셈으로 합쳐져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어느 한쪽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그 반대쪽을 챙겨서 균형을 잡아주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둘이 다만 동시적이다.
세계는 서럽고 웃긴 것들로 가득하다. 장터에는 서럽고 웃긴 가게들이 즐비하다. (feat. 이상은 - 외롭고 웃긴 가게)
그처럼 서럽고 웃긴 것이 인간이다.
깨달음은 서럽고 웃긴 것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어느 제3의 메타인지의 허공에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럽고 웃긴 것 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는 것이다.
서럽고 웃긴 인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스스로를 묶어(engagement), 인간과 약혼(engagement)하고, 인간에 참여(engagement)하는 이 일은 인간과 하나됨의 일이고, 인간과 하나임의 일이다. 곧 하나님의 일이다.
깨달음은 이 하나님의 사업이다.
서럽고 웃긴 것들이 서럽고 웃긴 채로만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울음으로 흐르고, 웃음으로 흐르는 일이다.
울음과 웃음은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흐름이다.
봄에 녹아서 흐르는 샘물이고, 꽃향기를 널리 전하는 바람이다.
흘러가야 동행의 사실을 안다.
서럽고 웃긴 채로만 얼어붙어 그 자리에 멈추어 서있기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아 혼자라고 착각한다.
서럽고 웃긴 것들은 맑은 눈물이 되어 흐르기 위한 모든 것이다.
너를 위해 흘리는 하나님의 눈물이 맑다.
너를 다시 만나 기뻐하는 하나님의 눈물이 참말 맑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참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참말은 서럽고 웃긴 것들을 정직하게 증언함으로써 하나님의 눈물을 부르는 말이다.
인간이 서럽고 웃긴 인간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때 참말은 흘러나온다.
참말을 하는 이는 서로 사랑하는 이다.
인간이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랑 속에 이미 와계신다.
울음으로도 웃음으로도 보일 수 있는 맑은 눈물이, 그렇다는 그 대답이다.
맑은 눈물이 번져나갈 때 그 빛으로 세계는 다시 창조된다.
서럽고 웃긴 인간으로 기쁘게 사는 이는 그래서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매일매일이 깨달음이다.
여여(如如)하다는 표현은 '있는 그대로'를 뜻한다. 이 '있는 그대로'의 의미는 커피 한 잔의 여유라기보다는, 차라리 여여(汝汝)하다고 쓰는 표현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너여, 너여."
서럽고 웃긴 것들을 향해 하나님은 두 번 부른다. 못 알아들었을까봐 한 번을 꼭 더 부른다.
그렇게 서럽고 웃긴 것들을 분명하게 '너'로서 청한다.
서럽고 웃긴 것들과 언제나 하나로 동행할 것이라는 입장을 명백하게 밝힌다.
여여(汝汝)함은 이처럼 '너를 향한 마음'이다.
너만 생각하면 가슴은 더 많은 느낌들로 가득 찬다.
다사다난한 이 우주는 그렇게 너만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가슴속이다.
다 너를 위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서럽고 웃긴 인간에게서 흐르는 그 눈물이 맑고 영원하다.